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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소식

[자료] 손충무 기자가 본 5.18직전의 김대중의 민중봉기 음모

출처 : 역사학도 카폐

아래는 손충무저 "김대중 X-파일(서울:새세상출판사,1997)에 있는 5.18 직전과 관련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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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97 중간.

김대중은 신민당과 결별했을 뿐 아니라 결별선언의 이유였던 "재야 인사와 긴밀한 협의"의 터인 "국민연합"마저도 "사적조직"으로 바꿔 버렸다. 여기에는 이미 민주회복을 위한 재야세력의 통일 같은 이념은 사라지고 단지 정권욕만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국민연합"을 점령한 김대중은 집권 구성의 3단계로서 "사조직" 확보에 급피치를 올려 3월 중에 가동시켰다.



제 1조직은 반체제 운동으로 체포, 제적되어 학원으로 돌아간 약 4백 명의 복학생으로 조직된 "민주연합 청년동지회"로 3월 5일 발족했다. 총 책임자는 김대중의 장남 김홍일이 맡았으며 이 조직은 투쟁경력이 풍부한 복삭생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각 대학의 학생회장을 수중에 거두려한 것으로 말하자면 김대중의 전위조직이었다.

...중략...



제2조직은 "민주헌정동지회"로 3월 10일에 발족, 전현직 국회의원, 공무원, 교수, 재야법조인 등 전국적으로 2만명 남짓한 회원을 모아 김종완(양돈업, "내란음모사건"피고로 제 1심에서는 징역 4년 판결)이 대표가 됐다. 김대중의 "외곽전위조직"이라 해야 할 것이다.



제 3 조직은 "한국 정치 문화 연구소"로 20대부터 40대의 청장년 정치 지망자들을 전국의 시군 단위로 조직한 것인데 회원수는 약 5천명. 복직교수의 정치 세미나 등을 통하여 김대중 지지분자를 양성하는 기구였다. 소장은 김상현("내란음모사건"피고로 제 1심에서 징역 10년 판결)으로서 김대중의 "외부 사조직"이었다.



...중략.



p.200 중간.

5월 3일, 서울대학생총회는 15일(1980년)에 대규모 가두시위를 실시할 것을 결의 했는데 김대중 씨의 "국민연합"은 "학생운동은 정당한 저항"이라고 데모를 선동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5월 4일,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은 일본 오히라 수상과의 회담에서 "한국군부가 미주화의 장해가 된다"고 전두환 사령관을 간접적으로 비판했다.



서울사태가 예상보다는 심각한 사태로 발전해 나가자 한국의 빠른 민주화를 바라던 지미 카터 정권은 점점 서울사태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학생과 노동자들이 연대하고 거기에 야당이 불을 지르며 일부 종교세력마저 합세하는 모습을 보이자 국무성과 국방성(펜타곤)은 서울사태를 위험하게 보기 시작했으며 잘못하면 군인들에게 정권을 탈취할 수 있는 명분을 주는 것이 아닌가 하고 불안한 눈초리로 서울을 바라보았다.



p.201

불안해진 국무성 관계자들과 CIA관계자들은 서울의 정확한 사태와 함께 전두환을 비롯한 12.12에 가담한 소장파 장군들의 속셈을 알고 싶어했다. 그들의 뜻을 받아 필자(손충무)가 서울에 도착한 것은 5월 6일이었으며 그 길로 보안사령부로 가서 전두환 장군을 만나서 워싱턴의 우려와 북한의 움직임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필자(손충무)의 이야기를 듣고난 전두환은 "이런 사태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은 김대중파들입니다. 나는 김대중을 유능하고 똑똑하며 언젠가는 이 나라 정치 지도자들 가운데 최고자가 될 수 있다는 손 국장 이야기에 흥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한 김대중의 행동은 도저히 용서 할 수 없습니다. 우리측(중앙정보부, 보안사령부, 경찰)이 제공한 정보에 의하면 김대중은 대통령 선거에 출마키 위해 김영삼과 헤어지고 대학 복학생들과 종교가들을 앞세워 국민연합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나의(전두환) 예편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 역시 믿을 수가 없는 인간입니다. 손 국장도 조심하세요"라고 답변했다.



