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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터의 주한미군 철군론을 백지화 만든 전두환 대통령

-미군철수 백지화와 아웅산 테러-

 

"6, 25 전쟁’이 일어나게 된 원인중의 가장 큰 원인은 주한미군 철수에 있다. 한반도에 공산주의 간판을 단 김일성 왕조를 건설하려는 야욕을 가진 김일성과, 공산주의 맹주로서 혁명수출을 하여 한번도를 복속 시키려는 소련과 중공은 주한미군 철수를 보고, 오판을 하여 김일성의 남침전쟁을 도왔다. 수백만의 억울한 생명들이 전화(戰禍)에 의해 참혹히 죽어야 했다. 그런데 카터 대통령(미국 39대 대통령, 재임기간:1977-1981)의 주한미국 철군방침에 의해 한반도는 다시 전화의 시발점에 놓이게 되었었다. 그러나 카터의 철군론(撤軍論)을 백지화 한 분이 전두환 전 대통령이다.


▲김일성을 만나 기뻐하는 카터 전 미국 대통령@ 중앙불교)

카터는 동맹인 대한민국 보다는 북한의 김일성 공산 독재체제를 좋아하는 행보를 국제사회를 향해 노골적으로 보이고 있어 미제(美帝) 좌빨 정치인이라는 혹평을 듣기도 하는 인물이다.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병적으로 증오했다. 김일성이 좋아서 반대 급부로 박정희를 싫어하는 것인지, 아니면 개인의 정치성향인지는 모르나 그의 박정희에 대한 편견은 미군철수로 이어지고, 마침내 그의 재임기간 내에 미국 CIA를 상전처럼 모시는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의 손에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되는 비운을 맞았다. 오비이락(烏飛梨落)의 소식인가?

1979년 6월29일 카터는 도쿄에서 7개국 경제 정상회담을 마치고 김포로 들어오게 되었다. 김포 지역의 안개로 착륙이 늦어져 영접 나간 박정희 대통령은 거의 두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카터는 두 시간이나 기다린 박대통령과 악수만 나누고, 곧바로 미 해병대 헬기를 타고 동두천 미 2사단내의 숙소로 떠나버렸다. 다음날 아침 카터는 짧은 반바지를 입고 조깅을 시작했다. 일부 한국인들이 카터의 조깅을 흉내내어 반바지를 입고 조깅을 하기 시작했다. 카터는 한국의 조깅 원조인 셈이다. 그러나 조깅을 하기전 카터는 박정희 대통령을 예방했어야 했다. 카터는 그것을 무시하고 주권국가의 땅에서 제마음대로 반바지로 뛰었다.

1979년 6월 30일, 카터와 박대통령은 제1차 정상회담을 위해 청와대에서 대좌했다. 한국측에서는 최규하 총리, 박동진 외무장관, 노재현 국방장관, 서종철 안보특보, 김용식 주미대사, 김계원 비서실장, 통역을 맡은 최광수 의전수석 비서관이 배석했다. 미국측에서는 밴스 국무장관, 브레진스키 안보보좌관, 글라이스틴 대사, 베시 주한미군사령관이 배석했다.

이날 박대통령은 카터는 대통령 후보로서의 공약이 주한미군 철수였기에 ‘주한미군 철수 문제’에 대한 부당성에 대해 카터를 설득하려고 애썼다. 박대통령은 주한미군이 한국의 방위뿐 아니라 동(東)아시아와 자유세계의 방어를 위해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하는 점을 역설했다. 카터 대통령은 얼굴이 벌개진채로 펜을 들고 메모지에 무엇인가 쓰는 자세를 취했는데 경청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공약에 대해 질책하는 듯한 박대통령에 언행에 자존심이 상했다. 카터는 메모를 써서 브라운 장관과 밴스 장관에게 슬쩍 넘겼다. 거기엔 ‘만약 박정희가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주한미군 전원을 철수시키고 말겠소’라고 적혀 있었다.

<두 개의 한국>이란 책을 쓴 돈 오버도퍼 기자에 따르면 카터의 철군(撤軍) 특사 하비브와 브라운은 카터 대통령이 1977년 5월 초에 서명한 1급 비밀문서(撤軍 일정표)를 박 대통령에게 설명했다고 한다. 그 내용은 1978년 말까지 1개 여단 6,000명을 빼내가고, 1980년 6월 말까지 또 1개 여단과 지원병력 최소 9,000명을 철수하며, 한국에 있는 핵무기는 줄여 가다가 철군(撤軍) 완료와 함께 다 가지고 나간다는 것이었다.

