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渾沌의 죽음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라!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 말고,
오리의 다리가 짧다고 이어 주어서는 안된다
송 재 운/동국대학교 명예교수
남해의 임금을 숙(儵)아라 하고,
북해의 임금을 홀(忽)이라 하며,
중앙의 임금을 혼돈(渾沌)이라 한다.
숙과 홀은 때로 혼돈의 땅에서 만나 놀았다. 그 때마다 혼돈은 그들을 잘 대접하였다.
그래서 숙과 홀은 혼돈의 은혜에 보답할 것을 의논 하였다.
“사람은 누구나 (얼굴에)일곱개의 구멍(七竅-두개의 눈, 두 개의 귀, 두 개의 코구멍, 한 개의 입)이 있어 그것으로 보고 듣고 먹고 숨 쉰다.
그런데 유독 이 혼돈에게만 이런게 없다.
어디 시험삼아 우리가 혼돈을 위해 구멍(七竅)을 뚫어주자”
(이렇게 해서) 숙과 홀은 날마다 한 구멍씩을 뚫었다,
그런데 7일이 지나자 혼돈은 (그만)죽고 말았다.
장자(莊子)의 <莊子(일명 南華經)> 내편 7. 응제왕(應帝王)에 나오는 말이다.
<장자>는 다른 중국 고전들과는 달리 우화(寓話)로 가득 차 있어 읽기에 황홀하고 무궁무진한 상상력을 독자에게 제공한다.
‘우화’란 ‘허구(虛構)의 이야기’다. 그러나 사실 이상의 진실을 담고 있다.
장자의 우화는 대우주 자연과 인간세계 속에서 ‘일어날 법한 사건’ ‘있을 법한 일들’의 이야기로서,
그 안에는 ‘어떤 진리를 예시하는 무한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게 특징이다.
앞서 본 ’혼돈의 죽음‘은 이런 우화의 대표격으로서
노장(老莊)의 무위자연(無爲自然) 사상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장자는 중국 전국(戰國) 시대의 사람이다.
맹자(孟子 BC 372-BC 289)와 같은 시대의 사람이라고 하는데,
생몰(生沒) 연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대략 BC 369-BC 288 경으로 추측하고 있다.
장자는 노자(老子)의 도(道)와 무위자연(無爲自然)을 계승하였다.
때문에 노자와 장자가 이룬 학파를 ‘노장학파’.라 하고, 도가(道家, 道敎가 아님)라고도 한다.
이들 도가의 ‘무위자연’은 문자대로 직역하면
<무위는 무엇을 하지 않는 것이고, 자연은 ‘그렇게 됨’, ‘그렇게 된 상태’>를 말한다.
이를 풀면 <본래의 상태, 본성 그대로를 잘 유지 보존 되게, 함부로 거기에 인위(人爲)를 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무위는 인위와 반대되는 개념이고,
자연은 다순히 우리들이 일상으로 보는 산천초목을 뜻하는 것 만은 아니다.
‘혼돈의 죽음’에서
‘혼돈’은 오늘날 개념으로 보면 남해(남극)와 북해(북극)의 가운데니 ‘지구 전체’가 아닌가 한다.
지구는 삼라만상이 존재하는 ‘자연’을 대표한다.
그러므로 장자가 말하는 ‘혼돈’이란 바로 ‘자연 그 자체’ 다.
이 ‘살아 있는 자연 그 자체’를 자기들 사람처럼 만들겠다고
숙과 홀이 인위(일곱 개의 구멍을 뚫은 것)를 가하니 ‘혼돈’은 죽었다.
장자에서 ‘혼돈의 죽음’은 바로 ‘자연의 죽음’을 말한다.
숙과 홀의 주관적 편견이 빚어낸 비극이다.
아무리 눈 귀 코 입이 없는 ‘혼돈’이라해도 그냥 그대로 두엇어야 한다. 그
런데 첨단 과학시대인 이 21세기에 와서도
우리들 주변에선 ‘혼돈의 죽음’과 같은 비극은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를 하나 들겠다. 바로 북한의 <주체농법>이다.
북한은 해마다 큰 수해를 입는다.
유엔 인도지원조정국(OCHA)의 8월 28일 발표에 따르면
북한은 지난 8월 7일부터 14일까지의 집중호우로 평안북도 양강도 자강도 황해남도 등
9개도 149개군에서 98만여명이 피해를 입었다.
특히 함경남도 강원도 황해북도 평안남도 등 4개도에서의 피해가 가장 많았다.
17만명은 가옥이 완파되는 피해를 입었고, 파괴되거나 침수된 공공 건물도 2천 8백 71개소나 된다. 그리고 전체 경작지의 10%인 22만 3381 ha가 피해를 입었고, 주요 농업시설 488곳이 또한 파괴 되었다.
UN은 가장 낙관적으로 보아도 이번 물 피해로 북한의 연간 평균 수확량의 20-30%가 감소할 것으로 보았다.
또 상수도시설 파괴로 주민들이 강물이나 우물의 물을 마셔 이질 증세가 20%나 증가하고,
지역 보건소도 30-40%가 침수 되었다
또 일반 언론에 따르면 가옥 2만 9천채 파손. 이재민 68만여명, 사망 5백여명 이다.
북한은 95년도에도 수해로 재산피해 150억달러, 이재민 520만명을 내었다.
북한은 이후에도 해마다 수해로 사망자와 실종자, 그리고 수만채의 주택파손 피해를 내고 있다.
이웃인 남한과 중국 동북지역은 근래 북한처럼 큰 수해(水害)를 입지 않았다.
