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한국 곳곳에 마을 대항 투석전(投石戰)이 있었다. 투석전에는 반대되는 마을 사람들은 죽일듯이 미워하고 돌을 무섭게 던졌다. 투석전에 사람이 심하게 다치면 싸우는 상대 동네인들은 더욱 중오심이 무서워졌다. 세월이 흘러 사람들이 각성하게 되자 마을 대항 투석전은 사라졌다. 그러나 악독한 한국 정치인들이 정권을 잡기 위해 자유민주화를 운위(云謂)하면서 영원히 치유하기 난망한 전라도, 경상도 지역 싸움을 교묘히 공작하였다.
5,18 광주사태 당시 나는 무위사(無爲寺: 전남 강진군 성전면 죽전리 소재) 주지였고, 서울 조계종 총무원 불교신문 편집국장을 겸하고 있었다. 당시 총무원에서는 나 외에 교무부장과 총무원 간부 1명 도합 3명이 첫째, 광주사태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서, 둘째, 무장봉기한 시민군이 무기를 자진 군경(軍警)에 바치고, 평화적 시위를 종용하게 하기 위헤 당시 육군본부와 사전 협의하고 총무원 검은 색 자동차로 광주로 갔다.
당시 전주 향토사단의 계엄군은 정읍시에서 장성으로 넘어가는 고속도로 터널부터 무장하여 엄중히 지키고 있었다. 우리는 당시 전주에 주둔하고 있는 향토사단본부에 가서 사단장을 만나고, 헌병 중위가 헌병차에 타고 선두에 서서 길안내를 하여 터널을 통과하였다. 정읍 쪽 터널입구에는 빈 군용트럭 두 대가 막고 있었다. 우리가 터널을 지나자 반대편 터널 쪽에는 경찰과 군인들이 무장하여 살벌하게 지키고 있었다. 장성 쪽 고속도로에는 전남 향토사단 병력이 계엄군이 되어 있었다.
우리는 또다른 헌병장교에 의해 당시 전남북 계엄사령부인 상무대로 안내되었다. 때마침 상무대는 사령관이 이취임식이 있었다. 전 사령관 윤흥정 중장과 신임 소준열(蘇俊烈) 소장이 사령관실에서 이취임식을 하면서 악수를 교환하고 있었다. 당시 최준장이 육본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고 나를 소장군에 인사를 시켰다. 소장군은 나에게 다가와 귀에 살짝이 자신의 부친이 화엄사주지였다고 귀뜸하며 손을 잡고 반가워하였다.
다음날 우리는 광주시내로 들어갔다. 광주시내는 간디 식 무저항 시위가 아니었다. 길 위에 버스가 불에 타고 있었다. 군용 지프차에는 청년들이 시민위원회라는 띠를 목과 가슴에 두르고 각기 개인화기를 들고 사납게 순찰돌듯 돌아다니고 있었다. 파출소를 찾으니 경찰은 피신하고 파출소는 온통 파괴되어 있었다.
도청 앞 경찰 상무관을 찾으니 그곳 강당에는 60여개의 관들이 놓였고, 관뚜겅에는 태극기가 덮혀 있었다. 관 옆에는 민초같아 보이는 여인들이 목을 놓아 울고 있었다. 상무관 강당에는 죽은 이들의 부패 냄새를 가리기 위해서인지 사찰에서 피우는 향연(香煙)이 여기저기 피워 오르고 있었다.
우리는 그 다음 광주 군통합병원을 방문했다. 그곳에는 시민군에 총을 맞은 군인과 경찰들이 침대에 누워 고통속에 울고 있었다. 어느 침상가에 내가 다가가니 중상의 총상을 입은 환자 하나가 엉엉 울면서 나에게 소리쳤다. “스님, 살려주세요.” 간호사의 성명인즉 계엄군 대위라는 것이다. 나는 고통속에 신음하는 군인들의 손을 일일이 잡아주며 진심으로 위로했다. 죽어가는 군인중에 불교신자는 “스님의 기도”를 부탁하였다. 나는 군통합병원을 나오면서 화두는 “누가, 왜? 시민들과 군경과 교전을 하게 했는가? 선동자는 누구인가?”의 의문이었다.
어느 광주시민들은 총을 발사하는 군경과 맞서 군경에 총을 발사하는 시민군에 양비론(兩非論)을 나에게 주장하기도 했다.
