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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은 정몽주와 삼봉 정도전

-모진 운명의 역사적 주인공들-

시 평

 

송재운 박사

(실버타임즈 편집인/대불총 공동회장)

 

고려의 충신

정몽주(圃隱 鄭夢周 1337-1392)와 조선왕조의 개국공신 정도전(三峰 鄭道傳 1342-1398)은 동시대의 인물로서 모진 운명의 주인공들이다.

두 사람은 나름대로 제각기 남긴 업적이 크지만 오랜 세월 동안 역사적 평가는 달랐다. 한 제왕이 남긴 청치적 포폄(褒貶) 때문이었다.

두 사람의 같은 점부터 거론하면 우선은 성씨가 같은 씨라는 점이다.

정몽주는 관향이 영일(迎日)이고 태어난 곳은 경북 영천이며,

정도전은 봉화(烽火) 씨고 태어난 곳은 충북 단양이다

 

두 사람이 다 출생에 대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鄭夢周

어머니의 꿈으로하여 처음에는 몽란(夢蘭 - 꿈에 난분을 안았다 내려트려 깼다)이라 하고, 다음 9세 때에는 몽룡(夢龍 - 꿈에 룡을 봄)이라고 고쳤다가 성인이 되어 夢周라고 다시 지었다.

 

鄭道傳은 그 아버지 정운경(鄭云敬)이 한 관상가의 말을 듣고 충북 단양 도담삼봉(譚三峰) 길에서 한 여인을 만나 혼인, 아이를 낳았는데,

길에서 얻은 아이라하여 이름을 도전(道傳)이라 하였다.

그리고 그의 호 三峰 역시 도담 三峰에서 딴 것이라 한다.

 

둘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운 동문이다.

 

이색은 한산(韓山)인 인데

고려말 원() () 교체기에 이미 천명(天命)이 명나라로 돌아갔다고 보고 친명정책을 주장했다.

그리고 신유학(新儒學)이 들어오면서 배불론(排佛論)이 대두되고 있었는데,

이색은 유교의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불교를 배척하지는 않았다.

그는 당시 성리학을 통해서 많은 제자들을 길러 내었는데

그 가운데 정몽주 길재(吉再) 이숭인(李崇仁) 등과 고려왕조에 충절을 다했으며,

정도전 하륜(河崙) 윤소종(尹紹宗) 권근(權近) 등은 조선왕조 창업에 크게 기여 하였다.

 

정몽주는 정도전 보다 다섯 살 위였다. 또 학문도 깊었다.

씨는 서로 의기가 투합하여 일생을 같이 걸어 갈 동심우(同心友)의 맹서를 맺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몽주는 고려를,

정도전은 조선을 선택함으로써 두 사람의 운명은 갈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결국 두 사람 똑 같이 한 사람의 손에 죽었다

그 한 사람은 바로 후일 태종이 되는 이성계의 5남 이방원(李芳遠)이다.

이성계의 막강한 군대가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래 고려왕조의 명운은 경각에 달려 있었다. 바람앞의 등불이었다.

다만 최영(崔瑩 1316-1388)장군과 정몽주가 있어 왕실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최영은 이성계에게 패하여 죽고 말았다.

이제 역성 혁명을 착착 진행하는 이성계의 측에서 보면 제일 큰 장애물은 정몽주였다. 이방원은 정몽주에게 하여가(何如歌)’를 지어 그의 마음을 떠보려하였다.

그러나 돌아온 그의 답은 단심가(丹心歌)’였다. 이방원은 기울어가는 고려왕조에 대한 정몽주의 확실한 뜻을 알고 조영규 등을 보내 이성계를 문병하고 귀가하는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척살(刺殺) 하였다.

이때 정몽주의 나이 56. 그가 이렇게 죽은지 4개 월 만에

이성계는 공양왕에게서 선양받는 형식을 취해 왕위에 앉고,

이듬해 1393년 새 왕조의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선포 했다.

 

정도전은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기획하고 실행하고 완성한 개국 공신이다.

