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금요일(7월 27일)에는 만해학회에서 <만해 한용운과 백성욱>이라는 세미나가 불교평론 사무실에서 있었다.
거기서 정천구의 <백성욱의 불교사상>이라는 제목의 논문 발표가 있었다.
백성욱 (白性郁, 1897년 ~ 1981년 9월 16일)박사는 한국불교의 큰 선지식이며 거목이었다.
그는 불교계 독립운동가였고 대한민국을 건국하는데 공헌한 애국자였으며
동국대학교를 발전하는데 초석을 놓은 인물이다.
불교철학의 기본이론을 정립하고 금강경 독송을 수행의 기본으로 삼아 수행하고 가르친 불교수행인이다.
따르는 사람들로부터 살아있는 부처님 같이 존경을 받은 선지식이었습니다.
그는 학생시절 만해와 함께 3.1운동의 불교계 인사로 중요한 활동을 하였고
상해 임시정부를 왕래하면서 국내와 임시정부와의 연락과 독립자금의 전달 등 독립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분이다.
그는 일제의 추적을 받는 인물이 되었다.
그는 조국을 구하기 위해서는 선진 지혜를 배워야겠다는 결심으로
프랑스를 거쳐 독일의 명문 뷔르츠부르크 대학교 철학과에 들어가 그곳에서 <불교순전철학>이라는 논문으로
1924년 철학박사학위를 받고 1925년 귀국했다.
고국에 돌아와서 그는 불교청년들의 독립운동에서 불교청년회 참립을 주도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자신의 깨달음을 더욱 깊게 하기 위해 금강산에서 10년간 수도한 바 있다.
해방후에는 이승만 박사의 건국운동에 참여하여 정부수립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이승만 정부 아래서 내무장관을 지내기도 하였다.
이승만 대통령 시절 두번이나 부통령에 출마한 경력이 있으며 동국대학 총장에 취임하여 오늘날 동국대학교의 기틀을 마련한 분이다.
5. 16 이후 총장직을 그만 둔 다음에는 소사 백성목장에서 찾아오는 후학들을 지도하고
불교로 이끄는 수행생활에 전념하였다.
그 분이 제창한 불교운동이 금강경 독송이었고 금강경이 대중에게 크게 보급된 것은 그의 영향이 컷다.
지금도 그의 가르침을 따라 금강경을 독송하는 사람들이 국내외에 적지 않다.
필자는 그분이 열반하기 전 10년 가까이 그분을 뵙고 기회 있을 때 마다 가르침을 받은 바 있으며
그러한 가르침을 기초로
<금강경 독송의 이론과 실제>,
<금강경 공부하기> 등의 책을 쓴 바 있다.
백성욱 박사는 일제의 참략으로 암울한 시기에 나라를 되찾고 대한민국을 건국하는데 공헌하면서
한국불교를 반석위에 세우는데 헌신한 분이다.
그리고 그분은 이러한 모든 일들을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른 철저한 수행을 통해 실천했다.
오늘날 나라가 어지럽고 불교 또한 어지러운 시점에서 백성욱 박사와 같은 분의 존재가 아쉽다.
그분과 같은 시대에 살던 미당 서정주는 한국사람으로
역사상 여성으로는 신라의 선덕여왕을 가장 매력있는 인물로 꼽을 수 있고
현대에 가장 매력있는 인물은 백성욱 박사라고 평가한 바 있다.
또한 일생 백성욱 박사를 따르고 지켜본 정종 교수는 백성욱 박사를 헤르만 헤세의 소설 속에 나오는 싯다르타와 같다고 말하곤 했다.
다음은 <백성욱의 불교사상>이라는 만해학보에 실린 정천구의 논문이다.
불교와 불교인이란 무엇인가를 되세겨볼 수 있는 백성욱 박사의 일생과 그의 불교사상을 적은 글이다.
만해학보2018년 통권 제18호
백성욱 박사의 불교사상
정천구 (전 영산대 총장)
Ⅰ. 머리말
백성욱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을 하다가 프랑스를 거쳐 독일에 유학하여
「불교순전철학」이란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불교학자이다.
그는 불교 종립대학인 동국대학교의 총장직을 맡아 그 기틀을 만들었다.
해방 후 대한민국 건국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이승만 대통령 시절 내무장관을 지냈고 부통령에 두 번이나 출마한 경력이 있다.
그는 은퇴 후 수행에 전념하면서 생을 마칠 때까지 찾아오는 사람들을 깨달음으로 인도한 철저한 불교수행인이었다.
따르는 불교 신도들로부터 그는 박사도 총장도 장관도 아닌
그냥 ‘선생님’으로 친근하게 불리면서 ‘살아있는 부처님’(生佛 생불) 같이 존경을 받았다.
필자는 소사로 은퇴한 그 분을 1971년부터 1981년 열반할 때까지 기회 있을 때 마다 찾아뵙고 가르침을 받았으며
그를 ‘선생님’으로 부르는 여러 사람들 중의 하나이다.
오늘은 선생님으로서가 아니라 한 분의 사상가로서 백성욱의 불교사상을 논하고자 한다.
그의 불교사상은 남독일의 명문대학 뷔르츠부르크(Würzburg) 대학교 철학과에서 1925년 받은 철학박사 학위 논문
「불교순전철학,佛敎 純全哲學」에서 이론적인 기본 틀이 잡혔고 금강산 수도의 내증(內證) 과정을 통하여 확립되었다고 본다.
철학과 사상은 엄밀히 따지면 다른 말이지만 모두 사색과 경험에서 도출된 인간 사고의 결과물이다.
“지혜의 탐구로서의 철학은 보편적인 지식, 전체에 관한 지식의 탐구이다.”
한 때 철학보다 사상을 선호하는 경향이 생긴 것은 사상이 실천적 경험을 더 강조하기 때문이라 본다.
그러나 실험에는 경험적인 실험만이 아니라 사고의 실험(thought experiment)도 있다.
철학의 주제와 같이 경험적 실험이 불가능한 경우에 사고의 실험이 많이 활용된다.
물리학에서도 전자기학을 창시한 맥스웰(James Clerk Maxwell, 1831~879년)이나
상대성 이론의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1879~1955년)과 같은 학자들도 사고실험을 활용하였다.
정치철학에서 정의론(The Theory of Justice)으로 유명한 존 롤즈(John Rawls)는
‘무지의 베일’에 가린 사람들의 판단이라는 사고실험으로 정의(正義)의 원칙을 도출하였다.
그런데 철학이 사색의 근본을 따진다는 점에서 더 근본적이고 사상이 그 다음, 그리고 이론의 순서를 이루고 있다.
