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1.10 (수)

  • 맑음동두천 -3.3℃
  • 맑음강릉 -1.2℃
  • 맑음서울 -1.4℃
  • 맑음대전 -3.2℃
  • 맑음대구 1.5℃
  • 구름조금울산 4.5℃
  • 맑음광주 0.0℃
  • 구름조금부산 5.0℃
  • 맑음고창 -2.8℃
  • 구름조금제주 5.4℃
  • 맑음강화 -4.7℃
  • 흐림보은 -1.0℃
  • 맑음금산 -3.3℃
  • 맑음강진군 0.9℃
  • 맑음경주시 4.1℃
  • 구름많음거제 4.6℃
기상청 제공

대한민국의 건국과 리승만 대통령에 대한 재평가

해방기념일이냐 건국기념일이냐?

 
보통 한국사람들에게 8・15기념일이라고 하면 1945년 8월 15일 일제통치로부터 해방된 날이라 하여 광복절이란 이름으로 불려져 왔다. 광복절(光復節)이라고 하면 외세의 지배에서 벗어나서 주권국가를 회복했다는 뜻이 담겨져 있어서 무난한 표현이기는 하나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의 정부수립이라는 뜻이 부각되어 있지 않은 감을 준다. 그 이유는 한국의 좌파성향의 사람들 중에는 같은 해 9월 9일의 평양에서 수립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부수립을 더 중요시하며 또 앞으로 세워질 남북한 통합정부인 고려연방공화국의 건국에 매우 큰 비중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200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정부수립 60주년을 기해서 8・15를 약간 모호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광복절이란 말보다는 차라리 건국기념일로 하는 것이 더 명확하고 적절하지 않느냐는 여론이 일기 시작한 것 같다. 이것은 지난 60년 동안의 발전과정을 통하여 대한민국의 역사에 무게가 더해지고 또 체제정통성의 인식이 국민간에 계속 높아져 감을 보여준다. 대한민국의 정치적 정통성과 역사적인 무게가 더해질수록 우리의 관심은 대한민국정부를 수립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수행하였던 리승만 박사에 대한 인식과 처우문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가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리승만 박사의 건국노선에 대한 평가

리승만 박사라고 하면 대한민국정부의 초대 대통령이므로 당연히 그에게는 건국의 아버지라는 말이 붙어 다닌다. 보통 초대 대통령이라고 하면 독립운동이나 정부의 수립과정에서 두드러진 공로를 세우지 않고서도 차지할 수 있고, 또 정파들간의 싸움에 밀려서 어부지리를 얻어서 국가원수의 자리에 오르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나 리승만 박사의 경우는 당시의 정치인들 중에서도 한국독립운동을 가장 오랫동안 계속해 왔던 선배급의 애국투사였으며 1919년 상해에서 세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독립운동 과정에서도 임시정부의 구미 대표부를 오래 이끌어서 가장 두드러진 공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해방후의 건국투쟁과정에서 특히 1948년의 대한민국정부수립에 의심의 여지없이 주도적인 역할을 해냈던 지도자였음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해방후 한국의 정치세력은 크게 보아서 여섯 갈래로 분열되어 있었다. 정치적인 색깔로 분류한다면 ① 극좌익에 조선공산당 ② 온건좌익에 근로인민당과 그 언저리 ③ 중간에 중립정당세력 ④ 온건우익정당에 한국독립당 ⑤ 강성우익에 한국민주당 ⑥ 그 우익에 리승만을 추종하는 국민운동단체인 한국독립촉성회 등이었다.

한국에서 좌우익의 대립이 격렬해지니까 리승만의 추종세력과 한국민주당은 사실상 하나로 뭉쳐서 좌파나 중간파와 싸웠다. 그러나 정부가 수립된 다음에는 리승만의 자유당과 한국민주당은 자리싸움으로 분열되었다. 극좌와 온건좌파 그리고 중간파가 힘을 잃은 다음에는 자유당은 여당이 되고 한국민주당은 야당투쟁의 중심세력이 되어서 대정부 투쟁에 혈투를 계속하게 된 것이다.

해방직후 한국의 젊은 세대와 식자층은 거의가 좌파정당의 지지자 내지 추종자들이었다. 좌파세력은 당 활동의 조직성과 전략전술의 우수성 그리고 뛰어난 선전선동술을 발휘하여 국민대중의 압도적인 과반수 지지를 얻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리승만 박사의 지지자들은 김구를 비롯한 임정(臨政)계 세력의 지지도를 상실한 상황에서 악전고투하면서 대한민국정부수립이 강행되기에 이른 것이다.

