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욱 연구원 강의록. 2020. 10월 27일>
송재운(동국대 명예교수)
-차 례 -
1. 백성욱 박사의 불교 수행
- 득도와 출가-그리고 독일 박사
- 불교중앙학림 교수
- 금강산 수도
2. 백성욱 박사의 해인삼매
- 해인삼매
- 백 박사의 가르침(法門)
- 광복 후의 회향
3. 화엄경과 해인삼매
- 화엄경
- 일체유심조
- 비로자나불
- 삼종의 화엄경
- 해인삼매
- 해인삼매 세력
- 海 印 三 昧
1. 백성욱 박사의 불교수행
득도와 출가-그리고 독일 박사
백성욱(1897-1981) 박사는 1950년 6.25가 나던 해 내무장관을 지내고,
53년부터 62년까지 만 8년간 동국대학교 2-3대 총장을 엮임한
정치가요 교육자지만 본래는 승려로서 불교 수행자였다.
그는 서울 연지동에서 태어나 6세 때 당시 사립 초등학교인 호동壺東학교를 나오고
7세 때부터 글방(書塾)에서 12세때까지 6년간 한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1910년 13세가 되던 해 7월에
서울 정릉의 봉국사奉國寺에서 최하옹崔荷翁 선사를 은사로 득도得度한다. 승려가 된 것이다.
이렇게 출가한 백성욱 박사는
다음해 부터 해인사 통도사 범어사 등 전국사찰의 유명 강원을 무려 6년이상 돌면서 경전 공부에 몰두한다.
초등학교를 나온 뒤 먼저 한학(한문과 유학)을 익히고 다음 불문에 귀의하여 불학佛學을 배운 것이다.
백성욱 박사는 이러한 과정을 거친 뒤 당시 전문대학 과정인 서울 불교중앙학림(동국대 전신)에서
불교학을 전공하고 22세 때인 1919년에 졸업,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상해 임시정부로 간다.
그리고 연이어 프랑스 보배고등학교를 거쳐 독일 뷔르츠부르크 대학에서 28세가 되는 1925년 10월
논문 <불교순전철학>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는다.
학위 논문 불교순전철학은 당시 우리나라 불교 전문 잡지인 <佛敎>지 제7호에서 14호까지 연재하여 국내에선 처음으로 발표 되었다.
佛敎中央學林 교수
백성욱 박사가 독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것은 박사 학위를 받은 그해 이다.
그리고 백성욱 박사는 독일 유학 기간과 귀국 전후를 통하여
논문 수필 등 60여편의 글을 <佛敎>지와 동아일보 등 신문에도 발표한다.
몇 가지만 추리면 다음과 같다.
大小入一理
- 근대 불교운동에 대하여
- 인도의 동물 숭배와 半島佛敎
- 백림 불교원 방문기
- 現 네팔에는 무엇이 있나
- 석가여래와 그 후계자
- 나의 신앙과 느낌
- 내가 본 상해 현황과 느낌
- 現代佛敎를 건설 하려면
- 곤륜산崑崙山 절정에는 무엇이 있나
- 美의 差別
- 어떻게 보아야 美를 잘 보나
- 사람이 보는 美는 宇宙의 共通이 아님
- 나는 님의 살림
- 가난을 중심으로 한 內外面
- 佛陀之化身인 타치 라마喇嘛(달라이라마)
- 어느 날 강가에서
- 아우 찾는 少女
- 人中 自然의 발로
- 기다림
- 뜻 맞는 사랑
- 波上舟
- 오늘 나의 노래
논단 수필류를 중심으로 위와 같이 몇 편 골라 보았다.
승려로 출발한 20대 후반의 불교 철학자가 1920 년대에 가졌던 관심사가 대개 어떤 것이었나 하는 점을 유추해 보기 위함이다.
백성욱 박사는 귀국 다음해인 1926년 29세에 드디어 모교인 불교 중앙학림의 교수로 부임한다.
졸업 후 불과 7년 만이다. 당시 중앙학림 교수에는 백 박사를 가르쳤던 은사도 있었다.
다음에 얘기 할 포광包光 김영수金映遂(1884-1967) 선생이 대표적이다.
포광 선생에 따르면 중앙학림에서 백 박사는 철학을 강의 했다고 한다.
금강산 수도
백성욱 박사는 중앙학림 교수 2년 만인 1928년 9월 교수직을 사임한다.
그리고선 <10년 후 다시 自然景을 찾아서>(佛敎 지 48, 49호)란 글을 남기고 금강산金剛山으로 들어 간다.
출가 후 몸에 배었던 산사의 만행萬行이 그리웠기 때문일까.
아니 보다 더 철저한 성불의 길을 걷기 위함이었다.
이 때가 백 박사의 나이 31세로 안양암安養庵에 들어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일곱자를 한 구절로하여 실상염불實相念佛에 단신 몰입한다.
실상염불이란 화엄경의 법신불과 계합契合코져 하는 염불로서 ‘대방광불화엄경’ 을 끊임없이 소리내어 암송하는 염불이다. 이 화엄 염불의 구경究竟은 화엄삼매 곧 ‘해인삼매海印三昧’에 있다.
백성욱 박사의 이러한 화엄경 염불은 독특 하였다. 그래서 당시 불자들의 관심을 크게 사 안양암으로 많은 수행 신도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백 박사를 따라 수행을 같이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일때문에 백 박사는 3년 만에 안양암에서 지장암地藏庵으로 수도량을 옮긴다. 그리고 여럿이 같이 하는 회중會中 수도에 다시 들어간다..