철학이 빠지면 사상은 도그마가 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본론은 먼저 백성욱의 불교사상이 형성되고 전개되는 과정을 살펴보고
그의 사상적 바탕이 된 박사학위 논문 <불교 순전철학>을 분석한 다음
불교사상의 주요 주제인
교상판석(敎相判釋)에 관한 사상,
수행론(修行論),
그리고 사회사상을 차례대로 검토해 나가기로 한다.
Ⅱ. 불교사상의 형성 과정
1. 수학기: 백성욱은 구한말의 풍운이 얽히던 1897년(광무 1년) 8월 19일 백윤기(白潤基)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때는 고종이 나라 이름을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황제를 칭하던 해이다.
그는 다섯 살 때부터 13세까지 호동학교(壺凍學校)를 졸업하고 한학을 천자문에서부터 사서삼경까지 다 배웠다고 한다.
그런데 14세가 될 때 부모를 잃고
홀로 절에 맡겨져 1910년 7월 14세에 봉국사(奉國寺)에서 최하옹(崔荷翁) 대선사를 은사로 득도하여 불문에 귀의하였다.
그는 전국 각지의 불교 전문 강원에서 6년 이상 불교를 공부하고 1917년 중앙학립에 입학하여 1919년 졸업하였다.
그 과정에서 그는 서양 철학의 새로운 역사를 열었던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의 철학에 심취했다고 한다.
본인의 회고에 의하면 그는 어릴 때부터 지혜 있는 자만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고 한다.
“지혜는 곧 힘(곧 생명력)이라고 생각했던 것인데,
그 때 어른들이 늘 말하기를 이인(理人)은 힘이 세고 지혜가 많다고 일러주었다.”
그는 칸트의 전기를 읽다가 “내가 도통할 자신이 생기기도 했다”고 한다.
백성욱이 중앙학림을 졸업할 때는 조국의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린 3.1운동이 일어나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상해에 세워지던 해이다.
당시 불교계에서는 일본의 사찰령으로 왜색화(倭色化)되어 가는 한국불교를 혁신하려는 운동과 직접적인 항일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당시 중앙학림에 재학 중이던 백성욱은 3.1운동 하루전날 만해의 자택에서
한용운의 지도하에 있던 유심회의 동료 불교학생들과 함께 만세 운동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들 중 신상원은 책임자 백성욱․박문오는 참모로 서울에 남고 나머지는 지방으로 내려갔다.
1919년 4월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백성욱은 신상완, 김대용, 김법린과 함께 상해로 밀항하였으며
임시정부의 국내 특파원 자격으로 이들과 함께 독립운동자금 및 불교비밀결사조직 등 본격적인 활동에 착수하였다.
그 후 독립자금 전달 등의 임무를 맡아 여러 번 상해를 왕래하였다고 한다.
상해를 드나들면서 그는 이승만(李承晩)을 만나게 되었으며
이 인연으로 해방 후 두 사람은 대한민국 건국에 협력하는 사이로 발전하게 되었다.
암암튼 그러다가 그는 3.1운동이 일어난 다음 해에 유럽으로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그가 왜 유학을 결심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왜 미국이 아닌 유럽행을 결심하게 되었는지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그러나 독립운동을 하면서도 일제의 침략 아래서 무력(無力)한 국민을 일으켜 세우기 위하여
서구의 새로운 학문을 익혀야 하겠다는 생각이 중심이 되었던 것 같다.
지혜가 곧 힘이라는 어릴 때부터의 생각은 민족문제에도 해당하며 일제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힘의 원천인 지혜를 얻어야 하며
일본보다 선진국인 서구에서 새로운 선진 지혜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승만 등이 미국 유학을 권유하기도 했으나
그가 유럽을 택한 것은 모든 학문의 원천인 철학을 배우기 위해서는 미국보다는 독일을 선택했던 것으로 보인다.
백성욱은 먼저 프랑스 파리로 가서
거기서 보베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독일어, 라틴어 등을 수학하고 1922년 뷔르츠부르크 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했다. 거
기서 그는 고대 희랍어, 독일신화사, 천주교 의식(儀式) 등을 연구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서양철학의 진수를 배우고 3년 만에
「불교순전철학」(佛敎 純全哲學: Buddhistishe Metaphysik)이라는 논문으로 1925년 10월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독일에서 수강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폭 넒은 독서와 교우를 통하여 학문의 시야를 깊고 넓게 가지게 되었으며
특히 조국의 위치와 조선 불교의 위상에 대하여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그는 독일 유학에서 선진 학문을 배우면서
우리 민족 역사의 진면목을 유럽도서관의 자료들과 서양인들의 말을 통하여 확인하게 되었다고 한다.
특히 불교문화에 있어서 고려대장경의 우수성과 한민족의 찬란한 문화유산에 관하여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백성욱 박사 송수기념 문집》에 수록된 당시의 서간문들에서 술회하고 있다.
그는 유럽에 더 머물면서 한국불교와 한국문화의 세계화를 위한 발판을 마련하려고 하였으나
학비를 조달할 수 없어 탄광에서 광부 생활까지 하면서 학비를 벌어야 하는 참담한 생활을 견디어야 했다.
1차 대전 패전 이후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야 했던 당시의 독일경제는 극도의 어려움을 겪었으며 유학생까지 돌볼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독일에서 퇴경 권상로 에게 보낸 그의 서신에는 학비조달의 어려움과 도움을 호소하고 있으며
불교신앙과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고난을 견디어 내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어쨌든
그는 유학생활 중 국내와의 교신을 계속했으며 국내 잡지에 계속 글을 보냈다.
그는 자신의 불교사상의 기초가 된 박사학위 논문《불교순전철학》을 국문으로 초록하여
당시 국내의 대표적 불교 잡지였던 《佛敎》에 철학박사 백준(白峻)이라는 이름으로 보내 6회에 걸쳐 연재하였다.
그 외에도
《현대적 불교를 건설하려면》,
《백림(伯林)불교원 방문기》등을 발표하여 국내의 불교운동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2.귀국활동과 입산수도 :
1925년 독일에서 귀국한 백성욱은 동국대학교의 전신이며 모교인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수직을 맡아(1925-1928)
후학 양성과 갖가지 강연회를 통하여 국민 계몽활동에 주력하였다.
한편 그는 유학 전에 키우고 활동하던 불교청년회의 부흥을 위해
김법린, 김상호, 도진호 등과 만나 의논하고
다음 해 1월 조선불교선교양종승려대회를 준비하는데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그는 1928년 9월 돌연 교수직을 사임하고 수도(修道)를 위해 금강산에 입산하게 된다.
그의 돌연한 금강산 입산 동기는 자신의 글 “다시 적멸궁을 찾아가면서”라는 글에서 엿볼 수 있다.
독일유학에서 돌아와 화려한 귀국활동을 하면서 식민지로 전락한 나라로 돌아와서 깊은 심적 고뇌를 했던 것 같다.