리승만 박사는 우선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합의된 신탁통치안을 강력하게 반대하였고 신탁통치를 추진하려던 미소공동위원회의 합의를 반대하는 투쟁을 계속하였다.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소련이 외국철수에 의한 한반도문제의 해결을 제시하자 그에 맞서서 UN감시하의 남북한 총선거 방안을 밀어붙였다. 그것이 북한의 반대에 봉착하자 가능한 지역에서의 총선거를 통한 정부수립으로 방향을 틀어서 1948년 8월 대한민국의 정부수립을 관철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만일 이러한 방법으로 대한민국정부가 어설프게나마 수립되지 않았더라면 1950년 북한군의 남침을 저지하기 위하여 미국을 비롯한 UN군의 참전은 나올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 경우에 한반도는 공산화통일을 모면할 방법이 없었다. 대한민국이 해방정국의 혼란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공산화의 참극을 모면할 수가 있었다는 것은 사실상 세계사의 큰 기적이었다. 이것이 모두 리승만 박사의 혜안과 공로에 기인한 것이었음을 생각할 때 한국국민과 우리의 후손들은 아무리 찬양하고 감사해도 지나침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리승만 박사의 리더십과 그 문제점에 대한 소견

세상사에서 초기에 크게 환영받고 잘 나갈 듯이 보이다가 세월이 감에 차츰 시들어지거나 용두사미로 끝나서 실망을 안겨주는 일이 있는가하면 반대로 처음은 많은 사람의 사랑과 호응을 얻지 못하다가 세월이 감에 따라서 일이 번창해지고 많은 사람들의 호응과 지지를 얻게 되는 경우도 있다. 건국 초기에 한반도에 통일정부가 수립되지 못하고 남북이 분단되어 서로 쟁패를 계속해 왔지만 건국후 60주년이 지난 현재에 와서는 남북한의 체제경쟁이나 정통성 논쟁은 이미 끝이 난 상태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남북한 두 나라간의 국력의 차이나 국가위상의 우열은 어디서 연유하는 것일까? 그것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분석될 수가 있겠지만 가장 큰 요인은 그 나라의 정치 지도자의 인격과 영도력이다. 대한민국의 수립과 그 정치노선은 리승만 박사 한 사람의 역량과 판단 그리고 개인의 의지력에 의해서 만들어진 역사의 기적이었던 것이다.

북한의 김일성은 집권 당시에 33세의 무명 청년에 지나지 않았다. 김일성은 소련 점령군의 방침과 정치장교의 각본과 연출에 의해서 철저히 조종되어 조작되었으며 그들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리승만은 미군의 점령군사령관이나 그의 정무장교와 처음부터 사사건건 부딪치고 싸우며 자신의 정치노선을 주장해 밀고 나가는 출중한 정치지도자였다.

리승만은 종전 당시 미국 국무성의 신뢰와 지지도 받지 못한 상태였다. 미국의 군정장관은 리승만을 배제하여 김규식 안재홍 등 중립파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남한의 정치문제를 풀어나가려 하였다. 미소공동위원회가 좌절되자 문제를 UN총회로 끌고 들어가서 UN감시하의 총선거를 통한 방안을 제시한 것도 李 박사의 노력의 결과이다. 북한이 UN감시위원단의 입북을 거부하였을 때 남한만의 총선거로 대한민국정부를 수립케 하도록 유도한 그 머리와 수완 그리고 배짱도 리 박사가 아니면 나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리승만은 공산당 지도부와는 대화를 시종일관 거부하였다. 김구 김규식 등 임정 요인과도 말이 통하지 않았다. 한국민주당의 반공적 보수우익지도층과도 뜻이 안 맞아 알력이 계속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리승만이 고집불통의 완고하고 융통성이 없는 구제불가능한 독재자라고 고개를 내저었다. 이런 속성은 민주국가의 정치지도자로서 중요한 결격사유가 되는 것이나 리승만의 경우만은 예외였다. 오랜 세월이 지난 다음에야 비로소 리승만 박사의 소견과 판단이 옳았음이 판명되었으니 그동안 그의 외로움과 괴로움은 어느 정도였겠는가?

