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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뉴스

좌파 기념사업을 벌이는 보훈처 !

좌파 운동가 김성숙을 3월의 독립운동가에 수백억원 기념관 까지!!

국가보훈처는 지난 3월 31일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승려에서 임시정부 국무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광복 후에는 조국 통일을 위해 혁신 정당을 조직하여 정치인으로 활동하신 김성숙(1898.3.10 ~ 1969.4.12) 선생의 탄신 110주년을 맞이하여 선생의 공훈을 기리고자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고 밝혔다.

국가보훈처는 김성숙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한 이유로 “1. 일제강점기 조국 광복을 위해 승려에서 임정 국무위원 등으로 활동 2. 광복 후 민족주의 실현을 위해 현실 정치인으로 온갖 고초를 겪음”이라 밝히며, 나라를 위해 헌신한 고인의 뜻을 기리기 위해 포스터 1만 5천부를 제작 배포하고 중앙일간지 및 정기간행물 등에 특집기사를 게재 김성숙을 홍보하고 있다.

그런데 지난 4월 25일 보훈처가 후원하고 대한민국 선열유족회가 주관한 ‘4월의 독립운동가 김성숙 선생 공훈선양 학술강연’을 통해 밝힌 김성숙의 행적을 보면서 국가보훈처가 운암 김성숙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한 이유에 대해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국가보훈처에 깊은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학술 강연을 통해 본 김성숙은 3.1 운동 당시 비밀리에 독립문서를 만들어 살포하다 일경에 체포 2년간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룬 후, 1922년 조선무산자 동맹과 조선공제회에 가입 활발한 활동을 했고, 1923년에는 중국 북경으로 건너가 의열단 및 한인 아나키스트들과 교류하면서 진보적인 근대정치사상을 섭렵하고, 루신, 에로셍코 등을 통해 아나키즘을 수용하였다. 그는 장지락(김산), 양명 등과 창일당을 조직 일크츠크파 고려공산당의 베이징 지부 노릇을 하였고, 코민테른 극동 책임자 보이틴스키 및 중국 공산당 창립맴버의 한사람인 이대소와 만나 한인세력의 규합을 의논하였다.

1926년 그는 장지락(김산) 등과 함께 ‘KK’(독일어 Koreaner Kommunismus의 약자, 한인 공산주의자라는 뜻)을 조직 공산주의자들을 결집시키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유월한국혁명동지회 내부의 공산주의 비밀조직인 ’‘KK"와 민족주의 단체인 의열단을 매개로 하여, 사회주의 운동과 민족운동의 접목을 위해 노력하여 1927년 5월 8일 광동대독립당축성회를 결성한다. 중국국민당 정부와 공산당간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그는 중국 공산당이 이끄는 교도단(후일 赤軍으로 개칭)의 책임자로 활동하다 두쥔훼이를 만난다. 그는 이 과정에서 소비에트 정부 숙빈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기도 한다.

1929년 주은래의 중신으로 두진훼이와 결혼한 그는 1930년 두진훼이와 함께 중국좌익작가연맹에 가입 루신, 마오둔 등과 문학창작 및이론비평 활동을 한다. 1935년 그는 중국공산당을 탈당 한인공산주의자들을 규합하여 조선공산주의자동맹을 조직하고, 1936년에는 상하이에서 박건웅, 김산 등과 조선공산주의자동맹을 조선민족해방동맹으로 개편 ‘중국을 위한 혁명이 아닌 조선을 위한 혁명, 즉 민족혁명을 지양해야 한다’고 선언한다. 민족주의 이념과 반자본주의 이념을 결합하되, 전자를 지주로 삼아 후자를 접목시킨다는 논리였다.

