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질서에 정통성이 시험받고 있다
제국주의의 환영을 좇는 나라와 겁을 내고 있는 나라들
中西寬(나카니시 히로시) 京都大 대학원 교수
거래하는 시대로부터 권력정치 시대로의 변화
5월 20일부터 21일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上海를 방문하여 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한 후에 굳게 악수하는 사진을 전 세계로 전파하였다.
이 회담에서 中러의 ‘전면적’ 파트너십이 새로운 단계인 戰略的 협력관계로 진화했다고 말하며, 내정간섭이나 일방적인 제재를 반대하며 역사를 왜곡하며 전후의 세계질서를 손상하려는 기도를 반대한다는 등을 내용으로 한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또한 10년간 교섭해 왔던 러시아로부터 중국으로 천연가스 매각협정을 체결하며 세 번째 중러 합동군사연습을 실시하는 등 중러양국의 협력관계가 심화되었음을 홍보한 것이다.
이런 중러양국의 밀월은 국제질서의 현상에 도전하며 힘의 행사를 사양하지 않는 현상타파 진영의 盟約처럼 보였다. 실제로 중러양국은 서방과 주변국가의 관계악화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힘의 행사를 통하여 國益을 추구하려는 것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러시아는 지난 3월 일방적인 주민투표로 우크라이나로부터 독립을 결정한 크리미아 지방을 러시아연방에 편입시킴으로써 서방국가들로부터 강력한 비난과 제재를 받고 있다.
중국도 작년 11월 일방적으로 防空식별구역(ADIZ)의 설정을 선언하였으며 식별구역을 통과하려는 항공기에 사전 통보를 요구하고 있다. 최근에는 일본의 방공식별권과 중복되는 지역을 통과하는 항공기를 중국 전투기가 위협하는 사건을 두 번이나 일으켰다. 5월에는 베트남과 분쟁중인 西沙列島 해역에서 중국 해양석유총공사가 거대한 굴착기를 설치하여 석유 抽出을 개시하였다. 부근에서는 월남과 중국의 어선과 다른 선박의 충돌이 반복하자 중국측도 海軍함정을 출동시켰다고 보도하고 있다.
유라시아의 두 大國이며 유엔 상임이사국이기도 한 러시아와 중국이 이러한 자세를 취한다는 것은 국제정치에서 심상치 않은 의미를 갖는 것이다. 냉전 종결 후 중국과 러시아는 서방주도의 국제정치 운영에 대하여 자주 반대하며 때로는 거부권을 행사해 왔다. 예를 든다면 1999년 코소보 분쟁시 유엔 안보이사회에서 군사력 행사에 대하여 중러양국은 반대하였다. 북한에 대한 제재나 시리아의 내전개입에도 반대의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국제질서에 대한 외교적 반대였을 뿐이다. 최근의 움직임은 군사력에 의한 일방적 행동을 보이는 것은 국제질서의 정통성에 대한 큰 도전인 것이다. 국제정치의 현 단계에서는 질서 속에서의 국가간 거래가 아니라 힘의 행사나 협박을 의미하는 권력투쟁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그렇다면 중국과 러시아는 팽창주의 내지 제국주의 국가가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인가? 현 시점에서는 그러한 정치색이 강한 표상이기도 하지만 그런 행동의 원천, 의도, 능력을 정밀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명백하게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주권을 침해하였으며 그 일부를 자국의 영토로 편입하였다.
우크라이나가 소련군으로부터 물려받은 핵무기를 러시아에게 돌려주는 대가로서 라시아 아메리카 등과 체결한 부다페스트 각서에 위반한 것도 명백하다. 이것은 국제법을 위반한 일방적 현황변경인 것이다. 그러나 국제질서는 국내질서와는 달리 합법성만으로 이해할 수가 없는 면이 있다.
소련연방 시대에 우크라이나로 이관되어 러시아 주민이 다수를 점하는 크리미아에 대한 우크라이나의 주권은 정치적으로 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크리미아에 관한 한 현상에는 애매함이 있으나 러시아의 행위를 결정적 현상변경으로 간주하는 것은 너무 법률주의에 경사된 판단일 것이다.
