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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해도 여행기

북해도 여행기

한승조  고려대 명예교수・대불총 상임고문

   

  

나는 오래 전부터 홋카이도(北海島) 여행을 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 이유는 아마도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나는 미국을 오가는 도중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동경을 여러 번 들러보았고, 또 몇 년 동안 夏季방학 중에 큐슈(九州) 후쿠오카(福岡)의 한 대학에서 강의를 하였으므로 그 地域은 낯설지 않다. 둘째는 신간센을 타고 일본 열도를 다녀보았으나 북쪽은 가본 일이 없었다.

그러나 일본 지도나 동아시아의 지도를 보면 북쪽의 알라스카 아래 오오츠크해 아래 보이는 시베리아 동부와 사할린 그리고 바다 한가운데를 차지하는 北海島가 늘 내 눈에 크게 보였다. 북해도는 주변의 많은 섬들을 군림하는 왕자격이라고 할까? 어디선가 북해도의 겨울 얼음축제가 유명하다는 말을 들었다. 그렇다. 북해도에 가려면 한겨울 아니면 한여름이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만 하고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가 이번 3월에 불현 듯이 북해도 여행을 하게 된 것이다.

 

첫날, 38

38일부터 11일까지 34일 일정이라는 여행사의 통지를 받고 38일 아침 4시 반에 기상해서 라면으로 아침식사를 때운 후에 아내와 같이 집을 나왔다. 집 앞에서 택시를 잡아 가양역 근처로 가자고 하니 택시 기사가 인천공항으로 가려느냐고 묻는다. 그렇다고 하니 이 택시로 가시지 그러느냐? 얼마냐 물었다. 인천공항까지 3만원에다가 도중 톨 값 몇 천원만 더 주면 된다는 것이다. 아니다. 가양역 근처 공항버스 정류장까지 가자고 했다.

공항버스 정류장에서 도착하니 65분이었다. 12분을 더 기다리면 버스가 오는데, 또 어떤 택시가 손님을 태워왔다. 부녀였는데 짐이 많았다. 그 택시기사도 3만원만 받을 터이니 택시로 가자고 사정하는 것이었다. 그 부녀는 대꾸도 하지 않고 짐을 챙겼다.

이 택시는 인천차이니 어차피 빈차로도 가야만 할 처지이다. 공항버스 값으로 그냥 타라는 말을 듣고 나는 아내와 그 차에 올라탔다. 그 차는 마구 달리는 것이었다. 교통규칙을 지키라고 주의를 했더니 자기는 손님이 없으면 시속 200 킬로로 달린다는 것이다. 우리 때문에 매우 천천히 가는 것이라고 생색내듯 말하는 것이었다. 어찌했던 우리는 공항버스 요금으로 인천공항에 일찍 왔다.

우리 일행이 모이는 시간은 7시 반이었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 나는 조금 늦겠다고 여행 가이드에게 미리 말해 놓았는데, 7시도 안되어 도착했기에 공항 의자에서 일행을 한참 기다려야 할 판이었다.

 

북해도 千歲(지토세) 비행장에서 죠상케이 온천마을로

대한항공 비행기가 105분에 이륙했다. 바다 위에는 구름이 깔려 있어 아래는 보이지 않았다. 1130분이 되니까 아침 겸 점심식사가 나왔다. 나와 아내는 잘 먹었다. 북해도 지토세(千歲)공항에 내려서 짐을 찾아 밖으로 나오려고 하는데 우리 일행 20명 중 두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공항의자에 앉아서 한 시간 반 정도를 기다려야했다. 오늘부터 구경 다닐 곳도 많은데 이렇게 공항의자에 언제까지 앉아있어야 하지? 짜증도 났지만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여행가이드가 이리저리 찾아다니더니 끝내 두 노파를 데리고 왔다.