한국정부가 출범하는 무렵이나 그 후에도 리승만 대통령을 미워하고 반대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나 자신도 당시에 리승만 박사가 하는 일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고 나의 지식이 더 넓어지고 깊어지면서 그때는 내가 너무 모르고 건방졌기 때문이지, 리승만 박사의 판단과 결정에 하자가 없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리승만 박사의 정치행태나 리더십의 잘잘못에 대하여 무조건 변명이나 변호만 할 것이 아니다. 그가 왜 많은 사람들의 비판이나 비난의 대상이 되었는지 그들의 반대나 저항에 어떠한 정당성의 근거가 있었는지 가급적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성찰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대통령이 자신의 의견이나 주장을 강력하게 내세우며 남의 의견을 경청하거나 그런 주장을 타협적으로 수용하는 태도가 없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불교에서는 사람들이 가지는 성향 중에서 아치(我痴), 아견(我見), 아만(我慢), 아애(我愛)를 4번뇌라고 강조한다. 이것이 리승만 박사에 경우 거의 정확하게 부합됨을 부인하기가 어렵다.

또 리승만 박사의 장기집권욕도 많은 사람들을 등 돌리게 만든 요인이었다. 1948년 1952년 1956년에 대통령으로 출마하여 집권한 것까지는 너그럽게 보아 줄 수가 있다. 그러나 그가 85세가 되던 1960년의 선거에 출마한 것이나 조병옥이라는 야당 후보가 갑자기 타계하였으므로 대통령선거는 할 필요조차도 없어진 상황에서 자신의 심복인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도록 묵인한 것 그리고 3・15부정선거를 엄격하게 챙겨보지 않았던 것도 리승만 박사의 노망 내지 실책이었다.

그러나 사람이면 결점이 없을 수 없고 또 모든 일을 언제나 다 잘 할 수 없다. 잘 못하는 일이 있더라도 잘 하는 일들을 지켜보면서 바라는 일이 원만히 성취되기를 바라며 그를 위해 최선을 다하여 돕는 것이 주변 사람들의 의무이다. 우리는 새 나라가 리승만 박사처럼 뛰어난 정치지도자에 의하여 세워지고 발전과 번영의 길로 올라설 수가 있었음을 환영하며 하늘과 우리의 조상신(祖上神)들에게 무한히 감사를 드려야만 한다.

또 한편에는 우리 국민의 무지와 무식 그리고 배은망덕으로 인하여 건국의 아버지의 말년이 너무나 불쌍하고 비참했는데 그에 대하여 생각할수록 가슴이 저려옴을 느끼게 한다. 리승만 대통령은 3・15부정선거로 인하여 실각하여 대통령직을 사임해야 했지만 그것은 단독 출마자였던 리승만이 의도적으로 계획하고 추진했던 부정선거가 아니었다. 리승만 박사의 국외망명도 그 자신이 원했던 것이 아니었다.

1960년 4월부터 그가 운명한 1965년 7월까지 계속되었던 하와이의 망명생활은 무참하게 버림받고 짓밟혔던 세월이었다. 리승만은 그 인생의 종말이 다가왔음을 느끼면서 고국 땅에서 죽고 묻히고 싶다는 간절한 의사표시를 여러 번 전했음에도 고국의 여론이나 정치인들은 그 노 애국자의 최후청원조차 외면하였다. 당시 한국의 언론과 식자들이 무엇이 무서워서 그런 비정(非情)을 저질렀던가? 국민의 등 뒤에 숨어있는 공산주의자들이나 그 공작원의 눈치나 입김을 그 정도로 두려워했던가?

리승만의 죽음도 한국의 언론계는 사망 객사 타계로 보도하였을 뿐 자살했던 노 전 대통령에도 부쳐졌던 ‘서거(逝去)’란 말이 논의된 바조차 없었다. 초대 대통령인 리승만의 장례는 마땅히 국상(國喪)으로 치러져야 했음에도 당시의 분위기상 그런 말도 꺼내기조차 눈치 보이는 일이었던 것 같다. 그러니 유족들의 바람에 의하여 조촐한 가족장으로 치러졌다. 우남 리승만에게는 자신이 만들었던 국군묘지에 안장된 것이 유일한 대우가 되었던 셈이다.

