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空 강의 초록, 2019. 5. 25-대불총>
불교의 공空 사상
공空이란 ?
공은 무가아니다
불교에서 공(sunya)은 일체 존재의 본질을 밝히는 개념이다.
공은 일체의 모든 존재가 불변적이고 독립된 실체(實體-reality)나 자아가 없다는 뜻을 말한다.
모든 존재는 다양한 조건에 의해 상호 의존적이기 때문(因緣生起)에,
스스로 독립하여 홀로 자생할 수 있는 자성自性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은 ‘어떤 존재가 없다’는 무無의 뜻이 아니라 모든 존재 자체에 영원한 자성,
즉 실체가 없다는 것을 개념화한 것이다.
존재론적으로는 무아無我(諸法無我)이고 시간론적으로는 무상無常(諸行無常)이기에 공이다.
무아이므로 공이며 공이므로 무아이다.
무상이라 공이며 공이므로 무상인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공은 절대로 아무 것도 없다는 뜻의 무無가 아니라는 것이다.
마치 수학에서의 영零(zero)과 같다. 수학에서 공 즉 영개념은 수數 자체를 있게하는 존재다.
이 공(零)을 중심으로 하여 플러스의 수와 마이너스 수가 존재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공은 무가 아니고 중도中道 공인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일체개공一切皆空(일체 모든 존재가 공이다)이라는
불교의 명제가 모든 존재의 배후에 있는 실체 또는 본질이라고 이해해서는 절대로 안된다.
불교에서의 공은 일체존재의 무아 무상을 중생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여
이들 존재에 대한 집착을 버리게 하는 인연법의 진리를 설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다음 대승불교의 창시자격인 용수龍樹(Nagrjuna, 생 년대는 1-2세기경) 말을 들어보자. 용수는 대승경전인 반야경에 기초를 두고 공사상을 체계화한 인물이다.
중도中道 공
용수는 말한다.
“여러 인연으로 생겨난 존재를 나는 공이라고 설한다. 왜 그런가?
여러 인연이 화합하여 어떤 것이 생하면 그것은 여러 인연에 소속 되므로 자성이 없다(無自性)“.
곧 인연에 의하여 생기는 것, 연기緣起 자체가 공과 무자성의 뜻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다만 중생을 인도하기 위해서 공은 임시적 개념(假名)으로 설하지만
유有 -무無 두변(二邊)을 떠나므로 중도中道라고 이름 한다”.<이상 中論중론>.
용수에 따르면 공은 단순한 유냐? 무냐?하는
식의 2변 대립의 개념으로는 이해 할 수 없는 중도라고 한다. 즉 중도 공인 것이다.
수학의 영과 같은 도리다. 영은 유도 아니지만 무도 아니어서 용수가 말하는 중도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이분법이 없어진 불이不二(둘이 아님)가 바로 공이라 할 수 있다.
진공묘유眞空妙有
중국 동진東晋 때의 승려 승조僧肇(384-414)는 진공묘유를 말한다.
그는 <조론肇論>에서
“공은 유를 통하여 드러나므로 참된 공(眞空)이며,
유는 자성이 없지만 인 연으로 생겨나기 때문에 있다(妙有)”고 한다.
승조가 말하는 진공묘유는 결국 인연법을 근거로 한다.
공은 인연으로 생겨난 모든 존재와 떨어질 수 없는 관계 속에서 참된 것으로 성립된다는 것이다.
중국에서 불교사상을 수용하는 초기 단계에서는 노자와 장자의 무無 개념으로 공을 이해 하였다.
그러나 승조는 이런 격의格義의 방식을 비판하고 반야의 공을 그 핵심에서 규명한 인물이다. 그래서 승조는 일체의 법은 인연으로 모여서 생기고 --인연이 떠나면 멸하니 --있지만 자성은 항상 공이라고 하였다.
이런 독창적 이론들로 해서 승조는 ‘해공解空 제일’ 이란 별명을 들었다.
비유비무
공은 전술한바 있지만 무가 아니다.
그것은 무와 유의 중도로 비유비무非有非無 즉 무도 아니고 유도 아니다.
“비록 유이지만 비유요, 또한 무이지만 유이니 이른바 비무이다.
(雖有而無 所謂非有 雖無而有 所謂非無)“ <승조 肇論조론>
용수의 팔불중도八不中道
용수는 말한다.
“인연으로 생긴 법은 공하다.
또한 이것은 가명假名(거짓된 이름)이고 역시 중도中道 이다(因緣所生法 亦爲是假名)”
<中論중론>.
그에 의하면 공과 가가 분리되어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며,
역시 이것은 또한 중도라 한다. 이른바 공空 가假 중中 삼제三諦 이다.
팔불중도설
불생역불멸不生亦不滅 생함도 없고 역시 멸함도 없다.
불상역불단不常亦不斷 항상됨도 없고 역시 끊어짐도 없다.
불일역불이不一亦不異 같지도 아니하고 역시 다른 것도 아니다.
불래역불거不來亦不去 오는 것도 아니고 역시 가는 것도 아니다.
용수의 이 팔불중도설八不中道說은 그릇된 유무의 견해를 타파하는데 목적이 있다.
사람들이 유무 양변 어디에 떨어져 그 하나에 집착하면 편견 아집 애착에 빠져 도를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유비무의 중도 공을 보라는 것이겠다.
불가득 무소유의 실천
공은 유무 생사 등 양단의 어느 것에도 집착할 수 없는 중도의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공의 실천적 덕목은 공한 제법諸法, 즉 공한 내외의 모든 존재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즉 집착을 벗는 것이다.
그래서 불가득不可得 무소득無所得은 공 사상을 실천하고 지향하는 목표가 된다.
때문에 우리는 유마경의 “모든 법의 구경은 무소유이니 이것이 공의 대의大義다
(諸法究竟無所有 是空義)”라는 언명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공은 무소유고, 무소유는 곧 공이다”
이것이 불법佛法 실천의 목표이고 동시에 결론이다.
<附 記>
오온五蘊 Panca Khandha (五蘊皆空)
色rupa-육체(물질적인 것)
受vedana-감수 작용. 의식속에 어떤 상을 수용.
想sam na-마음 속에 일종의 관념을 형성함.
行samskara-마음의 능동적 작용.
識vjnana-의식, 마음의 작용.
色외에 위 4가지는 정신 작용을 말함.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2019. 5. 25. 송재운(동국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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