"아닙니다. 김대중 씨의 본래 인간성은 그렇지 않은데 그 동안 군사 정권들이 한쪽으로만 매도해 왔지요. 제가 한번 만나서 설득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하게 전해 줄 말이 있어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김대중에게 나쁜 선입감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손 국장께서도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 사태로 인해 내 주변 많은 사람들이 김대중에 대해 나쁜 이야기만 하고 잇어 좋은 인상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 사람(김대중) 지금까지 많은 어려움을 겪어 왔으니 조금만 참고 대를 기다리면 될 텐데....너무 성급한 것 같습니다. 손 국장께서 잘 말해 얼마동안이라도 외국에나 나가서 있다가 오도록 하십시요"



전두환을 만난 다음 김대중의 비서실장을 지낸 천명기 의원과 공보비서 유훈근에게 전두환의 뜻을 전달했다.



다음날인 5월 8일 동교동으로 김대중을 방문했다. 그리고 지미 카터 정권의 한국사태 우려와 함께 군부의 불만을 자세하게 절달했다.



p.202

"전두환 장군이 김 후보를 미국에 데리고 가도 좋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니 다리 치료도 할겸 미국에 가서 한 2년 쉬다가 오시지요. 원하시면 미국 수속은 저희들이 하겠습니다. 그 대신 당분간 정치에 관계하지 ㅤㅇㅏㅎ겠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십시요. 자칫해서 엉뚱한 사건이 발생한다면 모두 김 후보께서 뒤집어 쓰게 됩니다".



"손 동지.....서울에 오셔서 분위기를 보셨겠지만 국민들은 절대적으로 나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군인들이 엉뚱한 생각들을 갖고 있는데....그들은 유신 세력들에게 포위당해 있어요. 유신세력들을 타파하지 않으면 커다란 비극이 발생합니다. 박정희의 말로와 공화당의 모습을 보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전두환 장군을 한 번 만나게 해 주시오. 내가 만나서 그와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면 모든 오해가 풀릴것입니다"



"그 분이 마나려고 할지.....아니면 거절할지 모릅니다. 일단 말씀은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전 장군께서는 김 후보에 대해 특별하게 나쁜 선입관을 갖고 있는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보고 수속을 해서 미국으로 모시고 가라고 했습니다".



"아닙니다. 지금은 내가 떠날 수가 없는 시기입니다. 나를 위해 수 많은 동지들이 고생했는데 나 혼자 편안하자고 미국으로 떠난다면 그들이 나를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나를 기다리고 있는 호남 사람들의 바람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희망을 안겨주어야 합니다"



김대중은 철저하게 도취당하고 있었다. 국민의 외침이 모두 자신을 향해 쏟아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5월 10일 이후 학생시위에 의한 긴장이 고조되는 한편, 12일 임시 가의에서는 제주도까지 포함하는 전국 비상계엄확대 공포가 결정됐다고 발표했다. 같은 날 심야부터 13일 새벽에 걸쳐 계엄군 장갑차가 정부기관, 보도기관 주변에 출동했으며, 13일 심야 전국 33개 대학 학생회장 회의는 14일부터 전국 대학생 가두시위를 결의했다.



p. 203

한편, 이에 호응하도록 한 김대중의 "국민연합"은 16일 "민주화촉진 국민연합대회 선언문"을 발표했다.



"우리들은 5월 19일 오전 10시까지 5월 5일의 민주화촉진 국민선언에서 요구한 "비상계엄령 즉시 해제", "신현확 총리와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즉시 퇴진", "정치범의 전원석방과 복권", "언론의 자유보장", "유신 정우회", 통일 주체국민회의와 정부개헌 심의 위원회의 즉시 해체에 대하여 정부가 명확한 답변을 국민 앞에 밝힐 것을 요구한다. 만일 이 요구가 관철되지 않을 때는 5월 19일 정오를 기하여 "행동강령"에 기초해 우리 국민은 투쟁에 나선다"



"행동강령"은

1) 5월 20일 정오에 서울은 장충단공원에서, 지방은 시청앞 광장에서, 민주화 촉진 국민대회를 개최한다.

