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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제30차 아태공포럼 발표내용 (김제원)

주제: 李承晩 박사의 국가관 및 治績功過

30차 아태공포럼 발표내용

 

주제: 李承晩 박사의 국가관 및 治績功過

강사: 김제원 (전직 공무원, 서울시청 국장 역임)

일시: 2014.6.11. () 오후5

 

 

우리나라 건국대통령 李承晩 박사의 國家觀 治績功過에 대하여 지금까지 듣고 배운 것과, 관련서적을 읽고 알게 된 바를 객관적인 시각으로 발표하고자 한다. 李承晩 박사가 90평생을 사는 동안, 특히 잃어버린 나라의 독립을 위한 투쟁과 건국 전후의 시기에 지도자로서의 역할과 건국 대통령의 책무를 어떻게 수행하였는지를 알아보는 일은 의미가 크다고 본다.

이승만 박사는 조선조 태종의 세자 양녕대군의 16대손, 즉 왕손의 후예로 1875년 태어나 구한말인 1905년 전후 독립협회에 가입해 활동하였다. 한국최초의 미국 박사학위를 받고 191035세 때부터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의 지도자로 청장년기를 보냈다. 해방 후인 74세 때, 1948년 건국대통령으로 취임 후 625전쟁 및 休戰정국에서 나라를 수호해 오다가 419후 하와이 요양병원에서 19657월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1. 李承晩 박사의 삶과 國家관련 主要事件

 

이승만 박사는 어떤 인물인가?

李承晩은 지금부터 139년 전인 서기 1875년 양력 326일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났는데 당시 國內外의 정세는 매우 혼란스러운 때였다.

고종이(1863) 즉위하여 흥선대원군의 집정시기였는데, 임진왜란때 불타버린 경복궁 재건공사(1865~72), 천주교 탄압의 상징인 병인박해와 병인양요(1866), 신미양요(1871), 운양호사건(1875), 강화도조약체결(1876), 임오군란(1882), 갑신정변(1884), 갑오개혁(1894),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및 독립협회 창립(1895), 대한제국수립(1897) 등의 국가적 사건이 계속된 시기였다.

나라밖의 사정을 보면 중국 나라의 양무운동(1861), 미국 링컨 대통령의 노예해방(1863), 일본의 명치유신(1868), 유럽의 독일제국성립(1871) 3국간섭(1895, ··러가 일본에 관여, 요동반도를 반환 ) 등 국제적으로도 조선의 사정이 참으로 어려운 시기였다.

35세 때(1910)李承晩20세기 초 세계 어느 곳에 누구와 비교해도 손색없는 국제적인 차세대의 지도자로 성장하였다. 동양고전(한학)을 전공한 20대 시절에 과격한 정치개혁을 요구하다가 57개월의 옥고를 치렀고, 그 뒤 미국 일류 대학에서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최초의 한국인으로서 젊은 나이에 동서양의 풍랑을 한 몸으로 부딪친 경력의 소유자였다. 거기에 미국의 대통령과 국무장관을 만나 특사 자격으로 외교활동을 한 특별한 경험까지 있다.

35세 때 그의 이미지는 李承晩神話로 시작되고 전개되었다. 그 나이에 그와 같은 투쟁경력, 학벌, 관록을 두루 겸비한 인물이 국내에 없었다. 일생동안 동지이면서 경쟁자였던 金九(1876년생)는 항일투쟁경력에서는 대등했으나 李承晩에게 비견할 학문이 없었다.

金九와 함께 3거두의 한 사람인 金奎植(1881년생)은 같은 미국 유학파였으나 학력이 학사에 그쳤고 투옥한 경력도 없었다. 대중상대의 연설과 政略구사에서 맞수였고 미국 교포사이에서 라이벌이던 安昌浩(1878년생)는 미국에는 먼저 갔지만, 학업을 포기하고 미국 땅에서 고생하는 교포를 돌보다가 李承晩처럼 고급영어를 익힐 기회를 놓쳤다.

