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를 중흥시키려면, 무엇보다 사회의 서민같은 민중적 승려들이 전국적으로 봉기하여 투쟁해야 한다. 일불제자(一佛弟子)로서 종파를 따질 것 없다. 사회는 다수의 민중들이 간헐적으로 봉기하여 자유, 평등, 민주를 위해서 투쟁하여 사회를 변혁시켜 오지 않는가.
주장의 근거는 프랑스 대혁명, 러시아 혁명, 동학농민혁명으로 천형(天刑)같은 농노(農奴), 노비의 신분제를 타파하고, 모든 사람의 자유, 평등, 민주의 세상을 열었다. 그런데 생사를 초원했다는 승려들이 왜 부정부패의 척결에 대하여 투쟁하여 불교종단을 변혁시키지 않는가? 불교중흥과 전혀 무관한 자들이 너무도 많이 불교계를 망치고 있지 않은가.
작금의 한국불교는 국민들의 선각자로서 사회를 계몽, 계도하지 못하고, 사회의 민중들이 봉기하여 부정부패한 사회를 적폐청산하여 사람이 살 만한 세상으로 변혁시키면 공짜로 무임승차(無賃乘車)하듯이 덕을 보아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끄러운 일이다. 이제 한국불교의 민중승려들은 긴 잠에서 깨어나 불교 본연의 모습을 되찾고, 사회에 공헌해야 할 것이다.
“한국불교가 시급히 변혁되어야 한다”는 필자의 주장은 과거 한반도가 불교국가 때 인 신라, 고려 때 왕과 귀족과 백성으로부터 보시받은 전국의 명산대찰의 관광비수입과 광활한 산과 임야, 토지 등의 이권은 국민경제가 좋아지면서 일부 승려들은 예전 부호의 호칭인 만석군이 부럽지 않은 부호가 되었다.
일부 승려들은 호텔도 운영하고 있다. 소수의 일부 사판승(事判僧)들이 정부의 권부와 결탁하고 사찰의 정재(淨財)를 상납하는 추악한 짓을 더 이상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매관매직(賣官賣職)하듯이 사찰의 주지 등 고위 감투를 쓰고 얻은 불로소득의 정재는 민중적 승려들에게는 고루 분배 되지 않는다. 대부분 은처승이 은처자(隱妻子)를 부양하는 개인적 부의 축적에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이다.
사찰은 진리를 구하는 선불장(選佛場)이어야 한다. 일부 대찰은 불로소득(不勞所得)으로 일확천금(一攫千金)하는 배금주의자(拜金主義者)들이 승복을 입고 고급 외제차를 타고 무슨 회사 회장같이 잘 처먹고 잘 수입 잡는 철면피들의 천국이 된 지 오래라는 불교계 항설(巷說)이다.
기막힌 예화이다. 그동안 수 년을 두고 조계종 총무원이 있는 정문 조계사 쪽에 “쌍둥이 아빠 물러가라!”의 시위를 모 서울대 교수가 수장이 되어 이끌었다. 여아 쌍둥이 아빠와 남아 쌍둥이 아빠가 손오공 변화술 부리듯 청정 비구승으로 둔갑하여 조계종에 먹칠을 하고 있다는 주장도 항설에 있다.
재주가 신통하다. 아이 하나도 낳기 힘든 데, 쌍둥이를 연거푸 낳게 하여 이층을 이룬 여인을 고통스럽게 한다는 것인가? 그러나 수 년을 두고 쌍둥이 아빠라는 승려는 졸부가 되었으면서 감투를 벗어놓고 아내와 쌍둥이가 있는 곳에 떠나려 하지를 않는다. 이유는 성불 때문이 아니다. 매불(賣佛)하여 일확천금의 불로소득의 탐욕을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위조지폐라도 몽땅 찍어 안겨주어야 할 후안무치한 자들이 아닌가.
조계종 비구승 시대를 열어준 분은 이승만 전 대통령이다. 그는 일제 불교의 불교재산을 대처승이 아닌 비구승들에게 전국 명산 대찰과 기외 전통사찰을 공짜로 몽땅 내주었다. 이유는?
한국불교가 일제(日帝)를 위한 기도가 아닌 대한민국 번영을 위한 “호국불교를 하라!” 고 명산대찰 등을 내준 것이다.
국민 경제가 좋아지면서 조계종은 부호가 되었다. 그렇다면 나라와 국민을 위해서 정재를 써야 하고, 민중적 승려들이 마음놓고 수행할 수 있는 환경과 노후복지를 만드는 데, 총력해야 하는 것 아닌가? 또 서산, 사명대사 같이 나라가 외침에 위태로우면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먼저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는 호국불교사상으로 공헌해야 하는 것이다.
