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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탐욕이 부른 沒落(몰락)--NYT 번역기사/ 세월호 침몰과 유병언의 파멸

뉴욕타임즈는 7월27일자 신문에 '탐욕이 부른 몰락(Greed Before the Fall)'이란 제목으로 세월호와 兪炳彥(유병언) 관련 기사를 게재했다. 최상훈 서울특파원을 포함한 총 6명의 기자가 서울, 파리, 뉴욕에서 한국의 세월호 참사를 취재해 쓴 기사다. 全文(전문)을 번역 소개한다.

● 목포해양대학원 김우숙 학장은 “세월호가 그 정도로 많은 화물을 싣고 그렇게 멀리 항해할 수 있었다는 것은 기적이었고, 세월호에게 화물은 곧 현찰이었다”고 말했다.

● 검찰 측이 발표한 추가 증거에 따르면 세월호 소유사에서 얻은 이윤은 모두 유병언과 그의 일가로 돌아갔고 세월호 안전훈련 비용으로는 승무원당 2달러씩만 지급됐다. 2달러마저도 수료증을 복사하는 비용이었다.

● 세월호 참사는 훈련부족으로 일어났음이 분명하다. 실제로 몇몇 승무원들은 참사 후 이뤄진 인터뷰에서 긴급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고 탈출 훈련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의 사업체 중 몇 곳은 신도들이 주요 구매자가 되는 방식으로 운영했다. 최근에는 몸을 깨끗하게 하라는 敎理를 이유로 녹차나 관장약도 팔았다.

● 유병언은 그의 존재 자체를 신비스럽게 하고 싶어서였는지 남들이 그의 사진을 찍을 때 항상 뒤나 옆에서만 찍게 했다.

● 제주도의 일부 港灣(항만) 근로자들은 지난해에 세월호를 포함한 다른 선박들이 보고되는 것 이상의 화물을 싣는다는 것을 문제 삼아 지역 정부청사 건물 앞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톤당으로 임금을 받는 그들이 실제로 일한 양보다 돈을 덜 받는다는 것을 볼 때 그들의 불만은 충분히 이해할 만한 사안이다.


루브르 박물관과 베르사이유 궁전에 새겨진 그의 이름과 수십 년간 그의 교리를 따르던 수만 명의 사람들, 그리고 全세계 곳곳의 수백 채 저택과 사업체를 뒤로 한 채 유병언은 빈 술병 하나를 옆에 두고 잡초 위에서 부패한 채 쓸쓸히 삶을 마감했다.

몇 주 전에는 유병언을 잡기 위해 1만 명에 달하는 경찰 인력 투입, 지하 은닉처 수색을 위한 포크레인 동원 등 한국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수색작전이 펼쳐졌지만, 결국엔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한 번은 유병언을 거의 잡을 뻔했지만, 나중에 알려진 사실에 따르면 그는 미리 도피한 별장 내 벽 속 비밀공간에서 가방 두 개에 100만 달러에 달하는 현금을 갖고 숨어있었다.

한국 검찰은, 유병언이 평생 세간의 인정을 받기 위해 장난감부터 배에 이르기까지 팔 수 있는 것은 모두 팔았었고 이는 그를 돈방석에 앉게 했다고 했다. 유병언은 한국에서 평화 시에 일어난 최악의 참사인 304명을 목숨을 앗아간 세월호 침몰에도 원인을 제공했다. 세월호 소유사를 포함한 여러 개 계열사에서 벌어들인 수백만 달러와 승객들의 안전을 담보로 한 사업운영으로 얻은 돈들이 고스란히 유병언 一家(일가)에게 넘어갔다고 검찰은 밝혔다.

세월호 위층에 추가로 설치된 객실과 대리석으로 된 갤러리가 배 무게를 늘렸다. 배에는 또 너무나도 많은 量(양)의 화물이 실렸고, 제대로 결박조차 할 수 없었다. 검찰에 따르면 세월호는 배가 가라앉지 않게 하기 위해 배의 平衡(평형)을 담당하는 밸러스터 탱크의 물(이하 평형수)도 빼고 운행했다. 더 많은 이윤을 남기기 위해 過積(과적)했다는 것이 조사단의 설명이다.

