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식 / 논설실장
국회선진화법과 세종시는 박근혜 대통령의 ‘작품’이나 다름없다. 모두 취임 이전의 일이긴 하지만 자신의 레거시(legacy)로 남을 것이다. 그 가운데 선진화법에 대한 평가는 이미 분명해졌다. 박 대통령 스스로 식물국회를 개탄하며 경제 입법을 호소하는 길거리 서명에 나섰고,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망국법’으로 규정했다. 하루라도 빨리 안락사(安樂死)시켜야 한다. 그런데 간단하지는 않다. 선진화법 때문에 선진화법을 바꿀 수 없는 ‘순환 불능’ 구조 때문이다. 새누리당과 국회의장이 핑퐁 중이지만 누군가 총대를 메지 않으면 실기(失機)할 수 있다.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
결자해지(結者解之)가 순리다. ‘결자’를 찾기 위해 2012년 5월 2일 국회 본회의 속기록을 보자. 황우여 의원 등 30명이 선진화법을 발의하고, 김세연 의원이 제안 설명을 했다. 김영선 의원이 반대토론에 나섰다. 지역구 선거에서 한 표가 많아도 당선되고, 국회에서 절반보다 한 명이 더 많으면 의사 결정을 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기본이다. 그런데 7∼8명만 단합하면 위원회를 작동 중지시킬 수 있고, 결국 행정부도 작동 중지된다. 심재철 의원은 이렇게 반대했다. 국회선진화 또는 몸싸움 방지라며 속이려 하고 있다. 소수파의 발목잡기를 제도적으로 보장해 식물국회, 식물정부를 만들게 된다.
찬성론을 펼친 남경필 의원은 “선량들의 양심과 상식을 믿어야 한다”, 황영철 의원은 “몸싸움이 아니라 논리 싸움의 장 마련”이라고 했다. 결국 찬성 127, 반대 48표로 통과됐다. 박근혜 원희룡 유승민 유일호 유정복 정병국 현기환 의원은 찬성, 김무성 윤상현 이회창 정몽준 조순형 주호영 진영 의원은 반대, 최경환 의원은 기권했다. 당시 국회의장 대행으로 사회를 맡았던 정의화 현 국회의장은 가결 선포 뒤 “제헌국회부터 이어져 온 국회 운영의 기본 틀이 바뀌게 됐다. 무기력국회, 식물국회 우려가 없지 않다”고 했다. 본인도 반대표를 던졌다.
4년 가까이 지났다. 반대론이 옳았고, 찬성론이 틀렸다. 황영철 의원은 “(동물국회에 대한) 잘못된 솔루션”이라며 국민에게 사과했다. 박 대통령은 지난 13일 신년 회견에서 “동물국회 아니면 식물국회가 될 수밖에 없는 그런 수준”이라며 법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 수준의 문제라고 비켜갔다.
선진화법 선두에 박 대통령이 있지만 그에게만 책임을 묻기 어려운 사정도 있다. 2012년 4·11 총선을 앞두고 야당 압승 전망이 압도적이었다. 박근혜 비대위원장을 추대하고 당명도 바꿨다. 이런 상황과 연말 대선까지 고려해 ‘국회 선진화’를 국민 앞에 공약했다. 그런데 152석을 획득, 단독 과반까지 달성했다. 유야무야 뭉갤 수 있었지만 박 대통령은 약속을 지켰다. 그런 바탕 위에서 대통령 선거에서도 승리했다.
이명박 대통령 시절 세종시 수정 문제가 제기됐을 때 박 대통령이 저지했다. 당시 정몽준 대표가 애인과의 약속을 지키려다 물에 휩쓸려 죽었다는 미생지신(尾生之信)을 거론하자 박 대통령은 “미생은 죽었지만 귀감”이라고 했다. 이런 소신은 지금도 그대로다. 전언을 종합하면 더 확고해진 것 같다. 최근에도 북한 지뢰 도발에 대한 대북 확성기 재개, 역사교과서 국정화, 위안부 협상 타결 등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한번 결정되면 어떤 후폭풍이 있어도 스스로 견디고, 결코 아래로 책임을 전가하는 일이 없다고 한다. 그런 단호함과 책임감에 ‘남성’ 공직자들이 부끄러움을 느꼈을 정도이며, 심지어 위안부 문제로 통화한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감탄했다는 얘기도 있다.
그러나 계속 그럴 수 있을까. 등산에 비유하면 박 대통령은 하산길에 들어섰다. 4대 개혁과 경제 회생은 까마득한데 선진화법이 발목을 잡고 있다. 박 대통령이 “좋은 취지에서 만들었지만 4년 운용 결과 잘못된 법임이 드러났다”며 사과하고 개정을 호소하는 것이 필요하다. 안타깝게도 그럴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친박(親朴) 중심의 찬성 의원들도 고해성사의 자세로 나서야 한다. 그것도 안 되면 반대했던 사람들이 당시의 소신으로 바로잡아야 한다. 누구든 잘못이나 실수를 저지른다. 진짜 문제는 잘못을 알고도 고치지 않거나,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는 일이다. 더 늦기 전에 시정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지 않으면 어떤 식으로든 심판을 받게 된다. 대통령도, 국가도 예외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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