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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뉴스

이 나라엔 어떤 상징(象徵)이 있는가?

빨치산 탑은 세우면서 建國대통령 동상은 부수는 나라

나라의 정체성(identity)을 보여주는 상징(象徵)이 있다. 북한 전역에 설치된 3만5천여 개의 金日成동상은 金日成의 망령(亡靈)이 통치하는 북한의 실상을 보여준다.

대한민국에는 어떤 상징이 있는가? 2008년 1월 말 기자는 명륜동 일대를 헤매고 다녔다. 李承晩 박사의 동상 조각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들 조각은 1956년 서울의 탑골공원과 남산공원에 건립됐던 동상의 일부분인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서와 동사무소도 정확한 위치를 몰랐다. 동네 주민들에게 물어물어 몇 시간을 뒤진 끝에 명륜동 1가에 위치한 한 허름한 집에 다다랐다. 소리가 났다, 안 났다 하는 고장 난 벨을 한참이나 눌렀지만, 소식이 없었다.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인근 노인정과 부동산을 다시 뒤졌다. 알아낸 정보라곤 鄭 모라는 70대 할머니 한 분이 산다는 것, 그리고 겨울이면 딸네 집에 가 있느라 사람이 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난감했다. 높다란 철문 사이론 마당에 무엇이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근처 공사현장에서 블록 몇 개를 가져왔다. 간신히 시야를 확보해 들여다보니, 아니나 다를까 동상 같은 게 보였다.

카메라 줌렌즈를 갈아 낀 후, 팔을 들어 틈새로 셔터를 눌렀다. 초점이 맞질 않아 수십 커트를 찍어야 볼만한 사진이 한두 장 나왔다. 한 시간 가까이 수백 번 셔터를 눌렀다.

사진 속에 나온 동상은 두 개였다. 사람 키만 한 李承晩 박사의 얼굴 부분과 그 보다 조금 작아 보이는 상체 부위였다. 동상 파편은 사람이 살지 않은 빈 집 마당에 흉물처럼 버려져 있었다. 머리 부분은 아이들이 장난을 쳤던 흔적인지, 눈과 귀가 파란 색 노끈으로 묶여져 있었다.

억장이 무너졌다. 이 나라는 건국(建國)의 아버지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명륜동 집에 상체부분만 남은 李承晩 동상은 파고다 공원에 세워져 있었다. 이 동상은 1956년 5월31일 「대한소년화랑단」에 의해 세워졌고, 2미터40센티 높이에 기단까지 6미터에 달했다. 그러나 4·19 직후 시위대에 끌어내려져, 쇠줄에 묶인 채 길바닥을 뒹구는 수모를 겪게 된다.

사람 키만 한 李承晩 동상의 머리 부분은 1956년 8월15일 남산 중턱에 세워진 동상의 일부이다. 남산 동상은 초대대통령 선서식에서 선서문을 낭독할 때의 모습을 조형화한 것으로 본체 7미터, 기단까지 합치면 25미터에 달하는 초대형이었다.

남산 동상 역시 4·19이후 1960년 7월 국무회의에서 철거가 결정됐고, 같은 해 8월19일 중장비를 동원해 해체했다. 동상은 닷새에 걸쳐 조각조각 파괴됐다. 처음에는 오른 팔, 다음에는 왼 팔이 잘려나갔다. 이후 이곳엔 분수대가 만들어졌다.

폐기된 것으로 알려진 이들의 존재가 다시 세상에 드러난 것은 1970년 3월의 일이었다. 당시 「코리아 라이프」라는 잡지에는 「95회 생일을 쓸쓸히 맞는 老정객 故 李承晩 박사의 퇴락한 잔영」이라는 제목의 글이 수록됐다. 이 글은 서울 명륜동1가에 동상의 잔해가 흘러오게 된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4·19 직후 李박사 동상은 어느 고철상인에 의해 용산에 있는 모 철공소에 인계되었었다. 홍윤성씨가 철공소로부터 李박사 동상을 구입할 때는 이미 동상 하체는 완전 분해된 후였다. 그나마 남은 부분을 철공소 주인을 달래어서 운반비조로 20만원을 지불한 홍씨는 20여명의 인부를 동원, 현재의 위치로 옮겨놓은 것이란다』