해외 타국의 혁명가들과 비교해 보아도 李承晩은 전혀 손색이 없는 자랑스러운 인물이었다. 이승만 보다 6세 위인 인도의 간디(1869)19세때 영국에 유학, 변호사 자격을 딴 뒤 30대에 남아프리카에 가서 수십만 인도 사람의 권익을 위해 활동했으나 그때까지 그는 독립투사는 아니었다.

14세 아래인 인도의 네루(1889년생)는 상층계급 출신, 영국 유학 등 배경이 李承晩과 비슷했으나 30대 때 영국 치하에서 합법적인 정치활동만 펴고 있었다. 베트남의 胡志明(1890)은 프랑스에서 폭넓게 공산당 활동을 하면서 독립운동을 펴고 있었으나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다.

한 살 아래였던 독일의 아데나워(1876)73세 고령으로 집권자가 된 점과 독재자라는 비판을 받는 점에서 李承晩과 공통점이 있으나, 30대 때의 아데나워는 감옥과는 거리가 먼 변호사 출신으로 쾰른시의 부시장 자리에 도전하는 정치 초년생이었다. 중국의 國父로 불리는 9살 위의 孫文(1866)26세 때 의사로 있다가 反淸 혁명에 뛰어 들었다. 중국의 毛澤東(1893)18세 때 孫文이 주도한 신해혁명(1911)에 참가, 학업을 포기하고 혁명가의 길에 접어들었는데, 34세 때 중공 중앙당의 농민부장이 되었다.

뛰어난 학력, 동서양을 겸비한 학식, 정치경력, 지도자의 자질 등을 볼 때 李承晩과 쌍벽을 이룰 수 있는 人物로는 손자뻘(48세 아래) 나이인 싱가포르의 李光耀(1923) 전 총리를 들 수 있는데 이광요는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변호사가 되어 귀국, 31세 때에 자치령인 싱가포르에서 정계에 입문, 1950년 자신이 이끌던 인문행동당이 다수당이 되자, 36세 때 총리가 되고, 1965년 말레이시아연방에서 분리된 뒤 독립한 싱가포르의 총리가 되어 30여년 만에 자원도 자본도 없는 어려운 나라에서 세계 일류국가로 만들었다.

李承晩李光耀 두 사람 모두 국민 위에 군림하는 카리스마의 리더십을 발휘했다는 것이 공통점이라 할 수가 있다. 차이점을 찾아보면 李承晩은 공산주의자와 싸우면서 73세의 늙은 나이에 싱가포르보다 인구가 20배 많은 나라,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발전의 기반을 닦았다. 그에 비해 李光耀는 한국의 李承晩朴正熙가 이룩한 업적을 자신의 시대에 일구었고 30수년 집권 후 은퇴하여 세계의 賢者로서 노후를 편히 보내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李承晩 박사의 人生 과정

이승만 박사는 35세 때인 1910년에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합병된 것을 고비로 그의 삶도 가시밭길로 바뀐다. 亡國의 한을 품은 채 미국시민권을 끝까지 마다하고 無國籍者로 살면서 항일민족독립운동가로서의 삶을 이어갔다. 이 과정에서 李承晩은 성공보다도 좌절과 실패를 더 많이 겪었고 그 결과 외국의 젊은 지도자들에게 뒤처지기도 했으며 성과에 못 미치게 되기도 했다.

李承晩1910. 35세의 차세대 지도자로 고국을 떠난 지 38년 만인 194873세의 고령으로 대한민국의 建國大統領이 되었으니 묫자리를 찾을 나이에 투쟁가 정치가로 대기만성의 영광을 안은 것이다. 해방과 함께 李承晩金九는 남쪽에서, 金日成은 북쪽에서 영웅이 되었다. 金九는 위대한 민족주의 지도자로서의 위상을 차지하였고, 金日成은 아들 손자로 이어가는 북한의 3대 수령국가의 창시자가 되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국가안보의 기틀을 다지면서 오늘의 번영을 가져오는데 크게 기여한 건국 대통령 李承晩 박사는 건국 65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음에도 아직 진정한 영웅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있다.

