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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한국의 영원한 붕우국(朋友國)이 되어 주기를


▲나트랑시의 고찰 융산사

▲左, 법현스님, 선일스님, 필자, 자광스님, 수명스님, 일면스님, 혜광스님(무순)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불행한 과거를 잊고, 해원상생(解寃相生) 속에 대한민국과 베트남은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신의가 넘치는 붕우국(朋友國)이 되어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기도한다.

우리는 과거 월남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공산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국군의 전적지 (戰迹地) 답사와 그곳에서 전투로 사망한 국군과 미군, 월남군, 베트남군 등의 영혼에 대해 해원상생(解寃相生)을 위한 영혼 천도식을 하기 위해 베트남국의 나트랑(Natrang)시(市)에 있었던 십자성부대(제100군수 사령부)를 찾아 나섰다. 십자성부대의 흔적은 무상한 세월에 색바랜 위병소 뿐이었다. 나는 위병소를 어루만지며 그날의 이국 땅에서 오가는 국군을 회상하며 낙루(落淚)했다.

2015년 8월 8일 오후 8시 40분경, 인천공항에서 우리는 대한항공기에 탑승하여 칠흑같은 밤의 하늘을 뚫고 나트랑의 캄란 공항으로 날아갔다. 나는 비행기의 창가에 앉아 “왜 베트남 찾는 길에는 대한항공이 칠흑같은 밤에 왕래하는가?” 자문하고 우려하고 탄식했다.

우리 일행은 자광스님(조계종 호계원장), 일면스님(동국대이사장), 법현스님(선운사 전 주지), 수명스님(동양화 화가), 혜광스님(창원시 관음사주지), 선일스님(인천 법명사주지), 필자를 포함하여 7인의 승려였다.

대한항공은 밤 11시가 넘어서야 나트랑시로 통하는 유일한 공항인 캄란 공항에 도착했다.

캄란 공항에서 나트랑으로 가는 봉고차 안에서 먼저 자광스님의 회고가 시작되었다. 그는 1970년 초, 대위 계급장을 단 군복을 입은 군승(軍僧), 즉 군법사로서 십자성부대에 있는 군법당 불광사(佛光寺) 주지로서 활동한 추억을 회상했다. 자광스님은 강산이 네 번 변하는 세월만에 나트랑을 찾는다면서 감회가 남달랐다.

불광사(佛光寺)가 있는 십자성부대는 사이공에 있는 파월군의 총사령부의 지침을 받아 일선에서 전투를 하는 맹호부대, 청룡부대, 백마부대 등에 군수물자를 지원하는 군수보급기지의 부대였다.

당시 십자성부대에는 군종법사인 자광스님 외에 기독교 목사인 군목(軍牧)과 군종신부가 함께 각기 종교가 다른 장병들을 위해 종교활동을 했었다.

월남에서 자광스님은 하마터면 무장 베트콩에 기습적으로 사살될 뻔 했다. 자광스님이 시골 절에 가서 노승을 뵙고 평화를 논의할 때, 민간인 속에 섞여 있는 남녀 베트콩들이 총을 들고 기습해왔다. 무장하지 않은 당시 자광스님은 베트콩의 총들에 벌집이 될 절대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놓이게 되었다. 기적이 일어났다. 자광스님과 평화를 논하던 시골 절의 노승이 일어나 성난 베트콩들을 호통쳐 물러나게 해준 것이다. “진짜 수도승을 살해하면 지옥고를 면치 못한다.”는 호통이었다.

자광스님은 당시 가장 괴로운 소리는 최전선에서 죽어 국군의 시체를 담아오면서 내는 헬리곱터의 소리였다고 회고했다.

