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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연재]이승만 시대(54) 4.19 유혈사태 뒤늦게 안 이승만 "부정을 보고 일어서지 않는 백성은 죽은 백성"

“학생들이 왜 이렇게 되었어? 부정을 왜 해? 이 젊은 학생들은 참으로 장하다!” 병원 위문

 

 

선거 결과에 대한 국민의 분노 폭발

 

선거 당일인 3월 15일에는 마산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 그것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7명이 사망했다.

이와 같이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이승만과 이기붕의 당선이 선포되었다.

이승만은 유력한 야당 후보가 없는 상태에서 유효투표의 97%를 얻었다.

그러나 이기붕이 76%의 득표로 당선되었다는 발표가 있자, 여론은 선거 결과를 인정하지 않았다. 뒤이어 부정선거의 증거가 폭로되면서 국민은 분노하기 시작했다.

이때 마산에서 또다시 심각한 사건이 일어났다. 4월 11일, 이전의 시위 때 행방불명되었던 한 중학생의 시신이 바다 위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것을 계기로 시위는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정부는 시위 배후에 공산주의자들이 개입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는 사이에 시위의 중심은 서울로 바뀌었다. 4월 18일의 고려대 학생들의 시위로 시작된 서울 시위는 4월 19일에 절정을 이루었다.

대학생과 고등학생들이 대규모로 시위에 참가한 것이다. 학생 시위대는 “부정선거 다시 하자”는 구호를 외치며 경무대를 향해 나아갔다.

그러나 그것을 저지하려는 경찰의 발포로 180여 명 이상이 사망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사태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부정을 보고 일어서지 않는 백성은 죽은 백성"

당황한 정부는 선거를 다시 하겠다고 발표했지만, 학생시위는 그치지 않았다.

미국도 한국 정부의 강경 진압을 비판했다.

게엄령이 선포로 군대가 출동했지만, 계엄사령관 송요찬 육군참모총장은 평화적 시위는 보장한다는 말로 시위대에 동정을 표시했다.

그 때문에 시위대가 군대 차량에 올라가 시위를 하는 모습도 보였다.

여기에 덧붙여 4월 25일에는 미국대사관의 격려를 받은 대학교수단이 학생들을 지지하는 시위를 벌였다. 그들은 “피의 값에 보답하라”는 현수막을 들고 시위에 참가했다.

높은 나이로 국민 대중과 직접 소통이 별로 없었던 이승만 대통령은 4월 26일에 가서야 유혈 사태가 일어났음을 알게 되었다.

상황을 어느 정도 정확히 파악하게 된 이승만은 “부정을 보고 일어서지 않는 백성은 죽은 것”이라고 말하면서 시위에 동정을 표시했다.

그는 청년 시절에 독립협회 행동대원으로서 조선왕조의 부패에 대항해 시위를 주도했던 자신의 모습을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병원을 직접 찾아가 부상당한 학생들을 찾아갔다.

그는 학생들의 처참한 상태를 보고, “학생들이 왜 이렇게 되었어? 부정을 왜 해? 부정을 보고 일어서지 않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지. 이 젊은 학생들은 참으로 장하다!”는 말로 위로를 했다.

서울대 병원으로 부상학생들을 위문하며 눈물을 흘리는 이승만 대통령.
▲ 서울대 병원으로 부상학생들을 위문하며 눈물을 흘리는 이승만 대통령.

"국민이 원한다면 물러나겠다"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에서 하야(下野)하겠다.”

4월 27일 이승만은 이와 같은 성명을 발표하고 사임서를 국회에 제출했다.

그러자 경무대에 피신해 있던 이기붕 가족이 자살했다. 그에 따라 자유당 정권의 핵심 세력이 흩어지게 되었다.

이승만이 대통령직을 물러나게 만드는 데는 자신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영향을 미첬다는 몇 사람들의 주장이 있다.

그러나 당시 국방장관으로 마지막까지 대통령 곁을 지켰던 김정렬(金貞烈) 장군은 그의 회고록 <항공의 경종>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누구의 압력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스스로 하야 결단을 내렸다고 증언하고 있다.