그는 자신의 지난 생활을 돌아보면서
“법률상으로는 아무 걸림이 없는 사람이지만 ‘이것이 과연 잘한 일인가’하는
윤리상 판단으로는…용신(容身)할 곳 까지없겠다는 고통을 가지게 된다,”고 하면서
“더럽게 사는 것 보다 조촐하게 죽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을 했다고 적고 있다.
그는 부처님의 사리가 모셔진 적멸궁에 가서 자기를 다 버리고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결심했던 것이다.
금강산에 들어간 백성욱은
처음에 장안사에 머물다가
그 후 안양암에서 단신 수도에 들어갔는데
‘대방광불화엄경’을 부르는 것을 수행의 요체로 삼았다.
수행 중 동참을 원하는 학인이 많아지자 지장암으로 장소를
옮겨 1939년 일경(日警)의 압력으로 귀경(歸京)할 때까지 회중(會衆)을 지도하며 수행하였다.
당시 백성욱은 1928년 장안사에서 정진하던 중 그의 소문을 듣고 찾아 온,
이승만과 가까운 혜정(慧亭) 손석재(孫昔哉) 선생을 만났다. 그녀는 후일 동국대학교에 거액의 장학금을 기부하였다.
두 분은 함께 공부하다가 1930년 오대산 적멸보궁에서 백일기도를 드린 후 서울에 돌아왔다가
백성욱은 다시 안양암에 들어갔다.
그는 1일 1식(一日一食 )으로 천일(千日) 기도를 하여 숙명통을 얻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 후 차차 제자들이 모여들어 안양암에서 3년을 보냈다.
지장암으로 옮겨 다시 하산할 때까지 7년을 머물렀으니 도합 10년을 금강산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수도(修道)했던 것이다.
일경의 압력으로 금강산에서 하산하여 서울로 돌아온 후 해방될 때까지 그는 돈암동 자택에서 좌선 수도에 전념하였다.
3. 사회활동 :
1945년 조국 광복과 동시에 그는 곧 애국단체인 중앙공작대를 지도하여 민중 운동을 벌이는 동시에
이승만 박사를 도와 대한민국 건국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는 해방 후 한국민족에게 가장 시급한 과제가 정부를 수립하여 자기 나라를 만드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그는 미군정에 대하여 한국인에게 정권을 이양할 것을 촉구하는 5만 명의 연판장을 결집하여
동경의 맥아더 사령관 및 주한 미군사령관에게 전달함으로서 정부 수립의 중요한 계기를 만들었다.
백성욱 박사는 1950년 2월 7일 제4대 내무장관에 임명되어
6.25동란 직후인 동년 7월까지 국가적으로 가장 어려운 시기에 국내 치안 유지와 내무행정 발전에 진력 하였다.
6.25가 터져 정부가 대전으로 피난 갈 때도 백 내무는 서울이 적군에게 점령될 때까지 중앙청을 지키다가
단신으로 적진을 뚫고 남하하여 서울의 적정(敵情)을 피난 정부에 알려주었다고 한다.
정종(鄭瑽) 교수는 백성욱의 내무장관 시절
그가 지방 경찰서까지 철조망을 철거케 하여 경찰과 국민의 거리를 좁히려고 노력한 점 등을 평가하였다.
정교수가 그를 방문했을 때
“그 옛날 지장암에서나 돈암동 선방에서나 장관실에서나 한결 같은 인간 백성욱 박사“를 발견하고
그 시절과 그의 인간됨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전시에도 국가의 주체성을 지키려던 백성욱은 이승만의 은밀한 정치 고문이기도 했으나
외부 세력의 반대로 이승만 대통령도 어쩔 수 없이 대전에 내려온 백 내무의 사표를 수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이듬해 부산에서 백 박사는 한국 광업진흥주식회사 사장에 취임하여
1956년 사임할 때까지 광업 발전은 물론 금광 개척을 통해 정부의 국고(國庫)를 튼튼히 하는데 많은 기여를 하였다.
백성욱 박사는 1953년 8월 동국대학교 총장에 취임하였다.
정계를 떠나 대학으로 옮긴 그는 대학의 이사장과 동창회장을 차례로 겸임하며 대학 발전을 중심으로 한국불교 중흥에 온 정열을 바쳤다.
그는 현 동국대학교의 기본이 된 본관,
본부건물, 과학관, 도서관 및 기타 부속 건물 등 총 8,700여 평의 건물을 신축하였으며
1957년에는『고려대장경 보존동지회』회장에 취임,
고려대장경 영인에 착수하셨고 또한 재단법인 동국대학교 장학회 이사장에 취임, 후학 보조에 진력하였다.
또한 그러한 직책 수행 중에도 백 총장은 전체 학생을 대상으로 총장 문화사 특강과 금강경 강의를 열었으며
대학원에서 금강삼매경론, 팔식규구(八識規矩), 보장경, 화엄경 등을 강의하였다.
5.16군사정변으로 동국대학교 총장직을 사임할 수밖에 없었던 백성욱 박사는 경기도 소사에 백성목장으로 은퇴하여
1981년 8월 열반할 때까지 수행에 전념하면서 인연 닿는 사람들에게 불법을 전하였다.
Ⅲ. 불교순전철학(佛敎純全哲學)
이상의 과정을 통해 형성된 백성욱의 불교에 관한 기본 관점은 그의 박사 학위 논문 「불교순전철학」에 잘 나타나 있다.
독일어 원문(原文)의 뜻은 불교형이상학(Buddhistishe Metaphysik)인데
이는 산스크리트어의 아비달마(Abhidharma)를 의역한 것이다.
형이상학은 아리스토델레스에 의하면
자연의 근본을 연구하는 학문이며 이를 제1철학이라 불렀다.
백성욱은 논문에서 불교의 개념 정의 및 불타(Buddha)와 법(dharma), 그리고 아비달마에 대한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
1.불교의 정의(定義)
논문에 의하면
“불교는 실제적 현실로부터 구득(求得)한 진리를
철학적 견지에서 각개의 주관을 떠난 객관적 지위에서 연구하는 의식 철학이다.
” 백성욱의 불교에 관한 이러한 정의(定義)는 매우 독창적이고 통찰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당시 유럽에는 불교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는 유학당시 그가 쓴 “백림 불교원 방문기”에 그 일단을 엿볼 수 있다.
그 당시 이미 베를린 근교에 수행과 포살을 행하는 잘 짜인 불교수도원이 있었던 것이다.
백성욱은 대승불교권인 한국에서 승려생활을 하고 불교를 익혔기 때문에
유식불교에서 기본으로 삼고 있는 심․의․식(心意識)에 착안하여
유럽에서 후설의 현상학을 중심으로 논의 중이던 의식철학이라는 개념으로 불교를 정의한 것이다.
