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동안 폭로, 盧 정권 대북송금 특검수사 특사에 8억달러 자료도 건네.. [韓美-정상회담] ‘한.미 미래 공동비전’이 6.15·10.4 평양선언 무효화 시키다 (下.끝) (손충무 칼럼) 2000년 10월 20일 워싱턴에 도착했다. 3년만이었다. 서울 구치소 1년, 春川 감옥 1년, 그리고 감옥 가기 전 대통령 선거 때문에 1년 동안 미국에 오지를 못했다. 3년 만에 워싱턴에 도착해 친구들의 환영을 받으며 지나간 이야기와 함께 조지 부시 공화당 후보와 앨 고어 민주당 후보의 대통령 선거 이야기로 밤을 새웠다. 그리고 다음날 공화당 본부 조지 부시 캠프로 가서 다니엘 머피(ADMIRAL DANIEL J.MURPHY, USN) 제독을 만났다. 우린 오랜 기간 큰형과 아우로 많은 세월을 보낸 의형제 사이였다. 머피 제독은 4성 장군으로서 아버지 부시 대통령의 비서실장 4년, 부통령 비서실장 8년을 지냈다. 해군대장과 참모총장을 지냈으며 CIA 비서실장을 지낸 부시 집안의 주요 참모이다. 아버지 부시가 2차 세계대전 당시 해군 조종사 중위였을 때 머피는 해군 중장이었다. 부시가 대위로 예편 할 때쯤 머피는 대장이 되어 있었다. 부시가 해군을 떠나 텍사스에서 석유 광구를 개발해 재벌이 되고 상원의원을 거쳐 CIA 부장으로 임명됐을 때 머피 장군은 백악관 안보 보좌관(NSC) 수석이었다. 그때부시 CIA 부장이 자신을 도와 달라고 요청했다. 한국 같으면 해군 대장을 지낸 4성 장군 제독에게 해군 대위로 예편한 옛 부하가 찾아와 자신을 도와 달라고 했을 때 선뜻 응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라는 사회는 매우 합리적이다. 해군에 있을 때 같으면 하늘과 땅 차이일테지만 머피는 부시 CIA 부장의 비서실장 겸 CIA 차장으로 갔다. 그 시절 칼럼자는 박동선 회장의 주선으로 그를 만나게 되어 좋은 형제지간으로 지냈다. 머피는 올드 브라더(큰형) 이고 중간에 머피 장군의 측근인 주한 미국대사관 총영사인 앤드류 F. 앰티파스가 중간 형이고 내가 막내였다. 오랜만에 세 사람이 만났다. 머피 장군은 부시 선거를 지휘하고 있었으며 앰티파스는 국제 외교 문제를 맡고 있었다. 머피 장군은 칼럼자가 김대중에 의해 불법 구속 당해 있을 때 아버지 부시 前 대통령의 친서를 가지고 앰티파스와 함께 김대중을 만나러 서울까지 왔었다. 먼저 당시 김종필 총리를 만났다. 김종필씨가 전두환, 노태우에 의해 정치정화법에 묶여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못하던 불우한 시절이 있었다. 그때 JP의 오른 팔인 김용환 전 재무장관과 이상열 사장이 칼럼자를 JP에게 끌고가 저녁을 함께 했다. JP가 진심으로 도와주기를 간청했다. 그래서 워싱턴으로 돌아와 머피 부통령 비서실장에게 이야기 하여 부시 부통령이 제랄드 포드(Gerald R. Ford) 전 대통령이 회장으로 있는 AEI WORLD FORUM 에 초청 연설을 하도록 만들었다. AEI WORLD FORUM 은 현직 대통령이나 국무총리, 재무장관, 재벌 그룹 회장만이 참석 하는 세계 지도자 모임이었다. 이 자리에 정치정화법에 묶여 있는 JP를 전직 총리 자격으로 초청, 강연을 하도록 만듬으로써 JP의 위상은 올라갔고 서울의 전두환 정권은 당황했다. 그들은 막후에 칼럼자가 있었던 사실을 몰랐다. 그런 후 나는 시치미를 뚝 떼고 전두환, 김복동, 정호용에게 JP에게 정치활동을 하도록 미국이 바라고 있다고 전했다. 그래서 JP를 정쟁법에서 해제시켜 ‘신민주공화당’을 창당, 대통령 선거에 참여하도록 되었다. 김종필 총리는 머피 일행을 만나 “손충무 동지 사건은 나도 가슴이 아프다. 