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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조선 인터뷰] '듣기 좋은 거짓말'이 現場 망쳐… 생존자 나오기 어렵다고 인정했어야

[半년간 민간잠수사 40명 이끌며 세월호 수색… 백성기 잠수총감독]

당시 에어포켓 있다느니 72시간 살 수 있다는 등
그런 말들은 모두 거짓말… 힘들수록 진실 말했어야…
잠수사 설득해 영상 촬영, 수중상황·자료 100%를 가족에 공개해 신뢰 쌓아
실종자 7명 더 찾았으나 배 무너질 듯해 수색중단… 가족들도 상황 받아들여

이주영 해양수산부 장관이 세월호 실종자에 대한 수중 수색 종료를 선언한 지난 11일. 88수중개발 백성기(51) 잠수총감독은 울산의 집으로 향하지 못했다. 그는 동료 잠수사들과 진도에서 밤새 술잔을 기울였다. 그는 지난 6개월간 가로 22m, 세로 60m 넓이의 바지선 위에서 내내 살았다. 그 위에서 하루 2시간씩 자면서 대원들을 이끌었다. 그는 "몸이 느끼는 고통 때문에, 수색 작업을 할 수 있는 소조기(小潮期)가 오히려 두려웠다"고 했다.

강원도 양구 출신으로 UDT를 전역한 백 감독은 2009년 11월 필리핀의 수심 110m 바닷속에서 죽을 고비를 넘겼다. 하반신 마비를 당해 수면까지 급상승한 것이다. 그는 다시 하강해 17시간을 물속에서 버티며 스스로 감압을 한 끝에 목숨을 건졌다. 그 뒤로 1년간 대소변을 못 가렸지만 끝내 잠수사로 재기했다. 그런 그를 동료들은 '잠수사의 전설'이라고 부른다.

백 감독은 세월호 실종자 수색 마지막 4개월간 민간 잠수사 40여명을 이끌었다. 12일 울산행 열차를 타기 위해 부산에 온 그를 만났다. 그는 "진실을 말하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세월호 수색이 난관에 빠져 허우적거렸다"고 했다. "세월호 참사로부터 얻은 가장 큰 교훈은 '힘들수록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것"이라며 "그렇지 않으면 최초의 거짓말을 발판 삼아 또 다른 사기극이 판을 친다"고 말했다.


	부산 연안여객터미널 부두에서 백성기 감독이 질문에 답하고 있다. 그는 “국민이 받을 충격을 완화시키겠다는 핑계로 거짓말해선 안 된다. 장기적으로 신뢰를 잃는다”고 말했다.
부산 연안여객터미널 부두에서 백성기 감독이 질문에 답하고 있다. 그는 “국민이 받을 충격을 완화시키겠다는 핑계로 거짓말해선 안 된다. 장기적으로 신뢰를 잃는다”고 말했다. /김종호 기자

―세월호가 침몰한 4월 16일 어디에 있었나?

"88수중 직원들과 부산 태종대 앞바다에 침몰한 3000t급 화물선 내부를 수중 수색하며 인양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바로 사고 해역으로 간 건가?

"아니다. 부산에서 하던 일을 마저 했다. 언론에서 '(생존이 가능한) 72시간이 남았으니 열심히 구조하면 된다'고 했다. 이건 아닌데 싶었다. 마지막까지도 수색을 못 하고 있던 4층 선미 다인실(SP-1) 외벽을 뚫어낼 잠수사들을 추가로 소집하면서 5월 27일 88수중 일원으로 사고 해역에 가게 됐다. 당시엔 감독 직책이 아니었다."

―도착했을 당시 상황은?

"세상 모든 일이 처음이 중요하다. 언론과 공무원들이 사고 초기에 했던 '듣기 좋은 거짓말'이 현장을 망치고 있었다. 그것 때문에 마지막까지 힘들었다. 세월호 내부에 에어포켓(산소가 남아 있는 공간·air pocket)이 있다느니, 최대 72시간까지 생존이 가능하다느니 하는 건 다 거짓말이다. 공무원과 잠수사들은 살릴 수 있는 아이들을 살리지 못한 죄인들로 여겨지고 있었다."

―침몰선 안 실종자가 에어포켓에서 기적적으로 생환한 해외 사례도 있는데?

"그건 격실이 철재로 이뤄진 배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격실을 목재로 만든 세월호는 에어포켓이 남아 있을 수 없었다. 잠수사들이 내쉰 공기방울로 천장에 한 줌의 에어포켓이 생겼지만 그것도 금세 사라졌다. 힘들더라도 사실을 말했어야 이후에 사고 수습을 어떻게든 할 수 있었는데, 처음에 했던 거짓말이 계속 발목을 잡았다."

―사건 소식을 접하자마자 '추가로 생존자가 나오기 어렵다'고 직감했나?

"철제 격실도 아닌 배에서 실종자들이 살아 나올 가능성은 없다고 봤다. 바다와 배에 대해 아는 사람이라면 비슷하게 생각했을 거다."