사실 의식에 관한 연구는 21세기에 이르러서야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기독교 중심의 서양사회에서 정신, 의식 등은 신의 영역이라 인간의 연구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과학 쪽에서는 의식은 인간의 주관이라 객관적 연구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뇌 과학과 신경과학 등의 발전으로 의식에 관한 연구는 더 이상 거부의 대상이 아니며
오히려 새로운 연구의 주제로 떠오르고 있다.
의식연구의 세계적 권위자인 데이비드 찰머스(David Chalmers)는
의식을 기존의 기본 요소-공간, 시간, 물질, 전하-로 설명할 수 없다면
의식 그 자체를 자연의 기본적인 구성 요소로 상정하여 연구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그는 19세기 막스웰(Maxwell)이 물리학에서
공간, 시간, 물질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던 전자기 현상을 새로운 현상으로 추가하여 설명한 예를 들고 있다.
그는 의식이라는 현상학적 자산과 물리적 자산이 자연세계에서 매우 긴밀하게 통합되고 있는 것으로 보여
이를 이원론적으로도 일원론적으로 과학적인 이론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백성욱은 위의 정의를 통해 불교를 신(神)을 섬기는 다른 종교들은 물론 일반적인 이론 철학과도 구별한다.
인도불교는
남방의 소승불교와 북방의 대승불교로 전해졌는데
대승 중 티베트불교는
특별히 신비적으로 해석된 것이고 동아시아의 불교는 철학적으로 해석된 것이라고 보았다.
불교에 등장하는 신(神)들은
인도 전래의 신들을 불법(佛法)의 수호신으로 만들어 놓아 절을 지키고 있는데 불과하며
불교의 핵심은 그러한 신들에 대한 신앙과는 다른 것이다.
불교의 요체는
‘순전철학’인데 그것은 ‘전 우주의 진리를 연구하는 학문’ 이며
또한 ‘오직 이론만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직접 실습을 하는 것이 불교 철학의 특별한 장점’이라 쓰고 있다.
순전철학으로 의역한 불교의 아비달마(Abhidharma)란
사물의 배후에 있는 전 우주적 진리를 연구하는 학문인 것이다.
아비달마는 “불교의 최고의 가르침, 또는 궁극적 진리에 관한 순수한 있는 그대로의 서술이며 오염되지 않은 반야 지혜”를 말하는 것이다.
2.붓다(Buddha)와 달마(Dharma)
백성욱에게 불교란
결국 전 우주적 진리를 연구하는 학문인데 그것은 이론상으로만 아니라
실천을 통해 구득한 진리를 객관적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여기서 붓다(Buddha)와 달마(Dharma: 법, 진리) 그리고 아비달마라는 불교의 핵심적 요소들의 뜻이 분명해진다.
그는 붓다가 석가모니라는 실존인물을 지칭하지만
‘깨달은 이’라는 보통 명사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부처님이란 우주의 진리를 구득한 주체 즉 ‘진리 속에 있는 주관’이라고 말한다.
그는 부처님은
일신교(一神敎)적으로나 다신교(多神敎)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없다고 말한다.
하나의 달이 천강(千江)에 비치는 것처럼 부처님은 하나이면서 삼라만상에 두루 미치는 바,
그것은 부처님이 우주 진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우주 진리 자체에서 우리는 논리상으로나 관념상으로 주관과 객관을 구별하지 않을 수 없으며 부처님을 우주 진리의
주관이라 한다면 달마는 바로 우주 진리의 객관이다.
우주의 진리를 주관과 객관으로 나누어 붓다는 진리를 주관적으로 구현한 인격으로
그리고 달마는 우주 진리의 객관으로 본 점 역시 백성욱의 탁월한 통찰이라 본다.
그런데 그에 의하면 달마의 관념은 소승과 대승에 있어서 다르다.
소승에서는 달마를 해석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아라한의 지위에 올라 속히 윤회에서 벗어나길 원한다.
그들은 주관만을 자유에 두고자 하고
외계(外界)에 대해서는 공포와 불안으로 된 비관적 관념을 버리지 못하였다.
그러나 대승에서 달마에 대한 관념은 그와 다르다.
보살들은 주관과 객관에 모두 자재(自在)하기를 구하며 우주도 우리의 무명(無明)에 의해 건립되었으므로
외계 자연에 대해 공포와 애증의 관념을 가지지 않는다.
그들은 환(幻)적 주관과 객관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으므로 이 현실 세계는 오직 환(幻)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대승에 있어서 달마는 공(空)에 비유된다.
허공중에는 오온(五蘊)이 없고
따라서 식(識)이 없으며,
식이 없으니 식의 경(境)이 없을 것이다.
식의 경이 없으니 무명(無明)도 없고,
최종적으로는 유・무(有 ・無), 취사(取捨)가 없고 환(幻)과 환 아닌 생각도 없어 자연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그러한 달마를 체득할 수 있을까,
즉 어떻게 전(全) 우주적 진리에 도달할 수 있을까?
박사는 금강경 해설에서 그 방법을 화엄부의 설을 인용하여 신해행증(信解行證)에 의해서라고 하였다.
신(信)
즉 진리가 있음을 믿어서 의심치 않을 것,
해(解),
즉 부처님의 진리의 말씀과 그 내용을 알려고 노력할 것,
행(行),
즉 안 것을 실행해 볼 것,
그리고 증(證),
즉 알아 얻은 것을 결정을 받아 다시는 없어지지 않게 할 것의 네 가지 조목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3. 세계와 중생의 기시(起始)
순전철학은 세계와 중생이 생기게 된 연유와 육체에 관해 논하고 있다.
인도의 힌두교나 서양의 기독교에서는 세계는 누군가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보고
그런 신에게 예배하고 복종해야 한다는 창조설을 믿는다.
인도에서는 창조의 신 인드라와
그와 대립적인 아수라,
그리고 우주의 본질이라고 본 공기에서 생성된 불을 숭배하기도 했다.
바라문교에
이르러 브라만신이 우주를 창조했다는 신화를 만들고 이에 근거한 카스트제도가 생겨 인간사회를 지배하였다.
창조주를 믿는 종교에서는 모든 것을 신에게 바쳐야 하는 것으로 믿어 사람도 공양물로 바쳤다.
그런 종교 아래서 인류는 신의 노예이고 실질적으로는 신을 대신하는 사제(司祭)계급의 노예였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석가모니 부처는 브라만 종교의 공양을 금지하고
인류는 신으로부터 해방된 독립적 존재임을 선언했던 것이다.