목포해양대학원 김우숙 학장은 “세월호가 그 정도로 많은 화물을 싣고 그렇게 멀리 항해할 수 있었다는 것은 기적이었고, 세월호에게 화물은 곧 현찰이었다”고 말했다.

세월호에 탑승했던 학생들이 보낸 잊을 수 없는 문자들과 침몰상황을 담은 비디오들이 한국을 뒤흔들었다.

세월호가 처음 기울어지기 시작하자 학생들은 다가올 위험을 감지하지 못하고 “재밌다”를 외치며 페이스북에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올렸다. 배가 더 기울기 시작하자 순식간에 공포가 번졌고 학생들은 “죽기 싫어”를 연발하며 그들의 부모에게 급한 작별인사를 보냈다.

한 소년은 급하게 “이제 끝인 것 같아요,” “엄마, 아빠 사랑해요”라는 문자를 보냈다.


범죄자의 再조명

위와 같은 상황이 전 세계로 보도됐다. 세월호 침몰에 연관된 규제 및 인허가 담당자, 선장, 관리자, 승무원 등이 줄줄이 체포됐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와 진상규명의 중심에는 한국에서 가장 기이하고, 지탄받고 있는 한 一家가 있다.

참사를 막지 못했다는 것과 유병언을 생포하지 못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는 朴槿惠(박근혜) 대통령도 이 비극의 근원은 유병언 일가에 있으며 유병언 측은 국민들에게 진실을 밝히려 하지 않고 법망을 벗어나려고 하고 있다고 말했다. 유병언의 부인과 두 명의 자녀는 체포된 상태고 차남은 아직 도주 중이다.

兪씨 일가 측은 세월호 참사, 사업체, 그리고 교회에 관한 질문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있다. 유병언을 따르는 신도들은 박근혜 대통령이 정부에 대한 비난 여론을 잠재우고자 유병언 일가를 이용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여러 규제 담당자, 해양 경찰 담당자, 검찰, 항만 근로자, 선원들과의 인터뷰를 종합해 보면 兪씨 일가가 세월호를 더 고급 배로 보이게 하기 위해 돈을 들이면서 안전 수칙을 무시하는 등 세월호 참사에 중대한 역할을 했다는 검찰 측 설명을 입증한다.

유병언 일가는 세 개의 대륙에 최소 70개가 넘는 회사들의 자금을 개인 현금인출기처럼 사용했다고 검찰은 밝혔다. 그들의 명의로 돼 있거나 그들이 관리하는 회사들의 자금은 미국에만 맨해튼의 리치 칼튼 호텔을 포함한 최소 800만 달러 상당의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고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먹었다는 프랑스製 초콜릿 '드보브 에 갈레'의 미국 판권도 있다. 프랑스에서는 마을 하나 전체를 사들이기도 했다.

유병언은 20여 년 전 자신의 신도 32명이 자살한 오대양 사건에 횡령 등의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은 후 자신을 우상화하는 데 수천만 달러를 사용했다.

유병언 씨를 젠 스타일의 예술 천재로 부각하기 위해 兪씨 일가는 루브르 박물관에 150만 달러를 기부했고 그의 예명(號)인 아해라는 이름을 박물관 대리석벽에 황금으로 새겼다. 兪씨 일가는 뉴욕 그랜드 센트럴 驛(역)에서 그의 사진전을 열었고, 프랑스 왕궁이었던 베르사이유 궁전에도 사진전을 열기 위한 대관료로 수개월간 100만 달러 가까이 사용했다.

피가로紙(注: 프랑스 조간신문)는 또 그들이 모임의 자리를 빛내기 위해 미슐랭 스타 요리사들에게 요리를 부탁하고 프랑스 前 대통령의 부인이자 모델 겸 가수였던 칼라 부르니 사르코지의 어머니 같은 유명인사들을 초청하기도 했다고 보도했다. 사진전이 끝나고 열린 콘서트에서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새로운 곡인 ‘심포니 6번 아해’라는 곡도 연주했다.

