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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인터뷰

아버지를 부정한 김영삼을 찾아가면서 보호한 全斗煥을 뺀다면...

그는 朴 전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 기사를 쓰지 못하게 하였고, 일부 측근들이 朴 전 대통령을 격하하려는 움직임도 중단시켰다. 박근혜씨가 찾아가든 말든 전두환의 역사적 업적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全斗煥 전 대통령은 재임 시절 朴正熙를 보호한 사람이다. 朴 전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 기사를 쓰지 못하게 하였고, 일부 측근들이 朴 전 대통령을 격하하려는 움직임도 중단시켰다. 무엇보다도 그는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으로서 朴 전 대통령 시해 사건을 엄정히 수사하여 범인 김재규를 斷罪하였다. 권력 공백기에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부의 정통성을 깡그리 부정한 사람이다. 좌파적 역사관의 포로가 되어 한국 현대사를 총체적으로 격하하고 자신만이 정통성이 있다고 억지를 부리면서 좌익 득세를 위한 일들을 골라서 하였다. 좌파宿主였다. 그는 퇴임 뒤에도 박정희를 향하여 입에 담지 못할 수준의 비방을 계속한다. 그의 아들도 박근혜 비판에 앞장 서고 있다.

박근혜씨는 자살한 前 대통령의 묘소까지 찾아가더니 김영삼의 집도 방문하였다. 그런데 전두환 전 대통령은 방문 대상에서 뺐다. 아마도 표가 되지 않는다고 계산하였을 것이다.

전두환이 정말 표가 없는 사람일까? 나의 표 계산으론 김영삼보다 많을 것 같다.
박근혜씨가 찾아가든 말든 전두환의 역사적 업적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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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에 나가서, 내가 全斗煥 대통령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고 하면 놀라는 기자들이 더러 있다. 모든 대통령은 聖君이어야 하고 모든 스포츠맨은 슈퍼맨이어야 하고 모든 기업인은 無慾의 자선가여야 한다고 생각하는(그러면서 자신들은 모순덩어리이다) 기자들의 눈에는 榮辱(영욕)투성이인 全斗煥 전 대통령의 욕된 면만 보지 않으려 하는 내가 이상한 사람으로 여겨질 것이다. 내가 全斗煥 정권에 의하여 두 번 기자직에서 해직된 적이 있다고 말하면 왜 그런 사람이 全씨를 긍정적으로 보느냐고 이상한 눈초리로 대한다. 公的 판단에 私感을 개재시키면 안 된다는 원칙이 생소한 모양이다. 수치로 본 全斗煥 대통령의 부정할 수 없는 功積을 싣는다.


오늘날 한국에서 識者를 자칭하는 사람들중에는 全斗煥 정권을 변호하는 이들이 거의 없다. 金泳三 전 대통령이 주도한 소위 역사재판에 의하여 全斗煥 정권의 출범 과정은 反헌법적인 행위로 규정되었다. 이 판결에 대한 異見도 많다. 全斗煥 정권의 출범에 대한 논란과는 별도로 이 정권이 남긴 實積에 대해서는 異見이 적다. 수치를 통하여 객관적으로 정리되기 때문이다. 정치는 動機보다는 결과를 重視한다. 객관적 수치로 나타나는 全斗煥 정권의 실적이 역사적 평가의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될 것이다.



*제5공화국 관련 경제정보: 朴正熙 정권 마지막 해와 全斗煥 정권 마지막 해의 비교표

1. 1979년 1인당 GNP: 1,546 달러
2. 1988년 1인당 GNP: 3,728 달러
3. 1980년대 경제성장률: 연평균 10.1%로서 200여개 국가중 1위

4. 1979년 수출 147억 달러, 수입 191억 달러, 경상수지 적자 41억5100만 달러.
5. 1988년 수출 600억 달러, 수입 525억 달러, 경상수지 흑자 138억 달러.

6. 1979년 국민저축률: 25%
7. 1988년 국민저축률: 34%

8. 1979년 도매 물가상승률: 20%, 1980년은 44%
9. 1983-87년 도매 물가상승률: 연평균 2.7%

10. 1988년에 외채 320억 달러, 對外자산 253억 달러. 1989년에 純채무국으로 전환.
11. 전화대수: 1982년 300만 대에서 1988년 1000만 대 돌파.

12. 소득격차: 1980년에 지니계수가 0.39, 88년엔 0.34로 축소(수치가 낮아지면 격차가 줄었다는 뜻임).