그런데 유독 북한은 왜 그리 큰 수해를 연례행사로 치르는가? 반복되는 수해의 주 원인은 무엇인가?
바로 ‘민둥산’ 이다.
북한은 이른바 김일성의 <주체농법>에 따라 산에 나무를 베고 표피를 깎아 내어 민둥산을 만들고 거기에 농작물을 심는다.
말하자면 전국의 산지를 논 밭으로 만든 게 큰 화근이다.
그것도 산비탈 논 밭은 계단식으로 해야 그나마 비 피해를 어느 정도 맊을 수 있는 것인데,
김일성은 산의 논 밭을 계단식으로 하지 말고,
그냥 경사면에 작물을 심으라고 명령, 이것을 지금도 북한 주민은 그대로 따르고 있다고 한다.
경사면은 계단식 보다 작물을 더 심을 수 있는 이점은 있어도,
우기 때 호우에는 안전을 장담할 수는 없다.
비가 오면 이것은 산사태를 일으켜 그 아래 가옥과 전답을 쓸어 묻고,
하천과 강을 메워 엄청난 물의 범람을 일으키게 된다. 이것이 수해며 수재다.
연속되는 북한 수해 수재는 천재(天災)라기 보다 이처럼 인재(人災)에 속한다.
해괴한 ‘주체농법’이 바로 그 주범이다. 남한에선 식량이 모자랄 때,
민둥산 뙈기를 만들기 보다 ‘통일벼’를 새로 고안하여 수확을 크게 늘리는 것으로 해결하였다.
자연의 섭리를 선용(善用)한 것이니 장자의 ‘혼돈’은 남한에서 여전히 살아 있다.
산의 나무를 베고 그 표피를 깎아 냈을 때,
이것은 사람으로 치면 모든 터럭을 베고 피부인 살가죽을 벗긴 것과 같다.
살가죽을 벗긴 사람이 살 수 없듯이 산도 이와 다를 바 없다.
나무를 베고 수천 년 쌓여 온 부엽토(腐葉土)와 표피를 이룬 흙을 긁어 내면 벌써 산은 산이 아니다. 죽은 것이다.
여기다 곡식의 씨를 뿌리고 농사를 짓는다고 해서 산이 금방 살아날 리 없다.
죽은 산은 천재인 폭우와 바람을 맊아 줄 수 없다.
그래서 북한은 수해를 연례행사로 치르고 있는 것이다.
김일성 주석이 진즉 장자를 읽었다면 이런 우(愚)는 범하지 않을 텐데- 안타깝다.
장자가 말한 ‘혼돈의 죽음’은
분수(分數) 없는 사람들의 인위조작(人爲造作)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 하는 것을 인류에게 가르치고 있는 멋진 <우화> 다.
이 ‘혼돈-’에 짝하는 장자의 말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잘 아는 “학의 다리가 길다고 짜르지 말라” 는 것이다.
<장자> 외편 8. 변무(騈拇-붙은 발가락)편에 나온다.
길다고 그것을 여분으로 생각지 마라(長者不爲有餘)
짧다고 그것을 부족하게 여기지 마라(短者不爲不足)
그러니까 물오리는 비록 다리가 짧지만(是故鳧脛雖短)
이어주면 괴로워 하고(續之則憂)
학의 다리가 비록 길지만(鶴脛雖長)
그것을 자르면 슬퍼한다(斷之則悲)
(학의 다리가 길다고 짜르지 말라)
자연 속의 모든 존재자(存在者)들은 그 나름대로의 독특한 꼴(형태, 모습)과 존재방식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들은 각자 다른 자와 확연이 구별되는 고유성(固有性)을 갖는 것이다.
이 고유성을 서로 다른 존재자들이 각기 인정하고 존중 할 때, 존재자들의 자연속 삶은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장자의 가르침이다.
길다고 남음이 없다는 것은 그 ‘긴것 자체’가 고유성이니 탓할 바 아니고,
짧다고 부족함이 없다는 것도 이와 똑같은 이치이다.
그런 까닭에 물오리의 다리가 짧다고 억지로 이어 주면 안되고, 학의 다리가 길다고 짤라서도 안된다. 만일 억지로 늘이고 짜른다면 이런 것 모두는 자연의 순리를 배반하는 인간의 독단일 뿐이다.
노장(老莊)의 ‘무위자연’은
유가의 ‘인의(仁義)주의’ ‘중례(重禮)주의’가 너무나 인위적인 강제가 많아서
오히려 인간의 자유를 속박하고 있다는데서 이를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논리가 강하다.
장자의 ‘혼돈의 죽음’이나 ‘학다리’ 이야기도 이런 비판을 전제하고 있다.
그렇더라도 장자의 이런 ‘우화’들은 우리들 인간이 흔히 가질 수 있는 독단적 행위,
편견의 오류를 깨우치는데 대단한 암시를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장자의 자연주의는
우리 인간들이 자연을 자연답게 대우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파괴 할 때 올 수 있는 '큰 재앙(災殃)‘을 저어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인류는 장자의 이런 예언들이 이미 위험스럽게 현실화 되고 있음을 경험하고 있다.
기후의 이상변화, 잦은 천재지변들이 그것들이고 목전에 닥친 핵(核)위협이 또한 그렇다.
그래서 필자는 장자처럼 반문명주의를 찬성한다.
인류의 문명이 더 나자지 말고 이쯤에서 머물러 주어도 더바랄 게 없을 것이다.
따라서 나는 오늘부터 ’장자주의자‘가 되고자 한다. (끝)
(한맥문학. 2016. 10월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