따라서 이승만은 혁명으로 타도된 독재자로 보는 시각은 크게 수정해야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김정렬 국방장관의 진술에 따르면, 4월 19일에 대대적인 학생 데모가 일어난 이후 국무위원들은 줄곧 중앙청내 국무위원실에서 침식을 같이하며 사태 수습에 몰두하고 있었다.

4월 26일 아침 9시 시위대가 시청 앞으로 몰려오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그는 경무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비상 계엄령의 시한이 닥아와 기간을 연장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중앙청을 나서려고 하는 데, 매카나기 미국대사로부터 대통령을 만나게 해달라는 전화가 왔다. 경무대 비서실로 수차례 연락했으나 회답이 없다는 것이었다.

경무대에 도착해 대통령에게 어제 이기붕 국회의장 집이 습격을 당한 것등을 포함해 상황을 간략히 보고했다.

대통령은 보고를 듣고는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그래. 오늘은 한 사람도 다치게 해서는 안 되네.”라는 짤막한 대답을 했다.

그리고 나서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하는 질문을 여러 차례 해왔다.
그리고는 “내가 그만두면 한 사람도 안 다치겠지?”하고 묻고는 대답을 독촉했다.

그러자 김정렬 국방장관은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무의식 중에,
“각하, 저희들이 보좌를 잘못하여 이렇게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대통령은, “그래, 그렇게 하지. 이것을 속히 사람들에게 알리지.” 하고는 박찬일 비서관을 불렀다.


물러나는 순간까지 공산주의를 경계

그리고는, “내가 부를 터이니 받아 쓰게.”하고는,

“나는 해방 후 본국에 돌아와서 우리 여러 애국 애족하는 동포들과 더불어 잘 지냈으니, 이제는 세상을 떠나도 원한이 없다. . . . 공산주의에 대하여서는 부단한 주의를 하라.”

는 요지의 성명서를 구술했다.

이것이 바로 역사적인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성명서였던 것이다.

김정렬 장관은 중앙청에 있는 최치환 공보실장을 전화로 불러, 잠시 후에 중대한 성명이 나갈테니 미리 예고 방송을 해 놓으라고 전달했다.

그리고는 정리된 하야 성명서를 가지고 새로 외무부 장관이 된 허정과 함께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가 내용을 확인받았다.

그리고 대통령의 하야 성명은 전파를 통해서 전국에 퍼져 나갔다.

잠시후 계엄사령관 송요찬 장군이 대학생 대표들을 데리고 경무대로 들어 왔다.

이와 거의 동시에 매카나기 대사가 미8군사령관 매그루더 장군과 함께 경무대에 도착하였다.

이윽고 대통령이 학생들과의 회견을 마치고 응접실로 들어오자, 매카나기 대사는 “대통령 각하께서는 한국의 조지 워싱턴 이십니다.”라고 찬사를 올렸다.

그러자 대통령은 우리말로 “저 사람 무슨 잠꼬대야?‘라고 혼자 말을 했다.
이미 하야 성명이 나간 후였기 때문에, 미국대사는 완전히 무색해져서 별 대화도 없이 잠시 앉아 있다가 돌아가고 말았다.

하야 성명서가 발표되자, 데모대의 대부분은 만세를 부르고 해산했다.

대통령의 결단은 누가 권고해서 한 것이 아니고, 대통령 스스로의 판단에 의한 독자적인 것이었다. 이승만이 아니었다면 결코 당시에 하야 성명이 나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김정렬 국방장관은 회고하고 있다.

이승만의 지지자인 허정이 과도내각을 이끌다

이승만은 대통령직을 사임하는 자리에서 마지막으로 공산주의의 위협을 경고하는 당부를 한 바 있었다.

1960년 4월 27일 이승만은 경무대를 떠나 이화장 사저로 갔다.

가는 길 옆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노(老) 애국자를 환송했다. 잘못이 있다면 여러 해 전에 대통령 자리를 물러나지 못한 것이 잘못이었다.

이승만이 돌아온 이화장 벽에는 시민들이 '만수무강'을 비는 벽도들을 붙여 환영했다.
▲ 이승만이 돌아온 이화장 벽에는 시민들이 '만수무강'을 비는 벽도들을 붙여 환영했다.