그럼 세계는 신이 아니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백성욱은 부처님과 불교철인들의 말을 인용하여 세계의 시작은 우리의 환적 주관,
즉 불성(붓다)이 무명(無明, 아비디아)으로 인하여 컴컴해(암묵暗默)져서
진리의 객관 대신에 환적 객관을 우리에게 이와 같은 세계로 보이게 된 것이라고 해설한다.
“만일 우리가 진리의 주관(즉 붓다)을 가졌으면 이 세계는 확실히 다른 형식 하에서 우리에게 보여주리라”고 하였다.
이 세계는 주관이 미(迷)하여 환적 세계를 건립한 것이라 한다.
환적 세계는 공(空) 위에 건립된 것이다.
따라서 그는 “이 세계는 우리의 강도적(强度的) 공상(空想)에서,
공상은 우리의 욕망에서, 이 욕망은 우리의 사색에서 온 것이다.
이 사색이 순결하면 이 세계가 존재하지 못한다,”고 결론 짓고 있다.
그럼 생명체, 즉 정신과 육체를 가진 중생은 정신이 육체를 떠나면 어떻게 될까?
논문은 이런 문제들에 대한 불교철인들의 사색을 정리하고 있다.
브라만교에서 마음은 죽지 않고 윤회한다. 육체는 죽지만 마음은 영혼으로 불사(不死)한다.
그러나 불교의 윤회는 이와는 다르다. 불교에서 육체를 떠난 마음은 영원불멸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다만 의식으로서 정신의 작용은 업장(業障)식인 제8식 아뢰야식(阿賴耶識)에 저장된다.
그러나 육체와 관련된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의 전5식은
육체가 무너지면 의지할 곳이 없어지고 정신은 결국 업장식인 8식만이 남게 되어 중음신(中陰神)이 된다고 한다.
중생이 생을 받게 되는 것은 아버지, 어머니, 중음신과 중음신이 부정모혈과 결합할 시간의 4가지가 결합해서 얻어지는 것이다. 이 집합은 결코 외부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중음신(정신) 스스로가 회합코자 하는 욕망에서 연유된 것이다.
결국 부모의 은혜라는 것은
양육의 은혜요 생산과는 관련이 없으며 있다면 “동물적 교합”일 뿐이다.
육신을 통한 생명의 탄생에 있어서
불교의 철인들은 선천적 관념을 부인하면서 동시에 중음신이 자기의 내부에 종자를 내장하여 조건을 만나 생명력을 비축하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4.아비달마의 논리체계
그런데 불교순전철학, 즉 ‘아비달마’는 미혹된 중생이 무명에서 벗어나 불교의 진리,
아니 전 우주적 진리를 잘 이해하도록 해주는 인식론과 체계를 가지고 있는데 백성욱은 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불교에서 발전시킨 논법의 형식은 긍정 →부정 →불(不) 긍정, 불부정이다.
이 논리 형식은 다섯 가지 심리학적 요건(오온五蘊: 색色・수 受・상 想・행行・식識) 위에 건립한 우리의 정신이
선입견과 오류를 버리고 객관적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이다.
만일 여기 흑색과 백색의 중간이 되는 색이 있다고 할 때 회색이라는 개념을 모르고 있었다면 그 색을 인식하는 방식은 이렇다. (1) “이 색은 흑색이다.” 그러나 진리와 다름으로 우리는 다시
(2) “이 색은 백색이다”라는 반대 명제를 내새운다. 그러나 그것도 진리는 아니므로
(3) “이색은 흑색도 아니고 백색도 아니다”라는 명제에 도달하여 진실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불교의 상대적 관점을 나타내고 있다.
우주는 상대적 관점 이외에 없다. 예로서 우리는 평등을 원하며 그래서
(1) “평등은 평등이다”라는 이론적 명제가 나오나 현실적으로는 불평등이 없는 곳에 평등도 없으므로
(2) “평등은 평등이 아니다”라는 반대명제가 나온다.
그런데 이에 따라 (3) “평등은 평등도 아니요 불평등도 아니다”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므로 만일 사람이 “평등을 실천하자면, 평등 즉 불평등, 불평등 즉 평등”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는 서양 형식논리학의 정반합(正反合) 논리와 비슷하다.
그러나 신의 다른 이름인 절대정신의 발전과정을 해명하고 의식뿐만 아니라 사물과 생명체의 변화 등을 모두 설명하는
헤겔 관념론의 변증법과는 다르다.
불교의 논리는 무아(無我)를 기반으로 하고 있고 진리파악을 위한 것이다.
다르마키르티(法稱)가 대성한 불교의 논리학은 찰라 생, 찰라 멸하는 미지의 사물을 새롭게 인식하기 위한 논리이다.
백성욱은 불교의 인식론에 기반을 두어 인식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바쳐 미지의 대상을 바르게 파악하는 수행방법을 개발하였다.
이는 뒷부분에서 살펴볼 것이다.
우리는 금강경에서 이러한 종류의 논법이 계속됨을 볼 수 있는데 박사가 후기에 금강경을
부처님의 일대시교(一代時敎) 중 가장 중심적인 경으로 세우게 된 것은 불교순전철학의 맥락과 궤를 같이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Ⅳ. 교상판석론(敎相判釋論)
알려진 바와 같이 교상판성론(이하 교판론)이란
방대한 불교 경전들을 어떠한 원칙하에 체계를 세워, 내용상의 차이에 따라 시간적인 구획으로 분류하여 해석을 가하는 것을 말한다.
중국에서 천태 지의(智顗: 538~597)대사의 5시(時) 8교(敎) 교판론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5시는 화엄시・아함시・방등시・반야시 그리고 법화・열반시이고
8교는 돈교・점교・비밀교・부정교의 화의사교(化儀四敎)와 장교(藏敎)・통교(通敎)・별교(別敎)・원교(圓敎)의 화법사교(化法四敎)이다.
이러한 교판들은 복잡한 모든 경전을 하나의 흐름으로 분류하고 해석하여 불교 이해의 방식을 제공해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 과거의 교판론들은 오늘날 역사적 근거를 갖추지 못한 자의적(恣意的)인 것이라는 비판에 직면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종을 제외한 많은 종파들의 사상이 교판론을 중심으로 발전했던 점에 비추어
오늘날에도 새로운 시대에 적합한 현대적인 교판론의 정립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백성욱은 그러한 의미에서 새로운 교판론을 제시하였다.
그는 석가모니 부처의 일대교를
다음과 같이 아함부(阿含部), 방등부(方等部), 반야부(般若部), 법화․열반부(法華․涅槃部)의 4시4교로 분류하였다.
부처님은 성도 후 처음 12년 간 아함부를 설했는데 그 내용의 요체는 고집멸도(苦集滅度)의 4제(諦) 법문이다.