나 자신도 손 동지를 잘 알고 아끼는 사람이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이 고소를 했고ㅡ그 때문에 구속을 당해 있는데 DJ를 만나서 이야기 하면 석방할 것이다. 그러면 워싱턴으로 데리고 가라ㅡ그가 한국에 있으면 DJ가 상당히 불편해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다음날 그는 DJ에게 부시 전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고 손충무를 석방하도록 요청했다. 그러면 워싱턴으로 데리고 가겠다고 했다. DJ는 쾌히 승낙했다. “조사가 끝나는 대로 석방한다고 약속했다” 는 것이다. 서울 구치소로 아들과 함께 면회 온 머피와 앰티파스는 “DJ가 석방을 약속했다”고 알려 주었다. 그들은 안심하고 서울을 떠났다. 그 때문에 외신들은 “한국 저항 저널리스트 손충무 조사 끝나는 대로 무혐의 처리, 석방 될 것”이라는 보도도 있었다. 워싱턴타임스는 컬러사진까지 넣어 1페이지에 걸쳐 특별취재 보도 기사를 통해 “워싱턴 한국 대사관 관계자들은 김대중 정권의 저항 언론인 손충무씨가 무혐의로 처리되고 석방 준비에 들어갔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DJ 일파들은 머피 일행이 워싱턴에 도착한 다음날 나를 전격 기소했다. 그리고 2년 징역형을 선고했으며 단 1분도 감형해 주지 않았다. 춘천교도소에서 1급 모범수로 3차례에 걸쳐 감형, 가석방을 법무부에 올렸으나 번번히 서울 법무부에서 부결시켰다. 석방된 후 법무부에 항의 차 들렀더니 그들이 말이 걸작이었다. “우리야 해 드리고 싶어도 저 위에서 해주지 말라는 사인이 내려오는데 어떻게 합니까? 대통령 비서실장이 차관에게 손충무는 감형을 해주지 말라고 강력하게 오다를 내렸습니다”라고 말했다. 김대중이 박지원을 시켜 “손충무는 가석방이 아니라 1분 1초라도 감옥에 더 붙잡아 두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감옥에서 나오자 머피 장군은 자신의 비서를 서울의 병원으로 보내면서 위로하는 사연과 함께 빨리 “워싱턴으로 와서 아시아 조직의 부시 선거를 맡아라”는 비밀 문서를 함께 동봉해서 보냈다. “김대중에게 복수를 해야 할 것이 아니냐? 워싱턴에서는 김대중이 저지른 범죄행위 사건을 폭로하여 한국 국민에게 알려 주도록 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은 Mr, Son 너 밖에 없다고 여러 사람이 의견을 모아 이 편지를 보낸다”면서 “김대중이 김정일을 만나기 위해 8억 달러를 언더테이블로 전달했다”는 메모를 보내 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문제의 메모에 대해 좀더 구체적인 것을 알아야 한다는 사실과 함께 “내가 마음을 놓고 기사화하거나 폭로할 수 있는 언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 말의 뜻은 정보의 소스 출처를 어느 선까지 밝혀도 좋은가? 하는 물음이었다. 며칠 후 빌 클린턴 정부 정보기관의 고위급 G씨를 만나게 해주었다.머피 장군의 옛 부하였다. 그를 통해 김대중이 서울의 외환은행과 스위스 은행을 통해 마카오 은행에 있는 북한 구좌와 베이징에 있는 중국은행 북한 구좌를 통해 4억 달러를 송금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또 현대는 해외에 있는 “현대 그룹 계열회사들, 영국에 있는 건설회사와, 덴마크, 스웨덴 선박 회사와 전자회사 구좌를 통해 4억 달러를 김정일 구좌로 보냈다”고 설명하면서 “미국은 2차례에 걸쳐 김대중 정부에 엄중하게 경고하고 위험을 전달했다”고 설명해 주었다. 그래서 “기사의 소스를 어느 정도로 하는 것이 좋겠느냐?”