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불총은 4월 10일 호국성지 밀양표충사에서 서산대사, 사명대사, 영규대사 3대성사님들의 호국충혼을
기리기 위하여 봉행되는 호국성사 사명당 향사에 대불총이 참석한다.
아래 내용은 본 행사의 참석에 즈음하여 표충사와 사명당에 대하여 회원들의 이해를 도모하기 위하여
공동회장 송재운 박사님이 표충사와 사명당에 대하여
그리고 이종찬 박사님은 사명당이 전란의 와중에서 쓰신 시 3편을 보내셨다.
글을 주신 두분께 감사를 드리며,
행사에 참여를 신청하신 회원 여러분들께 감사와 의미있는 행사가 되기를 기원드립니다.
표충사表忠寺 와 사명대사四溟大師
大佛總대불총, 호국성사 사명대사 향사 참가에 즈음하여 -2019. 4. 9-10
표충사
표충사表忠寺는
경남 밀양군 단장면 구천리 재약산載藥山 남서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 15교구 본사인 통도사通度寺 말사이다.
임진왜란때 승병을 일으켜 나라를 지키는데 큰 공을 세운
사명대사四溟大師의 충혼忠魂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표충사당表忠祠堂이 있는 절이다.
원래 이곳에는 신라 원효대사가 세운 죽림사竹林寺를 흥덕왕때 황면黃面이 재건하여
영정사靈井寺로 개칭한 절이 있었다
表忠寺라는 이름은
사명대사를 제향하는 사당을 당시 서원의 격으로 表忠書院이라 편액하고
일반적으로 表忠祠로 불러왔는데 이 사당을 사찰에서 수호하여 왔던 까닭에 사(祠)가 사(寺)로 바뀐 것이다.
이 사당은 1719(숙종 4년) 밀양군수 김창석金昌錫이 사명대사의 충혼을 기리기 위하여
지방 유지는 물론 관찰사 조태억趙泰億의 협조를 얻어 세워졌다
그 뒤 1738(영조14)년에 사명대사의 행적을 갖추어 임금에게 올리니 임금이 교지를 내려
표충사의 잡역을 면제하고 전답 5결結을 내리고 경상도 관찰사에게 중수하도록 명하였다.
이 때 남붕이 책임을 맡아 사우祀宇를 세 칸으로 하고 단청을 하였다.
그리고 사명대사의 영정을 중앙에 모시고 동쪽에 서산대사西山大師, 서쪽에 기허당騎虛堂을 각각 모시었다.
서산대사는 사명대사의 스승이고 기허당은 임란 때 금산 전투에서 왜병과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스님이다. 또한 이때에 願彿殿 爐殿 禮祭門 義重堂 紫霞門 明湮樓를 세웠다.
사당의 좌우에 선원과 교당을 세웠는데 향교와 서원의 동서 재실과 같은 형식으로 하였다.
1792년 동쪽 10리 되는 곳에 사명대사의 비석을 세우고 비각을 건립하였다.
이렇게 모든 사우寺宇를 다시 정비하여 세웠기 때문에 중흥사 重興寺라 하였다.
현재 표충사에는 청동함은향원이 국보75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향원은 1177년(명종7)에 제작된 현존 고려시대 최고最古의 향로이다.
이 밖에도 보물 467인 표충사 삼층석탑이 있고, 중요 민속자료 29호인 사명대사 금란가사와 장삼이 있다.
그리고 유물전에는 사명대사와 관련된 유물 16건 79점이 있다.
표충사 석등 대광전 표충서원 등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다. (민족문화대백과 참조-송재운 記)
사명대사(1544-1612 세수 68세)
풍천 임씨. 속명은 응규應奎, 자는 이환離幻, 호는 사명당四溟堂 또는 송운松雲.
경상남도 밀양이 고향으로 부父 수성守成의 아들이다.
나이 14세때인 1558년(명종 15년)에 어머니가 죽고 이듬해 아버지마저 돌아가자
김천金泉 직지사直指寺로 출가하여 승려가 돼, 신묵대사信黙大師의 -제자가 되었다.
31세 되던해 1575년
묘향산(妙香山-평안북도 영변, 희천군, 평안남도 덕천군에 걸쳐 있는 산으로 해발 1.909M.