그 후 이승만은 한 달 정도 이화장에 머물었다. 그러나 혼란한 정국에서 이승만의 국내 체류를 부담스럽게 느끼는 정치세력도 있었기 때문에, 그는 돌연히 5월 29일 프란체스카 여사와 함께 미국 하와이로 떠나게 되었다.

이승만이 없는 한국에서는 자유당 정부의 외무부장관이었던 허정(許政)을 수반으로하는 과도내각이 형성되었다.

허정 내각은 민주당의 요구대로 대통령중심제를 내각책임제로 헌법을 개정했다. 그리고 1960년 7월 29일에 제5대 국회를 구성하기 위한 총선거를 실시했다.

민주당이 압도적 승리를 거둔 다음 8월 23일 국회는 윤보선을 제5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직선제에서 간선제(間選制)로 되돌아 간 것이다. 내각책임제의 핵심인 국무총리 자리는 장면(張勉)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집권 여당인 민주당은 처음부터 윤보선의 구파와 장면의 신파로 나뉘어 극심한 분열을 보임으로써 그 앞날을 어둡게 했다.

이화장에 돌아 온 이승만 대통령이 몰려든 시민들에게 손인사를 하고 있다.
▲ 이화장에 돌아 온 이승만 대통령이 몰려든 시민들에게 손인사를 하고 있다.


사회혼란에 직면한 장면 정권

4 · 19로 사회 각 분야의 불만이 터져 나옴에 따라 지하에 숨었던 좌파들이 머리를 들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7 · 29선거에서는 사회주의 또는 사회민주주의를 내세운 사회대중당, 한국사회당과 같은 혁신계 정당들이 참여했다.

그러나 기성체제에 대한 가장 큰 도전세력은 학생들이었다. 그들은 정권을 무너뜨렸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 따라 학교 안의 분쟁이 격화되고, 동맹휴학이 줄을 이었다.

시위는 전사회적으로 확산되어. 초․중등학생들은 물론 경찰관까지도 시위를 했다.

4 ․ 19발포 책임자들에 대한 처벌이 미흡했다는 이유로 ‘4월 혁명유족회’등이 국회에 난입하여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민주당 정부는 자신들의 능력으로 집권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학생들의 요구에 약할 수밖에 없었다.

장면의 민주당 정부가 반공법과 데모규제법을 제정하려 하자, 학생들은 맹렬히 반대했다.

그리고 민주당 정부가 미국과 체결한 경제협정에서 원조 자금 지출에 관한 미국의 감독을 받아들이자, 학생들은 내정간섭이라고 비난했다.

민주당 정부는 혁신계의 압력에 못이겨 3만 감군을 약속하기도 했다.

또한 민주당 정부는 사회 안정을 위해 경제개발에 착수하려 했고, 그것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얻기 위해 미국의 요구대로 환율을 500 대 1에서 1300 대 1로 크게 올렸다.

그러자 즉각 악성 인플레이션이 일어났다. 그리고 미국에 대해 지나치게 비굴하다는 비난이 일어났다.

장면 정부는 일본 자본이 들어오기를 기대하여 외무상이 이끄는 일본친선사절단을 받아 들였다. 그리고 일본 상품의 수입을 허용했다.

이승만 정부 때와 비교해 그것은 파격적인 변화였다.

그러나 그것은 국민의 전반적인 반일(反日) 감정을 건드리게 됨으로써 정부가 수세에 몰리게 되는 또 다른 원인이 되었다.

학생들은 시간이 갈수록 과격해져 갔다. 그래서 장면 내각의 퇴진을 요구할 정도가 되었다.

나아가 학생들은 미군 철수를 요구함은 물론, 사회주의와 북한 체제도 옹호하기 시작했다. 학생운동이 좌경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학생들의 좌경화는 1961년 4월에 4 · 19 일주년을 기념하여 발표된 ‘4 ․ 19혁명 제2 선언문’에서 뚜렷이 나타났다.

학생들은 남북학생회담을 열겠다면서,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라는 구호를 외쳤다.