검찰 측이 발표한 추가 증거에 따르면 세월호 소유사에서 얻은 이윤은 모두 유병언과 그의 일가로 돌아갔고 세월호 안전훈련 비용으로는 승무원당 2달러씩만 지급됐다. 2달러마저도 수료증을 복사하는 비용이었다.

세월호 참사는 훈련부족으로 일어났다는 것이 분명하다. 실제로 몇몇 승무원들은 참사 후 이뤄진 인터뷰에서 긴급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고 탈출 훈련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들은 실제로 배가 가라앉기 시작할 때 내부방송으로 “자리에서 대기하라”라고 지시했고 이는 학생들을 물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한국에서는 선박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의 많은 규제가 신뢰를 바탕으로 이뤄지고 빠져나갈 구멍이 많으며 이는 부족한 감시인력과 각종 부패로 비롯된 문제다. 이런 시스템적 결함이 세월호가 위험을 안고도 운항할 수 있게끔 했다.

경제성장을 지속하기 위한 한국 사회 전반에 퍼진 느슨한 안전규제가 건물붕괴에서 최근 불거진 원자력발전소 사고의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한국여론은 세월호 참사 이후 朴대통령이 말했듯 한국 사회에 곪아온 부패와 비리를 척결하고, 규제 개혁 작업 가속화를 주문하고 나섰다.

검찰과 감사원에 조사 결과 해양경찰 담당자들은 세월호 소유사에서 제공한 음식과 술에 눈이 멀어 안전 점검에 소홀했다. 세월호 출항 前 점검을 맡은 사람들 역시 멀리서 대충 화물이 어느 정도 실렸는지 보기만 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구원파의 신도들은 이 모든 사안이 정부가 선박운항 감시 소홀과 172명을 구출하는 데 그친 구조 과정에 대한 비판에서 벗어나기 위해 兪씨 일가를 조사하려 한다고 주장한다. 이 사건은 실제로 박근혜 정부를 혼란에 빠지게 했다. 국무총리는 사퇴 의사를 밝혔고 박근혜 정부 지지율은 곤두박질쳤다.

유병언의 설교 등이 소개된 웹사이트를 관리하고 기독교복음침례회 대변인이기도 한 이태종 씨는 “유병언과 구원파를 잡으면 모든 일이 끝나는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 敎(교)의 설립 이래 유병언은 최고의 지도자다”라고 말했다.


소년期의 거대한 야망

유병언의 거대한 야망은 그의 소년기부터 시작했다. 1981년에 발행된 그의 설교집에 따르면 허약했던 소년 유병언은 미켈란젤로보다 더 훌륭한 조각가가 되겠다는 꿈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인 1960년대에 들어서 종교에 눈을 뜨게 됐다.

구원파 홈페이지에 따르면 젊은 유병언은 미국 기독교 선교사의 영향을 받아 본인 자신도 傳道(전도)를 시작하게 됐다.얼마 지나지 않아 대중을 사로잡는 웅변가였던 유병언은 그의 지지자들과 함께 文鮮明(문선명) 목사의 통일교가 탄생한 곳이기도 한 한국에서 새로운 종교를 만들었다.

구원파는 현재 10만 명의 신도를 갖고 있으며 교인이 구원을 받는 방법을 다른 敎理(교리)와는 다르게 해석한다.

한국 경기도 안성의 진용식 장로교 목사는 구원파는 간통이나 절도죄를 저질러도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치는 무법자들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한 유병언은 사이비 종교 집단의 지도자고, 그의 신도들은 그를 모세나 메시아인 양 받들며 그에게 돈을 바친다고 했다.

구원파 지도부는 그들의 교리는 성경에서 비롯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비난을 받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교리 중 하나는 건강을 중요시하는 데에 있다. 이는 유병언이 어렸을 때 결핵을 앓는 등 허약했고 그의 결벽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몸과 혈관을 청결히 하는 것을 통해 정신이 순수해질 수 있다고 설교했고 다른 교인들이 식사 前 장시간 동안 기도하는 것을 음식에 침이 들어갈 수 있다며 불만을 나타내기도 했다.

