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차 亞太共포럼 발표내용
주제: 패망한 월남 탈출기
강사: 김창근
월남 패망 당시 한국대사관 서기관 역임
코스타리카 대사・카자흐스탄 초대 한국대사 역임
일시: 2013. 10. 23. (수) 오후5시
주최: 한국문화안보연구원・아시아태평양공동체
주관: 아시아태평양공동체
1975년 월남의 패망 당시 사이공에 있던 한국 외교관들은 도와주기로 했던 미국의 비협조와 일본과 프랑스 등 현지 열강의 무관심으로 탈출하지 못하다가 일부 교민들과 함께 사선을 넘으며 어렵게 베트남을 벗어났던 것으로 드러났다. 외교부가 공개한 1977년 외교문서에 포함된 '김창근 주월남 대사관 서기관의 탈출 수기에는 월남 패망 당시 대사관 공관원들과 교민들의 절박했던 상황이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 탈출수기에 나타난 내용은 월남 패망직전인 1975년 4월 28일부터 5월 11일까지의 상황이다. 다음은 김 서기관의 수기를 요약한 것이다.
월남 패망 이틀 전인 4월 28일 사이공에 있던 주월 한국대사관은 긴박한 월남 상황을 인지하고 탈출계획을 세웠다. 이에 미국 대사관과의 협조체제를 마련하고 29일 탈출을 위해 미 대사관으로 향했다.
미 대사관이 애초 주월 한국 공관원들과 교민들을 집결시킨 곳은 포인트3 (국제개발처 직원 숙소 근처)이란 곳이었다. 김영관 주월 대사와 김창근 서기관 일행이 “항공기 1대를 내줄 테니 준비하라”는 미국 측의 연락을 받고 포인트3으로 향했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어 곧바로 미 대사관으로 향했다. 하지만 미 대사관의 상황은 일행에게 여의치 않았다.
미 대사관이 자국 국민을 먼저 분류, 헬기를 이용해 탈출을 시켰고 우리 대사관 직원 및 교포들의 탈출을 계속 뒤로 미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와중에 미 대사관에 도착해 대사실로 들어갔던 김 대사가 먼저 떠났다는 이야기까지 들렸다. 이대용 당시 공사가 미 대사관에 확인하니 사실이었다.
더군다나 김 대사가 떠난 후 미 대사관측은 미국인을 우선 철수시키고 한국인을 월남인에 우선하여 철수시키라는 본국지시가 없었는데 왜 여기로 왔냐며 우리 공관직원들과 교민들을 탈출시킬 의사가 없음을 내비쳤다.
다음날 (4월 30일)까지 이대용 공사의 지휘 아래 미 대사관에서, 마지막 헬기를 타기 위해 애써 봤지만 불가능했다. 탈출 막바지 마지막 남은 헬리콥터를 타려고 했는데, 경비를 서던 미 해병대원은 최루탄까지 쏘며 우리를 저지했다. 결국 우리들과 100여명의 교민들은 남겨졌다.
마지막 헬기가 떠난 후 남은 사람들은 다른 외국 대사관에 도움을 요청했다. 프랑스 대사관에서는 출입을 막았다. 일본 대사는 “우리도 힘이 없다”며 얘기 도중 자리를 떴고, 밑의 직원은 볼펜을 선물로 주며 “우리에게 폐가 되는 일은 삼가 달라”고 했다. 공관원들이 베트콩에 잡히는 것보다 죽는 게 낫다며 병원에 가서 “자살하기 위한 약을 달라”고 했다. 당시 사이공에 있던 프랑스 병원(Gaall Hospital)에 몸을 숨기며 다시 탈출 방안을 강구했다. 하지만 병원 측에서도 베트콩들의 위협에 한국인들을 보호할 수는 없다며 병원을 떠나라고 종용한다. 더욱 더 절망에 빠진 일행은 청산가리와 수면제 등으로 자살하려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일단 병원을 떠나긴 했지만 그대로 탈출 의지는 포기하지 않은 일행이 현지에 있던 교민회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여기서 본격적인 독자 탈출방안을 교민들과 모색했다. 처음 나온 안은 서해안 지역인 락차를 통해 태국으로 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전통적인 공산군 소굴이라는 이유로 일행들이 반대했고 무산됐다.