그것은 당시 인도 사람들의 고통을 먼저 해결해 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 세상은 고생이니 그 근본을 살펴서 없애면 밝아진다,”는 것이 곧 고제(苦諦)요,
“뭉쳐라, 할 것 아니할 것 구별을 해라” 그것이 집제(集諦),
“그것을 없애라”가 멸제(滅諦),
그리고 그 다음 ‘종요로운 데로 나갈 수 있는 것’이 도제( 道諦)라는 것이다.
아함부 다음에 인도의 사회적 불평등을 원리적으로 해소한 법문들이 8년 동안 설하신 방등부 경전들이다.
방등부는 4성(姓) 계급의 선천적인 불평등 이론을 부정하고
‘모든 사람들은 다 똑같이 원인지어 결과 받는 것일 뿐 일체가 평등하다'는 원리를 선언한 것이다.
세 번째로, 그 다음 22년간에 걸쳐 설해진 것이 반야부 경전들인데
이때는 그 이전 20년간 설법으로 인도 사람들의 근기가 어느 정도 성숙하여 바로 성불하는 법을 보인 것이다.
그 요지는 “한 마음 닦아 성불한다,”는 것으로서 반야부는 부처님의 일대기를 하루에 비할 때 가장 밝은 정오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금강경은 반야부의 핵심을 체계적으로
갈무리한 중심경전으로서 이론과 수행의 원천이 되는 경이라는 것이 그의 해석이다.
그 다음 나머지 8년 간 법화・열반을 설하셨는데
이는 불교의 유통(流通)을 위한 법문들이다. 예
를 들어 그 이전에는 이찬티카(부모나 부처를 해한 자 등)는 성불할 수 없다고 했으나 법화・열반시에는 일체 중생이 부처님 성품을 가지고 있어 성불할 수 있다고 하였다.
화엄경은 초기에는 소의경전(所依經典)으로 중시되었고 금강산 수도 시에도 ‘대방광불화엄경’ 제창이 수행의 중심을 이루었고 금강경으로 전환된 후에도 화엄경은 ‘부처님의 생활 그 자체를 그린 것’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럼에도 여기서 제외된 이유는 화엄경이 용수보살의 작품임이 분명하고 거기에 석가모니불이 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Ⅵ.수행론(修行論)
앞에서 우리는 불교란 ‘실제적 현실에서 구득한 진리’를 철학적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연구하는 것이라는 정의를 보았다.
백성욱 박사의 불교에 있어서 진리의 실제적 구득은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며
따라서 그 수행론은 그 스스로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독특한 측면을 지니고 있다.
다음은 수행의 요지를 가장 간결하게 표현한 그의 서한문 전문(全文)이다.
미륵존여래불을 마음으로 읽어서 귀로 듣도록 하면서 당신의 생각은 무엇이든지 부처님께 바치는 마음을 연습하십시오.
자신이 가지면 병(病)이 되고 참으면 폭발합니다.
이것이 닦는 사람의 항복기심(降伏其心)이라, 아침・저녁으로 금강경을 읽으시되 직접 부처님 앞에서 마음 닦는 법을 강의 듣는 마음으로 배워 알고 실행하고 습관이 되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육체는 규칙적으로 일하시고, 정신은 절대로 가만히 두십시오. 이와 같이 백일(百日)을 되풀이 하신다면 대략 10회 가량이면 자기의 숙명통(宿命通)이 나고 타인(他人)의 숙명도 알 수 있나니 이것은 아상(我相)이 없어진 연고입니다.
이것이 초심 불교의 행상(行相)이라고 할까요.
주의하실 일은 공부(工夫)하겠다면 탐심(貪心),
공부가 왜 안 되나 하면 진심(嗔心),
공부가 잘 된다하면 치심(痴心)이니,
이 세 가지 아니하는 것이 수도(修道)일진댄 꾸준히 하되 안하지만 말면 됨이라.
고인(古人)은 ‘斯可以綿綿(사가이면면) 不可以勤勤(불가이근근)이라 했지요.
백성욱에게 있어서 ‘진리 속의 주관’
즉 부처님으로 우리를 제도하시는 분은 ‘미륵존여래불’이고
‘진리의 객관’ 즉 달마(法)를 제시한 경은 금강반야바라밀경(약칭 금강경)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진리에 이르는 수행 방법은,
진리에 주관과 합치하는 길인 “미륵존여래불” 봉송(奉誦)과 진리의 객관을 체득하는 길인 금강경 독송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방법은 통틀어서 ‘바치는’ 공부에 귀착한다.
미륵존여래불은
석가모니불의 영산회상에서 3,000년 후에 성불할 것으로 수기(授記)를 받은, 오는 세계의 주세불(主世佛)이다.
백성욱은 미륵존여래불이 서양에서는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로 나온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설화를 제시하였다.
영산회상에서 석가모니불께서 1,250인의 청중들이 모두 진리의 불빛을 밝히고 있는 것을 보고
‘한마음 닦아 성불하는구나’하는 찬탄을 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그 말씀을 들은 청중들은 “옳지 이제 내가 성불하게 됐구나,” 하는 생각을 하자 다시 캄캄해졌는데
오직 한 제자만이 더욱 밝은 빛을 내고 있어 부처님으로부터 수기를 받았다고 한다.
그 제자는 “내가 부처가 되겠다,”는 아상(我相)을 내는 대신에
“부처님이 아니시면 이런 말씀을 어떻게 들을 수 있을까,” 하고 더욱 공경심을 내어 밝아졌다고 한다.
우리가 그 분의 명호를 부르는 것은 부처님의 마음이 어디 있는가를 찾는 것이고 그 분의 밝은 자리로 향함으로써 컴컴한 우리 자신을 바치는 것이다.
바치는 공부의 또 하나의 방법은 아침, 저녁으로 금강경을 읽는 일이다.
교판론에서 보았듯이 금강경은 부처님 법문 중 가장 빛나는 정오(正午)에 해당되는 반야부의 요체이므로
금강경을 읽으면 밝아질 수밖에 없다.
금강경은 밝은 자리이며 따라서 컴컴한 것을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아침에 읽는 금강경은 낮 동안의 재앙을, 그리고 밤에 잘 때 읽는 금강경은 자는 동안의 재앙을 소멸한다.
마음속에 집어넣어 두었던 것들은 결국 고통의 원인이 되는 것인데 그것들이 금강경을 독송하면 빠져 나오기 때문이라고 한다.
박사는 불교공부의 핵심인 계・정・혜(戒定慧) 3학(三學)도 금강경 독송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설한다.
