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국제시장' 17일 개봉]
6·25, 서독탄광 등 거치며 가족 위해 살아간 家長 이야기
기교없이 담백하게
담아내
"장남은 가장(家長)이다. 시방부터 니가 가장이다. 가족들 잘 챙기라이."
중공군이 코앞까지 밀어닥쳤다. 1950년 12월
15일 함경도 흥남 앞바다. 폭격기가 까맣게 하늘을 메웠다. 포성과 절규로 아비규환이 된 부두. 사람들은 밀치고 짓밟으며 죽을힘을 다해 철수하는
미군 배에 기어올랐다. 그때, 맏아들 덕수의 등에 매달려 있던 막내 막순이가 배 아래로 떨어졌다. 1만4000여명의 피란민을 태운 미군 선박
메러디스 빅토리호 위, 아버지(정진영)는 막순이를 찾으러 다시 배를 내려가며 어린 덕수(황정민)에게 가족을 부탁했다.
-
- 영화 ‘국제시장’은 험난했던 세월을 미소 지으며 돌아보게 한다. 서독 탄광에 다녀온 덕수(황정민)가 또 베트남에 가겠다고 하자, 아내 영자(김윤진)는 “왜 당신 인생에 당신은 없는 거냐”고 소리친다. 그때 ‘국기에 대한 맹세’ 음악이 울린다. 싸우던 부부가 벌떡 일어나 태극기를 바라보며 가슴에 손을 얹자 극장이 웃음바다가 됐다. /CJ엔터테인먼트 제공
오는 17일 개봉하는 영화 '국제시장'(감독 윤제균)은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현대사의 굴곡을 온몸으로 겪어낸 덕수의 삶을 좇는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시퀀스를 떠올리게 하는 흥남 철수의 참극, '쪼꼴레또 기브 미'를 외치며 미군 차량을 찾아 뛰던
전후(戰後)의 혹독한 빈곤…. 덕수는 서울대에 덜컥 합격한 "공부 X나게 잘하는" 남동생을 위해 지옥 같은 서독 탄광의 막장으로 향하고,
말썽쟁이 여동생을 시집보내려 다시 베트남으로 간다. 서독에서 광부와 간호사로 처음 만났던 아내 영자(김윤진)에게 덕수는 말한다. "참 다행이다.
힘든 세상, 힘든 풍파 우리가 겪은 게 다행이라고. 망할 놈의 6·25사변, 서독 탄광, 월남 전쟁통…. 우리 아들이 갔으면 어쩔 뻔했노. 그런
일을 내랑 당신이 겪은 게 참 다행 아이가."
이 영화의 힘은 어떤 기교나 치장도 없이 담백하게 직진하는 이야기에서 나온다. 사는
게 전쟁이던 시절, 포기하지 않고, 저버리지 않고 지금의 대한민국을 일궈낸 아버지 어머니들의 삶이 주는 감동이다. 친구(오달수)가 "생선 궤짝
백만개 만들어도 동생 등록금 안 된다"며 파독(派獨) 광부 모집 광고를 찢어준 날, 덕수는 벽에 걸린 손바닥만 한 아버지 사진을 보며 소주잔을
기울인다. "아부지예, 알았심다." 갱도로 내려가는 승강기 문을 닫으며 독일인 작업반장은 "살아서 만나자"고 인사한다. 막장에서 노란 찐 감자를
먹을 땐 탄(炭) 때가 앉은 시커먼 얼굴에 흰 눈자위만 번들번들 빛났다. 이산가족 찾기가 한창이던 1983년 여름 서울 여의도 광장은 자료
화면과 영화 속 장면이 서로 녹아들며 이야기를 절정으로 끌어올린다.
'해운대'로 1000만 감독 반열에 오른 윤제균 감독의 연출력이
빛난다. 그는 자칫 윽박지르기 쉬운 소재와 주제의식을 특유의 촌스러운 듯 투박한 유머를 당의정 삼아 맛깔스럽게 포장해낸다. 젊은 정주영은
"마른땅에서 큰 배를 만들고 국산 자동차도 만든다카는 맛이 간 아저씨"로, 앙드레 김은 국제시장에 옷감 끊으러 온 별난 남자로 등장한다. 부산
무학국민학교 씨름부 이만기, 베트남 정글 전쟁터에서 귀국하면 발표할 신곡이라며 "저 푸른 초원 위에"를 흥얼대는 남진 병장은 영화에 재미와
감칠맛을 더해준다.
"아부지, 내 이만하면 잘 살았지예. 근데 내 진짜 힘들었거든예…." 고단한 세월의 더께가 거칠게 들러붙은
덕수의 얼굴이 액자 속 아버지 얼굴과 겹친다. 그 주름진 얼굴이 관객의 가슴을 향해 곧장 들이쳐 온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았던 우리 역사의
파도! 126분간 잔뜩 불어난 감정의 저수지 둑이 투둑 하고 터져 나갈 때, 관객은 영화 한 편이 가질 수 있는 힘에 놀란다. 흔치 않은, 귀한
경험이다. 12세 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