유병언은 교회를 설립하고 나서 그의 두 번째 인생인 사업가의 길을 걸었다. 기자들과 구원파에 몸을 담았던 사람들에 따르면 1970년대에 시작한 그의 사업은 신도들에게 기부금이나 투자금을 요구해 성장했다고 한다.

그의 사업체 중 몇 곳은 신도들이 주요 구매자가 되는 방식으로 운영했다. 최근에는 몸을 깨끗하게 하라는 敎理를 이유로 녹차나 관장약도 팔았다.

이런 방식이 한국이 아직 성장해가고 경제 기적을 막 일으키기 시작할 즈음 그에게 큰 돈을 안겨줬다. 사업자금을 구하기 어려웠던 때 그는 신도들에게 투자비 명목으로 돈을 챙겨 현대와 삼성이 떠오르던 시기에 같이 공장도 짓고 회사도 설립할 수 있었지만, 대기업 대열에 끼지는 못했다.

1980년대에 들어서 그는 수년간 상어 기름, 유기농 우유, 화장품, 자동차 부품, 원자력 시설에 들어가는 특수 페인트 제품에 이르는 여러 사업을 통해 작은 재벌 규모에 속하게 됐다.

1984년 全斗煥(전두환) 대통령이 그의 공장 한 곳을 방문했을 때 그는 세간의 주목을 받는 사업가가 돼 있었다. 그로부터 두 해가 지나고 유병언은 정치 인맥을 통해 1988년 서울 올림픽 당시 한강유람선 사업권을 따낸 것으로 알려졌다.

유병언은 그 당시에도 적정인원보다 많은 인원을 태웠다는 비난을 받았다. 연휴 기간에 최다 수용인원 200명의 두 배에 가까운 인원을 태우려 했었고 그 당시에 성난 시민들은 시위를 일으킬 수준이었다. 당시 선원으로 근무한 前 구원파 신자 이청 씨에 따르면 유병언은 부두에서 해탈한 모습으로 바라보기만 했다고 한다.


추락

영원할 것만 같던 그의 전성기는 1991년 들어서 벽에 부딪혔다. 그는 구원파 신자 32명이 사망한 사건에 연루돼 체포됐다. 공장 식당의 다락방에서 그들의 屍身(시신)이 발견됐고 몇은 목을 매단 채로 죽었다. 경찰은 유병언이 그들의 죽음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그들의 죽음이 갚을 수 없을 정도의 부채와 관련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유병언은 마지막까지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지만 교회 돈을 사업에 썼다는 횡령혐의로 유죄를 선고받고 1991년부터1995년까지 4년간 복역했다.

그의 감옥생활과 1990년대 아시아 외환위기의 여파로 문 닫게 된 그의 사업체들을 보고 많은 사람이 그가 回生(회생)하지 못할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검찰에 따르면 그는 출소하자마자 대중의 눈길을 피해 곧바로 회생했다고 한다.

그의 회사들이 부도가 나자 그는 그의 두 아들로 하여금 정부 채무상환 정책 중 하나인 '리시버 제도'(注: 주식회사가 경영난에 빠졌을 때, 파산절차에 따르지 않고 관리인을 두고 회사를 운영한 뒤 매각하도록 하는 제도)를 통해 저렴한 가격으로 다시 부도난 회사를 사게끔 했다고 검찰과 당국자들은 설명했다. 유병언은 이 회사들을 거미줄 식으로 엮어 하나의 주식회사 형태로 통합해 親知나 믿음이 깊은 신도들을 요직에 앉혀 운용했다고 검찰은 밝혔다.

이진호 검사는 6월에 '그들은 종교와 사업을 연계해 신도들로부터 기부금을 받아내 사업을 키웠다'고 말했다. 기업운영 주체, 대주주들, 그리고 내부 감사들까지 모두 구원파 신도였고 어떠한 형태의 견제와 균형을 맞추려는 체계도 없었고, 兪씨 일가가 돈을 원하면 기업은 내주는 식으로 운용됐다고 말했다.