굉음을 내며 다가오는 헬리곱터 소리만 들리면 자광스님은 법당에서 가사를 입고 목탁을 들고 뛰어나왔다. 그는 국군의 시체 앞에 영혼천도의 염불을 하면서 소리죽여 울고, 또 울었다고 회고했다. 당시 십자성부대 안에는 맹호부대, 청룡부대, 백마부대 등에서 전투중 사망한 국군 시체를 안치하는 영현소가 있었다. 국군의 시체는 자광스님이 사병들과 함께 모두 염습하고, 기도해주고 난 후 재로 변하여 고국의 부모형제 처자 곁으로 떠나보냈다 한다.

우리는 나트랑시에서 가장 웅장하고, 고찰인 융산사(隆山寺)를 찾아 예배한 후, 큰법당 앞에 대형 향로앞에 부처님을 향해 모두 합장하고, 천도의식으로 반야심경을 봉독한 후, 자광스님이 천도의 축원을 울먹이며 부처님께 올렸다. 축원의 요지는 영혼천도와 베트남에 월남전 같은 전쟁이 영원히 없기를 바라고, 한국과 베트남은 해원상생(解寃相生)의 정신으로 서로 돕는 영원한 친구(朋友)가 되도록 가호를 부처님께 눈물로 간원(懇願)하는 것이었다.

축원이 끝난 후 일면스님은 우리는 고국에 돌아가면 “한국과 베트남이 영원한 친구가 되도록 진력하고”, 특히 우리는 “한국에 사는 베트남 사람들에 친절하게 우대하는 불교운동을 전개하자”는 의미있는 말을 해서 우리 모두의 동의의 박수를 쳤다. 융산사의 부처님은 무설설(無說說)의 법문으로 상찬(賞讚)하시듯 미소를 주시었다.

베트남의 돈은 온통 베트남의 통일을 주도한 호치민(胡志明, 제1대 베트남 민주공화국 주석) 초상화가 담겨 있었다.

베트남은 일상으로 쓰는 돈부터 호치민 주석을 잊지 않고 소중히 하고 있었다. 나는 호치민이 있는 돈들을 보면서 “왜 우리는 건국 대통령 이승만의 초상화가 있는 돈은 없는 것인가?” 개탄을 토했다. 한국의 돈을 보면 대한민국은 없다. 이조(李朝)시대를 살고 있다. 5만원의 신사임당, 1만원의 세종대왕, 퇴계선생, 율곡선생 등이 있을 뿐이다. 왜 그런가? 대한민국에 살면서 대한민국을 조국으로 여기지 않고, 건국의 이승만, 경제초석의 박정희 대통령 등 우리의 대통령을 부정하는 추악한 작태를 보이는 자들의 농간 탓이다. 어느 시절이나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정희 전 대통령의 초상화가 담긴 한국 돈이 나올 수 있을까?

나는 융산사의 부처님을 우러르며 소리죽여 여쭈었다. “월남전에서 민간인을 포함한 베트남인 150만여 명이 사망했는 데, 이제 베트남은 인민의 낙원이 되었을까요?”

공산주의를 위해 죽은 시체가 시산혈해(尸山血海)를 이루고 난 후 전쟁의 폐허위에 통곡소리가 전국 방방곡곡에 울려 퍼지고 있을 때, 강대국들은 총독(總督)이 아닌 전주(錢主), 즉 투자자로 변신하여 베트남의 천혜의 자원인 관광지는 물론 돈이 되는 사업이면 무엇이고 잠식해 장악해 군림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관찰하고 분석하했다.

불교가 아닌 공산주의로 인민의 낙원을 만들겠다고 나선 당시 월남의 불교 승려들은 어떤 결과를 얻었나?

월남의 좌파 승려들은 월남을 망쳤고, 사찰은 국유화 시켰고, 승려들을 강제 환속 당하게 하거나, 처형 당하게 했다. 공산주의로 건설된 나라인 중국, 북한, 베트남 등은 사찰을 포함한 불교재산은 국유화 시켜 버렸다.