중국으로 말한다면 南지나해와 東지나해상의 행동은 영토적 주권에 의해서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주장도 국제법에 일반적 해석으로 본다면 자기편의주의적인 해석이라고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센카쿠열도에 대해서는 역사적 권리는 주장하면서도 1971년에는 그 영유권을 주장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西沙諸島에 대해서는 베트남이 1974년까지 영토적인 주장을 하지 않았다하며 베트남의 주장을 부정하고 있다.
국제법에 대한 중국의 자세는 권력을 초월한 규범으로서 법을 존중하는 (법의 지배) 자세가 희박하다. 그것은 법을 지배의 도구로 보는 법치주의에 경향이 강한 해석법이다. 오로지 중국 근해의 영역을 둘러싼 법질서는 그리 명료한 것이 아니며 그 애매모호함 때문에 중국이 위압적 행동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현상에 변혁과 파괴를 기도하는 처사라고 말할 수 있다.
유라시아 연합과 해양강국
中露(중러) 양국의 이러한 행동은 보다 더 큰 팽창주의 정책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야기한다. 히틀러는 1930년대 국제질서에 정면으로 도전한다는 인상을 피하면서 라인란드 進駐(진주)로부터 체코슬로바키아의 해체에 이르기까지 서서히 기존 질서를 무력화하였다. 그것처럼 중국과 러시아는 현존하는 국제질서의 空洞化(공동화) 또는 形骸化(형해화)를 노리는 것이 아니냐?
예를 들어서 미국의 역사학자 월터 러셀 미드는 중국 러시아 이란, 세 나라를 害蟲국가의 中樞(중추)라고 보았다. 이런 해충들을 부시 대통령은 ‘惡의 軸’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여기에는 현존하는 세계질서를 안으로부터 무너뜨릴 세력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러시아와 중국이 표명해온 선언이나 문서에는 오늘의 국제질서에 대한 큰 도전을 시사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푸틴은 대통령으로 복귀하기 조금 전부터 유라시아연합을 제창하였다. 러시아 벨라루스 카자흐스탄, 3국은 금년 5월 경제권 결성을 목표로 하는 유라시아연합 창설조약에 서명하였다.
군사적으로는 구소련의 일부였던 러시아 아르메니아 벨라루스 카자크스탄 기르기스탄 타지크스탄으로 구성되는 집단안보조약기구(CSTO)를 중시한다. 이러한 기구는 EU나 NATO를 모방한 것이며 러시아를 위한 세력권 구축의 기도로 보아진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등 동구라파 지역에 대한 정책도 이 지역을 장차 그 세력권으로 수용하려는 구상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후진타오 정권에 이미 해양강국이 제창되었는데 시진핑 체제에 와서는 ‘중국의 꿈’ 또는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라는 과장된 수사가 첨가되어 있다. 시진핑 주석은 작년 2월 오바마 대통령과의 수뇌회의에서 신 대국관계를 제기하면서, “태평양에는 미중양국을 받아들일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이 있다.”고 말했다고 하며 중국과 미국이 태평양을 분할해 가지려는 구상을 표명한 것이다.
이 구상에서는 일본의 남・서 섬들로부터 대만 필리핀간의 바시해협을 지나서 남지나 전역을 방어하는 제1열도선 안에서 우위를 확립한 후 오가사와라 열도에서 괌 에 이르는 제2열도선에서도 대미 우위를 확보한다. 또 인도양에서 중동에 이르는 해안선에도 독자적인 基地網(진주 목거리)을 구축하려고 서두르고 있다. 현재 중국의 동지나해와 남지나해에서의 행동은 단순한 영토분쟁이 아니며 그러한 ‘大구상’의 1단계로 삼으려는 가능성도 충분히 엿볼 수가 있다.
제국주의냐 威信정책인가
러시아나 중국의 이러한 현상타파적 ‘大構想’을 따라서 행동한다는 것은 현 시점에서는 어디까지나 가능성에 그친다. 확실히 역사의 結末을 잘 아는 우리로서는 나치스에 대한 유화주의가 실패하였음을 알고 있으며 보다 빠른 단계에서 나치스와 대결했어야 했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보다 빠른 단계에서 나치스와의 대결했더라도 평화유지나 보다 작은 전쟁으로 끝낼 수 있었다는 보장은 없었다.