2005년 녹화된 설교에 따르면 유병언은 끝없는 핍박을 견뎌내기 위해 단결하자고 했다.

유병언은 마태복음을 인용해 “우리는 세상에 괴롭지만, 확실히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핍박을 받을 때 슬퍼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라고 말했다.

검사와 금융 규제 담당자들의 말에 따르면 유병언과 그의 일가는 그들의 富(부)를 키우기 위해 매우 창의적인 방법을 개발했다고 한다. 검찰은 兪씨 일가가 1300여 개의 특허와 저작권을 주장하며 실질적으로 자신들이 운영하는 회사로부터 돈을 받아내고 있다고 한다. 장남 유대균은 청해진 해운의 회사이름 사용료로 145만 달러를 받았고, 차남은 침몰한 세월호 이름의 저작권을 갖고 있는데 그를 통해 돈을 받았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반면 다른 정부 문서에 따르면 兪씨 일가는 서류상으로는 청해진 해운의 주식을 보유하지 않았다. 하지만 청해진해운의 최대주주는 다른 선박회사인 천해지 주식회사로 밝혀졌고, 이는 유병언의 두 아들이 대주주로 등록된 ‘아이원아이(I-One-I)’라는 투자회사 소유다. 검찰은 유병언 측은 부인하지만, 유병언이 이 모든 회사의 실질적인 회장이자 결정권자로서 매월 1만 달러 이상의 월급을 받았다고 한다.

검찰은 유병언이 이 모든 사업을 뒤에서 쥐락펴락할 수 있었던 이유가 청해진 해운의 대표 김한식이 유병언의 명령을 따르는 독실한 신도였고 그의 이름으로 유병언의 주식 10%를 숨겨 줬기 때문이라고 한다. 김한식 대표는 공판에서 유병언의 형 유병일 씨에게 청해진 해운 고문료로 13만1000달러를 지급했다고 말했다.

검찰은 兪씨와 그의 두 아들 혹은 그들이 관리한 회사들이 최근에만 청해진 해운으로부터 최소 382만 달러를 받았다고 밝혔다. 다른 정부 자료에 따르면 청해진 해운은 250만 달러를 兪씨 일가와 연관된 회사 주식에 사용했고 그중 하나는 兪씨의 해외 전시전에 사용됐다.

돈이 兪씨 일가에만 들어감으로써 세월호의 안전이나 긴급상황 대처에 들어갈 돈도 없어진 청해진 해운은 76만4000달러의 적자를 내는 등 금전적으로 매우 힘들었다고 검찰은 밝혔다.


예술인 유병언

검찰과 정부는 兪씨 일가의 수많은 재산 축적 책략 중 하나로 유병언의 또 다른 이름인 '아해'의 사진작품 판매를 들고 있다.

兪씨 일가 측이 청해진 해운을 포함한 그들이 관리하는 회사들에 그의 사진을 좋은 투자상품이라며 터무니없는 가격에 사게끔 강요했다는 게 검찰 측 설명이다. 구원파인 李모씨에 따르면 많은 신도들이 이 사진들에 과연 투자할 가치가 있는지 의문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이 구매했다고 말했다.

어떤 이들은 사진 가격이 급상승할 것으로 기대해 투자하기도 했지만 다른 이들은 꺼림칙하지만 兪씨와 구원파의 위세를 보고 구매했다고 한다.

李씨는 자신들과 구원파에 대한 편견으로 비롯된 오랜 시간 고난을 겪었지만, 아해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사진작가로 거듭나고 아해가 유병언이라는 사실이 세간에 알려졌을 때에는 한국의 구원파에 대한 오해도 사라질 것으로 기대했다고 한다.