대한민국 건국이후 총무원의 감투를 쓰고 행정일을 보는 사판승(事判僧)은 대부분 돈에 혈안이 되어 부정부패하여 종단은 물론 한국불교를 망쳐왔다. 애전에는 정의로운 민중적 승려들은 ‘전국 승려대회’라는 명분으로 모여 부정부패한 종단에 대하여 적폐청산을 통해 “종단의 거듭나기 운동을” 했었다.
그 승려대회의 주체는 승려숫자가 많은 선원(禪院)이었고, 승가대학(僧伽大學) 등이었다. 당시는 불교정의를 세우려는 종정(宗正)과 총림의 방장(方丈)이 있어 전국 승려대회를 주도하였었다. 불교정의가 넘쳐 나는 시대였다. 고암, 성철, 월하 대종사는 누구보다 비구불교의 불교정의를 실천한 고승이다.
그러나 작금의 조계종 상징인 모 종정의 처신은 어떤가? 그는 연거푸 종정직에 재임하면서 “조계종의 최고 어른으로 자격이 의심스럽다”는 비난 여론이 충천하고 있다.
주장의 근거는 부산에 있는 대찰의 개인절을 멸사봉공(滅私奉公)의 마음으로 조계종 총무원에 공찰로 등록해야 하는 데, “종정을 연거푸 하면서 등록을 하지 않았다”는 소문이다. 개인재산에 집착하는 것이다. 향내 나는 종이에 포장한 “구린 똥” 냄새같이 전국 사부대중에 추태의 냄새를 종정이 피운다는 불교계 여론이 비등하고 있다.
그는 법상에 앉으면 주장자로 법상을 치며 중국 선사들이 오래전에 써먹은 선법문이나 앵무새처럼 흉내내면 소임을 다한 것인가? 일말의 양심이 있다면, 시급히 종적직에서 하야 하고 시급히 개인절을 총무원에 등록해야 해야 할 것이다.
조계종에는 진짜 적폐청산감이 있다. 총무원장이라는 최고 소임자에 미운 털이 박히면 하루 아침에 해종분자(害宗分子)로 몰려 멸빈, 제적 등 중징계를 당한다. 해종분자는 북의 반동분자와 비슷하다.
일반 사회의 양심수는 때가 되면 사면 복권되고 보상비까지 주는 데, 자비를 표방하는 조계종은 “한 번 죽인 넘은 영원히 죽을 뿐이다”는 개같은 주장으로 같은 승려에 대하여 사면복권을 해주지 않는다. 잔혹한 자들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억울하게 중징계를 받은 승려들과 전국의 민중적 승려들은 물론, 남녀 불교신도들, 불교를 아끼는 일반인들도 단결하여 봉기해서 불교이권에 혈안이 되어 첫째 불교를 망치고, 둘째, 같은 승려를 중징계로 산사에서 길거리로 내쫓는 자들에 대한 응징이 있어야 할 때이다.
필자는 거듭 주장한다. 전국의 민중적 승려들은 우선 동학농민혁명이라도 본받는 저항과 투쟁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해인사에 팔만대장경이 아직도 봉안중이지만, 한국불교는 탐욕승 탓에 한국 종교 서열 2위로 추락해버렸다.
일반사회의 극빈의 서민같은 민중적 승려들은 전국 도처에 부지기수이다. 몸이 아파도 돈이 없어 병원에도 못간다. 중병이 들면 돈이 없어 죽어야 한다. 여비가 없어 만행도 하지 못한다. 빈부의 차이는 사회를 능가한지 오래이다. 가난한 민중승려, 가난한 산속의 가난한 사암(寺庵)은 돈이 없어 개수 할 수 없어 퇴락하여 사라지고 있다. 부호의 사찰과 총무원은 오불관언(吾不關焉)이다.
끝으로, 한국불교를 중흥시키려면, 무엇보다 사회의 서민같은 민중적 승려들이 전국적으로 봉기해서 저항하고 투쟁하여 한국 불교계에 변혁을 쟁취해야 한다. 사회는 민중들이 간헐적으로 봉기하여 자유, 평등, 민주를 위해서 투쟁하여 쟁취해오는 데 왜 전국의 다수의 민중적 승려들은 소 먼산 보듯 하는 것인가? “만국의 노동자여 일어서라!”아닌 전국의 민중적 승려들은 일불제자로써 종파를 따지지 말고 봉기해야만 권리를 찾을 수 있고, 추락하는 한국불교를 중흥시킬 수 있을 뿐이다. 전국의 민중승려들은 생사를 초월하여 봉기하여, 한국불교계에 인권과 자유와 평등을 쟁취해야 할 것이다. ◇
이법철(이법철의 논단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