가장 가슴 아프게 생각되었던 것은 리 박사의 타계 후 정부로부터는 아무런 年金도 생활보조비도 지급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세상에 어찌 그럴 수가 있었던가? 나라를 구하고 3000만 동포를 잘 살게 하는 기초를 마련해 준 건국의 아버지와 그 가족에게 최소한의 국가적인 예우가 없었다니. 심지어 영부인인 프란체스카 여사는 생활비도 없어서 당분간 오스트리아의 친정집에 가 있어야 했던 모양이었다.

그 후 법이 바뀌어서 대통령의 부인에게도 얼마간의 생활보조비가 나오게 되니까 프란체스카 여사는 한국에 돌아와서는 대통령 부인으로서 받는 생활보조비와 이화장의 셋방 수입으로 말년 살림을 꾸려 나갔다고 한다. 또 하나 말하고 싶은 것은 다른 정치인들에게는 기념관 등 여러 가지 시설물이 세워졌음에도 우남 리승만 대통령에게는 그런 혜택이 전혀 주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현재 이화장(梨花莊)도 국가의 시설물이 아닌 것으로 알고 있다. 또 초대 대통령의 忌日(기일)에는 매년 추모행사가 열려 왔지만 현직 대통령은 물론 국무총리가 참석하여 추모사를 한 예도 없었다고 한다. 몇 년 전부터 관례적으로 대통령을 대신하여 보훈처장이 참석하여 조사(弔辭)를 읽어 왔다고 한다. 그런데 2009년 7월의 기일(忌日)에는 보훈처장도 참석을 거부하는 바람에 부처장의 이름으로 弔辭가 쓰여지고 읽혀졌다고 한다.

하기는 위인(偉人)들은 살아생전에 그의 가치가 인정되고 대접받지 못하는 경우가 흔하다고 들었다. 그러나 ‘건국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분의 사후(死後)에도 정부나 사회로부터 그 정도의 괄시와 푸대접을 받아왔다면 그런 나라의 안전이 과연 제대로 지켜질 수가 있을까? 이런 나라가 정신이 똑바로 박혀진 나라인지 또 이런 나라의 위엄이 앞으로도 어떻게 지켜질 수가 있겠는지 염려되는 것이다. 이런 사실이 리승만 대통령이 개인적으로 그 만큼 박복(薄福)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한국이란 나라가 그 정도로 정신이 없거나 박덕한 국민들의 나라이기 때문인지?

프로메티우스는 어둠과 추위에 고생하는 사람들이 너무 불쌍하여 천상에서 불을 훔쳐 지상으로 내려보낸 죄로 뜨거운 바위산에 묶여 영원히 큰 독수리의 밥이 되었다는 신화가 있다. 이런 것이 리승만 전 대통령의 前生業과 과거업에 대한 과보(果報) 때문인지? 리승만 박사도 남한을 공산주의의 지배로부터 구해준 공로(죄악) 때문에 그런 응징과 처벌로 시달림을 받고 있는 것인가? 차제에 우리 국민들 특히 식자층의 맹성(猛省)이 요구되는 일이라 하겠다. ○


혁신학교? 혁신은 개뿔! 애들 학력만 퇴행중! 교무실 커피자판기, 교사 항공권 구입에 물 쓰듯...특혜 불구 학력은 뒷걸음 일반학교에 비해 연간 1억4,000~1억5,000만원을 특별히 지원받는 서울형 혁신학교가 예산을 엉뚱한 곳에 쓰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특별예산(학교운영비)으로 교사실의 각종 책장이나 가구를 구입했고, 수백만원을 들여 학습자료 저장용 USB와 외장하드를 사서 나눠 갖은 사실도 밝혀졌다. 교무실 커피자판기를 구입하는데 특별예산을 쓴 혁신학교도 있었다. 이밖에도 여직원 휴게실 가스보일러 교체, 부장교사 워크숍 항공권 구입, 교직원 전체 체육복 구입 등 본래 목적과는 거리가 먼 곳에 특별예산을 물 쓰듯 전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학생들에 대한 선심성 예산 집행 정황도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학생 티셔츠 구입, 진공청소기 구입 등에 특별예산을 수백만원씩 사용했다. 학생들의 생일축하용 떡케익 구입비용으로 매달 70~90만원을 사용한 곳도 있었다. 반면 서울형 혁신학교의 학력은 일반학교에 비해 오히려 뒷걸음질 친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내용은 서울시교육청이 새누리당 강은희 의원에게 제출한 2012년 혁신학교 정산서 통합지출부를 통해 밝혀졌다. 서울형 혁신학교는 곽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