90년대 초반 李承晩 동상 파편 소식이 다시 알려진 뒤, 「이화장」측에서 매입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소유자 측이 거액을 요구해 무산된 것으로 전해진다. 정부에서 사들여야한다는 여론도 있었다. 그러나 좌파정권이 동상을 악용하려는 의도가 엿보여 이 역시 무산됐다. 『독재자의 말로(末路)는 이렇다』며 조롱의 대상으로 삼으려했던 것이다.

<공공장소에 건립된 동상은 전혀 없어>

4·19의 혼란 속에서 공공장소에 있던 李承晩 동상은 모두 끌어내려졌다. 배재대와 인하대에도 李承晩 동상이 있었지만, 90년대 초반 좌파학생들의 데모로 철거됐다. 이들 학교에 있던 동상은 박물관으로 옮겨진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기자가 확인해 본 결과, 현재는 정확한 소재 파악조차 되지 않고 있었다. 대학 측은 『크기가 너무 커 모처에 저장돼 있다』고 말했지만, 기자의 사진자료 요청도 모두 거절했다.

현재 李承晩 동상은 국회 본관 3층 로비와 「이화장」에 하나씩 총 두 개가 있다. 국회 내 동상은 90년대 중반부터 건립 움직임이 있었으나, 좌파성향 국회의원들의 반대로 1999년 가까스로 세워졌다. 그러나 국회 본관은 일반인의 출입이 허락되지 않는다. 李承晩 박사의 「얼굴」을 보려면 까다로운 절차와 허가를 거쳐야 가능하다.

일반인이 볼 수 있는 李承晩 동상은 「이화장」 한 곳에 위치해 있다. 그러나 이곳도 지리적으로 일반인의 접근이 쉽지 않을 뿐 아니라 李 前대통령 양자인 이인수 박사 사택이 위치한 가정집이다.

<남한산성에 묻혀버린 李承晩 박사 탑>

사라진 것은 李承晩 동상만 아니다. 경기도 남한산성에 건립됐던 「대통령 리승만 박사 송수탑(頌壽塔)」이라는 명칭의 李承晩 박사의 기념탑은 현재 남한산성 산 중에 묻혀 방치돼 있다.

이 탑은 1956년 6월15일 李박사의 건강을 기원해 건립된 것으로서 역시 1960년 4·19 이후 정부 명령으로 철거됐다. 철거에 동원됐던 주민들은 4m가량의 탑과 탑 위에 놓인 봉황 모양의 청동 조각을 분리해 탑 부분만 기단 앞 땅 속에 묻었다.

현재 탑이 묻힌 곳은 남한산성 정상 근처 평지로서 십여 개의 경계석과 원탁 石탁자 만이 육안으로 확인된다. 봉황 모양 청동 조각은 남한산성 공원 측이 보관해왔으나, 수 십 년 전 유실된 상태이다.

이 탑이 남한산성에 세워진 이유는 李박사가 남한산성을 자주 찾았던 데 기인한다. 李박사는 일 년에 서너 차례 남한산성을 찾아서 남문에서 내려 정상까지 걸어 올라간 후 동문 쪽으로 내려갔었다고 지역민들은 전해준다.

<빨치산 탑은 세우면서 건국대통령 동상은 없는 나라>

감사할 줄 모르는 백성이 축복받을 수 있을까? 지금 우리가 누리는 풍요의 씨앗은 李承晩 대통령이 만든 텃밭에 뿌려져, 朴正熙 대통령에 의해 기르고 가꿔졌다. 해방공간에서 수많은 이들이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주장하고 있을 때, 李承晩 박사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기초한 대한민국을 설계했다.

2차 대전 이후 대한민국의 기적적 성취는 李承晩이 만들어놓은 시스템 위에서 가능했다. 李承晩이 없었다면, 공산화(共産化)는 필연적 과정이었다. 절망의 땅이 된 북한과 희망의 기지가 된 남한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정상적인 국가라면 李承晩, 朴正熙 동상은 물론 큼지막한 기념관이 몇 개는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좌파정권 10년을 거치며 대한민국에는 李承晩, 朴正熙 기념관 대신 북한식 상징이 세워져왔다.