국제정치의 泰斗(태두)인 한스 모겐소는 권력정치를 현상유지정책, 제국주의, 위압정책의 3종류로 분류하였다. 어려운 것은 제국주의와 위압정책을 구분하는 일이다. 제국주의란 현상을 무력으로 변경하는 정책이나 위압정책은 힘을 과시함으로써 타국의 복종을 유도하는 정책이다. 위압정책은 제국주의의 수단이 되기도 하고 또 국내에서 정권의 정통성을 높이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
러시아와 중국의 대구상은 제국주의의 환영을 쫒는 위압정책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大構想’은 너무나 국제성을 결여하기 때문이다. 우선 나치스와 비교해 보아도 오늘의 러시아와 중국은 정치기반이 너무나 취약하다. 나치스에 상당하는 강력한 이데올로기도 없으며 비교적 단순한 내셔널리즘에 호소하는 이상의 정치사상도 갖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국내에는 현상에 대한 불만이 상당히 누적되어 있다. 푸틴정권이나 시진핑정권도 언론 미디어에 대한 억압을 강화하고 군부나 치안조직에 의존도를 너무 높이고 있기 때문에 정권에 대한 비판이 대규모로 표면화할 가능성은 작지만 공적인 선전에 대해서는 비교적 광범한 시니시즘(냉소주의)이 확산되어 있는 인상을 준다.
또 그에 못지않게 장기적으로 전략적 대 구상을 받쳐줄만한 국력의 유지도 어려울 것이라는 예측도 만만치 않다. 러시아의 인구는 일본보다 빠른 속도로 감소하고 있으며 현재 1억 4천만의 인구도 2050년에는 1억명 정도로 감소한다고 예측되고 있다. 더구나 러시아의 경제는 소연방 해체 후 경제개혁에 실패하여 군수산업과 연료산업 이외에는 주목할 만한 산업도 육성되어 있지 못하다.
중국은 흥융하는 대국이며 그 경향은 금후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그러나 일당독재체제는 급속한 경제성장이 가져오는 여러 가지 사회적 모순 때문에 국내적 긴장이 높아갈 것이다. 더구나 인구의 고령화도 빨리 진전되며 풍부한 노동인구를 벌어 먹일 경제성장의 지속성도 의심스럽다. 세계 제2의 경제대국이라고 하지만 1인당 GDP는 아직도 1만불 이하이며 선진국의 3분의 1 수준밖에 안 된다. 이러한 소득수준은 본래 중국의 지속적 경제성장의 발전을 따라가는 것이나 그 실현을 위해서는 대폭적인 국내정치와 경제개혁을 필요로 한다.
시진핑은 장쯔민 후진타오보다도 빨리 권력집중을 실현하였다. 이것은 개혁의 필요성을 공산당 지도부가 모두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푸틴의 상해 방문에서는 87세의 장쯔민과 만났으며 그것이 크게 보도된 것은 중국 상층부의 권력투쟁을 암시하는 것일런지도 모른다. 장쯔민이 정점에 서는 상해그룹은 자원을 지배하고 있으며 러시아와의 가스협정이나 西沙제도 해역의 자원개발에도 그들의 영향이 작용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중국 러시아 양국이 제국주의 정책을 추구하려면 양국은 현재 과시하는 긴밀한 전략적 제휴관계에도 긴장이 높아질 가능성도 없지 않다. 상해 수뇌회의에서는 러시아가 중시하는 상해협력기구(SCO)가 아니라 아시아교류 및 신뢰구축회의(CICA) 정상회의(소련 해체 직후에 잠정 조치, CICA-소련 해체 직후에 카자흐스탄에 나자르바에프 대통령이 제안하고 설립하려던 주목도가 약했음)가 크게 강조되었다.