지장암에서의 이 회중 수도는 무려 7년에 달했다. 안양암 시절과 합치면 10년의 세월이다.
2. 백성욱 박사의 해인삼매
해인삼매
금강산에서의 ‘대방광불화엄경’ 10년-. 백성욱 박사의 이 10년 수도의 불과佛果는 과연 무엇이엇을까?
백 박사와 1917-18년 사이 불교중앙학림 사제 관계였고, 그로부터 10년 후 백 박사가 중앙학림 교수였을 때는 동료 교수이기도 했던 포광 김영수(전술) 선생의 회고담을 통해 백 박사의 그 불과를 알아본다.
먼저 잠깐 포광 선생에 대한 소개를 한다.
선생은 1884년 경남 함양군 마천면에서 출생, 1906년 출가 입산하여 1923년 40세까지 사찰의 주지(법주사 법화사), 강원의 강주 등을 엮임하고 그후 대학의 교수로 진출하여 강의와 연구 생활을 종신토록 했다. 전통 사찰 강원의 강주에서 대학 강단을 개척하고 불교 사학의 지평을 연 분이다.
특히 불교학에도 뛰어난 지식과 조예가 깊었다.
동국대 전신인 불교중앙학림 혜화전문 동국대 교수를 지내고 전북대와 원광대 교수를 역임했다.
3.1운동 당시는 한국불교 청년 대표로 상해 임시 정부에 참여 했으나 병고로 인해 귀국한 바도 있다.
작고 1년 전 1966년에는 동국대에서 불교학술 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그의 논문 ‘5교 양종에 대하여’와 ‘한국 선종에 대하여’는 수작秀作으로 꼽힌다.
1984년 원광대에서는 제자들이 그의 논문, 역서를 묶어 <한국불교사상논고>를 내기도 했다.
이처럼 백성욱 박사와 깊은 인연이 있고 한국 불교학계의 거두였던 포광 김영수 선생은 1960년 간행(동국대학교 刊)의 <백성욱 박사 송수기념 불교학 논문집>에 게재한 논문 <화엄사상의 연구>에서 서두에 백성욱 박사와 자신의 학연學緣을 설명하고 , 백 박사의 ‘10년 금강산 수도’ 정진 결과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백 박사는 어떠한 각오하에서 그랬던지 세상만사를 다 집어치우고 깊이 금강산으 로 들어가서 일좌부동一座不動하고 10년이란 세월이 흘러 가는 동안에 ‘대방광불 화엄경’ 7자 경명을 섭심攝心 대상으로 정하여 천성 만성 억만성을 부르면서 전 념근행을 하였던 것이다. 흡사 정토종 수행자가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정근하는 것과 같았다.
이와같은 ‘대방광불화엄경’ 전념 수행의 결과로서 백 박사는 어느 날 하루 천지 삼 라만상이 소소역역昭昭歷歷(밝고 뚜렷함)하게 환연奐然(빛남)히 나타나는 해인삼매海印三昧의 부사의不思議 해탈경계解脫境界를 증득하였던 것이다.
이와같은 경계에 도달한 백 박사는 그 옛날의 백 박사가 아니라 천양지판 天壤之判 으로 달라진 백 박사이다. 신상身上은 예와 다름 없을지 몰라도 정신은 대각大覺의 세계에 들었던 것이다.(위 책 pp3-5)
포광 선생의 위 언명은 백성욱 박사가 10년 동안의 ‘대방광불화엄경’ 염불로 화엄의 ‘해인삼매’에 들어 부사의한 해탈경계를 이루고 불지佛智에 들었다는 의미다.
그리고 또 포광 선생은 논문의 말미 결론 부분에서 백 박사가 ‘대방광불화엄경’을 천념千念 만념萬念 무량념無量念 무량성無量聲으로 정근한 것은 대오大悟 대각大覺을 이루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만일 백 박사가 이를 성취하지 못했으면 금강산에서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면서, 그 결과 백성욱 박사는 필경 변성정각便成正覺의 경계에 있다고 하였다.
이상과 같은 포광 선생의 백성욱 박사 금강산 수도에 대한 평가와 찬탄에 따르면, 백성욱 박사는 1928년 금강산 입산이래 10년 동안 ‘대방광불화엄경’ 정진으로 성불成佛의 경지境地 대각大覺을 이룬 것이다.
이 때가 1938년의 일이니 백성욱 박사의 나이 41세이다.
봉국사에서 득도한 이래 28년만이다.
백성욱 박사는 원만하고 위엄을 갖춘 덕상의 얼굴에 이마 양미간에는 둥글고 적당한 크기의 예쁘게 생긴 백호白毫가 돋아나 있었다(20대 독일 유학 시절의 백 박사 사진을 보면 이때에는 이마 양미간에 백호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성년 이후 그의 얼굴 모습은 흡사 살아 있는 부처를 보는 것과 같았다.
더욱이 금강산 ‘해인삼매’ 이후에는 신광身光까지 발하여 불자佛子들은 백성욱 박사를 보고 ‘생불’이라 칭하기도 했다.
절에서 새벽 예불을 올릴 때 종성鐘聲에 맞추어 부르는 염불송念佛頌이 있다.
아미타불재하방 阿彌陀佛在何方
착득심두절막망 着得心頭切莫忘
염도염궁무념처 念到念窮無念處
육문상방자금광 六門常放紫金光
아미타불 어디 계신가
마음을 꼭 붙잡아 매어 절대 잊지 않고
이르고 또 이르러 무념처에 다달으면
육문에서 붉은 금 빛 항상 빛나리
이 염불송에서 六門常放은 곧 身光을 말한다. 한번 풀어 보자.