고 질문하니 G씨는 자신의 상관과 상의해서 알려 주겠다며 2-3일 기다려 달라고 했다. 3일 후 “조지 터넷 CIA 부장이 상원 정보위원회에 비밀보고를 했다”는 線까지는 좋으나 자신을 만나 사실, 또 자신들의 회사에서 파악한 것으로 하지 말고 연방 상원 의원들의 정보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1개월을 워싱턴에 머물며 부시의 선거 운동을 도왔다. 부시는 어렵게 앨 고어를 이겼다. 그러나 민주당 선거 본부에서 불복, 1개월 정도 법적인 시비 끝에 연방 대법원에 의해 조지 부시의 당선이 확정되었다. |
YS가 전립선 수술을 위해 도쿄 병원에 입원해 있었기 때문이다. YS의 병 문안을 가서 1시간 가량 빌 클린턴 행정부의 G씨가 전해준 비밀 이야기를 모두 했다. YS는 “큰 수고를 했다. 손 동지가 아니면 도저히 입수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서울로 돌아가면 다시 만나서 상의하자”고 했다. 도쿄에 있는 가까운 친구 언론인들을 만나 김대중이 김정일에게 8억 달러를 제공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려 주었다. 한편 한반도 문제 전문가인 ‘겐다이 코리아’(現代 KOREA) 편집장 니시오까 쓰도무(西岡力) 씨가 <金大中 & 金正日>이라는 소형 책자를 발간했으며 그 책 속에 처음으로 “한국 국민들 사이에는 김대중이 김정일에게 수십억 달러를 제공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고 폭로했다. 1개월 반 전 워싱턴으로 가면서 일본 기자들에게 이야기 해준 것이 처음으로 기사화 된 것이다. 2000년 6월- 민족 배신자 김대중, 임동원, 박지원, 정몽준 일당이 김정일을 만나기 위해 8억 달러를 상납한 진상의 기사는 이 책 속에 등장한 것이 처음이다. 20여 권의 책을 구입하여 서울로 가지고 왔다. 그리고 요소요소 사람들에게 전달했다. 이도형 한국논단 발행인은 이 책을 벌써 구입, 저자의 양해를 받아 한국어 번역을 하고 있었다. 이도형 발행인이 한글로 번역해 출간 된 한국어판 ‘김정일 김대중’은 칼럼자가 서울을 떠난 2001년 1월 5일 출간되었다. 이책 113페이지 속에 “김대중이 현금 30억 달러를 갖고 방북하였다고 하는 이야기가 서울에서 그럴듯하게 흘러 다니고 있다. 당초 20억 달러였으나 김정일측이 1일 연기 함으로써 하룻밤 사이에 10억 달러가 껑충 뛰어 올라 30억 달러가 되었다고 하는 소문이 서울에 나돌고 있다” 고 기록되어 있다. 칼럼자가 전달해준 그대로 일본어판에 실려 있었던 것이다. 윤여준 의원과 하순봉 야당 의원들에게 이야기 해주어 이회창 총재가 알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어느 시점에 국회 본회의에서 폭로하도록 할 예정이었다. 정재호 전 유정회 총무, 유치송 전 민한당 총재에게 일본어판 책을 전달해주고 워싱턴에서 취재한 8억 달러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그러는 사이 누구의 입을 통해서 흘러갔는지 김대중의 국정원 정보망 귀에 들어 갔으며 “8억 달러 정보 제공자가 손충무다” 라는 소스까지 안테나에 잡혔다. 박지원이 그 정보를 보고 받고 “손충무를 미행하라고 국정원과 사직동 팀에 지시했다”고 국정원에 깊이 박혀 있는 정보망이 알려주었다. “조심 하라는 것이다” 며칠 후 YS가 귀국해 다시 만났다. 권영해 전 부장도 만났다. 그러나 국내에서 폭로는 국회에서 의원들이 해주어야 하는데 그런 폭로를 할 만한 용기 있는 금배지들이 없다는 것이다. YS와 권부장은 결국 “손 동지가 미국으로 나가라– 워싱턴에서 도쿄를 오가며 터뜨려라. 