全斗煥 정권은 1980-88년 사이 세계 1위의 고도경제성장을 달성했다. 이 기간 국민소득은 2.3배로 늘었고 무역적자 구조는 무역흑자로 바뀌었다. 두 자리 수의 물가상승률은 2%대로 안정되었다. 외채도 크게 줄었고 국민저축률은 일본을 앞서는 세계최고 수준에 달했다. 1980년대 全斗煥 정부는 통신망 설치와 전자산업 육성을 國策사업으로 추진하여 1990년대 이후 한국이 세계적 인터넷-전자산업 强國으로 도약하는 조건을 만들었다.

이 경제성장으로 해서 한국사회에 중산층이 두껍게 등장했다. 1980년대 말 자신이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약70%가 되었다. 이들이 민주화의 主力부대가 되었다. 이들의 온건성향이 6.29선언으로 나타난 타협적, 평화적 민주화의 엔진역할을 했다.
경제성장이 만든 쿳션이 한국사회의 바닥에 깔리는 바람에 민주화의 부작용을 견뎌냈다. 1985년 2.12 총선으로 시작된 민주화의 혼란기에 경제성장률이 피크에 달했다. 경제호황기에 민주화 시위가 절정기를 맞았다는 것은 행운의 타이밍이었다.

全斗煥 대통령은 마이너스 경제성장률을 기록한 경제를 이어받아 이를 수습한 뒤 물가를 잡고 고도 성장과 흑자를 이룩했다. 全斗煥 대통령이 경제에 성공했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정치는 상당부분 경제를 관리하는 기술이다. 경제에 성공했다는 것은 정치도 실패하지 않았다는 反證이다.

경제 성공의 功을 전두환 대통령이 아닌 金在益 경제수석한테 모두 돌리려는 사람들이 있으나 이는 잘못이다. 金在益씨를 잘 부린 사람이 全 전 대통령이었고, 金수석은 1983년10월에 아웅산 테러로 타계했기 때문이다.

이 경제성장은 평화적 민주화와 全대통령의 단임실천을 가능케 했다. 1988년의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준비한 이도 全斗煥이다. 이런 호재로 安保면에서도 對北우위를 확보했다.

그에게는 물론 12.12사태의 책임이 있고, 비자금 모집의 과오가 있다. 이 때문에 그는 2년간 백담사 귀양, 2년간 수감생활을 했다. 이들 과오를 한쪽으로 놓고 그 반대편에 경제적 성공과 튼튼한 안보, 그리고 단임실천 및 6.29 민주화 선언(직선제 개헌이 핵심)과 서울올림픽 성공을 놓으면 저울은 어디로 기울 것인가.

*하나 덧붙인다면 전두환 정권은 前 정권을 격하하지 않았다. 김영삼 정부가 했던 식으로 前 정권 비리를 캐기 시작했더라면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현재의 국민적 평가는 매우 달라져 있을 수도 있다.

출처 조갑제 닷컴 / 조갑제


혁신학교? 혁신은 개뿔! 애들 학력만 퇴행중! 교무실 커피자판기, 교사 항공권 구입에 물 쓰듯...특혜 불구 학력은 뒷걸음 일반학교에 비해 연간 1억4,000~1억5,000만원을 특별히 지원받는 서울형 혁신학교가 예산을 엉뚱한 곳에 쓰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특별예산(학교운영비)으로 교사실의 각종 책장이나 가구를 구입했고, 수백만원을 들여 학습자료 저장용 USB와 외장하드를 사서 나눠 갖은 사실도 밝혀졌다. 교무실 커피자판기를 구입하는데 특별예산을 쓴 혁신학교도 있었다. 이밖에도 여직원 휴게실 가스보일러 교체, 부장교사 워크숍 항공권 구입, 교직원 전체 체육복 구입 등 본래 목적과는 거리가 먼 곳에 특별예산을 물 쓰듯 전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학생들에 대한 선심성 예산 집행 정황도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학생 티셔츠 구입, 진공청소기 구입 등에 특별예산을 수백만원씩 사용했다. 학생들의 생일축하용 떡케익 구입비용으로 매달 70~90만원을 사용한 곳도 있었다. 반면 서울형 혁신학교의 학력은 일반학교에 비해 오히려 뒷걸음질 친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내용은 서울시교육청이 새누리당 강은희 의원에게 제출한 2012년 혁신학교 정산서 통합지출부를 통해 밝혀졌다. 서울형 혁신학교는 곽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