서방정토 아미타불 어디 계신가!
이내 마음 그 아미타불께 꽁꽁 묶어매어 잊지 않고
그 마음 이르고 또 이르러 무념처에 다달아 거기 머물면
내 몸에서 붉은 금빛 무궁토록 빛나리라!
여섯 개의 문 즉 六門은 전후 좌우 상하를 뜻하기도 하지만, 이 염불송에서는 눈 귀 코 혀 몸 의식(眼 耳 鼻 舌 身 意)의 육근六根을 말한다.
이 육근은 바로 우리 인간의 몸과 마음이다. 우리 인간에게서 눈 귀 코 혀 네개의 감각 및 생리기관과 그리고 몸둥아리, 사물을 인식하는 의식 모두 이 여섯 가지를 빼고나면 무엇이 남는가? 아무 것도 없는 공空일 뿐이다. 그러므로 六根은 바로 ‘사람’ 그 자체이지 다른 게 아니다. 육문(육근)은 생명체로서의 몸(身)이다.
따라서 위 게송 ‘六門常放紫金光’은 ‘몸에서 언제나 항상 붉은 금빛을 발한다’는 뜻이다.
예나 지금이나 염불에서 제일 많이 찾는 부처님은 ‘아미타불’ 이다. 또 보살로는 ‘관세음보살’이다. 그래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은 가히 불교의 대명사처럼 되어있다. 그런데 ‘아미타불’을 찾는 이 새벽 예불송은 우리들에게 좋은 염불법을 가르치고 있다.
그 내용은 염불에서 그 염불의 대상에 오로지 한 마음을 묶어매어(着得心頭) 일체의 망상 분별심이 사라지고 그 대상과 내가 하나로 계합契合(아미타불이 염불 대상이라면 그 아미타불이 나와 일체가 되는 삼매-無念處)할 때까지 念到念窮(일념정진)하라는 것이다. 이와같이 할 때 그 과보果報는 육문상방의 금빛 身光으로 나타난다.
백성욱 박사의 금강산 10년 화엄성진도 실상實相인 비로자나 법신에 오로지 着得心頭하고 念到念窮하여 海印三昧를 이루었던 것이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백성욱 박사의 그 법력法力을 우러르고 육문상방의 身光을 경이驚異로 보아 생불이라 일컫기도 했던 것이다.
백 박사의 가르침(法門)
위와같은 호칭을 듣던 도인道人 백성욱 박사는 금강산 지장암에서의 오도悟道 후 어떠한 가르침을 제자들과 산방 대중들에게 남겼는가? 이것 또한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백 박사 자신이 당시의 일들을 기록으로 남긴바 없고, 그 제자들마져
지금은 다 세상을 떠난지 오래 되어 금강산에서의 가르침을 찾아 보기가 막막하지만, 딱 한분 제자 김기룡金起龍 선생이 1960년 백성욱 박사 송수기념(회갑기념)으로 ‘백성욱 박사 송수기념사업회’에서 편찬 간행한 <白性郁 博士文集(제1집 동국대학교 간)>에 ‘內金剛 地藏庵과 白性郁 博士’란 글을 남겨 지장암에서의 백 박사 행적과 법문 등 여러 가지 면모를 찾아볼 수 있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이 문집에는 백성욱 박사의 독일 박사학위 논문 ‘佛敎純全哲學’과 각종 논설 수상 서간문 등이 다수 수록 되어 있는데, 김기룡 선생의 지장암 글은 맨 말미에 부록으로 실려있다.
이 글에 따르면 김기룡 선생 자신은 1930년대 초 금강산을 찾았다가 내금강 지장암에 훌륭한 도인이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 뵈니 그 분이 바로 백성욱 박사였다고 한다. 그래 바로 그 자리에서 제자가 되어 ‘대방광불화엄경’ 독송을 선생님 따라 열심히 하면서 탐貪 진嗔 치痴 삼독을 녹이고, 예불 참선 울력(청소, 농사 일 등 사찰에서 단체로 행하는 각종 작업)을 하면서 수행정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금강산에서 나와서도 김기룡 선생은 평생 백성욱 박사를 스승으로 모시면서 살았다. 이와같은 김기룡 선생의 글을 통해 지장암에서의 백성욱 박사 수도정진의 일면과 가르침(法門)을 간략히 살펴 본다.
백성욱 박사는 28년 금강산 입산이래 지장암에서의 수도를 마칠 때까지 산을 떠난 일이 없다. 30년대 중반 못미쳐 서울 불교중앙전수학교(동국대 전신)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하고 학생 대표를 백 박사에게 보내 학교 발전을 위해서 교장을 맡아달라고 간청했으나 거절했고, 심지어는 어릴적 조실 부모한 백 박사 자신을 돌봐 길러준 외조모가 세상을 떠났을 때도 외가에 가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백 박사의 명성을 듣고 사람들이 찾아와 당시 사회적으로 상당한 직을 맡아달라고 요청하는 일도 적지 않았으나 모두 사양했다.
그야말로 불퇴전의 용맹정진이었다.
백성욱 박사의 매일 산중 하루 일과 역시 새벽 4시 예불로부터 시작하여 밤 9시 취침때까지 쉴틈이 없었다. 네시 예불이 끝나면 제자 및 산내 대중들과 함께 세 시간 동안 큰 소리로 ‘대방광불화엄경’ 독송 정근을 하고, 아침 공양을 끝낸다. 그리곤 다음 사시巳時 마자摩旨, 참선 울력 법문 저녁 예불 등 잠시도 한가롭게 놀거나 휴식하는 일이 없었다.
