필자는 전에도 말하였지만, 환경, 인권, 종교는 빨갱이들의 3대 은신처라고 하였다. 이번에도 북송 귀순자 22명의 처형 사례에 나타난 그들의 침묵에서 이 같은 사실이 여실히 증명된다. 사실, 어린 아이를 포함한 일가족 및 이웃 22명이 조개채취하려고 설 연휴에 무동력선 타고 나왔다는 것도 말도 안 되는 사실이지만, 전원 귀순 의사가 없어 북송하였다는 해명도 믿기 어려운 부분이다. 하물며 그렇다 치더라도 북송된 22명이 북한 해상당국의 허가를 받지 않고 어로에 나섰다는 이유 때문에 처형되었다면, 이는 더더욱 천부당만부당한 조치인 것이다. 그럼에도 초등학생 일기장 검사도 인권침해라는 식으로 정밀하게 따지는 “국가인권위”가 한마디도 없다. 사형제 폐지론자들, 인권운동가들도 여기에 대하여 한마디도 없다. 불법체류자에게 쓸데없는 동정을 표시하는 종교단체도 여기에 대하여 한마디도 없다. 인권을 빙자한 좌익종교단체, 정의구현사제단, 민노총, 한총련, 전교조, 민화협, 범민련, 참여연대, 민변.... 이들 역시 한마디도 없다. 북한의 인권문제 부분만 골라서 모르는 “통일부”도 이번 뉴스에 대하여 알아보는 중이라며 유야무야 되도록 시간벌기 한다. 그러나 왜 그렇게 북한의 인
김대중 對北송금 달러는 김정일의 혁명자금으로 쓰였다 자금을 관리했던 탈북자 김광진 증언: 1억 달러는 닭공장 현대화 등에, 2억 달러는 무기개발 분야에, 1억 달러는 군 현대화 등에 쓰였다 2000년 6월 김대중(金大中) 정부가 김대중-김정일 회담을 앞두고 현대그룹을 앞세워 북한으로 불법송금했던 4억5000만 달러가 김정일의 혁명자금으로 분류되어 핵무기 개발, 군 장비 현대화 등에 쓰였다는 주장이 그 자금의 일부를 관리했다는 북한 금융인 출신 탈북자 김광진(金光進)씨에 의하여 제기되었다. 김씨는 북한대학원 대학에서 받은 석사 논문 ‘북한 외화 관리 시스템의 변화 연구’에서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성택)에 1억 달러의 현금이 할당되었으며 이는 김정일의 6월11일 ‘말씀’에 따라 당 조직지도부 행정부문 소속 은행인 동북아시아은행에서 혁명자금으로 관리되었다. 혁명자금 이용에 대한 보고는 한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김정일에게 이루어졌으며 자금관리는 ‘611계좌’를 통하여 내가 단독으로 맡아 하였다”고 썼다. 김씨는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이 1억 달러는 2000년 6월1일 중국은행(Bank of China) 마카오 지점에서 동북아시
유우익 대통령 실장 내정자는 16일 오전 경기 과천 중앙공무원연수원에서 열린 새 정부 국정운영에 관한 합동 워크숍에서 이데올로기를 뛰어넘어야 한다면서 쓸데없는 이데올로기 논쟁에 휘말리거나 이데올로기로 일을 그르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분이 말한 이데올로기는 한국어로 번역하면 이념이다. 이념은 쓸 데 없는 것도,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데올로기는 정치적 신념이다. 대한민국과 헌법의 이데올로기는 자유민주주의이다. 유우익 내정자는 자유민주주의를 뛰어넘어야 한다 쓸데 없는 자유민주주의 논쟁에 휘말려선 안된다고 말하는 셈이다. 안보도 경제도 성공시킨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은 이념형 정치인이었다. 이념형이었기에 성공한 것이다. 레이건의 이념도 자유민주주의적 신념이었다. 이데올로기, 혹은 이념은 정치인의 가치관을 결정한다. 이것을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정치나 公務를 맡아선 안된다. 정치나 공무는 이념적 행위이다. 이렇게 따지고들면 유우익씨는 내가 말한 이데올로기는 자유민주주의가 아니고 좌파, 즉 사회주의 이념을 가리킨다고 말할지 모른다. 이명박 당선자도 몇 차례 비슷한 발언을 했다가 추궁을 당하면 그런 식으로 해명했다. 그렇다면 이렇
합참의장으로서 좌파정권에 굴복하여 한미연합사 해체 작업을 지휘했고, 제주해협을 북한무장선박에 개방하여 안보를 위태롭게 했던 인물을 국방장관으로 임명한 李明博 당선자에게 경고한다. 국민행동본부 대통령 노무현 국가반역 혐의 고발 설명회가 오늘 오후 2시 서울 프레스 센터 19층 기자회견장에서 열립니다. 1. 李明博(이명박) 대통령 당선자가 李相喜(이상희) 전 합참의장을 국방부장관으로 임명한 것은 敗將(패장)을 70만 국군의 지휘자로 세운 것이므로 취소해야 한다. 李씨는 합참의장으로 재직중이던 2005년 3월부터 2006년 11월 사이 좌파정권의 안보파괴 책동에 동조함으로써 제주해협을 북한 무장선박에 내어주고, 한미연합사를 해체키로 하는 등 국가와 국군을 위기에 빠뜨리는 행위를 한 최고위 책임자이다. 그는 반역적 좌파정권의 압력에 버티지 못하고 안보와 국익을 희생시킨 敗將(패장)이다. 좌파정권의 안보 허물기에 대해 항의하고 마땅히 군복을 벗어야 할 사람이 신정부 아래서 국방장관에 임명된다면 한미동맹 복원과 무너진 안보망의 복구는 불가능해질 것이다. 2. 李씨가 합참의장으로 재임시 노무현 대통령은 김정일이 핵실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안보의 생명줄인 한미연합사를 해체