시진핑 주석은 기조연설에서 과거에 안전보장관을 버리고 개방성 평등성 투명성에 기초한 완전히 새로운 협력적인 안전보장을 추구한다고 하였으며 아세아 제국은 상호협력에 의해서 아세아 안전보장을 실현할 능력을 갖는다고 발언하였다. 이것은 러시아로서는 경계할 만한 메시지로 들렸을 것 같다. 실제로 작년 9월 시진핑 주석은 중앙아시아 제국을 방문하여 실크로드 경제벨트 구상을 제시하여 중앙아시아와 중국의 관계 강화를 호소하였다. 이 구상이 구체화된다면 앞에서 말한 러시아의 유라시아 연합 구상 사이에 알력이 높아질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필요한 것은 ‘조심스러운 봉쇄정책’이다
러시아와 중국이 제국주의의 환영을 좇고 있다면 국제질서를 지키려는 나라는 그런 현실화를 방지하고 그 환상을 깨닫게 하는데 목표를 두어야 할 것이다.
그를 위한 방책으로서는 일방적인 힘의 행사를 제약하기 위한 안전보장 체제의 구축을 도모하는 것이 중요하다. 힘의 행사로 인하여 기정사실화가 되풀이 된다면 국제정치의 정통성은 자체가 없어져버리기 때문이다. 미국의 대외정책이 소극화되어 가는 현실로 보아서 국제정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국제협력의 필요성이 높아지는 것은 당연하다. 이러한 문맥에서 생각한다면 일본이 국제안전보장에 적극 관여하는 것이 중요함은 명백하다. 또 집단적 자위권 행사나 유엔 집단 안전보장에 대한 참가도 이런 점에서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국제질서의 정통성을 유지한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냉전 종결 후 국제질서를 주도해 온 서방측의 자세도 반성할 필요가 있다. 소련이나 동구권의 탈공산화도 평화적으로 현실화되었다. 서방측도 비민주체제를 타도하면 저절로 바람직한 질서가 생길 것이라는 과도한 낙관을 가지고 국제질서를 운영해 온 것이다.
결과적으로 서방측의 안이한 개입정책이 북아프리카로부터 동북아시아에 이르기까지 유라시아 대륙 주변에서 거대한 불안정 지역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러한 불안정 지역이 양성됨으로써 러시아나 중국의 현상타파의 움직임을 허용한 결과가 되어버린 것이다. 비록 민주화를 목표로 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체제변혁을 목표로 했다는 이유로써 국제질서를 힘에 의하여 변경하는 것을 용인하는 소지를 만들어낸 것이다. 푸틴 대통령은 크리미아를 편입하는데 서방측이 코소보에 세르비아로부터의 독립을 용인한 사례를 전례로 들었는데 이 두 가지 사례를 구분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서방측은 제국주의의 정책, 곧 힘에 의한 현상변혁에 저항하는 힘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그 힘은 군사력에 한정되어서는 안된다. 중요한 것은 종합적 질서의 형성력 다시 말하면 거버넌스가 제공하는 힘이어야 한다. 그것이 러시아와 중국의 민중을 끌어들여서 내셔널리즘의 흥분을 진정시키며 스스로 자기네들 정부의 힘에 의한 현상변경 정책에 대한 반대를 강화하는 요인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냉전기에 봉쇄정책에 제창자로서 알려진 조지 케난은 현실적으로 미국의 냉전정책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이었다. 그는 소련의 팽창주의 경향에 대한 장기적이며 인내성 있는 그러나 확고한 봉쇄정책을 제창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외면적 연기, 곧 협박이나 힐책 같은 몸짓으로 외면적 강경성을 보이는 것과 관계가 없는 것이다. 상대를 양보할 수밖에 없는 궁지로 몰아넣는 것을 피하면서 미국의 가치를 상대방이 계속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변화를 촉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케난은 90년대 후반에 나토의 동방 확대를 러시아 심리에 대한 극단적인 무신경을 보여준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하였으며 치명적인 과오라고까지 비판하였다.
물론 케난이 올바르다. 그러나 오늘의 러시아나 중국의 제국주의 행동의 원인이 되었다는 점에서 서방측 정책의 실패라고 하지만 현재 그들의 행동에 대한 속죄의식을 가지고 대항할 필요는 없고 또 그래서는 안 된다. 다만, 오늘 서방측이 해야 할 일은 실패의 되풀이가 아니라 케난의 봉쇄정책의 참다운 뜻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상대방의 강압적인 행동을 억제하면서 외교를 가능케 하며 상대방에게 변화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권유하는 것이 중요하다. (번역: 한승조 아시아태평양공동체 이사장)
일본 월간지 <中央公論>, 2014년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