청나라 3대 황제 세조世祖 순치제順治帝는
중원을 평정하고 황위를 양위한 뒤 오대산에 입산 하면서 이런 시를 남겼다.
我本西方一衲子 아본서방일납자
緣何流落帝王家 연하유락제왕가
百年三萬六千日 백년삼만육천일
不如僧家半日閒 불여승가반일한
나는 본시 서방(인도)의 한 중이었는데
무슨 인연인지 제왕가에 떨어졌다
백년 삼만육천일이라도
승가 절간의 반나절 한가로움만 같지 못하네-
순치제의 이 시는 속세의 백년 삶이 산사의 반나절 생활만도 못하다는 입산의 변으로 매우 감동적이지만,
그러나 우리가 절에 가서 며칠 묵어 보면 산사의 하루가 그렇게 한가롭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백성욱 박사의 지장암 생활도 위에서 살펴본 대로 하루 일정이 빈틈이 없었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백성욱 박사는 언제나 한복으로 정장하고 그 위에 법복을 입었으며 앉을 때는 절대로 어디 기대지 않고 종일이라도 정좌 했다. 그리고 백 박사는 제자들에게 “몸이 단정해야 마음도 단정하고 바르게 된다”고 가르쳤다.
다음은 가르침이다(제자와 산내 대중들에게 설한 법문이다).
<부처님의 공덕>
석가여래 부처님은 설산 고행을 하신 6년만에 그 아래 부근 목장에서 소녀가 올리는 우유를 받아 잡수시고
몸을 양養 하시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대진리를 각득覺得 하셨다.
지구상의 인류가 발생한 이후 지금까지 부처님 보다 더 많은 복을 가지신 분은 없었을 것이요,
부처님 외는 미래에도 없을 것이다.
무량대복을 가지신 부처님을 정성을 다해 시봉하고 공경하면 누구나 소원을 성취하고 복을 누린다는 것이
이론상으로도 긍정할 수 있다. 부처님은 한 없이 자비하시고 복덕은 무량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일심으로 부처님 시봉 잘해야한다.
<일체유심조와 견물생심>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와 견물생심見物生心은 어떻게 다른가?
견물생심이란 육체가 주인이 되어 그 한 마음이 심부름을 하는 것이고,
일체유심조란 그 한 마음이 주인이 되어 결과를 초래함이니,
그러면 나쁜 일을 할 필요도 없고 나쁜 일이 되어지지도 않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일체유심조 이기도 하지만 인습에 의하여 미래가 결정 되나니
일분일초를 헛되이하여 허가虛假한 몸을 가지고 어찌 복福을 지을까 보냐!
<마음을 닦는 자세>
현재현재에 충실하면 미래미래는 완성되느니라.
한 마음을 닦는 자 윗목에서 호랑이가 사람을 뜯어 먹어도 참견하지 말아야 한다.
같은 물을 먹어도 양이 먹으면 젖이 되고 독사가 먹으면 독이 된다.
<대방광불화엄경>
‘대방광불화엄경’ 이 일곱자 경 이름, 호명 정근을 일심으로 열심히 하면
밖으로 제 인연을 끊고 그 한 마음 속에 받은바 법을 지켜 안으로 헐떡 거리는 불(火)을 끄나니
마음 속에 잠재하여 무명無明을 짓는 업장業障을 집어내며 마음에 낀 티끌까지도 씻어 낸다.
그리고 모든 재앙은 소멸하고 소원은 성취하느니라.
<몸과 마음을 부처님께 바처라>
‘내(我)’라는 놈은 언제든지 무엇이던 하나 붙잡아야지 그냥은 못 있는 법이다.
그러니 항상 부처님을 떠이고 간절히 생각할 때에만 한限하여 그 붙잡는 집착심이 없어진다.
때문에 중생은 부처님께 몸과 마음을 다 받쳐야 한다.
견물생심이라,
우리가 삼라만상을 대할 때에 ‘나’(아만-이기심)라는 놈이 부쩌부쩍 크나니
오직 한 푼을 벌어도 부처님 전에 복짓기 위하여,
무엇을 먹어도 오직 이몸으로 부처님을 봉양하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부처님께 바쳐라.
<원수怨讐를 짓지 말라>
다른 사람과 원수를 짓지 말라. 원수란 다른 사람과 서로 원한을 맺어 적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진심嗔心을 못 이기는데서 생겨나기 십상이다.
진심이란 탐 진 치 삼독의 하나로 ‘성내고 화내는 마음’이다.
이런 진심이 사소한 다툼에도 남을 용서하지 못하고 원결을 맺어 결국 적으로 삼고 살게 된다.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그리고 성내는 마음은 남과 원수를 맺게 하는데 그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정신과 육체도 결딴낸다.
그러니 이런 성내는 마음, 즉 진심이 일어나면 즉시 부처님께 바쳐라.
그러면 진심은 소멸되고 부처님은 그대에게 자비를 베푸신다.
<몸이 바를 때 마음도 바르다>
우리의 마음은 몸를 바르게 가질 때에 올바르게 되는 법이다.
물이 방원方圓(모나거나 둥근)의 그릇에 따라 그 형태가 달라지는 이치와 같다.
그러므로 몸을 함부로 가질 때에는 마음 또한 망가지고 마는 것이다.
성정정일性靜情逸(심성이 고요하면 감정이 편안함)이요,
심동신피心動神疲(마음이 요동치면 정신이 피로함)니라.