혁신계 정당들은 남북 협상을 추진했다. 그들은 외세를 배격하고 ‘중립화 통일’로 나갈 것을 요구했다. 민족주의, 중립, 좌우합작,남북협상의 이름으로 공산주의가 용납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이승만이 해방직후부터 우리 나라가 결코 가서는 안된다고 막았던 길이었다.


하와이에서 보낸 생애의 마지막 부분

이승만 부부는 하야한지 한 달 쯤 지난 1960년 5월 29일에 호놀루루 공항에 도착했다. 길어야 한 달이나 지낼 것으로 믿고 간단한 옷가지만을 챙겨왔다.

교포들은 이 박사가 잠시 머물 것이라는 생각에서 윌버트 최의 별장으로 모시고 갔다.

그러나 쉽게 귀국할 것 같지 않아 보였으므로 윌버트 최, 오중정 총영사 그리고 최백열(崔栢烈) 등의 측근들은 이승만 부부를 윌버트 최가 팔려고 내놓았던 빈 집에 모셨다.

그것은 마키키 스트리트 2033번지의 침실 2개가 있는 작은 목조 주택이었다.

이 박사는 건강이 나빠져 트리풀러 미 육군병원을 자주가야 했다. 혈압이 올라갈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감정을 건드릴 만한 바깥 세상 문제는 알리지 않았다.

그 때문에 이 박사는 마지막까지 5 · 16군사정변으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朴正熙)와 그 정권의 성격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이승만 박사는 멀리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아들을 그리며 쓸쓸히 돌아가신 아버님 이야기를 자주하면서, 조상을 모실 아들이 없음을 한탄했다.

1957년에 이기붕의 큰 아들 이강석을 양자로 맞아들였지만, 1960년의 4 · 19직후 그의 일가족 모두 자살했던 것이다.

새로운 양자를 찾아 주기 위해 뉴욕의 이순용(李淳鎔)이 한국으로 갔다. 그는 이승만의 독립운동 동지로, 나중에 내무부 장관을 지내는 인물이었다. 그는 서울에 가서 전주 이씨 양녕대군(讓寧大君)의 17대손인 이인수(李仁秀)를 양자로 삼게 했다.

그러나 이승만 박사의 머릿 속에는 자나 깨나 귀국 생각뿐이었다.

이승만대통령이 하와이에 머무는 동안 양자 이인수(가운데)를 입양하였다.
▲ 이승만대통령이 하와이에 머무는 동안 양자 이인수(가운데)를 입양하였다.


하와이 교포들과 미국 친구들의 따뜻한 손길

이승만 박사는 5년 2개월 동안의 하와이 생활에서 교포들과 미국인 친구들의 도움으로 살았다. 돈이 나올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울의 사저인 이화장을 지키는 경호원들도 자기 돈으로 연료를 사야 했다.

이승만 부부를 도운 미국인 가운데는 오랜 친구인 보스윅이 있었다. 그는 1920년 말에 이승만이 상해 임시정부로 부임하기 위해 몰래 배를 탔을 때 중국인 시체를 넣은 관 틈에 숨어 가도록 도와준 인물이었다.

대통령 시절에 인연을 맺었던 미국인들도 찾아오거나 또는 멀리서 관심을 보여주었다. 이들은 6·25전쟁과 그 이후에 이 박사를 만난 다음 평생토록 존경했던 사람들이었다.

아이잭 화이트 대장은 트리풀러 육군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

합참의장이었으며 전 주한 유엔군 사령관이었던 라이먼 렘니쩌 장군도 하와이에서 회의가 있을 때마다 찾아 주었다.

그리고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 그리고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도 멀리서 이 박사의 하와이 생활을 걱정해 주었다.

하와이 체류 마지막 기간에는 프란체스카 여사의 오스트리아 친정에서 매월 2백달러를 생활비로 보내주었다.

박정희 대통령을 방문한 이승만대통령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
▲ 박정희 대통령을 방문한 이승만대통령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


좌절당한 귀국의 꿈

그러나 한국인 고위층들은 이승만과의 연루를 꺼려하는 박정희 군사정부의 눈치를 보아야 했다. 그 때문에 그들은 이승만 만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미국에 갈 때는 호놀루루 대신 알래스카를 거치는 비행기를 탔다.

