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16 (화)

  • 구름많음동두천 29.1℃
  • 흐림강릉 26.9℃
  • 서울 28.3℃
  • 천둥번개대전 25.5℃
  • 흐림대구 28.0℃
  • 흐림울산 25.6℃
  • 흐림광주 25.8℃
  • 부산 23.4℃
  • 흐림고창 27.4℃
  • 흐림제주 32.7℃
  • 흐림강화 25.0℃
  • 흐림보은 24.6℃
  • 흐림금산 26.9℃
  • 흐림강진군 24.6℃
  • 구름많음경주시 28.3℃
  • 흐림거제 23.8℃
기상청 제공

안보뉴스

昌은 여운형의 전철을 밟지 말아야 .

昌은 여운형의 전철을 밟지 말아야


과거의 역사는 오늘의 거울이라 하지 않았던가!
앨리스(토론방)

미국 워싱턴에서 임시정부 승인외교를 벌이던 이승만 박사의 미일전 발발 예언대로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자 미국의 참전으로 대일전쟁인 태평양 전쟁이 시작된다. 미국의 엄청난 공세에 밀려 일본의 태평양의 근거지를 하나 둘 잃자 일본의 패망은 다만 시간문제로 여겨지던 1944년 8월10일, 여운형은 조동호, 현우현, 김진우, 이석구 등 민족진영과 공산진영이 참가하여 "조선건국동맹"을 결성한다. 그러나 1945년 8월4일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조동우, 이걸소, 김창숙 등 일부 간부가 투옥되었으나 일본의 항복에 의해 출옥된다.

일본이 항복하자 일제하에서도 서울에 주재하던 유일한 외국 공관인 소련 영사관과 접촉하며 국제정세를 신속하게 파악하고 있던 좌익세력은 여운형을 간판으로 내세워 1945년 8월16일 기습적으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한다.그러나 송진우를 위시한 우익인사들의 영입에 실패한 여운형과 공산주의자들은 안재홍 및 그와 가까운 중도파 인사들만을 끌어들여 "건준" 중앙조직을 구성한다. "건준"은 사상적으로 볼 때 공산주의자들이 압도적이었고 나머지는 민족주의 좌파에 속하는 인사들로 구성되었다.

"건준"의 각 부서와 간부 명단이 발표된 지 5일 만인 8월22일 "건준"은 확대 개편된 부서와 간부 명단을 발표한다. 이와 같은 부서와 간부진 대폭 개편이 필요했던 근본적인 원인은 조선공산당의 박헌영파가 "건준" 중앙간부진에 참여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건준"은 개편을 단행한 지 불과 13일 만인 9월4일 또다시 중앙간부진을 개편한다. 개편 이유로는 안재홍의 탈퇴와 "건준"에 있어서 박헌영 파의 주도권을 보다 공고히 하여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기 위한 박헌영의 공작이었다.

두 차례에 걸친 간부진 개편으로 박헌영은 "건준"의 지배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새로 개편된 "건준" 간부진 명단이 발표된 지 이틀 만인 9월6일 밤 "조선인민공화국"이 선포된다. 박헌영은 인공을 선포하기 불과 이틀 전이 9월4일에야 여운형에게 인공 공작을 통고했던 사실로 미루어 여운형은 박헌영에게 철저히 이용당한 꼴이 되고 말았다.

인공 선포로 말미암아 건준은 해산되야 하지만 여운형과 그 추종자들은 자신들의 뜻과 달리 박헌영의 뜻에 의해 "인공"을 선포한 상태이므로 박헌영이 주도하는 "인공"과 별로도 "건준"을 존속시켜 자신들의 정치경쟁 수단으로 이용하고자 강력하게 반발했으나, 박헌영은 공산당 세포들을 동원, 지방 "건준"을 지방인민위원회로 개편하고 지방인민위원회로 하여금 "건준" 해산 압력을 가하자 10월7일 소집된 "건준" 중앙집행위원회에서 "건준" 해소가 결의되고 그날로 해산한다.

박헌영에 의해 본의 아니게 "건준"에서 주도권을 빼앗긴 여운형은 독자적인 세력기반과 정치경쟁 수단을 확보하기 위해 1945년 11월12일 인민당을 조직한다. 인민당 참여자들은 박헌영이 만든 정예정당인 조선공산당에 입당할 수 없는 사람들로, 좌익진영 내에서 박헌영에 대한 여운형의 주도권 경쟁 도구가 되는 동시에 사상 강도가 약한 사회주의자와 비사회주의적 정치지망생들이 대다수 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인민당" 당원의 약 70%가 공산당 프락치였다.