<백성욱 박사의 기도 발원문>
부처님 전에 마음을 닦는 자 서원이 있으니,
이 서원은 현재의 수행 정도를 점검하며 미래의 성불을 기약하는 것으로써
백성욱 박사의 회상會上에서는
백 박사가 손수 창안하여 지은 다음과 같은 발원문을 법회 또는 기도 전후 꼭 봉송奉訟 하였다.
-발원문-
1. 화엄주임華嚴主任 시봉侍奉 잘하겠습니다.
부처님 전에 복 많이 짓기를 발원.
2. 제도하시는 당래當來 미륵존여래불彌勒尊如來佛 공경을 밝은 날 같이 하기를 발원.
3. 천상천하 세계중생世界衆生이 다 서로 싸워서 죄짓지 말고,
그 바라는 한 마 음을 부처님전에 환희심 내서 복 많이 짓고,
밝은 날과 같이 시봉 다 잘하 기를 제도발원濟度發願.
이상의 백성욱 박사 법문들은
전술한 김기룡 선생의 글 <내금강 지장암과 백성욱 박사>에서 간추려 본 것이다.
광복 후의 회향
백성욱 박사는 해인삼매 오도悟道 후 1년,
그러니까 42세가 되던 1939년 금강산에서 하산한다.
자신이 이룬 ‘부처님 공덕’을 사회와 중생에게 회향回向하기 위해서다.
금강산은 통칭 “금강산 1만 2천봉 8만 9암자”라고 하듯이
신라新羅 이래 지금까지 한민족의 성산이며 동시에 ‘한국불교의 성지聖地’ 이다.
맨 꼭대기 제일 높은 주봉은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을 상징하여 비로봉이라 이름하고,
외금강의 주봉은 세존봉이며 연다라 석가봉 세지봉 법기봉 등으로 이어지니 일만 이천봉 모두와 기암괴석,
우거진 나무와 숲이 불보살의 화신 아닌 게 없다. 그대로 장엄한 연화장 세계다.
그래서 이 ‘금강법계’에는 사시장천 불광佛光이 충만하며 법음法音이 울려 퍼진다.
고인古人들이 산 이름을 불교 금강경金剛經의 ‘金剛’을 따서 붙인 까닭도 바로 이러한 연유,
즉 금강산이 ‘여래如來의 장엄세계’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일까!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은 1924년의 ‘금강산 순례기’에서 금강산은 ‘배례拜禮의 성산聖山’이라 쓰고 있다.
금강산을 단순한 자연미로만 볼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경배의 대상으로도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옳은 말이다. 수많은 불보살이 상주하며 법음을 내니 육당의 이런 말은 당연하고도 남는다.
백성욱 박사는 이 장엄한 연화장 세계 금강산에서 법신불을 만나고 이제 다시 사바로 돌아 온 것이다.
대승의 원행願行은 자리이타自利利他에 있다.
산사의 수행이 자리라면 이타는 스스로 증득한 불보살의 공덕을 중생에게 돌려 주어
그들에게 이익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회향이다.
백성욱 박사는 서울 돈암동 자택으로 온다.
그는 사랑하는 여인도, 세상의 명예도, 재물도, 가정도 다 없이 오로지 혈혈단신孑孑單身의 독신 수도인이었다.
백성욱 박사는 돈암동 집에서 1945년 나라가 해방 될 때까지 무려 6년간 참선 수도로 일관,
스스로 고행의 길을 걸었다.
생각컨대 이 6년은 백 박사에게 있어 이미 깨달은 바 청정자성淸淨自性을 더욱 갈고 닦는 보임保任(保護任持)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또한 언젠가 세상을 위해 보살행을 실천할 때를 기다렸다.
그래서였을까! 백성욱 박사는 광복 이듬 해인 1946년부터 49년까지 이승만 박사와 건국 운동을 같이 한다. 1919년 3.1운동 이후 상해 임시정부에서 친분을 두터이 했던 이승만 박사는 백성욱 박사를 무척이나 사랑하고 신임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6.25전란이 나던 해인 50년 2월에 백성욱 박사를 내무부 장관에 앉혔고,
1953년 8월 백 박사가 동국대학교 총장에 취임하여 중구 필동 일제 때 일본 정토진종 서본원사 자리인
남산자락에 동국대학교를 지을 때도 보이지 않게 음으로 양으로 많이 보살펴 주었다.
벡성욱 박사에 대한 이승만 대통령의 깊은 배려가 아니었다면
당시 경무대(현 청와대) 대통령 관저와 빤히 마주 보고 있는 서울의 안산案山 남산 자락을 파헤치고
건평 1만평(50년대 당시로서는 어마 아마한 시설)이 넘는 거대한 대학건물과 각종 부대 시설을 만들 수 없었을 것이다.
남산 필동의 현 동국대 자리는 해방 후 46년 일본 서본원사 건물과 그 부지를 조계종단에서 46년 정부로부터 적산 불하 명목으로 마련, 동국대 터로 정했던 것이다.
46년 당시는 서본원사 사우, 그리고 경희궁 정전이었던 숭정전崇政殿(일제시 서본원사서 매입) 등 목조 기와지붕 등 7동 617평, 그리고 판자 건물 80여평이 대학 시설의 전부였다. 그마저 백성욱 박사가 53년 총장 취임 당시는 6.25 전쟁을 겪은 뒤라 황폐화된 불모지나 다름 없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백성욱 박사는 만8년간 동국대를 종합대학교로 건설하면서 내내 대학원에서는 불교학 분야의 특수과목을 개설, 강의 하였다.
그 강좌를 보면 조론肇論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 화엄경華嚴經 보장론寶藏論 팔식규구八識規矩 선문염송禪門拈頌 등이다.