전세버스를 타고 가는데 역시 북해도는 산이 많고 또 가는 곳 마다 눈이었다. 산에는 삼나무인지 백화(시라가바)나무인지 눈 사이에 서 있었고 버스는 오랫동안 계속 달렸다. 그리고 한참 후에 도착한 곳이 죠상케이라는 온천마을이었다. 거의 두 시간 걸려서 도착한 곳이 定山溪라는 마을인데 100년 전에 定山(죠상)이라는 승려가 이곳에 온천을 파고 또 파서 이곳을 온천지로 만들었다. 그래서 그 스님의 이름을 따서 이 지역을 定山溪(죠상께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호텔은 매우 컸다. 우리 일행 중에 속이 편치 않아서 녹초가 되듯이 엎드려 있었던 60대 초반의 장년이 있었다. 버스에서도 돌보았지만 호텔에 내리자 그 분을 내 의자 옆에 앉히면서 일행에게 물었다. 누군가 사혈침을 가진 사람은 없느냐고 물었더니 누군가가 가지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 사혈침으로 신문지를 깔고 손가락 끝 위대장기맥 상응점에다 사혈을 했다. 피는 생각한 것만큼 많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많이 좋아졌을 것이라고 말하며 나는 손을 씻었다. 전라북도 고창에서 몰려온 12명의 가족 친지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나와 아내는 배정된 호텔 방안에 들어와서 옷을 벗고 쉬었다. 여행계획에는 그 주변 숲을 산책하며 힐링을 하라는 것이었지만 여기까지 오는데 피곤하였던지 나가서 산책할 생각이 없었다. 창가의자에 앉아 밖을 구경하는데 마침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러니 산책을 하지 않을 명분도 생긴 것이다. 나는 가져온 소주에다 수돗물을 타서 마시며 휴식을 즐겼다.

저녁 여섯 시부터는 저녁식사라 식당으로 갔다. 매우 넓은 홀이었는데 천장도 엄청나게 높았다. 식사는 일식과 양식의 혼합 뷔페였다. 정해진 자리에 정좌하고 각자는 담아온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음식이 너무 여러 가지라 무엇을 선택할지 망설여졌다. 음식 선택도 쉽지 않다.

나는 한 구석에 일본 미소시루 된장국이 있는 것을 보고 한 사발 가지고 와 덜어놓고 마셨더니 옆에 있던 어떤 부인이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이것은 된장국이다. 한번 먹어보라고 권했더니 맛있다고 감탄하는 것이었다. 자기들은 이런 된장국이 있는 것을 못 보았는데 이것이 어디에 있느냐 물었다. 그래서 나는 그 미소된장 그릇을 그 앞에 밀어주며 다 먹으라고 말한 다음 다시 두 그릇 더 가져와 아내에게 나누어 주었다. 아내는 먹던 것 중 제일 맛이 있다고 말했다.

나는 가이드가 무엇인가를 먹지는 않고 계속 손으로 젓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나중에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낫도라는 것이다. 일본에 와서 낫도를 안 먹는 것은 한국에 와서 김치를 먹지 않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나는 일본에 여러 번 와 보았지만 낫도를 먹는 것은 처음 보았던 것이다. 늘 호텔에 묵으며 혼자서 식사를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려는데 많은 사람들이 식당으로 몰려들어 왔다. 개중에는 일본인들도 있었지만 중국인 한국인 기타 외국인들이 더 많은 것 같았다. 일본 사람들은 남자나 여자나 호텔에 비치된 유까다를 거의 입고 있었는데 외국인 중에도 일본인들을 흉내 내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았다. 아하! 여기가 과연 국제적인 관광지역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숙소에 들어오니 앞으로 남은 밤 시간에 할 일이 마땅치가 않았다. 그래서 나와 아내는 온천탕 구경이나 하자며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이것저것 구경하다가 욕탕에 들어가자고 하며 8시에 밖 의자에서 만나기로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남은 시간이 약 40분이라 바쁘게 목욕하고 밖에 나와서 아내를 기다렸다. 15분이 지났는데도 아내는 나오지 않았다. 아내를 기다리고 있는데 함께 온 남자일행들이 욕실 밖으로 나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자연스레 말을 주고받게 되었다.

우리들 앞에 호텔 안마 마사지실이 있었다. 주인이 나와서 우리들을 보며 기웃거렸다. 우리들끼리 이야기하다가 그 중 한 사람이 자기는 목이 뻑뻑하고 아픈데 저런 것을 하면 효과가 있느냐고 나에게 물었다. 나는 안마를 받으면 좋아질 것이니 가서 받으라고 권했다. 그 사람은 안마실로 들어갔다. 오늘 낮에 내가 사혈한 사람이 안마를 받으면 좋을 것이라고 말하니까 그들은 즉시 그 사람에게 전화했고, 그 사람이 내려올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는 동안에 아내가 나와서 우리는 호텔방으로 올라가서 편하게 잠을 잤다.