자유당 독재를 붕괴시킨 419혁명(1960)뒤 이승만은 國父의 위상에서 독재자로 전락하였다. 진보좌파적 역사관의 영향으로 南北분단의 주범, 미국의 앞잡이 등 일방적 폄하 또는 매도되는 평가를 받았다.

李承晩에 대한 左右상반된 역사평가는 바로 현대사에 대한 평가로 이어지는 것으로 그의 일생이 현대사 중반부까지의 흐름과 궤를 같이 하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 사회에서 객관적이고 공정한 현대사가 실종된 셈이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 사회에 역사인식의 왜곡 혼란 미흡 등의 부작용을 초래하고 급기야는 한국 사회의 통합을 저해하고 국론을 분열시키며 정체성의 혼란을 가져오는 원천이 되고 있다. 더구나 학생과 젊은 세대를 상대로 하는 역사교육에서 생기는 혼선은 오늘날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

左右양편이 이데올로기에 따라 자신의 지지사관이나 정치적 목적에 의하여 史料와 선행역사 연구를 자의적으로 선택하고 상반된 역사를 서술하면서 사회를 양분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는 지구상에 한국밖에 없을 것이다. 이는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좌우파가 現代史에 대한 인식을 共有하는 접점을 찾지 못한다면, 차라리 이데올로기적 관점을 배제하고 있는 그대로의 역사적 事實史實로써 서술하는 현대사가 정립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2. 李承晩 박사의 歷史的 平價

 

419혁명을 맞아 하야한 뒤, 하와이로 亡命하면서 李承晩의 위상은 하루아침에 많은 국민들로부터 國父로 불리던 입장에서 한낱 독재자로 전락했다. 언론인 宋建鎬는 한국 현대인물사에서 이승만이 남북분단의 원흉이고 친일파를 비호, 중용하여 민족정기를 흐려 놓은 장본인이다. 남한의 對美종속을 심화시키고 그 앞잡이가 되었다는 논지의 글을 썼다.

진보성향 필진이 1980년대 후반에 집필한 <해방전후사의 인식>이라는 책이 나오면서 이승만이 한국의 남북분단 주범, 친미독재자라고 많은 국민에게 역사적인 사실을 그릇되게 알리는 심각한 문제점을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419 후 세상의 인심과 사정이 변하여 李承晩 옹호론은 설자리도 없었고 여론도 주목받지 못했다. 1942년부터 1959년까지, 18년간 이승만을 도와서 미국 정부와 언론을 상대로 한 자문홍보업무를 맡았던 미국 시라큐스대의 언론학 교수 올리버가 1954년에 신화에 가린 인물 이승만을 발간하는 등 긍정적 평가를 위해 의롭게 노력했다.

1963. 언론인 金麟瑞망명노인 李承晩 박사를 변호함이란 글을 썼고 1975년 한국일보가 이승만 특집을 게재했으며 외국에서 연구한 소수의 학자들이 긍정적인 평가의 논저를 발표했을 뿐이다.

1989년 냉전체제가 무너지고 붕괴된 소련의 현대사관련 史料가 비밀해제로 공개되면서 이승만이 남북분단과 한국전쟁에 책임이 있다(북침설)는 수정주의의 주장이 근거가 없음이 확인되었고 그것을 계기로 李承晩의 긍정적 평가가 본격적으로 시작 되었다.

정치학자 柳永益이 광범위하게 이승만 자료를 수집하고 본격적으로 이승만의 긍정론을 펴면서 이승만의 업적을 다음과 같이 나열했다. 첫째, 이승만의 대표적인 과오로 알려진 남북분단과 한국전쟁에 대한 책임론은 사실과 다르고 근거가 없다. 둘째, 그간 노출된 失政은 대체로 인정. 셋째, 이승만은 공산주의자와 싸우며 자유민주국가인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했다. 넷째,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과 강군 육성으로 산업화 정책이 안정적으로 추진될 수 있는 안보체제를 강화한 노력을 높이 평가. 다섯째, 이승만정권이 교육혁명을 통해 엘리트층과 산업역군을 대량 양성하여 경제발전의 동력이 되게 한 일 등은 크게 잘한 일이다.