이렇게 보면 백성욱 박사는 큰 선지식善知識이었다.
그래서 백 박사의 이런 강좌에는 대학원생 뿐만아니라 교 강사들도 상당수 청강 하였다고 한다.
도인이면서 대단한 석학이기도 하였다.
백성욱 박사가 동국대 총장을 퇴임 한 것은 5.16 후 1962년 이다.
53년부터 이때까지 백성욱 박사는 무에서 유를 창조,
동국대를 오늘 날 국제적인 명문대로 키울 단단한 터전을 만들고
더불어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은 재가불자들을 교화해 길러내니
나라 사람들은 백성욱 박사를 ‘시대의 활불活佛’이라 불렀다.
이 시대의 활불 백성욱 박사는 나라와 모교,
그리고 중생들을 위하여 철저한 이타행으로 금강산 悟道 이래의 후반생後半生을 참으로 멋지게 회향했다.
다음은 이런 ‘활불’이 불퇴전의 용맹정진으로 닦은 화엄경과 해인삼매에 대하여 알아 본다.
3. 화엄경과 해인삼매
화엄경華嚴經
일체유심조
華嚴經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Maha Vaiplya Buddha Ganda Sutra)의 약칭 이다.
그리고 통칭 화엄華嚴이라고도 한다.
석가모니불이 중인도 마가다국 적멸도량 보리수 아래서 정각正覺을 이룬 지 27일이 되던 때에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등각보살等覺菩薩들을 위시해 구름처럼 모여든 대중들을 위하여
당신의 깨달으신 내용(自內證) 그대로의 진리를 맨 처음 설한 경으로서,
대승불교의 가장 중요한 경전의 하나이다.
이 경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불佛이다.
대방광은 체體 상相 용用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불의 형용, 화엄은 불의 공덕으로서 빛나는 장엄이란 뜻이다.
大는 넓고 넓어 끝이 없다는 뜻(體大-본체)이고
方은 무비방정無非方正으로 바르지 않음이 없다(相大-형상)는 것이며
廣은 그 몸이 온 세계에 두루하여 충만하지 않음이 없다(用大-쓰임새)는 의미다.
經은 佛을 설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화엄경의 佛은 인도에서 역사적 삶을 영위한 석가모니불이 아니라
그(석가모니불)로 하여금 자내증(스스로 깨달아 앎)케 한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말한다.
비로자나는 Vairocana-광명변조光明遍照-즉 밝은 빛이 우주에 충만한다는 뜻으로
한자 毘盧遮那는 산스크리트 Vairocana를 음역音譯한 것이다.
영문으로는 Supreme Light-초대광명이라 쓰고 있다.
그러므로 비로자나불은 이 화엄경의 세주世主이다.
이 경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80 화엄)를 근본사상으로 하여 이 세계,
즉 온 우주를 하나의 참된 법계 곧 일진법계一眞法界라 하고
四法界(이법계 사법계 이사무애법계 사사무애법계)를 설한다.
불교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용어 중의 하나인 法界(Dharma-dhatu)는
우선 진리를 뜻 할때가 있고 다음은 우주 만유를 의미 할 때가 있다. 여기서의 법계는 주로 후자에 속한다.
그리고 화엄에서는 법계, 곧 온 우주의 삼라만상 모든 존재자들의 생성소멸을 법계연기法界緣起로 푼다.
불교 연기론에는 이 법계연기 외에도 업감業感 여래장如來藏 진여眞如 연기가 있다.
화엄에 의하면 법계의 모든 존재자들은 홀로 고기독존孤起獨存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상의상자相依相資, 즉 서로 의지하고 도우면서 사는 중중무진重重無盡의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자는 상즉상입相卽相入 하는 가운데 서로 장애됨이 없이 평등하게 살아 간다.
화엄에서 법계의 모든 개체는 서로 평등하고 자유롭다. 그래서 만유제법萬有諸法이 진리 아님이 없다.
의상義湘 대사 법성게法性偈의 ‘하나 가운데 전체가 있고(一中一切) 많은 가운데 하나가 있으며(多中一),
하나가 전체이고(一卽一切) 많은 것이 또한 하나(多卽一)이다’라는 언명은
중중무진 사사무애事事無碍의 화엄 법계연기의 의취義趣를 잘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경의 입법계품(40 화엄)은
불교를 신앙하는 사람들의 보살행은 어떠해야 하는 가를 가르치고 있는 것으로 유명 하다.
이 입법계품은 선재동자가 문수보살에 의해 보리심을 내고
53 선지식을 차례로 찾아 가며 도를 묻는 과정과
맨 끝으로는 보현보살에게서 부처님의 공덕을 성취하고자 하면 열가지 큰 행원을 닦아야함을 배우는 내용 이다. 여기서는 보현보살의 10대원 중 어느 하나를 행하더라도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계가 다하고 중생업이 다하고 중생의 번뇌가 다할 때까지 행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비로자나불
비로자나불은 법신불法身佛 보신불報身佛 화신불化身佛의 삼신불三身彿 가운데 법신불이다.
법신불은 우주 만유의 근본 실재實在(reality)로서의 이불理佛-진리 그 자체의 불이다.
보신은 인因을 따라 생겨난 부처. 오랜 수행 정진을 통하여 그 과보로 이루어진 불로서 아미타불 노사나불 약사여래불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리고 화신불은 중생을 교화하고 구제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화현한 역사적 인물로서의 부처, 곧 석가모니불이다.