그러나 미국 대사 발령을 받아 미국으로 가던 김정렬(金貞烈) 장군 같은 사람들은 일부러 하와이에 들러 이 박사를 만나기도 했다.

1962년이 되자 이승만 박사의 귀국에 대한 열망은 더욱 더 커졌다. 트리풀러 병원의 주치의는 이 박사가 비행기를 탈 수 있는 날도 얼마 안 남았다고 진단했다. 그 때문에 귀국을 서둘르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귀국을 달가와하지 않는 박정희 군사정부와 언론기관들은 이승만의 사과를 요구하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프란체스카, 오중정, 그리고 최백열은 이승만 박사와는 의논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사과 성명을 만들어 발표했다.

이승만 박사 측은 출발 예정일을 1962년 3월 17일로 정하고 귀국을 준비했다. 그러나 출발 사흘 전부터 이 박사는 걷기가 어려워져 휠체어에 의지해야 했다.

귀국할 것이란 소식이 알려지자 많은 교포가 달려와 작별 인사를 했다.

그러나 출발 직전 김세원 하와이 총영사가 서울 정부로부터 귀국이 허용되지 않았음을 알려왔다.

극도로 낙심한 이 박사는 그날 이후로는 스스로 걷지 못할 정도로 건강이 급속히 나빠져 갔다.

귀국 좌절에 쓰러진 이승만의 마지막 모습.
▲ 귀국 좌절에 쓰러진 이승만의 마지막 모습.

미국인이 마련해준 요양원 병실

귀국이 좌절된 이승만 박사는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기 시작했다. 손발은 거의 마비되어 회복이 불가능해졌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하와이 각처에서 동정과 호의가 잇따랐다. 하와이 교민들은 그를 끝까지 버리지 않은 것이다.

그들은 한국 정부의 처사에 대해 말할 수 없이 크게 분개했다. 나이든 노인들일수록 더했다.

이승만 박사 부부는 독립운동 시절부터 잘 알고 지내온 부유한 딜링햄 씨의 주선으로 마우날라니 요양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딜링햄은 그 요양원의 최대 후원자였던 것이다.

요양원측은 이승만 박사를 무료로 모시는 한편, 프란체스카 여사에게는 간호보조원 자격으로 대우해 본관 건물 뒤편의 고용인 숙소에 머물게 해주었다.

프란체스카 여사의 간병은 헌신적인 것이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부인은 항상 이승만 박사 옆에서 성경을 읽어 주고 찬송가를 불러 주고, 마비된 손발을 주물러 주었다.

하와이 생활 5년 동안 그녀는 이승만 박사의 그림자처럼 붙어다녔다. 교포들은 헌신적인 부부 사랑에 감동했다.


죽은 몸이 되어 돌아온 고국

1964년에 들어서면서 이승만 박사의 병세가 악화되었다. 위에서 내출혈이 심하게 일어나 급히 퀸즈 병원으로 옮겨 응급처치를 받았다. 그 사실을 호놀루루 텔레비전 방송 등 하와이 언론들이 자세히 보도했다.

그 무렵 이승만 박사는 펌프로 움직이는 호스를 입 속에 꽂아 연명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가끔씩 우유를 그 호스를 통해 넣어 주었다.

1965년 7월 18일 밤 열시가 넘으면서 임종의 순간이 닥아오고 있었다. 이승만 박사의 침대 곁에는 프란체스카 여사와 최백렬, 그리고 서울에서 살다가 급히 연락을 받고 달려온 양자 이인수가 서 있었다.

병실 밖에는 오중정, 윌버트 최, 그리고 조선일보 통신원 차지수가 있었다.

마침내 1965년 7월 19일 0시 35분에 이승만 박사는 호스를 입에 문 채 조용히 숨을 걷우었다. 향년 90세였다.

독립운동으로 나라를 세우고, 전쟁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느라고 전 생애를 아낌없이 불살랐던 위대한 한국인 이승만은 멀리 떨어진 땅 하와이에서 고국을 그리다 쓸쓸한 최후를 맞이했던 것이다.

고인(故人)의 영구는 7월 21일 오후에 고인이 세웠던 한인기독교회 안에 안치되었다.