아이를 칭하는, 이 오래되고 들어보지 못한 '아해'라는 이름은 3년 전 그가 세계 명소를 돌아다니며 찍은 자연사진을 통해 알려졌다. 루브르 박물관의 정원을 빌려 개최한 작품전은 뉴욕에 위치한 아해프레스 명의로 돈이 지급됐다. 아해프레스는 유병언의 차남(한국이름 유혁기, 미국이름 키쓰)이 운용하고 있다. 추가로 설치된 가건물을 제외하고 임대료 자체로만 50만 달러 이상이 들었다.

신도들에 따르면 전시전의 이름으로 쓰인 ‘나의 창 밖으로’는 유병언이 4년간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매일 窓(창) 밖의 풍경을 촬영한 사진들을 모은 것이라고 한다.

아해프레스의 마이클 함 이사는 유병언이 그가 수감생활 중 매일 감옥 창틀로 본 세상에 영감을 얻어 270만 장의 사진을 같은 창문을 통해 찍었다고 밝혔다.

유병언은 그의 존재 자체를 신비스럽게 하고 싶어서였는지 남들이 그의 사진을 찍을 때 항상 뒤에서나 옆에서만 찍게 했고 아해프레스 웹사이트에도 르네상스 맨(르네상스的 교양인)처럼 '창안자, 사업가, 자선가, 환경 운동가, 무도가,화가, 조각가, 시인, 그리고 사진작가'로만 소개돼 있다.

함 씨는 서면 인터뷰에서 '전시회는 대중들에 자연의 아름다움과 자연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서 열렸다'고 말하며 '우리의 시각에서는 아름답고 의미 있는 노력이 허위 자료와 부정확한 언론 보도로 인해 더럽혀졌다'고 세월호 참사 이후 유병언을 향한 비난이 쏟아진 후 밝혔다.

세월호의 소유사인 청해진 해운은 유병언의 작품을 구매한 회사 중 한 곳이다. 청해진 해운 대표는 체포 전 한 한국 잡지사와의 인터뷰에서 '청해진 해운은 유병언의 사진이 담긴 200개의 탁자용 책을 구매하기 위해 10만 달러 정도를 사용했다'고 말했다. 검찰은 그들이 7장의 사진을 구매하기 위해 10만7000달러를 사용했다고도 밝혔다.

兪씨와 연계된 다른 회사에서는 한 장의 사진을 구매하는데 2만1400달러의 돈을 들였다고 밝혔다.

이 사진들이 과연 그만한 시장 가치가 있는지는 확인된 바 없다. 전문가, 딜러, 경매상들은 이 사진들이 한 번이라도 제대로 된 수집가나 딜러에 팔렸는지도 모르겠다고 한다.

뉴욕국제사진센터 수석 큐레이터로 근무하고 아시아 사진전을 담당하는 크리스토퍼 필립 씨는 “나의 15년간의 박물관 큐레이터로서의 의견은 이 작품들에 가치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른 이들에 전하지도 못할 정도다”라고 말하며 그의 작품은 과거 한국의 경제나 종교의 각종 쓰레기 작품들을 모아 하나의 보편적인 작품을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의 시작

검찰에 따르면 세월호 참사는 유병언이 2012년 직접 지시한 추가 객실과 위층에 설치된 아트갤러리의 증축에서 시작됐다. 해상 안전 및 재산보호를 담당하는 한국선급이 이 공사를 허가했다. 조사단은 수정사항에는 문제가 없지만, 화물 적재량과 평형수 기준은 지켜져야 한다고 했다. 한국선급은 선박 리모델링이 제대로 이뤄졌는지 조사단을 파견하기도 했다.

현재 구속 수감된 선박관리자들의 기소장에 따르면 그들은 새로 개조된 선박이 과연 안전한지 아닌지를 판단하기 위해 시행하는 기울기 실험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인정했다.

검찰과 감사원 조사결과에 따르면 해양 경찰 역시 이들이 제대로 안전성 여부를 시험해 봤는지를 확인할 의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번 달 발표된 중간조사보고서에서 감사원은 선박 개조가 기존에 승인받은 청사진보다 100톤 가량 더 무겁게 개조됐다고 밝혔다. 선박 아트갤러리의 대리석을 추가한 게 원인이다.