―잠수업자 이종인씨는 "선수 부분에 에어포켓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 안에 있을 생존자를 다이빙벨을 투입해 구조할 것"이라고 했는데.

"한마디로 사기다. 사기를 사기라고 말할 수 없게끔 몰아간 사기극이다. 그것 때문에 수색 시간을 손해 봤지만 차라리 그렇게라도 거짓이 드러나 다행이다. 당시 분위기는 다이빙벨을 투입 안 하면 나머지가 단체로 거짓말하는 걸로 몰려갔다. 그걸로 안 된다는 걸, 20시간 잠수할 수 없다는 걸 보여줘야 했다."

다이빙벨 소동은 백씨가 세월호에 투입되기 전의 일이었다. 하지만 다이빙벨의 해악은 그 이후의 작업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했다. "우리가 새로운 시도를 할 때마다 '너희 것도 제2의 다이빙벨 아니야?'라는 말들이 나왔다. 그런 의구심을 극복하는 데 힘이 들었고, 힘들이지 않아도 될 것에서 힘이 드니까 분노가 치밀었다."

88수중이 수색 작업에 참여한 지난 5월 말 당시에는 참사 초기부터 수색을 했던 언딘 쪽이 총감독을 맡고 있었다. 5월 30일 선체 외부를 절단하던 잠수사 이민섭(44)씨가 사고로 숨졌다. 작업을 중단할 수는 없었다. 후발로 참여한 88수중 쪽에서 그 자리에 잠수사를 보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누가 들어갔나?

"다 들어가기 싫어했다. 잠수사가 죽어서 나온 그 자리니까. 성공시킬 수 있는 사람을 정해야 했다. 88수중에서 실력 제일 좋은 유기주 팀장을 들여보냈다. '갈 수 있나?' 했더니 '예' 했다. 작업 성공하고 올라온 유 팀장에게 '올라왔나?' 했더니 역시 '예' 했다. 장비 받아주고 등 두드려줬다."

―구조 작업을 하면서 뭐가 가장 힘들었나?

"잠수사들이 실종자 가족들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실종자 가족들은 '잠수사가 쓰는 헬멧에 수중 카메라를 달아 영상을 보여달라'고 요청했지만 당시 바지선 책임자였던 언딘은 '우릴 못 믿는 거냐, 이럴 거면 철수하겠다'고 대응했다."

지난 7월 언딘이 해경과의 유착 의혹으로 검찰 수사를 받게 되면서 철수했다. 백씨는 이때부터 잠수총감독을 맡아 민간 잠수사 40여명을 지휘했다. 그가 처음 한 일은 수중 상황을 100% 실종자 가족에게 공개하는 것이었다.


	지난달 18일 오전 9시 30분쯤 세월호 내부를 수색 중이던 한 민간 잠수사가 헬멧에 부착된 수중 카메라로 찍은 세월호 4층 선미 다인실 부근. 목재로 이뤄진 격실 벽면이 보인다.
지난달 18일 오전 9시 30분쯤 세월호 내부를 수색 중이던 한 민간 잠수사가 헬멧에 부착된 수중 카메라로 찍은 세월호 4층 선미 다인실 부근. 목재로 이뤄진 격실 벽면이 보인다. /백성기 잠수총감독 제공

―잠수사들의 반대가 많았을 텐데?

"당시 잠수사들이 쓰던 마스크엔 카메라를 달기가 어려웠다. 카메라를 달 수 있는 마스크가 현장에 1~2대뿐이었다. 사비를 털어 4대를 구입했고, 원래 갖고 있던 2대를 수리해 현장에 가져왔다. '이 마스크를 쓰면 바지선 위에서 현장을 함께 볼 수 있으니 더 안전하다'고 설득했다. 통신선을 타고 올라오는 잠수사들의 거친 숨소리와 아무것도 보이지 않다가 불쑥 날카롭게 솟은 잔해물이 나타나는 영상을 보자 가족들도 마음을 누그러뜨렸다. 잠수 영상뿐 아니라 모든 자료를 가족들에게 공개했다."

―사람들은 바다 밑 세월호 상황을 알 수 없다.

"폭설이 내리는 산길을 시속 80㎞로 자동차를 모는 것과 같다. 깜깜한 선체 내부를 보려고 강한 빛의 랜턴을 켜는데, 온갖 부유물 때문에 빛이 난반사가 되면서 꼭 눈이 세차게 내리는 길에 자동차 상향등을 켠 모습 같다."

백 감독이 이끄는 잠수사들은 지난 5월 27일부터 수색종료일까지 169일간 실종자 7명을 찾아냈다. 하지만 실종자는 9명에서 더 이상 줄지 않았다. 잠수사들 사이에서 "이젠 그만둬야 한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고액 일당을 챙길 수 있는데 왜 그만두려 했나?

