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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대마도는 우리의 失地 회복… 일본인이 아무리 주장해도 역사는 어쩔 수 없다"

[최보식이 만난 사람] '대마도 영유권'을 주장해온 현역 군인, 김상훈 대령

"백두산은 머리, 대관령 척추, 영남 對馬와 호남 탐라를 양 발로"

"대마도는 우리의 失地 회복… 일본인이 아무리 주장해도 역사는 어쩔 수 없다"
미국과의 영토 협상에서 일본이 제시했던 지도에 대마도가 '조선령'으로 나와

김상훈 대령은 “대한해협은 현재의 위치가 아닌 대마도의 남단에 있었다”고 주장했다./최보식 선임기자
김황식 총리가 국회에 출석해 "역사적 근거가 있다 해도 지금 대마도를 우리 땅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고 말했다. 나도 같은 노선이었다.

이 때문에 김상훈(54) 대령과 만나는 것은 "내가 극우주의자로 비칠 수도 있겠구나"를 감수하는 행위였다. 학자도 아닌 현역 군인인 그는 '대마도의 영유권' 연구에 미쳐있다. 몇 차례 논문을 발표했고, '일본이 숨겨오고 있는 대마도·독도의 비밀'이라는 책을 출간했으며, 국회에서 특별 강연도 했다.

그는 근무처인 관동대 학군단(강릉 소재)에서 프레젠테이션 준비를 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통화에서 듣던 격정적인 어조와는 달리, 반듯한 인상이었다.

―독도 문제 해결을 위해 전략적으로 대마도를 언급하는 것인가?

"나는 대마도가 우리 땅이라는 객관적 증거 자료를 갖고서 말한다. 이런 사실 때문에 일본이 대마도를 감추기 위해 독도를 부각해왔는지 모른다."

―역사적으로 대마도가 우리 땅이라는 자료가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못지않게 대마도가 일본령으로 기록된 문서나 지도도 많다.

"맞는 지적이다. 가령 1750년대 제작된 '해동지도'에 '백두산은 머리, 대관령은 척추가 되며, 영남의 대마와 호남의 탐라를 양 발로 삼는다(以白山爲頭 大嶺爲脊 嶺南之對馬 湖南之耽羅 爲兩趾)'고 적혀있다. 19세기에 작성된 경상도 행정지도에도 '대마군(郡)'으로 나온다. 하지만 나는 이런 고지도와 고문서로써 말하는 게 아니다."

― 당신이 말하는 결정적 증거 자료는 무엇인가?

"일본의 개항 직후 미국은 일본 본토에서 1000여㎞쯤 떨어진 태평양의 무인도 '오가사와라'를 발견했다. 이를 미국령에 편입하려고 했다. 미·일 간 영토 분쟁이 벌어진 것이다. 이때 일본은 그 섬이 나와있는 자국의 지도(1785년)를 제시했다."

―일본은 이미 그런 지도까지 준비해놓고 있었는가?

"지도 작성자는 하야시 시헤이(林子平)로, 일본의 영토 주권에 가장 먼저 눈떴던 인물이었다. 그는 '해상 방위를 튼튼히 하고 주위의 무인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을 정벌해 국가 방위의 영역을 확대해야 한다고도 했다. 소위 정한론(征韓論)의 시조 격이다. 그는 일본과 주변국을 정찰해 지도 다섯 장을 제작했다."

―영토 협상에서 그 지도로 미국이 물러섰나?

"미국은 하야시의 일본어판 지도로는 객관적 증거가 될 수 없다고 했다. 고심하던 일본 막부는 하야시의 지도를 번역한 '프랑스어판'이 있다는 걸 알았다. 이를 증거물로 내세워 영토 협상에 성공한다. 바로 그 지도에 대마도가 조선령으로 되어있었다. 일본이 영토 협상에서 사용한 지도에 그렇게 나와있다는 뜻이다."

―그 지도를 직접 확인했나?

"지금까지 발견된 필사본 지도에는 독도는 우리 땅, 대마도는 일본 땅으로 되어있다. 이를 근거로 일본서 귀화한 호사카 유지(세종대 독도연구소장) 교수가 '국제적으로 공인된 지도에 이렇게 나와있는 것이 독도가 한국 땅이라는 결정적 증거'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우리가 몰랐던 것은 그 지도에 독도뿐만 아니라 대마도도 우리 영토로 되어있었다는 점이다."

―앞뒤가 모순된다. 필사본은 모두 대마도가 일본 땅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렇다. 하지만 그 필사본은 모두 조작됐을 가능성이 높다. 몇 년 전 국회도서관 206호실 독도특별전시관에서 프랑스어판 원본을 찾아낸 것이다<지도①>.대마도가 우리 영토와 같은 색깔로 채색돼 있었다. 나는 이 지도를 원본이라고 확신한다."