한국해운조합 역시 세월호의 과적 문제를 확인했어야 할 의무가 있다. 선박이 부두를 떠날 때 얼마를 싣고 운항하는지 각 선박은 한국해운조합에 보고할 의무가 있다.

현 해양안전체계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한국해운조합이 이런 역할을 맡을 자격이 없다고 주장한다. 이는 이 조합이 營利(영리)단체이고 해운사들의 지원을 받아 운영되는데 감시를 적절히 할 수 있느냐는 이유다.

세월호의 행선지였던 한국해운조합 제주지부의 담당자는 과적이 있었는지 여부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았다고 6월 인터뷰에서 밝혔다. 그들은 선박회사 측이 돈을 지급하지 않아 추가 조사에 드는 비용을 충당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이제 선박 옆면에 그어진 滿載(만재) 흘수선(注:선박이 충분한 예비 부력을 가지고 여객이나 화물을 싣고 안전하게 항행할 수 있도록 허락된 최대의 흘수)을 초과했는지 아닌지만 확인하는 것이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세월호 승무원들이 했다고 알려진 것처럼 평형수를 최소화하면 만재 흘수선을 맞출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될 경우에는 선박의 무게중심이 흔들렸을 때 치명적인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검찰 “세월호 참사의 원인은 過積”

지난 4월 세월호가 침몰했을 시 세월호 화물칸에는 적정량의 두 배 가까이 실려있었다고 한국 검찰은 밝혔다. 출항 前 점검을 맡은 사람들은 육안으로만 중량을 확인했고 무게 중심이 잘 잡혔는지는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다. 검찰은 승무원들이 허가된 중량을 맞추기 위해 밸러스터 탱크(평형수)의 水量(수량)을 줄였다고 한다. 줄어든 평형수와 두 배 가까이 실은 화물이 세월호의 무게중심을 잃게 해 기울게 됐다는 설명이다.

세월호는 지난 13개월 동안 최소 139번 이상 화물을 過積(과적)한 채 운항했다고 검찰은 밝혔다. 승무원 등은 법정 진술에서 선박이 기준치 이상의 화물을 싣고 운항한 적이 있다고 진술했다. 항만근로자의 진술에 따르면 선박이 화물을 싣고 내릴 때 심하게 흔들렸고 어떨 때는 지게차를 동원해 선박의 중심을 잡기도 했다고 밝혔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기 석 달 전인 1월에는 심한 바람으로 제주항에서 정박 상태에서 균형을 잃은 적이 있다. 세월호는 돌풍에 휩쓸려 하나의 돛단배처럼 흔들렸고 출항하지 못했다. 검찰에 따르면 이 사건이 있고 제주도 지부 회사 담당자들이 상부에 세월호의 안전 문제에 대해 보고했다고 한다.

검찰은 회사 담당자들이 이 문제가 있는 선박을 팔아야겠다고 결정했지만, 유병언 본인이 반대해 진행되지 않았다고 한다. 회사 고위간부들은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최대한 화물을 실으라고 명령했다고 검찰은 밝혔다.

1월 이전에도 위험신호는 여러 번 있었다. 제주도의 일부 항만 근로자들은 지난해에 세월호를 포함한 다른 선박들이 보고한 것 이상의 화물을 싣는다는 것을 문제 삼아 지역 정부청사 건물 앞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톤당으로 임금을 받는 그들이 실제로 일한 量(양)보다 돈을 덜 받는다는 것을 볼 때 그들의 불만은 충분히 이해할 만한 사안이다.

35세의 제주 항만노조원 고도호씨는 벌써 4년 전에 자신을 포함해 여러 근로자들이 신문 광고를 통해 문제를 제기했으나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4년 전 우리가 문제를 세상에 알렸을 때 우리 사회가 귀를 기울였다면 세월호 참사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해운사가 자행한 수많은 부정행위가 4월 16일 세월호 참사를 일으켰다. 세월호의 항로에서 제일 위험한 지역인 맹골수도를 화물 한도의 2배에 달하는 2142톤을 싣고 운항했다고 검찰은 밝혔다.