즉 금강경을 아침, 저녁으로 읽으면,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자연히 구별할 수 있게 되니 이것이 곧 계(戒)요,
또 헐떡거리는 마음이 쉬게 되니 곧 정(定)이요, 무언가 깨닫는 것이 있게 되니 곧 혜(慧)가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사실 경전을 독송하는 것은 부처님이 계실 때부터 있었던 불교의 오래된 수행방법이다
초기경전에는 경전을 수지 독송하는 사람들인 담마다라(Dhammadhara)라는 명칭이 나오며 아소까 비문에도 경을 수지하는 사람인 수탄티까(Suttantika)와 경을 구송하는 설법사로 담마까티까(Dhammakathika)라는 용례가 나온다.
그런데 이러한 공부를 바치는 공부로 귀착한다.
‘바쳐라’라고 하는 말씀에 박사가 주창한 수행법의 특징이 있다.
바친다는 것은 곧 “준다,”는 의미도 있고 “비운다,”는 의미도 있는데 꼭 “바친다,” 또는 “드린다,”로 말하는 것은
용심(用心)이 다르기 때문이다. “없앤다,” “버린다,” 하지 않고 ““바친다,”는 것은
거기에 공경심과 종교적 경건함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바친다는 것은 부처님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부처님께 바치는 것은 곧 복을 짓는 것이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컴컴한 것들을 부처님을 향하여 바치니 부처님이 다 제도해 주실 것이요
그 대신 자기는 점점 밝아지고 씩씩해질 것이 틀림없다.
따라서 복은 받는 것이 아니라 지어야 하는 것이다.
자기가 가진 모든 마음을 무조건 부처님을 향하여 바치면 부처님께서는 한없는 복을 내려주실 것이요
자기가 복을 받고자 마음을 끌어안고 있으면 결국 자기 자신을 부자유하게 만드는 것이 된다.
진리를 향한 수행은 현세적으로는 재앙의 소멸과 밝은 생활이요, 궁극적으로는 도통(道通),
즉 진리의 주관과 객관과의 완전합일이다.
수행의 결과는 정신의 변화와 육신의 변화가 함께 병행하여 나타난다.
왜냐하면 마음은 곧 세포의 생성, 변화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러면 견성(見性)이란 무엇인가?
마음이 육체 속에 갇혀 있을 때는 육신 속의 마음이요.
그것이 육신을 벗어나 객관적으로 육신을 보게 되면 성리(性理)라고 한다.
성리가 밝은 도인들은 몸을 받을 때(즉 태胎속에 들어갈 때) 몸에 들어가지 않고 밖에 있다가 아기가 뱃속에서 떨어질 때 비로소 들어감으로 고통을 겪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리(性理)를 또 다시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 바로 견성이며
공부를 하게 되면 자연히 그러한 단계를 거치게 되는데,
항상 공경심을 잃지 않으면 그러한 일들이 아무런 장애를 일으키지 않는다.
개인적인 차이가 있지만 금강경 독송 공부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공부의 효과는 우선 자신의 생활과 주변이 안정되며, 육신이 상쾌하고 건강해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사람에 따라서는 경계를 보게 되며 밝은 기운(혹은 백색광명白色光明)을 보거나 육체적으로 어떤 황홀경(엑스타시 ecstasy)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러나 수행자는 이러한 모든 경계에 접해서 이에 탐착(貪着) 하거나 놀라지 말아야 한다.
그것들 자체가 다 부처님에게 바칠 자료라는 것을 알고서 공부를 계속한다.
또한 공부자체도 법에 맞게 해야지 탐・진・치를 가지고 하면 공부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공부는 꾸준히 실제로 할 뿐이지 공부하겠다고 하면 그것이 곧 탐심(貪心)이고,
공부가 왜 안 되냐 하면 그것이 곧 진심(嗔心)이며,
또한 공부가 잘 된다하면 치심(痴心)이니, 이 세 가지 안 하는 것이 수도(修道)라는 것이다.
Ⅴ. 사회사상
백성욱의 사회사상은 불교철학과 사상을 사회생활에 적용한 것이다. 그
에 의하면 태양계를 포함한 대우주가 질서정연하게 돌아가면서 진화해온 것은
각 부분이 중심점을 기준으로 일정한 궤도를 유지하여 움직이기 때문인데 우주의 한 물건인 인류도 이를 본받고 있다고 하였다.
즉 태양계는 태양을 중심으로 위성들이 궤도를 돌고
그런 태양계 같은 별의 무리들이 하나의 중심점을 두고 궤도를 돌면서 은하계를 이루고
그런 은하계들이 어떤 중심점을 운행하여 항성계를 이룬다.
원자, 전자 등 미립자의 세계도 비슷한 원리로 궤도를 두고 돌아간다.
이런 관찰을 통하여 그는 소우주나 대우주나 “우주는 동(動)한다. 일정한 궤도에서 운영되므로 우주는 완전으로 나아갈 뿐이다.”고 말한다.
그런데 인류도 이 우주에서 한 물건인데 이 우주의 운행법칙에 의하여 생활하므로 향상하고 그렇지 못하므로 타락하였다고 한다.
우주의 생활준칙을 참고하여 인류의 역사를 조사하여 상고(詳考)한 결과 인류의 생활준칙은
대략 정신생활, 법률(정치)생활, 그리고 경제생활의 세 가지였다고 한다.
이러한 분류는 백성욱의 독일 유학당시 유럽에서 신지학과(神智學)과 인지학(人智學) 등을 사회과학에 접목시켜 활동하던
루돌프 스타인(Rudolf Stein)에서 보인다.
인간을 소우주로 보고 인체의 뇌, 심장, 다른 기관 등의 활동을 사회의 문화, 정치, 경제와 연관시켜 논하는
그의 이론은 아직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백성욱은 이를 불교의 인식론으로 풀어내어 독자적인 이론을 제시하고 있다.
백성욱은 이 세 가지 생활이 균형 있게 발전하지 못하고 하나가 다른 두 가지를 억압하고 지배하면 인류가 불행했다고 보았다.
원시 시대에서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자연에 대한 공포심을 기반으로 한 신을 중심으로 한 정신생활이 모든 것을 지배하면서 인류가 불행하였다.
인간은 신의 노예로 그의 뜻대로 움직여야 했기 때문이다.
고대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신을 기쁘게 하려고 동물공양 심지어는 인신공양까지 행해졌던 것이다.
종교지배가 끝나고
그 자리를 왕이나 귀족계급들이 차지하여 인민을 억압하는 왕권시대에는 법률(정치)생활이 정신생활과 경제생활도 지배하고 지배자들 간의 영토와 이익 다툼으로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 민중은 억압되고 살육되는 등 인류는 또다시 불행하였다.
경제생활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시대는 백성욱 박사 시대에는 아직 오지 않았지만
그는 마르크스 사상 계통의 운동으로 경제생활이 독단하는 시대가 오더라도 역시 불행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예견하였다.
70년 동안의 실험 끝에 멸망한 공산주의의 역사는 그의 예견이 적중했음을 보여준다.
