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기사.... 토요일 아침에 만난(?) 지옥의 북한 관련 뉴스에서 참담 함을 또 느낀다. 북한정권이 이래서야... 어떻게 사회개방을 할 수 있으며 미국과 관계 개선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 같은 북한의 인권말살 행위는 이미 공지의 사실이지만, 계속 터져 나오는 탈북자들에 의한 북한 인권참상은 실로 충역적이다. 누가 이를 해결할 것인가. 북한은 현재 과거와는 다소 다른 주민통제를 하고 있으며, 개방 챤스를 노리고 있으나 그들이 베트남, 중국 정도의 수준까지 개방, 발전하려면 아직 시간이 요원하다. 김 정일 지도자가 결단을 내려야 한다. 인권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모든 국민, 그 인민들도 김 정일 가계처럼 자유로운 여행, 생활을 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반체제, 그 반동분자들에 대한 제재는 어느 나라도 마찬가지 지만, 북한은 지금까지의 국민통제 수법 등을 개선하여 "사람이 사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남한 역시 그 같은 북한체제의 비인권 사실들을 인식하고도 유엔에서의 대북 인권결의안 표결에 불참, 기권을 한 사실을 조목할 때, 환장할 일이다. 그 북한에에 대해, 그 잘못된 국가운영 시스템에 대해 지적하고 충고를 해야 하는데, 일체 입을 듣고 있으니 남한정권 부터 문제적이 아닐 수 없다. 대북 퍼주기만이 능사가 아니다. 지난 10년 간 그 퍼준 물량으로 인해 북한 체제는 공고해 졌다. 그 때 우리 남한정부가 미국 등 우방들과 공조, 북한을 적절히 압박을 했더라면 그 같은 핵 쇼는 없었다. 이는 어디까지나 북한에 발목이 잡혔던 김 대중의 약점 때문에, 그 후 노 무현은 김 대중의 전자개표기 조작에 의하여 대통령을 만들어 준 댓가에 대해 김-노 가 망친 대북정책이었고, 북한 인민들이 더 비참한 생활을 연장하도록 했던 책임이 있다. 최근 북한은 가능한 한 인민들에게 자유권적 기본권을 보장하려는 움직임이 없지 않아, 2008년 부터 그 문제점들이 점진적으로 개선될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오늘 아래와 같은 탈북자의 증언에서, 남북한의 진로에 대해 우려를 가졌다. 12월 1일... 오늘부터 17일 까지 북한정권이 우리 남한에 대해 어떤 모습을, 카드를 보여 줄 것인지 두고 볼 일이다. 제발 "혹시나.." 가 "역시나.."로 나타나지 않기를 바란다. <배 부전 기자. simon@unitypress.com) 【뉴욕=뉴시스】북한의 정치범 수용소 ‘완전통제구역’출신인 신동혁(25)씨가 월스트리트 저널에 수용소의 참상을 고발하는 기고문을 게재했다. 완전통제구역 출신으로는 최초의 탈북자인 신씨는 30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 저널(WSJ) A섹션 오피니언면에 ‘북한 수용소의 생활’이라는 제하의 기고문에서 수용소에서 태어나 노예처럼 사육되는 어린이들과 여성재소자들에 대한 성학대, 짐승같은 생활을 하는 재소자들의 삶 등 믿기 힘든 인권유린의 참상을 폭로했다. 특히 그는 14세때 수용소를 탈출하려다 잡힌 어머니와 형이 공개처형당하는 모습을 보도록 강요받은 사실을 털어놓아 미국의 독자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지난 2005년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 중국에서 지내다 이듬해 한국에 온 신씨는 지난달 수용소 참상을 다룬 ‘북한정치범 수용소 완전통제구역-세상밖으로 나오다’라는 수기집을 펴낸 바 있다. 다음은 기고문. 나는 82년 11월 19일 ‘죄수’로 태어나 2년전까지 내가 집으로 부르는 정치범수용소 14호에서 살았다. 평양에서 50마일 북쪽으로 떨어진 개천의 이 수용소에는 범죄의 종류에 관계없이 잡아들인 재소자와 수많은 사람들이 범죄자의 가족과 친척이라는 이유로 수용돼 있다. 북한에는 ‘3대 규칙’에 따라 범죄자의 가족은 3대에 걸쳐 반역자로 투옥된다. 나는 곤봉과 주먹을 맞는 노예였고 사랑과 행복 기쁨 저항이라는 단어의 뜻을 모르는 곳에서 살았다. 내가 그곳에서 태어난 이유는 한국전쟁때 아버지의 형제 두명이 남한으로 탈출했기때문이었다. ‘반역죄’로 인해 할아버지와 아버지, 삼촌은 체포돼 모든 재산을 몰수당하고 각각 다른 곳에 수용됐다. 그러나 어머니는 왜 수용소에 투옥됐는지 아직 모른다. 그곳에서 부모님은 결혼을 허가받았다.(드물게 재소자들은 아주 열심히 일하거나 보위부 요원들의 환심을 사면 결혼을 허가받는다.) 이것이 나와 형이 수용소에서 태어날 수 있었던 이유다. 우리는 ‘허가’받은 가족이었지만 서로 애정을 갖지도 못했고 가능하지도 않았다. 내가 열네살때 어머니와 형이 탈출을 기도한 죄로 체포됐다. 나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투옥됐다. 그곳에서 7개월동안 보위부요원들은 우리 가족이 탈출을 공모했다는 것을 털어놓도록 강요했고 심하게 고문당했다. 당시 고문으로 등에는 흉터가 생겼고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진다. 96년 11월 29일 어머니와 형은 반역죄로 공개처형됐다. 나는 현장에 끌려나와 그들의 죽음을 보도록 강요받았다. 개천으로 돌아와 교도소에서 중학교 과정을 끝낸 나는 의류를 만드는 교도소내 공장에 배치됐다. 그곳에서 교도소 밖에서 살다 잡혀온 재소자를 만났고 바깥세상 얘기를 들었다. 2005년 1월 2일 우리는 탈출을 감행했다. 나는 성공했지만 동료는 철책속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는 그렇게 죽은 것 같았다. 중국을 거쳐 서울에 온후 실망과 슬픔도 있었지만 기쁨과 행복,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북한에 있을 때 나는 감정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유일한 감정이 있었다면 오직 공포였다. 매맞는 공포, 굶주림의 공포, 고문의 공포, 죽음의 공포였다. 개천수용소의 참상을 알리려고 탈출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침묵을 지키고 있을 수가 없다. 지금 이 순간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에는 수만명이 고통받고 있다. 한끼라도 더 먹기위해 아귀다툼을 하고 풀과 나무뿌리, 진흙, 쥐와 곤충으로 연명한다. 무자비한 고문은 공개리에 자행되고 매질은 계속된다. 여성은 종종 낙태가 강요되며 어린이에게 어린시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정치범들에게 인간의 권위는 없으며 지능과 감정, 꿈이 있을 수 없는 짐승으로 취급받는다. 사람을 이런 식으로 다뤄서는 안된다. 북한 정치범수용소의 학대행위에 우리는 맞서야 한다. 재소자들이 더이상 침묵속에 죽어가서는 안된다. 인간성을 말살하는 폭력에 항의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우리가 대변해야 한다. <관련사진 있음> 노창현특파원 robin@newsi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