예로부터 동 金剛山, 남 智異山, 서 九月山, 북 妙香山이라한 우리나라 4대 명산의 하나)
보현사普賢寺로 휴정休靜 서산대사(법명 휴정, 법호 淸虛청허 1520-1604 세수 84세)를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되었고 그뒤 1578년부터는 팔공산 금강산 청량산 태백산을 등에서 수선修禪하고,
1586년(42세) 충북 옥천산 상동암上東庵에서 오도悟道하였다고 한다.
1592년(48세)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의 근왕문勤王文과 스승 서산대사의 격문檄文을 받고 승병을 모아 순안으로 가서 서산대사와 합류 하고, 거기서 의승대장이 되어 승병 2천명을 이끌고 평양성과 중화 사이의 길을 차단하여 후일 평양성 탈환의 단초를 열었다.
그리고 1593년 명 나라 원군과 합세하여 평양성을 왜로부터 탈환하였다.
또 그 해 3월 서울 노원평과 우관동 전투에서 승리를 거둬 크게 공을 세웠다.
선조宣祖는 그의 전공을 표창하여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를 제수 하였다.
그 뒤 네 차례에 걸쳐 적진에 들어가서 침략군 대장 가등청정加藤淸正과 왜의 퇴각에 대한 담판을 벌였다.
뿐만 아니라 팔공산성 금오산성 악견산성 이중산성 부산성 남한산성 등을 축성 또는 개축 하기도 했다.
1604년 2월 강원도 오대산에서 스승 서산대사의 부음을 받고 묘향산으로 가던 중
선조대왕의 부름을 받아 일본과의 강화를 위한 사신으로 임명 받고,
8월 왜로 건너가서 무려 8개월 동안의 노력 끝에 전란 때 잡혀간 3천여 명의 우리 포로들을 데리고
1605년 귀국 하였다.
이렇게하여 조정에 복명復命하고 10월에 묘향산을 찾아 비로소 스승 서산대사의 영전에 절을 올렸다.
해인사에서 1610년 8월 26일 설법을 마친 뒤 결가부좌結跏趺坐(책상다리)하고 입적,
홍제암弘濟庵에 그의 부도와 비가 세워졌다. (민족문화대백과 참조-송재운 記)
사명당 전란戰亂의 시 세수(三首)
十月湘南渡義兵 시월 달 강남으로 의병들 건너
角聲旗影動江城 강성을 뒤흔드는 나팔과 깃발
匣中寶劍中宵吼 갑 속의 보배칼 한밤중에 우는 뜻은
願斬妖邪報聖明 저 요귀를 베어 국가에 보답하려고.
임진년 10월에 의병을 인솔하고 상원(祥原)을 건너면서 지은 시이다. 시 자체에서 풍기는 기개가 적을 삼키고도 남는다.
기어코 적을 무찌르고 말겠다는 굳은 결의가 엿보인다.
여기에서 이미 승리를 각오한 것이고 국가에 보답한다는
이 결연한 의지가 전란을 끝난 후에까지 뒷수습을 맡아 억울한 생명들을 구제하였던 것이다.
邇來衰鬢逐年華 젊은 세월 쫓기다 이제는 센 머리
又泛南溟八月槎 또 다시 남녘 바다 팔월 달 뱃길
曲臂折腰非我意 팔짱 끼고 허리 굽힘 내 뜻 아닌데
奈何低首入讐家 어째서 머리 숙여 원수의 집으로 드나.
부산 앞 바다에서 지은 시이다.
대아를 위한 소아의 수모는 감수해야 한다.
어제의 원수에게 오늘의 수교를 위해서 굴욕도 감수하는 비장함이 감돌고 있다.
이러한 비장함 때문에 현지에 다다라서도 머리 숙임이 없는 의연한 자세를 보였던 것이다.
人身牛首 사람 몸에 머리는 소이나
開物之大聖 만물을 열어준 큰 성인인데
人面獸心 사람 얼굴에 마음이 짐승이면
乃謂之何性 이를 무슨 성품이라 해야 하나
喇喇 라라라
靑靑手中草 푸르고 푸른 손 안의 풀은
萬古爲蒼生 만고의 세월 인류를 위했네.
어느 일본 사람이 신농씨가 풀을 맛보는 그림을 가지고 와 찬문을 구하여 써준다는 시이다.
신농씨는 사람의 몸에 소의 머리를 가졌다[人身牛首]라 한다.
이러한 성인은 인류를 구제하기 위하여 약초를 맛보는데.
(너희 왜인은)사람의 얼굴에 짐승의 마음을 가졌으니 이것은 어떤 천성을 가진 것이냐고 나무라는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