그는 가끔 자신과 이성계의 관계를 한()나라의 장량(張良)과 고조(高祖-劉邦)와의 관계에 비유하면서 이성계가 자기를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이성계를 이용하여 새 왕조를 만들었다는 투로 주석에서 토설했다 한다.

왕조 창건에 대한 자신의 이상을 이성계를 통하여 이룩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조선 건국 후 세자 책봉에서 개국에 공이 컸던 이방원은 제외되고,

이성계의 둘째 부인 선덕왕후 강씨의 둘재 아들(왕자 8형제중 막내) 방석(芳碩)이 선택되었다. 방석이 세자가 되고 정도전이 그의 사부가 되었던 것이다.

 

왕실의 후계구도가 이렇게 잡히자 이방원은 태조 7(1398)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세자 방석과 그의 형 방번(芳蕃)을 죽이고,

정도전은 직접 자기의 칼로 도륙을 내었다.

 

정도전의 모든 공명과 왕조에 대한 개혁과 민본 정치의 꿈은 이방원의 칼 아래 무참하게 좌절될 수밖에 없었다.

정몽주는 고려의 충신으로 끝까지 충절을 지키다 방원에게 죽었고, 정도전은 아버지 이성계의 충신이라 역시 방원에게 죽었다. 그러나 훗날 이방원(태종)의 포폄의 평가는 완전 뒤 바뀌었다.

 

이방원은 정몽주가 죽은지 13년이 지난 1405(태종 5)

정몽주를 영의정에 추증하고 익양부원군에 추봉했다.

그리고 시호를 문충(文忠)이라 했다. 조선에서 고려 충신 정몽주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신이라 현창되었고, 선죽교에 뿌린 피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전설로 전하게 되었다.

 

한편 정도전은

이방원에 의해, 고려와 조선의 두 임금을 섬긴 변절자며 불충한 자이고,

이성계의 첫째부인 한씨 소생의 왕자들(6형제)을 모조리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는 누명도 쓰게 되었다. 역적으로 취급된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때문에 조선왕조 오백 년 동안 정도전은 역사에서 존재감이 없었고,

정몽주는 역사에서 충신으로 길이 빛났다.

정도전은 정조 때부터 복권운동이 일어나 완전 복권 된 것은 대한 제국 말엽의 고종황제 때이다.

 

KBS의 사극 정도전을 시청하면서 정몽주와 정도전의 상반된 모습을 그려 볼 때,

정치권력의 무상함과 세태에 따라 변하는 인심의 무정함을 다시 한번 짚어 볼 수 있었다. (2014. 6. 20 실버타임).

 



혁신학교? 혁신은 개뿔! 애들 학력만 퇴행중! 교무실 커피자판기, 교사 항공권 구입에 물 쓰듯...특혜 불구 학력은 뒷걸음 일반학교에 비해 연간 1억4,000~1억5,000만원을 특별히 지원받는 서울형 혁신학교가 예산을 엉뚱한 곳에 쓰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특별예산(학교운영비)으로 교사실의 각종 책장이나 가구를 구입했고, 수백만원을 들여 학습자료 저장용 USB와 외장하드를 사서 나눠 갖은 사실도 밝혀졌다. 교무실 커피자판기를 구입하는데 특별예산을 쓴 혁신학교도 있었다. 이밖에도 여직원 휴게실 가스보일러 교체, 부장교사 워크숍 항공권 구입, 교직원 전체 체육복 구입 등 본래 목적과는 거리가 먼 곳에 특별예산을 물 쓰듯 전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학생들에 대한 선심성 예산 집행 정황도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학생 티셔츠 구입, 진공청소기 구입 등에 특별예산을 수백만원씩 사용했다. 학생들의 생일축하용 떡케익 구입비용으로 매달 70~90만원을 사용한 곳도 있었다. 반면 서울형 혁신학교의 학력은 일반학교에 비해 오히려 뒷걸음질 친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내용은 서울시교육청이 새누리당 강은희 의원에게 제출한 2012년 혁신학교 정산서 통합지출부를 통해 밝혀졌다. 서울형 혁신학교는 곽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