예컨대 지금도 전북 고창군 선산마을 靑보리밭 앞 공원에는 『국군과 경찰이 양민을 무차별 학살했다』는 날조된 해설과 함께 소위 「빨치산위령탑」이 세워져있다. 심지어 이 탑을 짓는데 도비(道費) 8천만 원·군비(郡費) 2천만 원 등 총 1억 원의 국고(國庫)가 지원됐다.

노무현 정권 들어서는 광화문 한 복판에서 간첩·빨치산 추모제가 버젓이 행해지고 있다. 기자는 지난 해 10월13일 광화문 열린공원에서 열린 소위 「제18회 민족민주열사·희생자 범국민추모제」를 취재한 적이 있다. 열린공원에 설치한 분향소·전시물의 추모대상인 500여 명의 소위 「열사(烈士)」 중 상당수는 건국 이후 간첩·빨치산 활동으로 실형을 받은 인물들이었다. 이 행사에는 현역 국회의원 22명이 추모위원으로 이름까지 올렸었다.

<『逆賊비석도 세월이 지나면 다시 세우는데...』>

李承晩 박사의 독재를 이유로 李承晩에 대한 부정(否定)이 정당화될 순 없는 일이다. 대통령 李承晩을 평가할 때 종신집권을 위한 개헌과 3·15부정선거를 빼놓을 수 없다. 독재자란 비판도 가해질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잣대로도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건국 자체의 의미를 부정할 수는 없다. 이는 부분을 내세워 전체를 부정하는 잘못이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 워싱턴은 그의 일부 과오에도 불구하고 국부(國父)로 추앙받고 있고, 중국 북경의 천안문 광장에는 마오쩌둥의 초상이 걸려있다. 덩샤오핑이 그의 존재를 말살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4·19직후 李承晩 송수탑 철거에 참여했던 안호일氏는 기자에게 『逆賊비석도 세월이 지나면 다시 세우는데 나라를 세운 초대대통령 비석이 땅속에 묻혀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치 못하다』고 하소연했다.

세월이 흘렀고, 李承晩은 역사 속 인물이 됐다. 북한의 쇠락은 그의 업적이 과오로 가려질 수 없음을 증명해준다. 대한민국이 일류국가로 도약하기 위한 첫 번째 작업은 바로 건국대통령 李承晩에 대한 올바른 평가와 복원이 될 것이다.


혁신학교? 혁신은 개뿔! 애들 학력만 퇴행중! 교무실 커피자판기, 교사 항공권 구입에 물 쓰듯...특혜 불구 학력은 뒷걸음 일반학교에 비해 연간 1억4,000~1억5,000만원을 특별히 지원받는 서울형 혁신학교가 예산을 엉뚱한 곳에 쓰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특별예산(학교운영비)으로 교사실의 각종 책장이나 가구를 구입했고, 수백만원을 들여 학습자료 저장용 USB와 외장하드를 사서 나눠 갖은 사실도 밝혀졌다. 교무실 커피자판기를 구입하는데 특별예산을 쓴 혁신학교도 있었다. 이밖에도 여직원 휴게실 가스보일러 교체, 부장교사 워크숍 항공권 구입, 교직원 전체 체육복 구입 등 본래 목적과는 거리가 먼 곳에 특별예산을 물 쓰듯 전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학생들에 대한 선심성 예산 집행 정황도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학생 티셔츠 구입, 진공청소기 구입 등에 특별예산을 수백만원씩 사용했다. 학생들의 생일축하용 떡케익 구입비용으로 매달 70~90만원을 사용한 곳도 있었다. 반면 서울형 혁신학교의 학력은 일반학교에 비해 오히려 뒷걸음질 친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내용은 서울시교육청이 새누리당 강은희 의원에게 제출한 2012년 혁신학교 정산서 통합지출부를 통해 밝혀졌다. 서울형 혁신학교는 곽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