그러나 李承晩 긍정의 再評價 作業은 진보좌파의 학맥이 두텁고 그들이 구축한 民族史觀의 벽이 높은데다가 젊은 세대들이 진보성향이어서 그동안 형성된 부정적 인식을 긍정적 업적으로 전환시키는 것이 쉽지가 않은 여건이다. 더구나 1989부터 2007년까지 10년을 집권한 좌파정권이 현대사에 대한 편향적 인식을 가짐으로써 이승만 평가도 다시 음지로 몰렸다.

金大中 대통령은 취임 초, 대한민국건국이 친일파 주도 아래 이루어졌다면서 대한민국은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졌다고 斷罪하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가장 감동적으로 읽었다면서 취임사에서 대한민국의 역사는 不義正義를 눌러온 역사라고 매도했다.

그 같은 역사인식에 따라 두 좌파정권은 李承晩에 대해서도 경멸적 태도를 취했다. 로 아무런 근거도 없이 李承晩金九 암살의 배후자로 매도하였고, 보도연맹원들에 대한 처형 지시자로 매도해도 방관했다. 상대적으로 대한민국건국(단정)을 반대했던 金九에 대한 尊崇을 극대화하고 기념관을 건립했으며, 진정한 공산주의자라고 주장한 呂運亨 등 좌익에게 건국 훈장을 추서하였다. 노무현정권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를 만들어 한민당 金性洙 등 대한민국 건국공로자들을 친일파로 몰아세우는 작업을 방조했던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이래 제국주의 식민지였던 140여개 국가가 독립하였다. 독립한 신생국가의 공통과제가 政治發展經濟發展을 함께 이뤄내 다 같이 잘사는 나라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회주의를 건국이념으로 내건 많은 국가들은 후진국 특유의 식민지 경험이나 정치사회적 여건, 무능과 부패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낙오했고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채택한 10여 개국만 성공했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그 중 한국은 성공한 나라들 중에서도 경제성장과 정치민주화라는 두 가지 과업을 선진국 수준으로 발전시킨 유일한 나라로 꼽히고 있다.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이 市場經濟體制를 신봉하는 自由民主主義 國家를 세우고 安保의 기반을 강화하는 등 기초를 쌓았다. 그 토대 위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産業化 政策을 강력하게 추진해서 新興工業國으로 발돋움한 것이다.

1947년 영국 식민지에서 독립한 인도의 네루 수상이 政治發展에는 성공했으나 經濟發展에 실패해 近代化 作業이 정체된 事例와 비교가 된다. 경제성장을 우선시한 한국의 국가전략이 정치발전을 앞세운 인도를 제치고 먼저 근대화를 이루었다는 것을 기억해내야 한다. 한국과 인도는 1950년에 1인당 국민소득이 비슷했지만 60년 뒤인 2010년의 국민소득이 15:1의 차이로 벌어진 결과가 되었다.

韓國成功사례는 미국의 대외정책 인식의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는데, 후진국의 특이한 전통과 여건을 감안해 그들 국가에 대한 인식과 정책내용 및 목표도 새롭게 규정해야 한다는 미국 정치학자들의 주장을 수용하게 되었다.

정치지도자로서의 李承晩은 일생동안 원칙과 소신, 그가 해방 뒤 귀국해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경구가 한 시대의 국론을 집결시키는 구심력의 상징이었다. 자신의 철학을 일관성 있게 밀고가면서 정치적 목표를 달성한 강력한 의지의 인물로서 개인적인 이익이나 명예를 위해 수치스러운 타협이나 굴종의 길을 가지 않았고 국가와 민족을 위한 大義에 헌신했다.

돈에 대한 구설수도 있었지만 평소 사생활이 검소하고 질박하였으며,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는 초기 경무대 시절까지 양말과 내의를 기워 입었고 12년간의 통치 뒤 하와이에 망명했을 때도 李承晩 夫婦는 생활비와 병원비가 없어 주위에서 도움을 받아야 했다. 말년에 권력욕을 절제하지 못하고 독재의 길로 들어선 과오만 없었다면 세계 어디에 내 놓아도 자랑스럽고 당당한 國父였다.