 

둘째 날, 39-오타루지역 관광과 삿뽀로행

도착 이틀째. 아침식사를 한 후에 짐을 가지고 로비로 나갔다. 전세버스에 올라탔는데 오늘은 일정을 변경해서 오타루라는 소도시로 갔다가 삿뽀로로 싣고 간다는 것이었다. 버스는 눈에 휘덮인 북해도의 산길을 달리고 또 달렸다. 북해도는 정말로 눈과 숲 그리고 산길밖에 볼 것이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가이드는 긴 시간 동안 마이크를 대고 오만가지 이야기를 했다.

가이드는 50대 초반의 날씬한 남자였다. 일본말은 거의 일본인 수준이었다. 자신은 한국에서 살고 취직했다가 IMF를 만나서 직장에서 떨려난 후, 할 일이 없어서 일본에 와 7년을 보낸 다음 다시 한국으로 들어가 여행사에 취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재일조선인으로 일본에서 출생해서 자랐고, 한국에서 대학을 다닌 것 같아 보였다.

말 중에 북해도의 역사이야기가 나왔다. 북해도는 원래 북방의 아이누족의 생활공간이었다. 1905년경 정식으로 일본 영토로 합병되었다는 것이다. 일본의 누군가(북해도 개척에 골몰하여 개발을 주도했다는 인물)의 노력으로 북해도가 일본 국토로 편입되었다. 아이누족 중에도 일본에 귀화하여 일본인이 된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끝까지 아이누족의 정체감을 고집하며 동화를 거부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들의 후예는 현재 아이누족 수용시설에 격리되어서 산다는 것이다. 알고 보니 북해도도 한일합방과 같은 시기에 일본에 의하여 점령당하고 또 동화되기 시작한 지역이었음을 알 수가 있었다.

북해도가 일본의 성장발전에 어떠한 기여를 하였을까? 북해도는 그동안 일본의 농업 어업 관광업의 기지역할을 해왔다. 또한 정치외교적으로는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는 제일선이 되어왔으며 미국을 위해서 방파제 역할도 해온 것이다. 또 일본 본토로부터 개발을 위하여 적지 않은 인구를 이주시켰으므로 일본의 과밀인구 해소에도 크게 기여하였을 것이다.

전세버스는 우리를 북방의 바다에 임해 있는 오타루라는 소도시에 하차시켰다. 우선 보여준 것이 오타루 운하였는데 그 소도시가 일본영화 러브레터의 촬영지였다고 한다. 나도 그 영화는 보았지만 어디가 어디인지 식별할 수가 없었다. 점심은 오타루 명물이라는 일본 초밥세트를 먹었다. 분량도 많았지만 소화력이 왕성하지 못한 우리 노인에게는 큰 대접이라고 하나 그리 좋아할 것은 없었다.

그곳에서 나와 구경한 곳이 키타 이치 글래스 점포와 마을관광과 오르골 전시장이었다. 조그만 기계에서 맑은 음악소리가 나는 것은 일본인들이 좋아하고 선물로서는 괜찮을 것이나 나의 취미는 아니었다. 나는 심포니오케스트라의 대규모 음악을 좋아하지 그렇게 작고 예쁜 기계의 기교적인 음악을 특별히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들은 다음 행선지인 삿뽀로시로 들어갔다. 내가 한 말 때문에 버스는 삿뽀로대학 곁을 지나게 되었는데 삿뽀로대학은 미국이 적극 관여해서 만든 농과대학이다. 전신인 농업학교의 미국인 클라크 교장은 ‘Boys. Be Ambitious'라는 말을 한 것 때문에 유명해진 것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터이다. 그리고 보면 북해도는 일본과 미국이 합작해서 개발한 땅임을 알 수가 있었다.

그 농업학교는 삿뽀로대학으로 발전했는데 노벨수상자를 한두 명 배출하여 현재 세계적 랭킹에서 아마도 서울대보다 높은 위치에 있지 않은가 생각되며, 북해도의 농업대학은 한국에도 큰 기여를 하였다. 내가 아는 고려대 농과대 교수들도 상당수 여기서 공부한 사람들이다.