하와이의 모든 방송매체들이 애도 방송을 했다. 그리고 수많은 미국인들과 교민들이 문상을 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

저녁에 영결예배가 끝나자, 고인의 영구는 하와이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진주만의 히컴 공군기지로 움직였다.

이때 프란체스카 여사는 기력이 떨어져 두 번이나 졸도했다. 그 때문에 그녀는 서울로 운구를 따라가지 못했다.

히컴 공군기지에서는 미군 의장대가 나와서 사열하는 가운데 조포가 발사되었다. 그리고는 그를 존경하던 미군 장군들의 추도사가 이어졌다.

이윽고 유해가 C-118 미군 수송기에 실리자, 뒤늦게 따라온 밴 플리트 장군을 포함해 16명이 비행기에 올랐다. 수송기는 1965년 7월 21일 밤 11시 정각에 서울로 출발했다.

가족장으로 치룬 이승만 장례식. 만장573개를 앞세운 행렬에 100만이 넘는 시민들이 나와 추모했다.
▲ 가족장으로 치룬 이승만 장례식. 만장573개를 앞세운 행렬에 100만이 넘는 시민들이 나와 추모했다.

가족장으로 국립묘지에 묻힌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 박사의 영구는 1965년 7월23일에 김포공항에 도착하여 빈소인 대학로의 이화장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장례절차가 문제였다. 나라를 세운 ‘건국의 아버지’이므로 당연히 국장으로 모셔야 했지만, 박정희 정부는 한 등급 낮추어 국민장으로 할 것을 종용했다. 결국 의견이 조정되지 못하자, 가족장으로 하게 되었다.

7월 27일 이 박사의 영구는 그의 모교인 배재고등학교 학생들이 든 만장의 행렬과 함께 그가 평소에 다니던 정동 제일감리교회로 옮겨졌다. 그리고 나서 김광우 목사 주례로 영결예배를 가졌다.

예배 후 자동차 편으로 동작동 국군묘지까지 갈 예정이었다. 그러나 길거리에는 위대한 애국자의 마지막 길을 지켜 보기 위해 나온 사람들로 넘처나, 정상적인 차량 운행이 불가능했다.

그 때문에 운구는 사람이 걷는 속도로 느리게 움직여, 오후 3시에야 동작동의 국립묘지에 도착했다.

운구가 도착하자 미리 마련된 장지 앞에서 영결식이 있었다. 숭의여자고등학교 합창단의 조가(弔歌)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운구는 땅에 내려졌다.

그리고는 “해 저물어 날 이미 어두니”라는 조용한 찬송가 소리와 함께 조용히 묻혔다.(계속)

<이주영 /건국이념보급회 이승만 포럼 대표>

출처 뉴데일리



혁신학교? 혁신은 개뿔! 애들 학력만 퇴행중! 교무실 커피자판기, 교사 항공권 구입에 물 쓰듯...특혜 불구 학력은 뒷걸음 일반학교에 비해 연간 1억4,000~1억5,000만원을 특별히 지원받는 서울형 혁신학교가 예산을 엉뚱한 곳에 쓰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특별예산(학교운영비)으로 교사실의 각종 책장이나 가구를 구입했고, 수백만원을 들여 학습자료 저장용 USB와 외장하드를 사서 나눠 갖은 사실도 밝혀졌다. 교무실 커피자판기를 구입하는데 특별예산을 쓴 혁신학교도 있었다. 이밖에도 여직원 휴게실 가스보일러 교체, 부장교사 워크숍 항공권 구입, 교직원 전체 체육복 구입 등 본래 목적과는 거리가 먼 곳에 특별예산을 물 쓰듯 전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학생들에 대한 선심성 예산 집행 정황도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학생 티셔츠 구입, 진공청소기 구입 등에 특별예산을 수백만원씩 사용했다. 학생들의 생일축하용 떡케익 구입비용으로 매달 70~90만원을 사용한 곳도 있었다. 반면 서울형 혁신학교의 학력은 일반학교에 비해 오히려 뒷걸음질 친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내용은 서울시교육청이 새누리당 강은희 의원에게 제출한 2012년 혁신학교 정산서 통합지출부를 통해 밝혀졌다. 서울형 혁신학교는 곽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