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의 일본'은 최근 한 달 새 한국은 안중에도 없는 듯 폭주를 거듭하고 있다. 일본은 지난달 말 스웨덴에서 북·일 교섭을 갖고 북한이 납치
일본인 문제 재조사에 들어가면 일본이 독자적으로 실시해 온 대북 제재를 풀어주기로 합의했다. 이어 지난 20일엔 일제(日帝)의 위안부 강제
동원을 인정하고 사과했던 1993년 '고노 담화' 재검증 보고서를 발표했다. 다음 주에는 일본의 평화헌법 해석 변경을 통한 집단적 자위권 행사
방침을 확정할 예정이다.
아베 내각의 이 세 가지 조치들은 한·일 관계를 악화시키거나 동북아의 평화·안보 질서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런데도 한국과는 사전 협의가 전혀 없었다. 일본은 과거 기회 있을 때마다 북핵 저지를 위해 한·미·일 3국 공조를 강조해 왔다.
그랬던 일본이 북이 핵을 포기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데도 아베 총리의 방북(訪北)까지 검토하고 있다.
문제는 우리 정부의 대응이다.
정부는 아베 내각이 고노 담화의 취지를 훼손하는 보고서를 내놓자 주한 일본대사를 불러 항의했고, 조태용 외교부 차관이 워싱턴을 방문해 미국
정부에 '한국의 우려'를 전달했다. 또 중국과 함께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입증할 공동 자료집을 내는 방안이 추진되고 있다. 일본이 독도 영유권
주장을 펴거나 왜곡 교과서를 밀어붙였을 때도 똑같은 대응을 했다. 한국이 어떻게 나올지는 굳이 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는 판에 박힌 조치를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아베 내각이 갈수록 한국의 반발에 대해 개의치 않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것도 이런 한국 외교의 전략 부재(不在)와
무관치 않다.
한국 외교가 어쩔 수 없이 이런 상황을 맞은 것인지, 아니면 속수무책으로 일본의 외교적 도발을 지켜보는 것인지는
엄밀히 따져봐야 한다. 이 정부 출범 이후 한·일 관계는 사실상 모든 외교 채널이 단절된 상태나 다름없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아베
내각의 잇단 과거사 및 독도 도발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아베 총리와의 정상회담에 응하지 않는 것은 일본의 변화를 촉구하기 위한 전략적
차원의 결정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외교 채널 전체가 대일 접촉을 기피할 필요가 있는지에 대해선 재고해 봐야 한다. 외교부와 일선 외교관들이
청와대 눈치를 보느라 이런 현상이 빚어진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전략의 부재는 '오락가락하는 외교'로 이어졌다. 한국은 아베
내각이 고노 담화 재검증에 돌입한 상태에서 미국의 중재를 받아들여 지난 3월 한·미·일 3국 정상회담에 응했다. 그러면서 한·일 간 국장급
위안부 회담을 요구해 성사시켰다. 그러나 일본의 고노 담화 재검증 발표 후 이 국장급 협의 무용론(無用論)이 한국 정부 내에서 나오고 있다.
'아베의 일본'을 향해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원칙은 단호하게 지켜야 하고 따질 것은 분명히 따져야 한다. 그러나 이것을 지켜낼 외교 전략
없이는 우리가 내세운 원칙이 우리만의 공허한 주장에 그칠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