나는 황우석 박사도 북해도에서 공부한 적이 있다고 알고 있다고 말하니까, 어느 할머니가 그가 또 검찰에 기소되어서 감옥에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받았다. 국가적으로는 그런 사람은 키워야지 고소해서 병신 만들어서 좋은 일이 있느냐? 황우석이 제거되는 바람에 줄기세포연구는 영국과 미국이 앞서버린 것인데 한국인들의 파벌정신과 시기심은 큰 문젯거리라고 말했다.

삿뽀로시에는 名物(명물)이 많다. 오도리공원은 춤추는 공원인가 하였더니 그것이 아니라 大通(대통)하는 거리라는 뜻이었다. 그곳은 여름이 아닌 겨울에는 볼 것이 없는 공원이나 그 주변에는 구경거리가 많았다. 북해도 개발의 역사를 담은 시 건물이나 기타 역사적인 건물들이 있었고 그 지하에는 초호화 상가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내가 가장 좋아 했던 곳은 삿뽀로 맥주 공장이었다. 그 건물에 들어서니까 삿뽀로 맥주 공장의 역사가 전시되어 있었고 500엔을 내니까 삿뽀로 맥주 세 병이 담긴 나무상자를 주는 것이었다. 그것이 얼마나 맛이 있는지 두 병은 내가 마시고 아내에게 한 병을 주니까 평소에 입에도 대지 않았던 아내가 한 병을 다 마시는 것이었다.

우리는 거기서 나가 지하상가로 걸어가는데 서점이 있어서 일행더러 먼저 가라하고 혼자서 서점에 들어가 책을 구경하다가 잡지 한권을 샀다. 어떻게 우리 일행을 만날까 걱정하며 밖으로 나왔는데 일행은 보이지 않았지만 대신 타고 온 버스가 보였다. 그래서 먼저 들어가 좌석에 앉아 있으니까 잠시 후에 일행들이 모두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날 우리는 조아이가니라는 이름의 큰 왕계요리를 먹었다. 무제한으로 먹어도 된다는 자리였다. 그리고 우리가 묶을 아파호텔로 갔다. 매우 쾌적한 숙박이었다.

 

셋째 날, 310

아침 9. 호텔 로비에서 일행과 만나서 간 곳이 도야호 방향이었다. 먼저 간 곳이 이른바 지옥의 계곡이었다. 산 속에 나무도 멋도 별로 없는 계곡 앞에 버스를 세워서 우리는 도보로 지옥의 계곡 앞에 내려서 미끄러운 길을 걸어서 올라갔다. 나무숲도 아니고 볼품이 없는 계곡이었다. 거기서 유황냄새가 난다고 하는데 나는 그 냄새도 맡지 못했다.

눈길은 얼어서 가지 말라고 하는데 나는 젊은 사람들이 가는 것을 보면서 따라 들어갔다. 길은 눈과 얼음이 덮여 있어서 매우 미끄러웠다. 그 길을 한참 가니까 온천물 김이 마구 올라오는 곳이 있었다. 사람들이 거기서 돌아서기에 나도 돌아서서 오다가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쪘다. 그때 나의 핸드폰이 주머니에서 빠져나와서 마구 앞으로 굴러가는 것이었다. 나는 그 핸드폰을 잡느라고 엉덩이 아픈 것도 미끄러운 것도 불구하고 가서 핸드폰을 잡았다.

버스는 도야호수로 갔다. 도야라고 하지만 한자로 보면 동리 할아버지의 호수라는 뜻이다. 그 앞에는 昭和(소화)신사라는 산이 보였다. 그것은 1943년대에 화산이 폭발해서 없었던 산이 솟아올랐다는 것이다. 昭和(소화)시대 새로 생겨난 산이라는 뜻으로 昭和新山(소화신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러고 보니 북해도는 아직도 火山이 살아 숨 쉬는 곳이다. 언제 또 어떤 화산이 터질는지 모르는 지역이라는 것이 된다.

도야호(洞爺湖)는 참으로 크고 넓으면서도 아름다웠다. 몇 년 전인가 세계정상회의가 이 호수주변에서 열렸다는 것을 보면 일본이 자랑하고 싶은 지역임이 틀림없다. 외부 구경을 위해 버스에서 내려 나가니까 눈이 내리고 또 바람이 너무 추었다. 그곳을 지나서 삿뽀로 근처의 호텔(삿보로 스스키노 호텔?)에 머물게 되었다. 여기서는 쇠고기 돼지고기 오리고기 등 마음대로 양 것 먹을 수 있는 음식점으로 안내해 들어갔다.