―대마도가 우리 땅이면 원본이고, 그렇지 않은 필사본은 다 조작됐다는 주장이 과연 논리적일까?

"기록에 따르면 1806년 한 네덜란드인이 하야시의 원본 지도 딱 한 부를 유럽으로 들고 갔다. 이를 갖고 클라프로토라는 동양학자가 현지 정찰 등을 한 뒤 1832년 프랑스어판을 찍었다. 국회도서관의 프랑스어판이 바로 그 지도다. 고자료 수집가인 한상복 선생이 국회도서관에 기증한 것이라고 했다."

한상복(72)씨와 통화해보니, 1980년대 초 호주에서 구입한 것으로 '1832년 인쇄본'이 맞다고 했다. 하지만 한씨는 "지도에서 대마도가 같은 노란 색이라고 해서 우리 영토라고 주장할 수 있는 지는 의문이다"는 반응을 보였다.

―우리 국회도서관에 보관된 것 말고 다른 프랑스어판 원본이 발견된 적은 없나?

"프랑스어판은 수십 부를 찍은 걸로 기록돼 있다. 하지만 필사본 외에는 발견된 적 없다. '오가사와라' 섬을 둘러싸고 미국과 영토 협상을 벌였던 일본 대표가 1863년 프랑스 대사로 갔다. 그가 프랑스어판을 수거해서 폐기했을 공산이 높다. 그 직후 일본은 대마도를 자기네 영토에 귀속했다(1868년). 이때 전후로 대마도를 일본 땅으로 표기한 필사본이 대량 만들어졌다고 본다."

―하야시의 일본어판 원본은 직접 본 적이 있나?

"일본어판도 대마도가 일본 땅이라는 필사본만 돌아다닌다. 일본 도쿄의 국립도서관에 원본이 보관돼있다고 하는데 확인하진 못했다. 하지만 하야시가 제작한 다른 지도 '조선팔도지도'의 원본은 발견했다<지도②>. 그의 고향인 센다이 소재 도호쿠(東北)대학 박물관의 인터넷 사이트에서 찾아냈다. 대학 측이 '원본'이라고 소개해놓았다. 그 지도에도 대마도는 조선령으로 나와있었다. 내가 이런 자료를 근거로 2010년 말 논문을 발표하자, 한 달도 안 돼 인터넷에 떠 있던 지도가 사라졌다. 그 공간을 '노 이미지(사진 없음)'로 비워놓았다."

―대마도 영유권보다, 현역 군인이 어떻게 해서 대마도에 빠져들게 됐는지가 더 궁금하다.

"2008년 초 미국 조지워싱턴 대학에서 연수할 때였다. 뉴욕타임스에 김장훈씨가 낸 독도 광고를 봤다. 민간인도 이렇게 노력하는데 현역 군인으로서 뭔가 기여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조지워싱턴 대학은 이승만 대통령이 다녔고, 이분이 정부 수립 후 '대마도 반환'을 요구했다는 것을 떠올렸다. 어떤 근거로 그랬는지 찾아내고 싶었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1948년 8월 15일) 사흘 뒤 첫 기자회견에서 '대마도 반환'을 요구했다. 이듬해 연두 회견과 연말 회견에서도 "대마도는 우리의 실지(失地)를 회복하는 것이다. 일본인이 아무리 주장해도 역사는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이런 압박에 일본 총리가 일왕(日王)에게 '한국인이 실제 2000명쯤 거주하고 있다'는 대마도 상황까지 보고했다. 하지만 여섯 달 뒤 6·25가 발발했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무엇을 찾아냈나?

"조지워싱턴대 도서관 7층 특수문서실에서 그의 1907년 졸업 앨범을 볼 수 있었다. 당시 같은 과 동문들이 '그에게 국적을 물을 때 실수하지 말라. 그는 우리 가운데 성적이 가장 우수하여 전 과목 A·B 학점을 받아 2년 반 만에 조기 졸업했다. 그는 YMCA와 역사·철학 등의 찬반 토론회에서 주요 멤버였다'는 글을 적어놓았다. 이분이 대학에서 역사학 두 과목을 이수했고, 그 뒤 하버드대(석사)와 프린스턴대(박사)에서도 역사 연구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이 이승만 대통령의 '대마도 반환' 요구와 어떻게 연결되나?