카터는 인권문제를 들고 박대통령을 비판했다. 긴급조치 9호의 해제를 요구했다. 박대통령은 카터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박대통령은 카터에게 수모를 받으면서도 어떻게 해서든지 주한미군을 울타리 삼아 산업발전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카터의 주한미군 철군론은 박대통령에게만 충격적인 것이 아니었다. 주한미 8군 사령부 참모장 존. K. 싱글러브 소장이 철군부당성에 대해 성명을 발표했다. 주한 미 8군 참모장은 WP지 동경 지국장과의 인터뷰에서 “주한미군을 철수 시키겠다는 카터 대통령의 계획은 곧 전쟁의 길로 유도하는 오판이다”라고 말하고, “2∼3년전의 낡은 군사 정보에 입각해 취해진 결론”이라고 비판했다. 카터는 격노했다. 싱글러브 소장을 백악관으로 소환하더니 30분 면담후, 그를 미8군 사령부 참모장직에서 해임했다. .싱글러브 소장의 용기있는 행동은 아직도 한국인들은 기립박수를 칠 정도로 환영하고,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싱글러브 소장의 용기있는 발언의 배후에는 뜻을 함께하는 당시 ‘베시’주한미군 사령관이 있었다. 베시 사령관은 6·25 때 주한미군이 철수함으로써 전쟁이 발발한 반면 휴전 이후에는 전쟁이 없었는데 그 이유는 주한미군이라는 전쟁 억지력이 엄존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해왔다. 싱글러브 소장이 직위해제를 당해야 했듯이, 베시 사령관은 육군참모총장 물망에 올랐으나, 카터의 농간으로 참모차장에서 옷을 벗어야 했다.

카터는 재선에서 레이건에게서 실패했다. 그는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카터는 자발적으로 북한에 들어가 김일성에게 인사하고, 그의 로비스트가 되었다. 그의 로비스트로서의 수훈갑(殊勳甲)은 94년 6월, 클린턴 대통령이 북핵을 저지하기 위해 영변 원자로를 폭격하려는 시나리오를 잠재운 것이다. 1994년 6월 14일, 클린턴 대통령은 장관급 회의를 할 때, 작전명, "오시라크(Osirak) 옵션"이라고 불린 새로운 대안을 화제 삼았다. 오시라크는 1981년 이스라엘이 공중폭격을 통해 파괴한 이라크의 원전시설을 의미했다. 카터는 즉각 김일성에게 달려갔다. 위급을 알려주고, 클린턴에게 전화하여 폭격을 막았다.

카터는 김일성을 만났을 때, 박대통령에게 하듯이 오연(傲然)하게 인권문제와 민주화를 요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김일성이 자신을 만나준 것을 큰 자랑인듯이 미국언론과 자서전에가지 자랑했다. 김일성이 자나깨나 제일 증오하는 대상은 첫째, 주한미군이요,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카터는 마치 김일성에게 충성하듯, 주한미군을 철수하려 했고, 박대통령을 증오한 것이 돼버렸다.

전두환 대통령은 1981년 1월과 1985년 4월, 2차례에 걸쳐서 미국을 방문하고, 1983년 11월에는 레이건 미 대통령을 서울로 초청하여 3차례에 걸쳐 〈한·미 정상회담〉을 가졌다. 첫 번째는, 전두환 대통령이 레이건 행정부가 출범한지 1주일만인 1981년 1월 28일부터 2월 7일까지 10박 11일 동안 미국을 방문하여 2월 1일 오전 11시 백악관의 대통령집무실에서 1시간 20분 동안 진행되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이때 전임 카터행정부에서 제기했던 주한미군 철수 문제를 백지화했다. 안보협력을 강화했다.

전두환 대통령과 레이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결산하는 공동성명은 레이건대통령이 주최한 오찬 후 오후 3시에 발표되었다. 양국 정상이 합의한 내용은 크게 3가지였다. 첫째, 안보 면에서 주한미군 불철수를 공식 확인하고, 한국군 전력 증강에 대한 미국의 협력을 명시하였다. 둘째, 남북한관계에서는 한국 정부의 입장을 전폭 지지하여 한국의 참석 없이는 북한과 접촉하지 않을 것을 분명히 했다. 셋째, 경제협력 면에서는 미국이 한국을 주요 교역국으로 재인식하고 있다는 점을 표명했다. 카터의 미군철수에 큰 희망을 가진 김일성은 전두환 대통령의 외교성과를 TV로 지켜보면서 분통이 터져 혈압으로 쓰러져 버렸다.

가까스로 의식을 회복한 김일성은 아들 김정일을 불러 밀명을 내렸다. 미군철수의 희망이 사라지게 한 전두환 대통령에 대한 테러 공작이었다. 밀명을 받은 김정일이 음모를 꾸민 것이 1983년, 10월9일, 미얀마 아웅산 테러였다. 아웅산의 묘소에는 전두환 대통령이 도착하여 헌화할 때 진혼나팔을 불도록 되어 있었다. 한편 진혼나팔이 울려 퍼질 때 김정일의 암살자들이 리모콘 폭발을 일으키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천운인가, 전두환 대통령이 도착하기 전 진혼나팔이 울려퍼졌다. 순간, 대폭발이 일어나 수많은 한국의 인재들이요, 전두환 대통령의 참모들이 허무하게 죽어갔다.

진혼 나팔은 왜 일찍 울렸을까? 첫째, 진혼곡을 연주하기 위해 도열해 있는 군악대가 마지막으로 연습삼아 진혼나팔을 불었다는 것, 둘째, 한국 경호원들이 사전점검차원에서 진혼나팔을 불어보라는 권유에서라고 추측한다. 어쨌거나 전두환 대통령이 주한미군철수를 백지화 한 것에 대한 김일성의 앙심은 아웅산 테러에 이른 것이다.