그는 이런 이론을 삼기사회조직론(三技社會組織論)이라 이름 지었다.
정신생활은
인간의 성리(性理)와 가치를 밝히는 생활이요,
경제생활은 인간집단의 생존을 위한 것이며,
법률생활은 인간 집단의 보존을 위한 것인데 이들은 전통사회에서 우주의 세 가지 요소,
즉 삼재(三才)라고 한 하늘(天-정신생활), 땅(地-경제생활, 인(人=법률생활)에 해당한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발전시켜야 할 것은 정신생활이라고 한다.
경제생활이나 법률생활의 불만족을 정신생활로 보듬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교육을 통해서 사람들이 “자족하고 물질보다 마음으로 행복을 찾는 것을 사회의 도덕규범으로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인체에 있어서 정신생활은 머리의 대뇌로서 조화롭게 몸을 다스려 편안하게 하며 그럴 때 지혜가 나오고 종합적 직관으로 우주의 실상을 파악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이에 이르는 길은 앞의 수행론에 제시되었다.
“경제생활은
온 몸의 신경이나 핏줄과 같아서 온 몸에 피가 잘 돌게 하는 핵심은 정당한 분배”에 있다고 하였다.
경제생활의 기본 바탕은 ‘자기가 필요이상으로 많이 가지거나 필요치 않은 물건을 쌓아 놓지 않고 남에게 줄줄 아는 것’이다.
이러한 분배가 경제상 원칙이 되는 사회는 건강하고 행복한 사람들이 많아져 보편타당한 가치구현에 한발 더 다가서게 될 것이라고 한다.
“법률생활은 몸의 척추와 같아서 몸을 굳게 버티게 하는 규범이라 정의(正義)로
세상을 골고루 평탄케 해야,”하며, “법률생활을 보편타당하게 운용하자면 개인이나 집단이나 불평하는 마음이 없어야“ 한다고 하였다.
불평하는 마음이 많이 있다는 것은 법률생활이 현실과 맞지 않다는 것이다.
법률생활은 원시시대 규칙에서부터 시작하여 각 나라별 헌법과 국제법 등의 발전과정에 있으며 앞으로 인류에게 더 나은 법률을 만들어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한다고 보았다.
백성욱의 삼기사회조직론은 사회를 계급이 아니라 기능과 조직을 중심으로 분류하고 탐구하는 새로운 사회사상이다.
사회뿐만 아니라 개인에게도 정신생활과 법률생활, 경제생활이 조화를 이루어야 건강하다고 본 것이다.
지구에서 각각 개인이 세 가지 생활을 바르게 하고 각 나라가 바르게 하면 인간은 보다 나은 방향으로 진화할 수 있으며
이 세 가지 생활을 가르치는 것이 교육이고 진리를 연구해 교육에 제공하는 것이 학문연구라고 설파했다.
Ⅵ.맺음말
이상이 부족하나마 요약해 본 백성욱의 불교사상인데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볼 수 있다.
우선 논리적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으며 체계적이라는 점이다.
불교순전철학에서 제시한 불교의 기본 철학들과 교판론, 수행론, 사회사상들이 하나의 체계를 이루고 있으며
서로 논리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다음으로 그의 불교사상은
현대인이 출가자나 재가자나 어디에서나 실천할 수 있는 생활불교의 요소들을 고루 갖추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신비적 요소나 미신적 요소가 없이 건전한 종교심에 바탕을 둔 간결한 원리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
생활불교의 요건을 갖추었다.
부담 없이 마음만 먹으면 실천할 수 있는 수행문을 제시하고 있다.
미륵존여래불 염불과 금강경 독송, 그리고 바치는 공부는 경건한 마음 이외 특별한 훈련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가 강조한 불교의 주요 덕목들을
그 기본 정신을 유지하면서 현대 생활에 알맞은 덕목으로 되살릴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예를 들어 탐・진・치를 과거에는 끊고 참는 것으로 알았는데
백 박사의 공부 방법에서는 탐심은 깨치고(자기 분수를), 진심(嗔心)은 바치고(참으면 스트레스가 쌓여 병이 된다),
치심은 닦으라고 말한다.
이러한 덕목의 재해석은 이론 철학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 현실로부터 구득한 진리’에서 도출된 것이다.
끝으로 수행의 적극적 측면을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불교가 은둔적이고 소극적이라는 인상을 주게 된 것은
소승적 태도를 지닌 사람들이 세상으로부터 도피하여 자기 자신만의 안심입명이나 자기 자신을 위한 구복(求福)만을 추구한 때문일 것이다.
백성욱 박사에 의하면 복은 받거나 비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지어(作작)야 하는 것이다. 복을 어떻게 짓는가?
부처님 기쁘게 해 드리는 마음으로 복된 일을 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열심히 일하고 노력하는 것이 부처님 전에 복 많이 짓는 것이다.
내면에서 떠오르는 모든 생각과 외계(外界), 즉 환경에서 오는 모든 사물들을 다 부처님께 바쳐서 복 짓는 공부는 대승적인 정신을 구현하는 것이다. 복을 받으려는 마음은 약한 마음이지만 복을 짓는 마음은 떳떳한 주인의 마음이라고 그는 설한다.
백성욱과 동시대의 인물인 미당 서정주는 우리나라의 역사적 인물로서 여성으로서는 선덕여왕을 가장 매력 있는 인물로,
현대의 남성으로서는 백성욱을 가장 매력 있는 인물로 평가한 바 있다.
그를 가까이 했던 정종 교수는 그의 풍모와 인물됨을 헤르만 헷세가 지은 싯다르타의 작중 인물 싯다르타와 같은 인물로 존경해 왔다.
그의 사상과 행동이 일치했기 때문일 것이다.
백성욱은 어린 시절부터 지혜를 추구하는 것을 생의 목표로 삼았다.
철학자(philosopher)의 본래 뜻이 애지자(愛知者), 즉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철학 박사 백성욱이야말로 타고난 애지자라고 할 것이다.
그가 추구한 철학은 사변적인 지식이 아니라 생명의 무한한 에너지를 발휘하도록 하는 지혜였다.
그는 그런 지혜를 얻는 방법론과 실제를 석가모니 부처님의 삶과 철학에서 배웠다.
아쉬운 것은 우리 사회에서 그의 철학과 사상을 연구하고 이어받고자 하는 노력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이는 필자를 포함한 백성욱 박사를 존경하고 따르던 사람들의 책임이기도 하다.
논어에 “사람이 도를 넓히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다”
(子曰 人能弘道 非道弘人)라고 했듯이
백성욱 박사의 도가 아무리 훌륭해도 이를 넓히는 것은 그것을 이어 받은 사람들이 얼마나 그의 도를 이해하고 실천하느냐에 달려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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