1939년 5월 김구와 김원봉이 조선의 독립을 위해 좌우합작을 추진하면서 임정에 합류한다. 그는 국제공산당 조직인 코민테른이나 중국공산당의 지휘를 받는 국제주의 공산당이 아닌, 우리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목표로 한 조선공산당으로서의 정체성을 견지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임정 참여 후, 1942년 1월22일 선전위원에 선임된 그는 1943년 3월4일에는 내무부 차장에, 4월10일에는 선전부 선전위원으로, 1944년 4월24일에는 임정 국무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이상과 같이 김성숙은 3.1운동 이후 조선의 독립운동보다는 공산주의 운동에 주력하다, 해방과 독립을 통한 조선공산당의 집권을 목표로하여 좌우합작을 주장하며 임정에 참여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일본의 항복선언으로 귀국한 후의 그의 활동에서도 알수 있는 일이다. 그는 신탁통치 문제로 좌우가 극렬하게 대립하던 시기 장건상, 김원봉, 성주식 등과 임정을 떠나 민주주의민족전선 의장단으로 참여하여 우익진영과 각을 세운 활동에서 증명된다. 여운형과 근로인민당을 결성하기도 한 김성숙은 1947년 4월21일 민족자주연맹 대표단 자격으로 남북협상에 참여키 위해 북행을 했으며, 1948년 5월 10일에 시행된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참여하지 않았다.

김성숙은 귀국 후, 대한민국 건국과정에 참여치 않았으며, 1955년에는 조봉암 서상일 등과 진보당 창당추진 준비위원회를 구성했고 1957년에는 민주혁신당, 1961년에는 통일사회당에 참여 혁신계 원로로 대접받기도 하였다. 이런 김성숙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 김성숙을 공훈선양하고 김성숙의 뜻을 기리자는 국가보훈처의 의도는 과연 무엇인가? 자유대한민국 국민의 혈세로 운영하는 국가보훈처 마저 ‘대한민국은 태어나서는 안될 나라’라는 생각에서 공산주의 운동과 좌우합작을 통한 고려연방제를 주장하는 종북주의자들의 주장에 동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해찬이 국무총리 시절인 2006년 1월 23일 창립총회를 연 운암 김성숙 기념사업회는 이수성, 전국무총리를 초대 이사장으로 추대하고, 2008년 4월 1일 이해찬 전국무총리를 3대 회장으로 선임하였다. 운암 김성숙 기념사업회 이해찬 이사장은 취임인사를 통해 “김성숙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겠다. 600억원~700억원의이 소요될 것으로 보이는 예산은 30%는 정부에서, 나머지는 국가보훈처와 경기도 등 지방자치단체와 지속적으로 협의해 나갈 예정”이라 설명했다.

과연 좌파정권은 종식되었는가?


혁신학교? 혁신은 개뿔! 애들 학력만 퇴행중! 교무실 커피자판기, 교사 항공권 구입에 물 쓰듯...특혜 불구 학력은 뒷걸음 일반학교에 비해 연간 1억4,000~1억5,000만원을 특별히 지원받는 서울형 혁신학교가 예산을 엉뚱한 곳에 쓰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특별예산(학교운영비)으로 교사실의 각종 책장이나 가구를 구입했고, 수백만원을 들여 학습자료 저장용 USB와 외장하드를 사서 나눠 갖은 사실도 밝혀졌다. 교무실 커피자판기를 구입하는데 특별예산을 쓴 혁신학교도 있었다. 이밖에도 여직원 휴게실 가스보일러 교체, 부장교사 워크숍 항공권 구입, 교직원 전체 체육복 구입 등 본래 목적과는 거리가 먼 곳에 특별예산을 물 쓰듯 전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학생들에 대한 선심성 예산 집행 정황도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학생 티셔츠 구입, 진공청소기 구입 등에 특별예산을 수백만원씩 사용했다. 학생들의 생일축하용 떡케익 구입비용으로 매달 70~90만원을 사용한 곳도 있었다. 반면 서울형 혁신학교의 학력은 일반학교에 비해 오히려 뒷걸음질 친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내용은 서울시교육청이 새누리당 강은희 의원에게 제출한 2012년 혁신학교 정산서 통합지출부를 통해 밝혀졌다. 서울형 혁신학교는 곽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