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이 중노릇은 안하고, 중이 잿밥에 눈이 어두워서야 말이나 되는가, 중이란 본래 도를 배워 깨우치는 자를 이르는 말이다. 예전의 출가 수행자(비구)는 한 벌의 바리때(밥을 담는 그릇) 외에는 그 무엇도 가지려 하지 않았다. 수행자들은 편안하고 아늑하며 사람냄새가 물신풍기는 그런 집에 집착하지 않으며, 호사스런 옷과 군침이 도는 음식에는 더더욱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이렇게 모든 걸 버리고, 다 놓고, 오로지 도, 도에만 매진했다. 스님의 부류 중, 수행자(비구)가 되었건, 나아가 땡중이 되었건, 도승이 되었건, 누구라 할 것 없이 업보가 만아서 살을 섞고, 피를 나눈 부모형제들을 뒤로하고 “비구”가 되기 위한 그 아픔은 어미뱃속에서 옷 한 벌 걸치지 않은 발가벗은 알몸뚱이로 밀려 나와 악을 쓰며 울었듯이 수행자들 또한 몸과 마음 인간사 세속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홀연히 절간 문을 들어설 때의 그 마음 본인 아니고서야 누구라 그 아픔을 짐작이나 하겠는가, 이렇게 수행자들은 스님의 경지에 오르기 전까지는 이 절, 저 절, 수많은 절을 옮겨 다니며, 궂은일 어려운 일 마다않고 그저 중이 되기 위한 도를 닦는 수행의 관문 수련인 으로서 참고 견뎌내며 수십 년의 기나긴 수련의 끝에 세속에서 말하는 도사, 스님이라는 경지에 오르게 된다. 우리는 男子 수행승을 다른 말로 “비구”라 하고, 女子 수행승을 “비구니”라 부른다. 산스크리트에서 “음”으로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거지乞士(걸사)”라 하며, 인도에서는 모든 수행자(비구)들은 전통적인 음식물을 탁발(동냥하는 일)에 의해 얻어먹기 때문에 위의 “거지걸사”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됐다. 그러나 일반 거지, 요즘 식으로 말해 노숙자(거지)와는 달리 수행자는 지향하는 바가 다르다. 그런데 이들 중들 또한 세월의 변화무상하매 물들어 [빨간 중] [파란 중] [누런 중] [붉으죽죽한 중] [썩어 문드러진 중] [하얀 중] 하여간 구구각색이다. “수행승(비구)”이 도를 닦아 스님이 되셨건, 염불을 외우다 말고 먼 산을 바라보며, 女人내의 하얀 속살 허벅지를 내심 그리며 소금배 열척을 밀어넣어도 돛도 않보이는 그곳에 빠져 허우적대다. 탱중이 되었건, 하여간 인간사 천태만상이라 했던가요. 개중에는 경전을 외우며 도를 닦아 뚜껑이 열린 중이 있기도 하지 많은 저렇게 중이 되기 위해“거지걸사” 들이 모여 사는 곳이 절간이다. 옛 이조시대 이전의 도의 경지에 오른 중, 또는 신선의 경지에 까지 오른 도사는 축지법과 장풍을 날리며, 둔갑술까지 쓰는 기상천외한 도술을 부렸다 한다. 그런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기가 아닌 21세기의 개방사회의 중, 좌파들이 말하는 진보중일 지라 해도 불교본연의 기본인 근본은 버려서는 안 돼는 법이다. 요즘 산중의 절간이나 도심 한가운데 절의 수행자들이 분수에 넘치는 부와 권력 그리고 좌경사상에 빠져 있는 이들 중 세속에서 말하는 땡중들이 심심치 않게 눈에 뜨인다. 지난 10년의 친북정권으로 인해 붉으죽죽해진 曹溪寺(조계사), 불교도의 성전 불교의 총본사인 그곳 曹溪寺의 이적성은 그 도를 넘고 있다. 조계사는 불법폭력 시위 “거짓 촛불”주동자들을 사찰 내에 보호하면서 조계사가 치외법권 지역인양 “어청수 경찰총장 물러가라!”이명박 대통령 OUT이라는 연등과 현수막을 내걸어 놓고, 불법난동 시위주동자를 처벌하지 말라는 엄포를 놓고 있다. 이는 불교도 정신에도 어긋나는 행동이다. 조계사 총무원장은 더 나아가 이들 “거짓 촛불” 불법시위 난동 자들을 애국자 인양 현 정부를 비아냥거리고 있다. “조계사는 중의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라!”세속을 떠나 도를 닦는 본연의 자세로 말입니다. 2000만 불교도 및 4800만 전 국민 앞에 무릎 꿇고 조계사는 사죄하고, 이후 자유대한민국건국을 부정하는 세력과의 관계는 여하한 일이 있어도 담을 쌓아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