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익은 호남인들을 가장 많이 죽였다
6월 22일 親北반국가행위진상규명위원회 「6·25세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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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22일 세미나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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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는 동족상잔(同族相殘)이 아니다. 공산주의(共産主義) 침략(侵掠)전쟁이자, 전체주의(全體主義) 확산(擴散)전쟁이며, 소련의 제국주의(帝國主義) 전쟁이었다.
당시 한반도에는 탱크나 전폭기라는 개념이 없었다. 그런데 소련이 T-34, 야크기를 전쟁에 동원했다. 북한 7개 사단이 남침했는데, 이 중 4개 사단은 모택동 팔로군(八路軍)에서 훈련받은 자들이었다. 최고사령관 김일성, 박헌영은 전쟁 직전 2년간 약 5개월에 걸쳐 소련에 머물며 지령을 받았다. 6·25는 남한과 북한의 내전(內戰)이 아니다. 공산주의·전체주의·제국주의 세력의 일방적인 침략이었다.
인천상륙작전 후 20일간 광란적 학살
6·25는 「잊혀진 전쟁」이 되더니 「왜곡된 전쟁」이 되고 있다. 군경(軍警)과 미군(美軍)이 민간인들을 학살했다는 식이다. 이것은 심각한 거짓이다. 6·25당시 학살은 좌익세력이 저질렀다. 좌익세력에 희생된 양민학살 숫자는 52년 내무부 통계연감에 따르면 12만2799명. 52년 공보처에서 나온 자료에 따르면 5만9994명에 달한다.
시기적으로 ①50년 6월25일부터 9월15일 인천상륙작전, ②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인민군 퇴각 시점까지 크게 두 번에 걸친 양민학살이 저질러졌다. 50년 9월15일까지는 그나마 선별적(選別的) 학살이었다. 인민재판 등을 통해 이유(理由)는 말하고 죽였다. 50년 9월15일에서 10월5일 사이 약 20일간은 인류사에 유래가 없는 광란적(狂亂的)학살이 저질러졌다.
「유엔군 상륙 시 지주가 될 모든 요소의 제거」라는 당의 명령이 무차별 학살로 나타났다. 대전·광주·전주·평양형무소 등에서는 큰 우물 속에 마치 새우젓 담그듯 사람들을 생수장(生水葬)·생매장(生埋葬)했다. 대전형무소는 우물마다 300여 구의 시신이 발견됐다. 북한 지역 덕산의 니켈광산, 반룡산 방공굴에서는 각각 6000명 이상이 학살당했다.
건국세력·기독교인이 주요 희생자
희생자들은 대한민국 건국을 주도한 자유민주주의 세력이었다. 대부분 공무원, 군인, 경찰 우익단체 책임자나 회원들이었다. 예컨대 50년 7월 전북 순창군 복흥면에서는 150명의 군인, 108명의 우익인사, 25명의 경찰, 920명의 이들 가족들이 죽임을 당했다.
또 다른 학살대상은 기독교·천주교 세력이었다. 공산주의에서 종교는 아편으로 여겨졌을 뿐 아니라 북한정권 건립에 철저히 반대했던 것도 교회였기 때문이다. 통계에 따르면 6·25 당시 182명의 신부 등 천주교 교직자들과 540여 명의 목사들이 피살됐다. 전남 임자도에서는 100여 명씩 구덩이를 파고 학살했고, 충남 논산 병촌교회에서는 한 살짜리 어린아이부터 육순의 노인까지 모든 소속 교인들을 죽였다.
학살된 희생자 중 82%가 호남
양민학살의 最大 피해지역은 호남이었다. 52년 내무부 자료에 따르면 총12만2799명의 학살자 중 전라도지역이 7만9708명으로서 전체의 65%를, 52년 공보처 자료에 따르면 총5만9932명의 학살자 중 전라도지역이 4만9114명(전남 4만3511명)으로서 전체의 82%를 차지했다.
6·25는 한반도에서 벌어진 모든 전쟁과 내용 및 차원을 달리한다. 인류가 출현한 이래 벌어진 가장 처참한 전쟁이었다. 1년이라는 단위시간 당 가장 많은 사람이 죽은 전쟁은 2차 대전-1차 대전-한국전쟁 순이다. 그러나 6·25는 세계전쟁이 아닌 한반도라는 지극히 작은 지역에서 벌어진 것이기에 더욱 참혹했다. 자유(自由)를 빼앗고, 재산(財産)을 박탈하는 공산주의 전쟁의 잔혹성을 입증시켰다.
대규모 학살은 더욱 자세히 밝혀져야 한다. 사료를 통한 규명이 계속돼야 한다. 그런데 6·25가 잊혀진 전쟁이 되더니 이젠 왜곡된 전쟁으로 변질되고 있다. 전체주의와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6·25 규명은 향후 통일의 체제를 결정하는 방향이 될 것이다. ◇
정리 김성욱 기자: http://조갑제.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