"이분이 미국 체류 시절 쓴 '저팬 인사이드 아웃(1941년)'을 봤다. 진주만 기습 7개월 전에 이미 일본이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킬 것으로 예측했다. 그 책에는 '일본과 한국 사이, 한국과 만주 사이 등에 경계선이 있었다는 것을 잊어버린 듯하다. 일본이 이런 과거의 경계선을 하나둘씩 깨뜨리면서…'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분은 사실적 근거를 갖고 '과거의 경계선이 있었다'고 말했을 것이다. '대마도 영유권' 주장도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고 본다."

―당신은 그전에 이 분야를 전공하거나 공부한 적이 있었나?

"전혀. 다만 그런 관심이 생기면서 미국의 한 고미술·지도 전시회에서 1864년 발행된 아시아 지도를 사게 됐다. 지도 하단에 '미국 페리 함대의 일본 현지 정찰과 측량으로 작성했다. 일본과 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미 의회의 지시로 미국 정부에서 제작했다'고 나온다. 이 지도에는 대한해협이 현재의 위치가 아닌 대마도 남단에 있었다. 일본 영토에는 채색이 되어있었지만 대마도는 우리 땅과 똑같이 무색이었다. 그게 첫 단서였다."

―당시 미국으로서는 동양의 어느 나라에 어떤 섬이 소속됐는지 몰랐을 수도 있지 않은가?

"페리 함대는 앞서 말한 '오가사와라'를 놓고 일본과 영토 분쟁을 했던 당사자다. 그때 일본이 하야시의 프랑스어판 지도를 제시해 협상에서 이겼다. 이를 근거로 미국 정부에서 제작한 지도였다. 그러니 대마도가 어느 영토에 속하는 지를 알았을 것이다."

―지도 하나로 너무 많은 것을 유추하고 있지 않나?

"1855년 영국에서 제작된 지도에는 일본 각 지방을 구역별로 번호를 매겨놓았다. 그 지도의 하단에 '대마도와 이끼섬은 일본 왕국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나온다. 1945년 국내에서 발행된 '조선해방기념판 최신 조선전도'에도 대마도를 우리 땅으로 표기해놓았다."

―하지만 2차대전 패전국 일본과 미국 등 전승국 간에 전후 처리를 위해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비롯한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와 소유권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는 샌프란시스코 조약(1951년)을 체결했다. 이 문안에 '독도'와 '대마도'는 명시되지 않았다. 이때 이승만 대통령의 '대마도 반환' 요구도 날아갔던 셈이다.

"우리는 '전승국' 신분이 아니어서 협상에 참여할 수 없었다. 또 6·25전쟁 중이었다. 외교적 제약이 많았다. 이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은 1952년 독도를 포함하는 '평화선'을 설정한 것이다. 하지만 대마도를 염두에 두고서 '이 경계선은 장래에 규명될 새로운 발견·연구 또는 권익의 출현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신정세에 맞추어 수정할 수 있음을 선언한다'고 했다."

―대마도 영유권 주장은 정말 현실성이 있다고 보나?

"당시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오가사와라' 섬이 미국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일본의 집요한 요구로 1968년 뒤집혔다. 미국이 과거의 합의를 받아들여 그 섬을 일본에 반환한 것이다. 당시 영토 협상의 기준이 됐던 지도에 의한다면 대마도 영유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은가."

그는 전혀 물러설 것 같지 않으니, 내가 서울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조선일보 9월 17일 게재


혁신학교? 혁신은 개뿔! 애들 학력만 퇴행중! 교무실 커피자판기, 교사 항공권 구입에 물 쓰듯...특혜 불구 학력은 뒷걸음 일반학교에 비해 연간 1억4,000~1억5,000만원을 특별히 지원받는 서울형 혁신학교가 예산을 엉뚱한 곳에 쓰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특별예산(학교운영비)으로 교사실의 각종 책장이나 가구를 구입했고, 수백만원을 들여 학습자료 저장용 USB와 외장하드를 사서 나눠 갖은 사실도 밝혀졌다. 교무실 커피자판기를 구입하는데 특별예산을 쓴 혁신학교도 있었다. 이밖에도 여직원 휴게실 가스보일러 교체, 부장교사 워크숍 항공권 구입, 교직원 전체 체육복 구입 등 본래 목적과는 거리가 먼 곳에 특별예산을 물 쓰듯 전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학생들에 대한 선심성 예산 집행 정황도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학생 티셔츠 구입, 진공청소기 구입 등에 특별예산을 수백만원씩 사용했다. 학생들의 생일축하용 떡케익 구입비용으로 매달 70~90만원을 사용한 곳도 있었다. 반면 서울형 혁신학교의 학력은 일반학교에 비해 오히려 뒷걸음질 친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내용은 서울시교육청이 새누리당 강은희 의원에게 제출한 2012년 혁신학교 정산서 통합지출부를 통해 밝혀졌다. 서울형 혁신학교는 곽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