당시 시민군은 4시간 동안에 전남의 무기고 44군데의 무기를 강탈하여 무장하고 있었다. (이것은 지구촌에 전설적인 신속하고 조직적인 무기강탈이다)민주화를 외치는 시민군은 광주교됴소를 해방하기 위해 수차 습격했고, 그 때마다 계엄군이 결사적으로 막았다.
광주의 밤하늘에는 간간히 어디선가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당시 시내에는 군경이 시민군에 내쫓기거나 아니면 작전상 철수하여 시내는 시민군 세상이었다. 밤에는 늦도록 지프차에 젊은 여성이 가두방송을 하는데 들어보니 계엄군이 대검으로 임산부를 난자했다는 선동연설이었다.
따라서 연약한 임산부가 대검에 당하고 있는데, 광주시민들은 모두 봉기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당시 광주시민들은 대부분 집에서 두꺼운 이불을 온 몸에 두르고 숨어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나는 거리의 벽보를 읽어 보았다. 하얀 큰 종이 위에 검은 색 글씨와 빨강 글씨로 이렇게 씌여 있었다. “광주시민 여러분, 조금만 참으십시오. 미국 항공모함이 광주를 구원하기 위해 부산에 거의 도착했습니다.”
당시 광주 시민군의 총본부는 도청(道廳)이었다. 그곳에 시민군이 강탈한 온갖 무기들을 손보고 있었다. 그곳에는 늙수구레한 신부와 40대 중반의 승려가 물 만난 고기처럼 설치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 과거 여순반란을 연상하는 교전보다는 간디 식으로 저항하는 게 어떠하냐고 제의하자 그들은 사납게 나를 노려보았다. 승려는 무장봉기를 나쁘게 보지 말라는 공갈이었다. 그는 승복 배의 허리 띠에 권총을 꾭고 어께에는 칼빈총을 메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사회과학도라고 나에게 주장하고, 인민을 해방하는 빨치산 수령을 흉내내고 있었다. 나는 조계종 승려로써 그를 본 기억이 없었다.
나는 광주시내의 요소요소를 살펴보고 난 후 상무대 사령관이 되어있는 소장군을 다시 만났다.
소장군은 탄식하면서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광주의 무장봉기는 광주에서 끝나는 게 아닙니다. 무장대는 민주화를 위해 싸우는 척 하면서 대한민국을 장악하려 하는 것이지요. 그들 무장대는 첫째 대전을 거처 서울로 상경하려 하고, 둘째, 여수 순천을 거쳐 부산, 대구로 들불이 번지듯 시도하고 있습니다. 6,25 이후 가장 무섭고 큰 내전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계엄군이 아니면 그들을 막지 못합니다. 나는 훗날 역사의 심판을 받더라도 내일 오전 9시가 되면 그들의 진압작전에 나설 것입니다. 나는 월남전에서 시가전을 해봤습니다.”
소장군의 작전이 있기전날 밤, 광주 TV에서는 “야간에 차량 이동이 있는데 그것은 시민들에게 식수와 식량을 운반하는 것이니 오해하여 놀라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방송을 했다. 다음날, 계엄군은 시멘트로 만든 크고 둥근 하수관을 굴려 엄폐물로 하고 시내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전날 저녁 도청에 나가 신부와 승려에게 미국 항공모함은 구원의 기병대같이 오지 않는다고 말하고, 총기 자진 반납과 교전이 없기를 바라는 말로 간절히 설득했지만, 오히려 내게 위협을 가했다. 나는 소장군의 작전중에 대부분이 민초들인 도청 결사대가 계엄군과 교전허여 허무하게 죽을 것을 염려한 때문이었다.
도청안에 결사대의 면면을 보니 대부분이 민초들의 청년들이었다. 영양가 좋아 보이는 대학생, 고교생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들에게 미국 항공모함이 구원병으로 온다는 선동연설과 부산, 대구가 호응하고 대전, 서울이 호응한다는 선동도 모두 거짓이었다. 도대체 누가 조직적으로 민초들에게 민주화로 유토피아(낙원)이 오게 하기 위해서는 무장투쟁을 해야 한다고 선동한 것인가? 전라도에 수치 대한민국을 부정하여 무장봉기를 한 박헌영의 부하인 호남의 정치인 탓인가, 북의 공직인가?
소장군이 광주 시내로 진격하는 시간에 우리는 조계종 총무원 검은 색 자로 텅 빈 고속도로를 향해 서울로 달렸다. 소장군이 위험하니 떠나야 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이번에도 헌병장교는 다시 나타나 경례를 붙이고 “수고했습니다!” 우렁차게 인사를 했다.