2) 민주화 투쟁에 찬동하는 의사 표시로서 시민은 검은 리본을 가슴에 달고

3) 국군은 비상계엄령에 의거한 일체의 지시에 복종하지 않고

4) 언론은 검열과 통제를 거부하고

5) 전국민은 집회와 평화적 시위를 통한 민주화 투쟁을 용감하게 전개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행동강령"에 의하여 요구가 관철되지 않을 때에는 5월 22일부터 "국민연합"은 민주화 투쟁을 전개한다고 돼있다.



이 선언문은 5월 16일발표되어 카피 30부가 언론기관과 주요대학에 배포되었다. 이것은 정부에 대한 민중복이의 "최후통고"였다. 그런데 5월 15일 신현확 총리가 "정치일정 중 앞당길 수 있는 것은 앞당긴다"는 타협적인 담화를 발표했기 대문에 각 대학 학생회장 회의는 가두 시위를 중단하고 당국의 태도를 지켜 보기로 하였다. 이 시기에 학생시위는 각 대학 학생회장 회의에 의해 통제되고 있었으며, 학생회장으 대부분이 학생의 선거로 선출된 온건파라고 보는 견해가 강했다.



....중략...

205p.

16일 오후 김대중의 단독성명서 때문에 전두환~김대중은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간 셈이됐다.

........중략....

206p.

1980년 5월의 위기는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런데도 정치위기를 정치인들은 모르고 있었다. 그런 정치위기를 알고 있던 사람은 전두환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전두환은 이 때까지만 해도 그런 불행을 피하고 싶었다. 그 마음이 김대중을 미국에 데리고 가서 2-3년 간이라도 잠시 떠나 있도록 한 후 국내 안정을 꾀하고 싶었던 것이다.



.......중략...



p. 208

이제 서울사태는 수습할 수 없는 파국의 순간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런 사실도 모르고 서울거리는 데모하는 학생들의 함성과 데모를 막으려는 경찰 기동대의 싸움은 더욱 치열해지고 최루탄 때문에 거리에는 눈을 드고 다닐 수가 없었다. 김대중과 기영삼의 가는 길을 선명하게 갈라 놓은 문제의 성명서가 가져온 파국의 물결은 서산에 지는 5월의 햇살도 모른 채 느리게 어둠을 불러오고 있었다.



끝.

[출처] 5.18직전의 김대중(손충무) (과격불법촛불시위반대 시민연대) |작성자 코리아


혁신학교? 혁신은 개뿔! 애들 학력만 퇴행중! 교무실 커피자판기, 교사 항공권 구입에 물 쓰듯...특혜 불구 학력은 뒷걸음 일반학교에 비해 연간 1억4,000~1억5,000만원을 특별히 지원받는 서울형 혁신학교가 예산을 엉뚱한 곳에 쓰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특별예산(학교운영비)으로 교사실의 각종 책장이나 가구를 구입했고, 수백만원을 들여 학습자료 저장용 USB와 외장하드를 사서 나눠 갖은 사실도 밝혀졌다. 교무실 커피자판기를 구입하는데 특별예산을 쓴 혁신학교도 있었다. 이밖에도 여직원 휴게실 가스보일러 교체, 부장교사 워크숍 항공권 구입, 교직원 전체 체육복 구입 등 본래 목적과는 거리가 먼 곳에 특별예산을 물 쓰듯 전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학생들에 대한 선심성 예산 집행 정황도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학생 티셔츠 구입, 진공청소기 구입 등에 특별예산을 수백만원씩 사용했다. 학생들의 생일축하용 떡케익 구입비용으로 매달 70~90만원을 사용한 곳도 있었다. 반면 서울형 혁신학교의 학력은 일반학교에 비해 오히려 뒷걸음질 친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내용은 서울시교육청이 새누리당 강은희 의원에게 제출한 2012년 혁신학교 정산서 통합지출부를 통해 밝혀졌다. 서울형 혁신학교는 곽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