그 원인으로 말미암아 "조선인민당"의 일부는 조선공산당, 남조선신민당과 함께 3당통합에 합의하여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을 결성하고, 여운형은 자파 세력을 다시 규합하여 11월 12일 사회노동당을 조직함으로써 조선인민당은 창당 1년 만에 일부는 남로당으로, 또 다른 일부는 사회노동당으로 흡수되면서 해체되었다. "조선인민당" 역시 박헌영의 공작에 의해 와해되고 여운형은 사회노동당 준비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나 사로당과 남로당의 무조건 합동을 제안하고 남로당 결성식에 보낸 합동제안서가 거부되자 1946년 12월4일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고양인 경기도 양평으로 낙향했다.

토지개혁을 비롯한 제반 개혁 후 북조선인민당과 합당하여 북한을 완전 장악한 북로당은 남로당을 견제하기 위해 남로당에 참여하지 않은 좌익세력들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역할을 주도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인물로 여운형이 적합하다고 생각한 북로당 지도부는 여운형의 정계은퇴는 민족통일전선에 커다란 손실이라 생각하고 여운형을 평양으로 초대하여, 남로당에 참여하지 않은 새로운 좌익 대중정당 결성을 권유한다. 이에 여운형은 1947년 5월24일 근로인민당을 조직하여 좌우합작과 미소공위 성공을 위해 활동하다 7월19일 암살되고 만다.

살펴본 바와 같이 여운형은 "건준"을 위시하여 여러 개의 정당을 만들며 전전했으나 박헌영파의 프락치에 의해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하고 좌절되는 우여곡절 끝에 생을 마감하게 된다.

여운형의 예가 비록 해방 후 혼란기에 발생한 사건들이지만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이회창씨의 출마 선언 이래, 지난 7일의 한국보수당 창당 선언은 기왕에 예상했던 바였기에 그다지 큰 충격이랄 수는 없다. 아니 오히려 이회창씨의 출마 선언에서 한나라당을 견제할 선명보수정당 탄생을 기대했다. 그러나 이회창씨 주변으로 결집하는 면면을 볼 때 이회창씨의 선명보수정당 창당 주창은 설득력도 없고 자가당착自家撞着의 모습만 보여줌에 실망하지 않을 수 없다.

여운형이 정성들여 거하게 한상 잘 차려 놓았더니 얄미운 박헌영이 밥알 한톨 남기지 않고 독식獨食하고도 모자라 쪽박마저 깨트려 내어 쫓은 역사를 거울삼아, 기왕에 창당한 한국보수당이 본의 아니게 김대중, 노무현 양대 좌파세력들에 빌붙어 대한민국을 요절낸 자들의 이합집산의 놀이터가 되는, 공산당의 숙주가 되었던 여운형의 전철을 밟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 2007-12-12, 19:31 ] 조회수 : 85


혁신학교? 혁신은 개뿔! 애들 학력만 퇴행중! 교무실 커피자판기, 교사 항공권 구입에 물 쓰듯...특혜 불구 학력은 뒷걸음 일반학교에 비해 연간 1억4,000~1억5,000만원을 특별히 지원받는 서울형 혁신학교가 예산을 엉뚱한 곳에 쓰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특별예산(학교운영비)으로 교사실의 각종 책장이나 가구를 구입했고, 수백만원을 들여 학습자료 저장용 USB와 외장하드를 사서 나눠 갖은 사실도 밝혀졌다. 교무실 커피자판기를 구입하는데 특별예산을 쓴 혁신학교도 있었다. 이밖에도 여직원 휴게실 가스보일러 교체, 부장교사 워크숍 항공권 구입, 교직원 전체 체육복 구입 등 본래 목적과는 거리가 먼 곳에 특별예산을 물 쓰듯 전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학생들에 대한 선심성 예산 집행 정황도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학생 티셔츠 구입, 진공청소기 구입 등에 특별예산을 수백만원씩 사용했다. 학생들의 생일축하용 떡케익 구입비용으로 매달 70~90만원을 사용한 곳도 있었다. 반면 서울형 혁신학교의 학력은 일반학교에 비해 오히려 뒷걸음질 친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내용은 서울시교육청이 새누리당 강은희 의원에게 제출한 2012년 혁신학교 정산서 통합지출부를 통해 밝혀졌다. 서울형 혁신학교는 곽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