한국정치사에 전두환 대통령만큼 왜곡되게 비판을 받는 분이 또 있을까? 그를 세상에 왜곡되게 만드는 자들은 첫째, 북한정권이다. 둘째, 북한정권의 지령을 받는 종북 좌파 정치인들이다. YS, DJ, 노무현이 그들이다. 그들은 대통령병에 혈안이 되어서 문민대통령시대를 외치며 투쟁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의 의지를 달성키 위해 누구보다 무장출신 대통령들을 증오했다.

YS의 정치력은 어떤가? OECD가입으로 외환관리가 허술해진 틈을 타서 기업이 외자를 유치하고 그돈으로 흥청 망청 하다가 결국 IMF로 가지 않았는가? 국민 대다수가 IMF로 고통을 받을 때, 소통령이라는 아들은 무소불위의 인사권을 휘두르고, 부정뇌물을 착복하여 졸부가 되었다. DJ는 어떤가? 햇볕정책으로 국민혈세를 착취하여 대북 퍼주기와 카드사를 무분별하게 허가하여 카드 빚에 시집, 장가 못가는 대난을 일으키고, 알짜배기 기업인 삼성(53%) ,포철(55%) .외환은행(82.3%) ,제일은행(73%) ,현대자동차(56%) 등 이 모두 50%이상의 주주를 외국인에게 헐값에 매각하고, 대북 퍼주기에 혈안이 되더니, 자신과 가족 모두가 졸부가 되었다. 속고, 죽어나는 것은 가난한 민초들이다.

예컨대 삼성발표에 의하면 2004년 삼성이 100조원의 흑자를 냈다고 한다. 그러나 삼성주식53%가 외국인이 주주이기 때문에 단순계산으로 우리 젊은이들이 뼈빠지게 번돈 53조원은 외국인은 불로소득처럼 수입잡는 것이다. 수출을 해서 무엇하나? 한국의 유수기업은 과점주주가 외국인이고 보면 우리는 겨우 인건비나 받아쓰고, 이득은 그들이 가져 갈테니 말이다. YS, DJ는 우리 경제사에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남겨놓았다. 또, DJ, 노무현은 대북 퍼주기로 100억불 가까이 국부를 유출시켜 버렸다. 서민경제가 바닥을 치고, 해고자들, 실업자들이 나날히 늘고 있는 것은 종북 좌파 대통령 탓이요, 좌파 정당 탓이며, 좌파 시민단체 탓이다.

한국은 종전의 나라가 아니다. 휴전 상태이다. 정신나간 종북 좌파 대통령들이 북핵까지 도와서 언제 북핵이 날아올지 모르는 전전긍긍의 한국이다. 북핵을 도운 반역자들인 종북 좌파 대통령들은 반역의 음모로 ‘전작권전환’을 통해 미군철수의 단계를 밟고 있다. YS의 ‘5,18특별법’의 국군죽이기 영향은 휴전상태의 한국 전역에 반란군은 살고, ‘애국 군경(軍警)죽이기’를 쉬지 않고 있다.

대한민국에 반역하고, 졸부가 된 종북 좌파 정치인들이 언제까지 건국의 국부인, 이승만 대통령과 안보와 경제를 살린 박정희, 전두환 대통령에 대한 비난에 우리는 눈감고, 귀막고 인내해야 할 것인가? 경제와 안보에 대해 통탄성이 충천하는 즈음에 미군철수 백지화속에 경제를 일으켜 세우고, 88올림픽을 성공시킨 전두환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기립박수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법 철(bubchul@hotmail.com)





혁신학교? 혁신은 개뿔! 애들 학력만 퇴행중! 교무실 커피자판기, 교사 항공권 구입에 물 쓰듯...특혜 불구 학력은 뒷걸음 일반학교에 비해 연간 1억4,000~1억5,000만원을 특별히 지원받는 서울형 혁신학교가 예산을 엉뚱한 곳에 쓰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특별예산(학교운영비)으로 교사실의 각종 책장이나 가구를 구입했고, 수백만원을 들여 학습자료 저장용 USB와 외장하드를 사서 나눠 갖은 사실도 밝혀졌다. 교무실 커피자판기를 구입하는데 특별예산을 쓴 혁신학교도 있었다. 이밖에도 여직원 휴게실 가스보일러 교체, 부장교사 워크숍 항공권 구입, 교직원 전체 체육복 구입 등 본래 목적과는 거리가 먼 곳에 특별예산을 물 쓰듯 전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학생들에 대한 선심성 예산 집행 정황도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학생 티셔츠 구입, 진공청소기 구입 등에 특별예산을 수백만원씩 사용했다. 학생들의 생일축하용 떡케익 구입비용으로 매달 70~90만원을 사용한 곳도 있었다. 반면 서울형 혁신학교의 학력은 일반학교에 비해 오히려 뒷걸음질 친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내용은 서울시교육청이 새누리당 강은희 의원에게 제출한 2012년 혁신학교 정산서 통합지출부를 통해 밝혀졌다. 서울형 혁신학교는 곽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