세월호는 평형수 기준치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761톤만을 싣고 운항했다. 세월호의 조타수가 기존에 운행하던 선장보다 5도 정도 더 방향을 오른쪽으로 급하게 틀었다고 검찰은 밝혔다. 승무원과 생존자는 제대로 결박되지 않은 화물 더미가 한쪽으로 미끄러지면서 배의 무게를 한쪽으로 기울게 하는 것을 봤다.

첫 번째 해양경찰 구조선이 사건 현장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세월호는 이미 60도 가량 기울었고 거의 수면과 직각 상태를 이루고 있었다. 구조팀은 유리창 안으로 생존자들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밧줄도 없고 배에 올라갈 장비가 없었기 때문에 구조할 수 없었다고 목포 해양경찰 관계자 김세진 씨가 말했다. 金씨는 그 정도 크기의 선박이 그 정도로 기울려면 최소 몇 시간은 걸렸어야 했다며 이번처럼 2분도 안 걸려서 기울 수는 없다고 말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3개월이 지난 지금 실종자의 시신 10구는 아직 찾지 못했고 세월호는 가라앉은 상태다. 사건 이후 검찰은 벤틀리 승용차와 200개가 넘는 아파트 등 兪씨 일가와 연관된 1억 달러 이상의 자산을 동결시켰다.

한국 금융감독위원회에의 발표로는 兪씨 일가 소유사들이 3300만 달러 이상의 자금을 이미 해외로 빼돌렸을 것이라고 밝혔다. 검찰 역시 많은 자금이 미국인과 결혼해 영어가 유창한 兪씨의 차남 키쓰가 운용하는 회사로 옮겨졌을 것으로 추정했다. 한국정부는 미국 당국자에 협조를 요청한 상황이다. 그의 형인 유대균은 지난 금요일 한국에서 체포됐다.

많은 시간과 돈을 자신의 이미지 회복에 투자한 유병언의 모습은 한국 전역에 현상수배 전단지로 도배됐다. 그는 그가 벽 뒤에 숨었던 별장 근처 매실밭에서 발견됐다. 경찰은 그의 사체가 심하게 부패돼 자살, 자연사, 혹은 타살인지 사인을 밝히기 어렵다고 밝혔다.

검찰은 세월호가 지난 13개월 동안 화물 한도를 초과해 운항하며 번 돈은 290만 달러 정도이고 이는 희생된 승객 한 명당 9500달러에 달한다고 밝혔다.

조갑제 닷컴 / 번역·金永男(在美통신원)



혁신학교? 혁신은 개뿔! 애들 학력만 퇴행중! 교무실 커피자판기, 교사 항공권 구입에 물 쓰듯...특혜 불구 학력은 뒷걸음 일반학교에 비해 연간 1억4,000~1억5,000만원을 특별히 지원받는 서울형 혁신학교가 예산을 엉뚱한 곳에 쓰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특별예산(학교운영비)으로 교사실의 각종 책장이나 가구를 구입했고, 수백만원을 들여 학습자료 저장용 USB와 외장하드를 사서 나눠 갖은 사실도 밝혀졌다. 교무실 커피자판기를 구입하는데 특별예산을 쓴 혁신학교도 있었다. 이밖에도 여직원 휴게실 가스보일러 교체, 부장교사 워크숍 항공권 구입, 교직원 전체 체육복 구입 등 본래 목적과는 거리가 먼 곳에 특별예산을 물 쓰듯 전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학생들에 대한 선심성 예산 집행 정황도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학생 티셔츠 구입, 진공청소기 구입 등에 특별예산을 수백만원씩 사용했다. 학생들의 생일축하용 떡케익 구입비용으로 매달 70~90만원을 사용한 곳도 있었다. 반면 서울형 혁신학교의 학력은 일반학교에 비해 오히려 뒷걸음질 친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내용은 서울시교육청이 새누리당 강은희 의원에게 제출한 2012년 혁신학교 정산서 통합지출부를 통해 밝혀졌다. 서울형 혁신학교는 곽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