나는 융산사(隆山寺)의 일주문 기둥을 어루만지며, 개탄했다. 한국의 좌파 승려들은 한국불교의 재산과 승려들의 목숨을 북의 공산주의에 헌납하려고 발악하고 있다고 논평할 수 있다. 한국의 불교인들, 즉 사부대중은, 한국불교의 암적(癌的) 존재인 좌파 승려들을 규탄하고 척결에 나서는 것이 한국불교를 보호하는 유일한 첩경이라고 차제에 나는 강력히 주장한다.

자광스님의 인도대로 십자성부대의 불광사를 찾았다. 베트남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난후 십자성부대는 물론 불광사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색바랜 위병소만 아직은 존재하고 있었다. 십자성부대 안쪽에는 월남전에서 전사한 베트남의 장성들, 이하 장사병(將士兵)의 무덤인 국립묘지로 변해 있었다. 국립묘지에 오르는 길목에 조형물은 베트남군의 승전의 투쟁상과 거대한 승전비가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나트랑시는 한국산 택시들이 간간 보였고, 오토바이들 자건거, 등이 교통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나는 오토바이의 물결속에서 교통문제로 시비하여 싸우는 시민 한 명을 볼 수 없었고, 교통순경도 볼 수 없었다. 나트랑 시민은 사로를 존중하고 자율적으로 교통질서를 지키는 휼륭한 시민들이었다.

우리는 영혼천도와 해원상생의 기도를 마치고, 2015년 8월 12일 밤 12시 40분경 역시 대한항공은 우리를 태우고 칠흑같은 어둠속에 캄란공항을 이륙했다.

나는 베트남의 남녀들을 관찰하고 이런 분석과 결론을 내었다. 남의 나라 군대들이 몰려와 총질을 한 결과 월남전에서 150만여 명의 전사자를 둔 베트남인들의 얼굴에는 선량하고 예의 바름속에 진한 한(恨)의 슬픔이 어려 있었다. 그것은 나라를 강대국들에 강점당해 비통을 겪은 우리 한국인들의 “아리랑”을 부르는 한(恨)과 슬픔과 비슷해 보였다.

끝으로, 베트남 국민은 전쟁의 폐허위에 경제발전의 기적을 이루려고 개미처럼 일하고 있었다. 머지않아 베트남은 경제적으로 아시아의 용으로 승천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감이 들었다. 나는 비행기 창문을 통해 칠흑같은 어둠속에 멀어져 가는 베트남을 향해 나직히 이렇게 축원했다. “영원한 붕우(朋友) 베트남이여, 번영하여 아시아의 승천하는 용(龍)은 물론이고, 국제사회가 인정하는 용이 되기를" ◇




이법철(이법철의 논단, 대표)






혁신학교? 혁신은 개뿔! 애들 학력만 퇴행중! 교무실 커피자판기, 교사 항공권 구입에 물 쓰듯...특혜 불구 학력은 뒷걸음 일반학교에 비해 연간 1억4,000~1억5,000만원을 특별히 지원받는 서울형 혁신학교가 예산을 엉뚱한 곳에 쓰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특별예산(학교운영비)으로 교사실의 각종 책장이나 가구를 구입했고, 수백만원을 들여 학습자료 저장용 USB와 외장하드를 사서 나눠 갖은 사실도 밝혀졌다. 교무실 커피자판기를 구입하는데 특별예산을 쓴 혁신학교도 있었다. 이밖에도 여직원 휴게실 가스보일러 교체, 부장교사 워크숍 항공권 구입, 교직원 전체 체육복 구입 등 본래 목적과는 거리가 먼 곳에 특별예산을 물 쓰듯 전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학생들에 대한 선심성 예산 집행 정황도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학생 티셔츠 구입, 진공청소기 구입 등에 특별예산을 수백만원씩 사용했다. 학생들의 생일축하용 떡케익 구입비용으로 매달 70~90만원을 사용한 곳도 있었다. 반면 서울형 혁신학교의 학력은 일반학교에 비해 오히려 뒷걸음질 친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내용은 서울시교육청이 새누리당 강은희 의원에게 제출한 2012년 혁신학교 정산서 통합지출부를 통해 밝혀졌다. 서울형 혁신학교는 곽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