김정일 유고에 따른 중국과의 예방전쟁에 대비해야 요즘 젊은 사람들이-40,50대나 된 사람들마저-중국이 마치 남의 나라를 넘보지 않은, 문명된 나라로 보는 데에 본인은 너무나 놀랐다. 더욱이 최근에 우리는 미국 쪽 ‘허리티지‘재단이나 ’전략연구소‘(CISI) 등에서 중국의 인민해방군이 북한에 ’유고‘나 군부 쿠데타 등의 돌발사태가 날 경우, 북한 주민의 중국에의 탈출을 막고, 만주 일대에 핵으로 인한 심각한 환경오염을 일으킬지 모르는 북의 핵무기를 先占하기 위해 전격적으로 북한 사태에 개입할 것을 신중히 검토했으나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는 정보를 흘린 바가 있었다. 지금의 북한의 사정을 볼라치면, 첫째로 남한에 있어서 친북좌경 세력이 정권을 잡는 데 실패했다는 점에서 매우 불안한 상태에 있으며, 두 번째로 핵 관련 신고가 아직 완전무결하게 이행되고 있지 않다는 것은 북한 군부 간의 심각한 異見의 결과일 수도 있으며, 세 번 째로 김 정일 국방위원장의 심장질환과 동맥경화증이 호전되고 있다는 낌새도 없는 가운데 아직도 후계자를 지정해놓지 않았기 때문에 북한에 혹여 ‘권력의 좌‘에 有故가 생길 경우 북한의 位相이 어떻게 변화할는지에 대해서는 중국이나 미국이 날카
이상희 前합참의장이 국방부장관으로 내정됐다. 李 前의장의 장관 임명은 두 가지 이유로 매우 부적절하다. 첫째, 李 前의장은 좌파정권 아래서 韓美연합사 해체를 주도한 인물이다. 그가 합참의장으로 재직한 2005년 4월~2006년 11월은 소위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라는 명칭의 연합사해체가 진행된 기간이다.대통령이 시켜서 「억지로(?)」 했다고 둘러댈 성질이 아니다. 속으로는 참을 수 없었다고 변명하기도 궁색하다. 사퇴를 하건, 항명을 하건 부당성을 주장하는 방법은 많았다. 그러나 李 前의장은 노무현의 利敵행위를 충실히 수행하는 부역자 노릇을 감당했다. 더구나 당시는 김정일이 核무장에 나선 시점이었다. 누란(累卵)의 위기에 합참의장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나?둘째, 북한에 군량미를 퍼다 준 것에 대한 책임에서도 자유롭기 어렵다.최근 언론에 보도됐듯, 소위 인도적 목적으로 북한에 지원한 쌀이 군량미로 전용돼왔음이 확인됐다. 충격적 사실은 정부와 軍당국이 對北지원 쌀의 북한군 유출을 지난 5년간 여러 차례 포착했으며, 심지어 이를 묵인해왔다는 것이다. 이들은 빈번한 남북접촉을 가져왔지만, 북한에 이의제기는커녕 사실 확인조차 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이 亡하지 않으려면 군
재경 강만수교육 김도연외교 유명환법무 김경한국방 이상희행자 원세훈문광 유인촌농림 정운천산자 이윤호보복 김성이환경 박은경노동 이영희건교 정종환, 남주홍, 이춘호
대한민국의 노무현 정부는 임기종료를 2개월 정도 남겨둔 2007년 12월에 신규로 발행하는 10만원권의 초상을 김구 선생으로 선정하고, 2009년에 발행할 것을 결정하였다.물론 국민들의 여론조사에는 박정희 前 대통령과 이승만 건국대통령이 1, 2위를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것과 달리 왜 김구 선생을 서둘러 선정하였을까? 과연 김구 선생이 적격자인가? 에 대하여 대한민국 국민이 의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실마리가 있기에 두 가지 자료를 소개하고자 한다.1. 일본 월간지 8월호먼저 1985년 일본 월간지 8월호에 “해방40년을 맞이하여”란 제목으로 동 잡지사의 편집부 안강량개(安江良介/야스에료스께)씨가 김일성을 만나 1985년 6월 9일 대담한 내용 중 김구 선생에 대한 내용(pp.194~195)을 그대로 번역 전재한다.김구는 유년시대부터 황해도에서 살던 사람이었다. 그는 해방전 “상해임시정부”에 있으면서 다수의 공산주의자를 살해한 유명한 반공(反共)분자였다.당시 공산주의자들은 김구라면 이를 갈 정도였다. 해방 후 남조선으로 돌아온 김구는 자신의 비서를 통해 나에게 만나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왔다. 나는 김구 비서에게 그와 만나는 것을 환영한다는 뜻을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