그 다음으로 고려된 방안이 붕타우 북쪽에 있는 롱하이로 가서 탈출한다는 것. 하지만 일행은 또 다시 탈출을 포기했다. 탈출하다 잡히면 오히려 생명이 보장되지 않으니 앉아서 보호를 받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그렇지만 본인(김 서기관)만은 예외였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곳을 빠져나가야 겠다는 생각에 탈출을 결행하는 교민일행과 함께 하기로 혼자서 결심했다. 병원에서이미 자결을 결심했기 때문에 두려울 게 없었다.
이렇게 해서(5월 3일) 결국 공관 직원 중 본인(김 서기관) 혼자만 독자 출발하게 됐고 일행은 5월 3일 오전 11시에 사이공 탈출을 감행하게 된다. 이들은 오후 2시 롱하이에 도착하기까지 3시간 동안 6개의 검문소를 맞닥뜨려야 했다. 도중에 베트콩을 태워주기도 하는 모험도 감행했다. 이렇게 롱하이에 도착한 일행은 돈을 주고 배를 사 바다로 나섰다. 하지만 선장이 말을 듣지 않아 선장을 가두고 일행이 직접 배를 운행했다.
5월 5일, 대만 배를 만났다. 그 배 선장과 타협해서 일부는 그 배에 타고, 나머지는 원래 타고 온 배로 대만 배를 따라가기로 했다.
5월 7일, 대만 선장이 다시 “기름과 물을 줄 테니 내리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모두 우리 배로 옮겨 탔다.
5월 8일, 싱가포르가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경비정이 상륙을 불허했다. 결국 나 혼자 육지에 올라 현지 영사를 만나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9일 나머지 일행도 상륙했고, 우리는 11일 무사히 서울로 귀환했다.
“외교문서 공개에 관한 규칙”(외교부령)에 따라 생산한 지 30년이 경과하여 비공개 연한이 풀림에 따라 외교문서가 공개된 것이다.
이 탈출 기록 속에는, 김창근 서기관(이후 코스타리카・카자흐스탄 대사를 지낸 뒤 1996년 퇴임)이 외교관으로서 당시의 급속한 상황 속에서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저작권자> (C )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서울=연합뉴스) 이우탁 유현민 기자 입력시간 : 2008/01/15 00:27:47
배부한 자료의 내용과 더불어 두서없이 많은 말을 한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합니다. 현재 저는 동작동 국립현충원이 보이는 곳을 지날 때면, 차 안이든 거리에서든 꼭 자세를 바르게 하고 모자를 벗고 고맙다고 인사를 합니다.
왜냐하면 그때 나는 죽으려고 했습니다. 북한으로 끌려가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요. 그러나 가족이 있고 나라가 있어서 저는 살아서 돌아왔습니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참석자 명단 (21명)
김제원 (서울시청 국장 역임)
김종대 (단국대 명예교수・독문학)
김호산 (전 한국지적공사)
박명수 (한국문화안보연구원)
박순영 (연세대 명예교수・철학)
박창학 (전 KBS)
박희도 (대불총 회장)
배용 (한국문화안보연구원)
신윤희 (대불총 상임감사)
신정례 (한국문화안보연구원)
심상철 (세무사)
윤문권 (사업가)
이석복 (한국문화안보연구원장, 대불총 사무총장)
이영석 (ERA코리아 회장)
임광수 (전 한국자유총연맹 매체본부장)
전귀옥 (금강선원)
정천구 (서울디지털대 석좌교수・정치학)
정태경 (독일 철학박사, 동국대 강사)
정행산 (경기매일신문 대표)
최두환 (중앙대 명예교수・독문학)
한승조 (본법인 이사장, 고려대 명예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