광주사태가 끝난 그 후 소장군은 1982년 제1군사령관 등을 역임한 뒤 1983년 육군 대장으로 예편하였다. 그런데 그는 예편 한 후 웬지 혼자 아버지가 살았다는 화엄사의 산내 암자인 연기암의 밭 가운데 방 한칸의 작은 집을 짓고 은거하여 선승처럼 앉아서 죽었다는 후일담(後日譚)이 전해왔다. 나는 소장군을 애도하며 텅 빈 방을 찾았다.
5,18 광주사태는 YS 대통령이 한국 민주화의 항쟁이었고 5,18 묘역은 한국 민주화의 성지(聖地)같이 만들어 주었다. 5,18 때문에 가장 큰 덕을 본 정치인은 DJ와 추종자들이었다. 5,18을 팔아 대통령도 되고 대졸부(大猝富)가 되고 그 추종자들은 DJ를 팔아대며 정치텃받으로 전라도를 반들었다. 오죽하면 “전라 공화국”처럼 되어 DJ 추종자가 아니면 대선, 총선, 지자체 선거에서 승리할 수가 없는 지역이 되어 버렸다. 5,18이 DJ에게 무슨 홍복(洪福)을 내린 것이다.
나는 5,18이 YS덕에 민주항쟁이 된 후, 강진읍 장터에서 DJ와 수하인 김원기의 연설을 들었다. DJ와 김원기는 전남북 시,군, 읍 큰 면단위까지 순회연설을 하고 다녔다. 주제는 5,18 때 억울하고 불쌍하게 죽은 시체를 들먹이며 “누가 민주인사를 학살했는가”에 대해서 선동의 순회강연을 하고 다녔다.
연단 밑에 사물놀이패의 북장구소리가 높아지면서 김원기는 마이크를 통해 외쳤다. “전라도는 DJ 선생님 앞으로 단결해야 살 수 있습니다. 경상도 군인들이 5,18 때 광주사람 다 죽이려 했던 것을 아시지요?” 북장구 소리가 요란해졌다.
드디어 DJ는 등단하자 김원기 보다 한술 더 떠 경상도 군인들이라는 말을 빼고, “경상도 사람들이 우리 전라도 사람 다 죽이려 했습니다!” 북소리가 높아지고 늙은 민초들의 남녀가 울면서 DJ 발앞의 땅에 이마를 박고 살려주신 은혜에 감사했다. 작금에도 전라도 일부 아낙네들은 5,18의 광주사태를 보지도 않았으면서도 “경상도 사람들이 전라도 사람 다 죽이여 한 것을 DJ 선생이 막았다”고 떠들고 선거의 표를 찍고 있다.
나는 그들이 무고한 경상도 전체를 싸잡아 살인마로 몰아가는 것에 분노하여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그후 5,18은 천문학적 국가지원금이 쏟아지는 항금 알을 낳는 복거위가 되었고, 5,18과 전혀 무관한 DJ의 추종자들이 국가지원금을 받는 유공자로 둔갑했다. 사기꾼들이 유공자 행세를 했다. 문민정부 30년간 내내 5,18은 찬송되고 해마다 국고지원금은 그치지 않았다. 5,18은 전라도에 돈이 오게하는 신통력이 있다는 것을 무식한 사람들도 깨달았다.
경악할 일은, 자유민주를 수호한다는 尹대통령 당선인도 5,18 묘역에 거듭 머리를 박고, 5,18 정신을 헌법전문에 넣겠다고 공약했다. 대한민국을 수호하는 애국 보수파 국민들을 묘욕하는 행위라고 나는 분석한다. 尹 대통령 당선자는 자신을 대통령으로 선택해준 보수우익인사를 절대 망각헤서는 안되는 것이다.
19대 文대통령의 책무였나? 文대통령은 제주 4,3 반란사태, 여순반란 사건, 등 모든 반(反) 대한민국의 무장봉기를 민주화 항쟁으로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국고금은 조(兆)단위로 지원하였다. 文대통령은 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해 너무도 억울하게 죽은 군경은 비민주 학살배들로 몰아버린다는 항설(巷說)이다. 5,18 때 대한민국을 사수한 군경은 개주검이 되고 말았다.