그러나 이 法 報 化 三身佛은 하나이면서 셋(一體三身)이고,
셋이면서 하나(三身一體)인 원융무애의 관계다. 법신은 모든 부처의 근본체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지고무상의 광명정신, 영원불식의 빛, 무궁의 능원能源 등으로도 불리는 이 법신은
다양한 세계의 색상色相을 이룬다. 우주간 일체一切의 일체一切가 비로자나불의 보편한 화신이란 말이다.
부연하면 우주에 충만한 비로자나 법신의 광명은 하나이고,
이 하나의 빛이 비춤에 따라 만법(만물)이 다양하게 일어나고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상 화엄의 일체유심조, 일진법계와 비로자나 법신불, 그리고 우주 삼라만상이 현현顯現 하는 원리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화엄에서 하나의 마음 곧 일심一心으로 귀결 된다. 한 마음이 청정하면 그 가운데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 있고, 원만보신 노사나불이 있으며,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이 있다.
그리고 일진법계도 유일심唯一心의 세계다.
이처럼 한 마음 가운데 體 相 用이 분명하니 三身佛이 밖에 있는 게 아니고 바로 내안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화엄을 빌어 말하면 해인삼매海印三昧에서만 가능 한 일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정각正覺도 해인삼매, 그 것 밖의 것이 아니다.
그런데 해인삼매도 마음의 경지다. 그래서 마음이 곧 부처(心卽佛)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화엄경은 세주世主 비로자나불이 교설을 설하는 것이 아니라 보살들, 특히 문수- 보현보살이 주로 ‘비로자나불’을 설하고 있는 게 특징이다.
삼종의 화엄경
모두 일곱 군데(七處) 아홉 차례(九會)에 걸쳐 설해진 것으로 전하는 ‘80화엄’은 39품으로 게송만도 4만 5천 이상을 담고 있다. 우리가 방대하기 이를 데 없는 이 경을 대할 때 느낄 수 있는 것은 쓰여진 언어들이 지극히 시적이고 상징적일 뿐만 아니라 은유법隱喩法으로 일관되고 있다는 점이다.
화엄경의 한역漢譯
<60화엄> 7처 8회 34품
동진東晋 때 북인도 출신 불타발타(Buddhabhadra 359-429)가 421년 번역.
지방의 한 귀족의 후원으로 번역이 이루어 졌다. 진본晉本이라고도 하며 제일 먼저 한역 된 것이라 하여 구본舊本이라고도 한다.
<80화엄> 7처 9회 39품
당唐 측천무후則天武后(624-705) 후원으로 699년 실차난타實叉難陀(Siksananda 652-710)가 산스크리트 원본 80권을 번역한 것으로 ‘당화엄경唐華嚴經’ 이라고도 한다. 화엄종 교설은 주로 이 80화엄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40화엄>
당唐 반야삼장般若三藏(797년 생)이 번역한 40권.
다른 이름으로 ‘입부사의해탈경계보현행원품入不思議解脫境界普賢行願品’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60화엄, 80화엄의 입법계품에 해당하는 것이다.
海印三昧
해인삼매 세력
80권 화엄경 39 품 240만자의 방대한 내용을 한자로 총 770 자, 110 구로 축소시켜 놓은 그 유명한 용수보살龍樹菩薩 <화엄경약찬게華嚴經略纂偈> 앞 머리는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대방광불화엄경 大方廣佛華嚴經
용수보살약찬게 龍樹菩薩略纂偈
나무화장세계해 南無華藏世界海
비로자나진법신 毘盧遮那眞法身
현재설법노사나 現在說法盧舍那
석가모니제여래 釋迦牟尼諸如來
과거현재미래세 過去現在未來世
시방일체제대성 十方一切諸大聖
근본화엄전법륜 根本華嚴轉法輪
해인삼매세력고 海印三昧勢力故
이를 풀어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위 두 구절은 경 제목이고, 그 다음 나무화장세계 비로자나 법신불, 노사나 보신불, 백천억 화신 석가모니불 등 모든 여래와 과거 현재 미래의 3세(시간), 시방일체 즉 온 법계 우주(공간)를 통털어 모든 성인들이 근본 화엄의 법륜을 굴리는 것은 해인 삼매의 힘(勢力) 때문이다.
연화장세계의 법 보 화 삼신불과 제여래는 물론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와 온 법계 우주의 모든 성인들이 해인삼매의 힘에 의해 불법의 수레 바퀴를 굴린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모든 부처와 성인들은 이미 해인삼매에 들어 있다.
그런데 이 삼매는 정지해 있는 부동不動의 상태가 아니라,
능동인能動因으로서 부처와 보살의 무한 광명과 자비 공덕을 중생에게 베풀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용수보살은 이것을 海印三昧勢力故라 한 것이다. 故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부처님께서 화엄경을 설하신 것도 이 해인삼매 경지에서의 일이다.
다음 해인과 삼매의 어의를 풀어 본다.
海印(Ocen seal)
우리나라 설화에서 해인은 용궁의 보물로 쓰이기도 했다. 합천 해인사의 창건 설화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런데 용궁의 해인은 사람이 원하는 것을 말로 하면 무엇이던 그 소원을 들어주는 신기한 보물이다.
산골에 살던 어느 가난한 농부가 개(犬)로 변신해 온 용궁의 공주를 잘 길러 주어 그 공덕으로 용왕에게 가서 해인을 선물로 받아와 해인사를 지었다는 설화가 그 것이다.
해인은 바다에 찍히는 도장과 같다는 의미로 삼매를 형용하는 말이다
해인이란 바다 물이 고요하게 잠잠 할 때 온 우주 삼라 만상이 그 속에 오롯이 비춰 보인다는 뜻이다.