위기관리의 관점에서 보아도 여러모로 강한 指導者였다. 그는 위기를 정면 돌파하거나 타개하는 승부사형이면서도 때로는 위기를 피해가거나 시간을 버는 방법으로 위기를 해소시키는 유연성도 보였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추진력과 결단력 배짱 등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지만 기본적으로 소신과 평소 준비가 잘돼 있다는 것이 강점이었다.

이데올로기 갈등으로 準內戰 상태였던 解放政局에서 어려운 고비를 수 없이 넘기고 自由民主主義 국가를 건국했을 때 그는 73세의 노인이었다. 75세 때인 625內戰이면서도 국제전이었던 한국전쟁에서 강력한 전쟁 지도력을 발휘해 나라를 지키는 구심력의 역할과 대한민국의 생존을 위해 전쟁 전후를 통해 끊임없이 정치생명을 걸고 미국을 강하게 압박했다. 韓美相互防衛條約이 성사되는 단계일 때는 고령의 나이와 대통령의 체면마저 버리고 아들 나이의 국장급 미국 특사와 협상 테이블에서 격렬하게 다투어 가면서 좋은 결과를 위해 전력투구했던 것이다. 한국이 세계 10위권의 선진국 대열에 들어간 현재의 위상을 보아도 李承晩 박사가 國家에 기여한 歷史的 意義는 매우 크다고 본다.

중국의 鄧小平은 소련 사람들이 스탈린 격하운동을 폈던 것과는 달리 선임자를 깎아 내리려 하지 않았다. 毛澤東 주석에 대한 역사평가에서 7 3이라는 평점을 매겼고 중국에서 그 평점을 수용하게 했다. 그러나 李承晩의 경우 歷史的 平價는 정치평론가 신상초가 3 7이라는 평점을 매긴데 대하여, 정치학자 유영익은 7, 3이라고 평가하여 상반된 시각을 보였다. 정치학자 진덕규는 5, 5로 균형을 유지했으나 일반여론은 쪽이 앞서는 듯하다.

 

3. 李承晩 박사는 과연 독재자인가?

 

오래 전부터 말이 많은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는 韓國民主主義 發展과정을 記述하면서 역사성을 빼버려, 역사 교과서가 아니고 어느 특정 이념 집단의 선전물과 같은 잡지가 되고 말았다는 느낌이다.

역사성이란 시간의 흐름으로 민주주의의 경우, 서구에서는 어떻게 발전하였으며 어떤 기복과 진퇴가 있었고, 한국은 그 과정을 어떻게 밟았느냐를 제대로 설명해야 역사를 바로 알게 된다. 우리나라는 1948815 이후 처음으로 民主主義를 시작한 나라이다. 그런데 수백 년이나 걸린 서구식 민주주의를 우리나라가 제대로 실천할 수 있었겠는가를 학생들에게 설명한 다음, 李承晩朴正熙를 비판해야 한다고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교과서 필진들은(누구를 위하여서 인지는 몰라도) 그런 역사성을 의도적으로 생략한 채 李承晩(朴正熙 포함)정부에 대하여는 서구식 민주주의를 적용해서 독재라고 비판하고, 북한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대 김씨 왕조정권은 공산주의 국가에도 유래가 없는 북한식 기준이라고 비호하는 것은 뭐라 변명해도 분명히 반역사적인 태도이므로 빠른 시일 내에 반드시 시정해야 될 일이라고 본다.