"모르는 사람들은 '일당 97만원이나 되는데 왜 포기하느냐'고 말하지만, 세월호 내부를 잠수해보면 그런 말이 절대 나올 수 없다. 수색을 계속하면 사고는 시간문제인 상황이었다. 세월호가 울고 있었다. 세월호에 들어갔다 나온 잠수사들이 한결같이 '배가 곧 무너질 것 같다' '배가 울고 있다'고 말했다. 영상을 보던 실종자 가족들도 똑같이 그걸 느꼈다. 더 이상 수색하다간 사고가 일어날 게 불 보듯 뻔했으니 설득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말로 설득했나?

"'우리가 안전해야 가족도 안전한 것'이라고 말했다. 9~10월 넘어가면서 인터넷 기사에 달린 댓글에 실종자 가족 편이 없었다. '내가 스톱하는 것보단 가족들이 먼저 (우리에게) 스톱을 요청하는 쪽으로 가자'고 설득했다. 잠수사들도 누군가의 아버지이자 남편, 아들이라는 점을 그분들도 헤아려줬다."

―마지막까진 두 가족이 반대했다고 들었다.

"한 가족에겐 '정말 너무하신다'고 말했다. 실종된 그 집 아이가 있을 거라고 했던 SP-1에 들어가기 위해 구멍을 세 곳이나 뚫었고, 그 와중에 한 사람이 죽었다. 우리는 그곳을 다 뒤졌다. '그 아이 찾는다고 다른 실종자 수색에 소홀했던 것도 사실인데 이렇게 계속 고집만 부리시면 어쩌느냐'고 말했다. 묵묵히 듣고만 계시더라."

백 감독은 "당신이 만약 사고 대책본부장이었다면 어떻게 했을 것 같으냐?"는 질문에 "마음 아프더라도 (상황을) 솔직하게 이야기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실종자들의 생존 가능성은 0%에 가깝다'고만 인정했어도 사고 초기 공무원들이 당한 조리돌림 등 대혼란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남은 돈은 없고 장비만 남았다"고 말했다. "헬멧 4대 사는 데 2000만원, 에어뱅크라고 산소 배합비율을 미세 조정해주는 장치 3대 사는 데 5000만원쯤 들었다. 잠수 안전은 내가 책임져야 하니까 받은 일당은 현장에 다 투자했다."

―그 고생을 하고 빈손으로 가면 부인이 뭐라 안 하나?

인터뷰를 시작한 뒤로 그가 처음으로 소리 내 웃었다. "하하하하. 뭐 그냥 이젠 이해해요. 아직 집도 없지만 마음은 부자예요. 그래도 이런 장비가 있으면 더 안전해지는 거죠." 그는 "해군 소령은 한 달 수당이 40만원, 중사들은 그 정도도 못 받았다"고 말했다. "하루에 1만원꼴이니 우리와 거의 100배 차이다. 하지만 그들은 몸을 사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바다에 뛰어들었다. 해군 존경한다."

기자와 헤어진 후 백 감독이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보내왔다. "유가족이나 실종자 가족들에게는 미안하고 죄송한 말씀이지만, 제2의 사고를 생각해서 인양은 포기해주셨으면 합니다. 어차피 인양도 잠수를 해야만 하고, 사고가 날 확률은 수색할 때보다 더 높습니다. 인양하러 들어갔다가 인명 사고가 나면, 그 아까운 목숨은 어떻게 하나요?"

출처
조선닷컴


혁신학교? 혁신은 개뿔! 애들 학력만 퇴행중! 교무실 커피자판기, 교사 항공권 구입에 물 쓰듯...특혜 불구 학력은 뒷걸음 일반학교에 비해 연간 1억4,000~1억5,000만원을 특별히 지원받는 서울형 혁신학교가 예산을 엉뚱한 곳에 쓰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특별예산(학교운영비)으로 교사실의 각종 책장이나 가구를 구입했고, 수백만원을 들여 학습자료 저장용 USB와 외장하드를 사서 나눠 갖은 사실도 밝혀졌다. 교무실 커피자판기를 구입하는데 특별예산을 쓴 혁신학교도 있었다. 이밖에도 여직원 휴게실 가스보일러 교체, 부장교사 워크숍 항공권 구입, 교직원 전체 체육복 구입 등 본래 목적과는 거리가 먼 곳에 특별예산을 물 쓰듯 전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학생들에 대한 선심성 예산 집행 정황도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학생 티셔츠 구입, 진공청소기 구입 등에 특별예산을 수백만원씩 사용했다. 학생들의 생일축하용 떡케익 구입비용으로 매달 70~90만원을 사용한 곳도 있었다. 반면 서울형 혁신학교의 학력은 일반학교에 비해 오히려 뒷걸음질 친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내용은 서울시교육청이 새누리당 강은희 의원에게 제출한 2012년 혁신학교 정산서 통합지출부를 통해 밝혀졌다. 서울형 혁신학교는 곽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