 

마지막 넷째 날, 311

311일 화요일. 호텔을 나와서 지토세공항으로 가는 도중에 미쓰이 아울렛을 들렀다. 일본에서 미쓰이 하면 한국의 삼성에 해당하는 최고 명문기업이다. 한국의 몇 개 백화점을 합친 것만큼 큰 백화점이다. 주차장도 엄청나게 넓었다. 나와 아내는 그 백화점을 둘러 볼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입구에 있는 안내소에 가서 도시락을 사려는데 어디로 가면 되느냐고 물었다. 안내원은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책자를 뒤지고 전화를 해보더니 위층에 등산용구를 파는 가게가 있으니 그쪽으로 가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올라갔으나 허탕을 치고는 다시 내려와 큰 상점 입구에서 화장실에 갔다가 눌러 앉아서 아이스크림을 사먹으며 드나드는 사람구경이나 하고 시간을 보냈다.

그곳을 떠나서 우리는 지토세공항으로 갔다. 그리고 생각지도 않게 공항 안 매점에서 내가 사려는 도시락을 찾아냈다. 가격은 2천오백엔으로 내가 가진 돈을 모두 털어냈으나 약 5백엔 정도가 부족하였다. 모자란 돈은 달러로 지불하겠다고 했으나 통하지 않아 신용카드로 결제하고는 그 도시락 통을 샀다.

나와 아내는 비행기에 올라타서 다시 점심식사를 하게 되었다. 쇠고기냐 닭고기냐 해서 나와 아내는 닭고기를 선택했고 맥주는 마셨는지 안 마셨던지 기억이 없다.

인천공항에 내리니까 530. 짐을 찾고 밖에 나온 것이 6. 그리고 공항버스로 집 동네에 내린 것이 7시경이었다. 공항버스가 바로 우리 집 근처에 내려주는 호강을 누렸다. 동네 음식점에서 외식을 하고 나흘 만에 나와 아내는 우리 방안으로 들어올 수가 있었다.

나와 아내는 북해도 여행길에서 투어 일행으로부터 계속 따뜻한 대접을 받았다. 지나고 보니 우리가 80대 노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전북 고창에서 온 12명 일행이 잘 대접해 주었기 때문인 것 같다. 무슨 큰 요리를 먹을 때면 늘 술잔을 나에게 건네주었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최고령 노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들 일행 중 한 사람의 신병을 챙겨준 노고에 대한 호감의 표시였던 것 같았다. 그러하던 아니하던 이것도 큰 복이 아닐까? (아시아태평양공동체 이사장)

 



혁신학교? 혁신은 개뿔! 애들 학력만 퇴행중! 교무실 커피자판기, 교사 항공권 구입에 물 쓰듯...특혜 불구 학력은 뒷걸음 일반학교에 비해 연간 1억4,000~1억5,000만원을 특별히 지원받는 서울형 혁신학교가 예산을 엉뚱한 곳에 쓰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특별예산(학교운영비)으로 교사실의 각종 책장이나 가구를 구입했고, 수백만원을 들여 학습자료 저장용 USB와 외장하드를 사서 나눠 갖은 사실도 밝혀졌다. 교무실 커피자판기를 구입하는데 특별예산을 쓴 혁신학교도 있었다. 이밖에도 여직원 휴게실 가스보일러 교체, 부장교사 워크숍 항공권 구입, 교직원 전체 체육복 구입 등 본래 목적과는 거리가 먼 곳에 특별예산을 물 쓰듯 전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학생들에 대한 선심성 예산 집행 정황도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학생 티셔츠 구입, 진공청소기 구입 등에 특별예산을 수백만원씩 사용했다. 학생들의 생일축하용 떡케익 구입비용으로 매달 70~90만원을 사용한 곳도 있었다. 반면 서울형 혁신학교의 학력은 일반학교에 비해 오히려 뒷걸음질 친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내용은 서울시교육청이 새누리당 강은희 의원에게 제출한 2012년 혁신학교 정산서 통합지출부를 통해 밝혀졌다. 서울형 혁신학교는 곽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