民主主義 발달의 최선진국인 英國의 경우도 800년 전인 1215, 영국의 존왕이 귀족들의 압력에 굴복, 귀족회의 동의 없이는 세금을 물리지 않고, 법원의 구속영장 없이는 자유민을 구금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약속인 대헌장, 즉 마그나 카르타가 탄생했다. 그 이후 국회와 이 서로 힘겨루기 끝에 1688년 명예혁명으로 국회가 국민을 대표하여 주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66년 뒤인 1754년에 당시 800만 국민의 3.5%28만명의 귀족이 투표권을 행사하였다. 130년 후인 1884년에는 세금을 내는 모든 가구주가, 34년 뒤인 1918년에 와서는 세금과 관계없이 모든 성인 남자가, 다시 10년 후인 1928년부터는 여자들도 보통 선거권이 주어졌다.

프랑스의 경우는 224년 전인 1790(영국의 1754년보다 36년 뒤)에 일정규모의 재산을 가진 납세자에게 투표권을 주었다. 25년 뒤인 1815년엔 30세 이상의 연 300프랑 이상의 납세자만 투표권을 가졌는데 1820년에는 일정 재산 이상의 유권자는 12표를 행사할 수 있었으나 인구는 전체 성인비의 58.8%였다. 1851년에 모든 성인 남자에게, 94년 뒤인 1945년부터는 여성들도 투표권을 갖게 되었다.

美國의 경우는 흑인들도 투표할 수 있게 된 것은 1964년의 미국민권법과 1965년 투표권법이 통과된 이후이므로 흑인의 경우 한국보다 정치적 자유를 얻은 것은 늦었다고 볼 수 있다.

 

수백년의 정치과정을 생략한 한국의 국가발전

선거권의 확대 내지 발전이란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참여폭이 확대 신장되는 과정이다. 동시에 선거권의 확대는 점진적이었고 신분중심(봉건체제), 납세중심(부르주아체제), 남녀모두(대중민주주의 시대)로 확대되었다는 점이다. 이런 투표권의 확대는 개정을 통하여 이루어졌는데 法治의 확립과정이 민주주의의 발달과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는 서구의 수백 년에 걸친 점진적인 과정 없이 1948년 헌법제정과 동시에 보통선거를 해서 재벌총수도 직원도 한 표이고, 무식자도 지식인도 한 표이며, 세금을 수백억 원 내는 재력가나 한 푼 안내는 자도 모두 똑같은 한 표가 주어진다.

1948년 이후 한국의 민주화는 서양에서 수백 년 걸려 발전시킨 민주주의 제도를 시행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압축적으로 겪고 있는 과정으로 우리는 민주주의라고 하는 연극과 연습을 지금도 하고 있는 처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연극과 연습을 통하여 實演이 되고 外來의 제도나 사상을 내 것, 우리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장기간의 시일과 엄청난 비용을 치러야 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이고 문제점이기도 하다.

 

한국민주주의의 진정한 건설자는 李承晩朴正熙이다

李承晩은 나라 사정이 극히 혼란스러운 때의 大統領이었다. 李承晩은 자신의 의지대로 대한민국 건국대통령에 올랐지만 그의 앞에는 수많은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첫째, 의 극심한 대립 속에 思想戰爭을 벌여야 했고, 둘째, 政府組織安定시키고 사회질서를 바로 잡아야 했다. 셋째, 日帝의 잔재를 청산하고 극심한 經濟 빈곤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民主主義를 정착시켜야 하는 義務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일차적으로 주력한 것은 思想戰爭에서 승리하여 國家權力社會의 질서를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철저한 반공주의자였고 資本主義 신봉자였으며, 강력한 제왕적 대통령제를 추구했다. 그는 左翼을 괴멸시켜야 政治權力이 안정되고, 권력이 안정되어야 사회 질서도 바로 잡힐 수 있다고 믿었다.

당시 정치사회적 여건이 극히 어려운 환경 속에서 이승만은 우리나라를 세우고, 공산주의자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自由民主主義市場經濟體制를 굳히는 일에 앞장서서 오늘의 大韓民國을 만드는 일에 크게 기여한 위대한 지도자의 役割을 감당했다고 주장하면서 첫째, 서구의 민주주의를 기준으로 李承晩朴正熙를 독재자라고 단정하는 것은 메이저리그의 통계를 기준으로 삼아 동네야구선수들을 혹평하는 것과 같다. 세종대왕에게 왜 민주주의를 하지 않았느냐고 욕설을 퍼붓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둘째, 서구의 민주주의를 판단 기준으로 하여 李承晩이나 朴正熙가 독재를 했다고 주장하고 싶은 사람은 민주주의가 도입된지 10~30년 만에 선진국 수준의 민주주의를 성취한 나라를 찾아보라. 그런 국가가 존재한다면 그 나라를 예를 들어야 한다. 그런데 세계사 어디에도 그런 나라는 없다.