이와같이 수행자의 마음이 참다운 삼매에 들면
무한한 시간,
무한한 공간 가운데 있는 일체의 모든 것이
의식 속에 마치 도장을 찍는 것처럼 인현印現 된다.
부연하면 부처님 큰 깨우침의 바다에 나타난 일체의 법, 즉 모든 것을 통털어 말하는 것이 海印이다.
그러므로 해인삼매는 시간 공간을 초월한 속에서 전술한 대로 언제나 능동적 세력을 나타내고 있음으로
화엄경은 시공을 초월한 영원한 진리로서의 항상법문恒常法門이라 말해진다.
三昧(Samadhi)
삼매三昧는 잘 아는대로 산스크리트 Samadhi의 음역이다.
한자 의역意譯으로는 정定, 정려靜慮, 정의定意, 정심행처正心行處 사유수思惟修라 쓰고 있으며 보다 구체적 설명으로는 심일경성心一境性 등지等持라 한다.
정定은 마음을 한 곳에 집중시켜 움직이지 않게 한다는 뜻이고,
정려靜慮는 고요히 마음을 가라앉혀 깊은 명상에 잠긴다는 의미다.
그러나 이 두가지는 서로 말은 달라도 마음 수행으로서의 지향하는 바는 같다.
心一境性은 마음이 한 경지(佛 中道實相 話頭 등)에 머물러서 분별망상과 잡념을 여읜 상태를 말한다.
바꾸어 말하면 일체의 모든 잡념을 모두 없앤 定이다.
이것이 곧 멸진정滅盡定 이다.
등지等持는 도거掉擧(산란한 마음)와 혼침昏沈(마음의 혼미)에서 멀리 벗어나 평등한 마음을 유지하며
하나의 경계에 집중하는 것이다.
좀더 풀어 말하면 등等은 도거와 혼침 두 가지 병통에서 벗어나 평등하고 고요한 마음의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고, 지持는 마음이 오로지 하나의 경계에 머물러 집중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삼매에는 구체적으로 관찰하고 극복해야 할 대상이 있다. 그것을 삼매경三昧境이라 한다.
眼 耳 鼻 舌 身 意 六根과 이에 대응하는 色 聲 香 味 觸 法 六境은 내적인 삼매경이고,
行 住 座 坐 語 黙 動 靜은 외적인 삼매경이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이 삼매경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것(대상-결과)을 잘 관찰해야 한다.
이 삼매경을 잘 살펴 행하는 수행 방법이 위에 든 등지요 일심경성 이다.
원효元曉(617-686)는 ‘금강삼매경론’에서 삼매는 ‘바르게 생각하는 것(正思)’이라 하고 定에 들었을 때 이와 같은 삼매경(所緣境)을 깊이 살피고 바르게 생각하며 통찰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삼매에는 혼침昏沈이 있어서는 안된다.
원효는 이처럼 바르게 생각하고 통찰하는 것을 사찰思察이라 했다.
또한 사찰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거짓과 올바름이 무엇인지를 통찰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대상에 대해 자세히 올바르고 명료하게 깨닫는 것이다. 이러한 사찰은 곧 선정禪定의 작용이기도 하다.
이와같은 원효의 사찰론에 따르면 선정삼매는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멍하게 앉아 있는 게 절대로 아니다. 항상 마음이 성성惺惺하게 깨어 있는 가운데 定이 진행 되어야 한다. 따라서 덮어 놓고 무아無我 망아忘我를 삼매처럼 말한다면 그 것은 큰 오류가 아닐 수 없다.
마음이 항상 깨어 있는 가운데서 아我와 물物이 혼연하게 하나를 이룰 때가 삼매의 하나가 아니겠는가.
삼매는 불교에서 모든 죄업을 녹이고 해탈에 이르는 가장 빠른 길이다.
그리고 또한 법계의 참된 진리와 진면목을 깨달아 불지佛智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므로 언설로 삼매를 다 풀어 낼 수는 없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말한 삼매에 대한 설명도 그저 방편에 불과한 것이라 하겠다.
굳이 한마디 더 붙인다면 삼매는 우리의 주관과 그 대상인 객관이 원효에서처럼 올바른 思察 위에서 일체一體가 되고, 마침내는 그 일체된 마음까지도 잊는 무념無念 무상無相의 중도中道가 아닌가! 이렇게 결론 짓고 싶다.
오늘 이 발표는 백성욱 박사의 ‘해인삼매’를 주제로 하였습니다.
백성욱 박사가 금강산 10년 화엄정진에서 성취한 ‘해인삼매’를 밝히는 것이 목적이었는데-그러다 보니 화엄경이나 삼매에 대해서도 설명을 곁들이지 않을 수 없어 말이 길어졌습니다. 이 점과 내용상 부족한 점이 있더라도 많은 양해와 질정叱正을 바라면서 다음 법성게의 한 구절로 ‘백성욱 박사의 해인삼매’를 모두 마치려 합니다.
능인해인삼매중 能仁海印三昧中
번출여의부사의 繁出如意不思議
부처님(能仁)의 해인삼매 가운데서
부처님의 크신 법문 무궁하게 쏟아지니 참으로 불가사의 하도다!
<참고문헌>
白性郁 博士 頌壽記念, <佛敎學 論文集> 동국대학교, 1960.
<白性郁 博士 文集> 동국대학교, 1960.
方東美 <華嚴宗 哲學> 臺北 黎明文化出版公司, 民國 72.
張蔓濤 主編 <華嚴思想論集> 臺北 大乘文化出版公司. 民國 67.
한정섭 해설 <화엄경 약찬게> 서울 불교통신교육원. 2011.
(2020. 8.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