그러면 국내 언론들이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다. 또 미국과 일본 언론에 보도된 것을 보내라. 그러면 복사하여 돌려서 소문을 나게 만드는 것이 효과적이다. 3년만 고생하면 돌아오지 않겠느냐?” 하는 부탁이었다. 그래서 결국 십자가는 내가 져야 했다. 연말이 다가오니까 신년 새해를 보내고 떠날 준비를 조용히 했다. 그런데 검찰에 숨겨둔 정보망으로부터 국정원 파견관이 서울 지검 간부를 찾아와 “청와대 지시라고 하면서 ‘손충무를 구속 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으라, 먼저 외국에 나가지 못하도록 우선 명분을 찾아서 출국금지를 시키라는 지시가’ 있다”는 정보를 알려주면서 “출국금지가 떨어지기 전에 빨리 나가라”고 했다. 그래서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도록 행동하면서 인사이더월드에서 정치부장으로 있던 김대천 군(당시 월요신문 정치담당 부장) 동아일보의 최영재 차장(신동아 편집부) 민주신문에 있는 김군부(인사이더월드 전 이사) 군을 불러 “신년을 서울에서 보내고 1월 10일쯤 아이들이 있는 미국에 가서 치료를 받을 생각이다. 막내가 해군 대위로 의사인데 샌디아고 해군본부 병원에 근무하고 있다. 해군 병원에는 아들 가족으로 20% 진료비만 내면 치료를 받을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혹시 내가 미국이나 일본에서 김대중이 김정일에게 8억 달러를 갖다 주고 6.15 선언을 만들었으며 6.15 평양 선언은 무효이다. 김정일의 놀음에 김대중이 놀아났다. 김대중은 노벨상을 받기 위해 사기를 친 것이다”라는 설명을 해주었다. 김대중 정보부와 사직동 팀들은 연말이 되어 촌지 얻으러 다니기에 분주하여 미행하는 것이 뜸해 보였다. 그들도 설을 쉬어야 하니까 핸드폰과 집전화 도청은 계속됐지만 미행은 뜸했다. 그래서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12월 29일 김포공항을 떠나는 비행기에 올랐다. 집안의 동생들에게만 알리고 공항에도 택시를 타고 갔다. 그 날밤 도쿄에서 YS 비서관과 권영해 부장 운전기사에게 무사히 도쿄에 도착했다는 연락을 했다. 도쿄에서 10일 동안을 묵으며 2명의 외신기자 친구들을 만나 “김대중이 김정일에게 8억 달러를 갖다 주고 6.15 선언을 만들었다. 돈을 송금하는데 한국 정보부가 직접 관련했으며 미국 정부가 2차례에 걸쳐 김대중에게 항의하고 경고했다”고 알려 주었다. 기사의 소스는 “믿을 만한 미국 정보기관의 워싱턴에 있는 소식통”으로 하라고 알려 주고 부시 대통령 취임식에 맞추어 워싱턴에 도착했다. |
결국 칼럼자의 8억 달러 폭로는 해외 외신들의 보도가 이어졌고 일본에서 2002년 10월 ‘김대중 김정일 최후의 음모’라는 내가 쓴 책 속에 모두 까발렸다. 그 기사를 서울의 김대천 군이 일요신문에 4페이지 걸친 특종기사와 나의 인터뷰 기사를 보도했으며 월간 신동아 잡지의 최영재 군이 조금씩 밝히는 기사를 보도했다. 그래서 한국에 상당히 알려지고 있었지만 한국 언론들이나 야당 국회의원이라는 자들은 입에 지퍼를 달았는지 침묵하고 있었다. 그 바람에 김대중 정권이 끝나는 3년 후에 서울로 돌아가겠다고 약속하고 떠나왔는데 노무현 정권의 등장과 그 아래에서 진행된 여권 무효화 조치 등으로 9년 동안 서울에 가지 못하고 워싱턴에 머물러 있다. 이제 건강이 회복되어 비행기를 탈 수 있게 되면 한국의 독자들과 팬들 옆으로 돌아 갈 것이다.(8억 달러 진상은 다음 기회에) ㅁ 손충무 –국제저널리스트. www.usinsideworld.com –편집인 겸 발행인 |
출처 인사이드 월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