셋째, 李承晩 朴正熙 두 대통령 시절의 한국의 민주주의는 19세기의 유럽 민주주의보다 더 민주적이었다. 10~30년짜리 한국민주주의가 유럽의 수백년짜리 민주주의 보다 더 발전이 되었다면 두 전직 대통령을 과연 매도할 수 있을까? 만약 링컨이 1950년대와 1970년대의 한국을 다스렸다면 李承晩 朴正熙 두 대통령만큼 더 잘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시절의 민주주의를 日本과 비교하면, 1920~30년대의 데모크라시 보다 훨씬 나은 편이다. 北韓中國은 아예 비교 대상이 되지 못한다.

넷째, 그렇다면 좌익들은 무슨 기준으로 李承晩 朴正熙를 독재자라고 매도하는 것일까? 그들이 가진 기준은 地上의 것이 아니라 天國의 기준이거나 자기 꿈속의 기준일 것이다. 그들의 잣대가 북한정권에 견줄 때는 자()의 눈금이 다르게 가감되는 요술의 자가 되는 것이다.

다섯째, 결론적으로 李承晩 박사의 治績平價한다면 李承晩 건국대통령은 쿠데타를 통하여 집권한 적이 없고 헌정을 중단시킨 적도 없다. 그러한 李承晩을 독재자라고 불러야 할 이유가 없다. 자진하여 물러난 점도 그렇다.

李承晩自由民主主義의 당위성을 부정하지도 않았다. 서구식 민주주의를 후진국에, 그것도 전쟁 중인 나라에 무조건 적용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생각하여 자신이 욕을 먹더라도 민주주의 조건을 먼저 만들겠다고 작심한 사람이다. 自由民主主義가 가능할 수 있도록 경제력과 제도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李承晩을 한국 민주주의의 진정한 건설자로 보는 게 타당한 역사적 평가일 것이다. 李承晩 박사의 年譜는 별첨자료를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태공포럼]

 

출처 http://aprc.or.kr/news/article.html?no=1845

 



혁신학교? 혁신은 개뿔! 애들 학력만 퇴행중! 교무실 커피자판기, 교사 항공권 구입에 물 쓰듯...특혜 불구 학력은 뒷걸음 일반학교에 비해 연간 1억4,000~1억5,000만원을 특별히 지원받는 서울형 혁신학교가 예산을 엉뚱한 곳에 쓰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특별예산(학교운영비)으로 교사실의 각종 책장이나 가구를 구입했고, 수백만원을 들여 학습자료 저장용 USB와 외장하드를 사서 나눠 갖은 사실도 밝혀졌다. 교무실 커피자판기를 구입하는데 특별예산을 쓴 혁신학교도 있었다. 이밖에도 여직원 휴게실 가스보일러 교체, 부장교사 워크숍 항공권 구입, 교직원 전체 체육복 구입 등 본래 목적과는 거리가 먼 곳에 특별예산을 물 쓰듯 전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학생들에 대한 선심성 예산 집행 정황도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학생 티셔츠 구입, 진공청소기 구입 등에 특별예산을 수백만원씩 사용했다. 학생들의 생일축하용 떡케익 구입비용으로 매달 70~90만원을 사용한 곳도 있었다. 반면 서울형 혁신학교의 학력은 일반학교에 비해 오히려 뒷걸음질 친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내용은 서울시교육청이 새누리당 강은희 의원에게 제출한 2012년 혁신학교 정산서 통합지출부를 통해 밝혀졌다. 서울형 혁신학교는 곽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