따라서 文대통령과 추종 정당은 아직도 대한민국 정부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민주를 위해 일하는 친북, 종북을 하고 떠나고 있다. 대한민국을 조국으로 수호하여 목숨바치는 애국 보수는 분명 있는데 기이하게도 선거 때면 북-중-러를 추종하는 정당에 지지의 표를 던지는 한국인들은 부지기수이다. 선거의 투표로 대한민국을 망쳐오는 세력은 文대통령 때 더욱 기승을 부리는 것같았다. 문민정부 좌파 정권 때 총선, 대선, 지자채 선거에 부정선거를 해온다는 항설도 전해온다.
반공의 한국이 왜 이리 변했을까? 누구의 책임인가? 깊이 분석해보면, 정답이 나온다.
첫째, 한국인에게 자유민주라는 이데올로기를 주고 지원하면서 또, 용공주의자들을 보호하는 미국의 대한정책 탓이다. 근거가 첫째, 가터같은 종북 충성동이가 북에 3대에 걸챠 충성을 바쳐오고, 둘째, DJ를 감옥에서 빼내고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레이건 대통령, 그레그 주한미대사, 그레그 CIA지부장 같은 자(者)들이 DJ를 구출하고 한국을 북-중-러의 세상으로 만들어준 것이다.
둘째, 호구지책(糊口之策)과 감투쓰고 출세하여 부귀영하를 누리기 위해서는 강대국에 빌붙어야 한다는 일부 한국인들 근성 탓에 북-중-러에 추파와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바치는 것이다. 작금의 미국 백악관은 대오각성할 것을 맹촉한다.
6,25 한국전쟁을 일으키어 한국인 300만여 명을 억울하게 죽게한 북-중-러가 아닌가. 러시아의 총수 푸틴은 실성해서인지 평화로운 러시아에 전쟁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자신의 총첩과 자녀는 스위스에 숨겨놓고 러시아의 아들들을 동원하여 우크라이나 전쟁을 하는 것이다. 푸틴의 전쟁을 관망하면서 중공과 북은 제 한국전의 기회를 엿보고 있다고 분석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북-중-러가 한국에 간절히 바라는 비밀공작은 불행한 역사의 되풀이 처럼 과거와 같이 한국에서 무장봉기로 내란을 바란다고 분석하고 예측한다. 30년 동안 양성된 좌파들은 북-중의 세상을 한국에 열기위해 尹대통령 시절에 반란에 나선다는 항설은 진동하듯 하고 있다. 尹대통령 당선인은 민심의 통합, 협치를 주장하고 다니는 순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 좌파는 尹대통령에 돌격을 위해 대오(隊伍)와 전열(戰列)을 이미 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끝으로, 19대 文대통령은 한국 역사에 초유의 수상하기 짝이 없는 대통령이다. 첫째, 임기내내 북-중-러를 위해 충성하듯 하더니 반미, 반일을 해왔다. 둘째, 임기 1개월을 남기고 검수완박(檢搜完剝)을 다수당인 민주당에서 밀어붙여 70년 전통의 검찰수사권을 망치고 있다. 이것의 목적은 좌파 정치인들의 이적죄, 반역죄와 부정부패에 대한 수사를 원천봉쇄 하기 위해서이다. 셋째, 대한민국 건국 후 도처에서 일어난 반정부 좌파의 무장반란을 모두 민주항쟁으로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그리고 文대통령은 황금마차를 타고 양산 사저에 가서 태평하게 살겠다는 것이다. 이쯤되면 대한민국을 건국에 목숨바쳐 이바지한 군경(軍警)이 살아서나 죽어서나 봉기해야 하는 것 아닌가. “5,18 무장반란이 부산, 대구와 대전, 서울로 비화하면 절데 안됩니다! 대한민국은 끝장입니다!” 5,18 사태를 진압한 소장군과 계엄군은 대한민국을 사수한 애국자들이었다. 하지만 그 날의 소장군은 5,18을 잠재운 후 왜 가족과 떨어져 홀로 화엄사 연기암 텃밭에 집 한칸을 마련하여 고독하게 세상을 떠나야 했는가를 이 글을 읽어주는 독자제위는 화두 참구하듯 궁구해주었으면 한다. 어쩌면, 소장군은 장차 한국은 반미, 반일속에 부정선거로 국민을 기만하는 좌파 정치인들이 북-중-러의 세상이 오게 한다는 것을 분석하고 예측하여 슬퍼한 것은 아닐까. ◇
李法徹(이법철의 논단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