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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조 교사의 전형적인 생리(좌익생리)

전교조 교사의 전형적인 생리(좌익생리)


학생운동(?)에 몰입했던 사람들의 생생한 수기들이 수록된 [진터골 이야기]를 읽으면서 어느 교육자가 겪었던 수기가 가장 마음에 들어 여기에 옮깁니다.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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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1,000만원 고료 “운동권이야기‘ 공모수기
진터골 이야기
図書出版 現 思 硏 (1988. 173P - 197P)
<파면하라>
글쓴이 김 세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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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자라는 나이, 아직은 ‘생각 미숙아’들에게 외곬수의 사상을 주입하고, 현실부정, 빈부간에 적대감 조성 등 한쪽 방향의 의식화 교육이 진정 바람직한 것인가. 그 나이야말로 아무런 편견 없이 여러 주장과 모습들을 공부하며 제 생긴 모습만큼이나 다양한 가치와 생각들을 각각 흡수해 나가야 할 때가 아닌가.”

◎ 프롤로그

요 몇 년 동안 나는 여름방학이 제일 바쁜 사람이 되어버렸다. 명색이 교육자인데 참 이상한 노릇이다. 등산이나 해수욕장 등의 피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으며, 산속의 시원한 옹달샘물 조차 한낱 어릴 때의 꿈이 되었다.

84년의 7월 27일.

학생들은 방학 중이었고 무더운 여름날씨였다. 시골길을 달리는 버스 안은 짐짝처럼 포개진 사람들이 내뿜는 열기와 풀풀 이는 먼지로 뒤범벅이었다. 연일 전국 곳곳에서 교육민주화 관련교사들의 모임이 열렸다. 방학이 되자 관련교사들의 집단 활동과 연수회 등은 더욱 극성스러워졌다.

중. 고등학교 학생의 의식화, 좌경화란 있을 수 없는 일이므로 이런 관련교사들의 활동을 차단하고 지도하는 일이 나의 일이었다.짐짝 버스에서 내려 나는 00군 교육청에서 관계자를 대동하고 K중학교를 찾아갔다. 00군 XX면 학부형 대표 김영선씨와 지역주민 대표 조선길씨가 K중학교 관련교사 박희영에 대해 제출한 진정내용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84년 7월 22일.

두 대표는 군 교육장에게 관련교사 박희영의 인사조치를 요구하는 진정서를 제출했던 것이다.

1. 교권을 탄압하지 마십시오.

우선 진정서 내용부터 살펴보았다. 그내용을 요약해 보면,

첫째, K중학교 관련교사 박희영은 의식화된 교사로서 학생들에게 의식화 교육을 하였고,

둘째, 교사로서 자질이 부족할뿐더러 여교사로서 품위 없는 행동을 하여 주민들의 빈축을 사고 있으며,

셋째, 교습방법이나 학습지도 등이 부실한 교사로서 K중학교에서 인사 조치 시켜주지 않으면 학생들의 등교를 거부하겠다는 것이었다. 학부형대표 및 지역주민들의 진정은 보기드문 일이었다. 학부형과 지역주민들의 진정은 교사들에 의한 학생들의 체벌에 항의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이런 일은 거의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날 박희영 교사는 마침 일직이었다. 학교장, 서무과장, 장학사가 입회한 자리에서 우리는 진정내용을 확인하는 자리를 가졌었다. 조사를 할 때 특히 여교사들은 단독상담을 하지 않는 것이 교육위원회 관계자들의 불문율이었다. 상담 도중, 여교사들이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밖으로 뛰어나가면 괜한 오해를 받을 소지가 있었기에 항상 조심을 해야 했다.

물론 이해를 못하겠다며 지나친 기우가 아니냐며 웃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우리에겐 그 문제도 심각했다. 조사를 하되 최대한 인격을 존중하며 예의를 잘 갖추는 게 우리의 도리였다. 박희영 교사가 학교장실로 들어왔다. 나는 박선생에게 의자를 권하고 자리에 앉기를 기다렸다. 박선생은 수척하고 야윈 모습이었다.

3년전,Y여중 재직 시 처음 본 박선생은 무척 건강하고 활기찬 모습이었다. 젊은 여교사 특유의 힘과 활기는 어디로 가고 몹시 창백한 표정으로 바뀌어 있는 박선생을 보자 나는 처음에 딴 사람으로 착각을 할 정도였다. 무척 피곤해 보였으며 눈빛도 흐려있었다. 후에야 박선생이 입원했던 K병원의 진단서를 보고 알았지만 그때 이미 그녀는 위암 환자였다. 병원에서 진찰을 받고 열흘 또는 그 이상 병가를 갔던 일이 있었다.

나는 관련교사들과 상담할 때 항상 그러하듯 공적인 말 이외에는 말을 삼갔다. 공적인 말만 해도 관련교사들은 조사 후, 담당자를 모함하고 괴롭히는 일이 많았다. 관련교사들 만큼이나 우리들도 선의의 피해를 입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박선생에게 방문이유를 간단히 설명했다. 내가 묻는 말에 양심대로 사실이면 사실, 아니면 아닌 것을 제3자가 납득할 수 있도록 대답할 것을 요구했다.

예상대로 박선생은 상담을 거부했다. 무척 도전적이었다. “댁한테 대답할 의무가 없습니다. 학부형들의 진정은 일고의 가치조차 없는 일이에요, 진술을 거부합니다.” 박선생은 무조건 상담이나 조사를 거부하였다. 흔히 관련교사들은 그들의 집회 및 유인물을 통하여 어떤 유의 조사일지라도 무조건 거부 한다고 했었다.

박희영 교사도 예외가 아니었다. 직권으로 조사를 못할 바는 아니었지만 무리한 충돌은 피했다. 무조건 반대에 체제 부정을 앞세운 관련교사들과 조사를 강행한다는 것은 피곤했다. 또한 시간 낭비였다. 나는 모욕과 불쾌함을 웃음으로 참았다. 하지만 박희영 선생에대한 진정조사를 포기할 순 없었다. 박선생에게 마지막 말을 확실히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박희영 선생님! 학교장과 교육청에서는 학생. 학부형. 지역주민들의 여론에 따라서 이미 기초조사를 하였습니다. 선생님의 진술이 중요합니다. 선생님께서 진술을 거부한다면 오히려 학부형들의 진정 내용을 모두 사실로 시인하는 결과가 됩니다. 박선생님께 불이익이됩니다. 박선생님을 보호하는 입장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교권을 탄압하지 마십시오. 진술을 무슨 이유로 강요합니까? 일고의 가치조차 없어요. 무조건 거부합니다.” 박선생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서 밖으로 나갔다. 이것이 박선생과 나눈 마지막 말이었다.

허탈해하며 학교를 떠나려고 하는데 학부형대표 김영선씨와 지역주민대표 조선길씨가 찾아왔다. 진정서를 제출한 당사자들이었다. 그들의 진정에 대해 확인 조사를 나왔다는 말을 듣고 나를 찾아 온 것이었다. 그들은 자리에 앉자마자 ‘진정서에 있는 내용을 철저히 조사해 인사조치 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자신들은 학부형과 지역주민대표로서 여러 지역주민들과 학부형. 학생들의 여론에 힘입어 행한 일이니 현명한 판단을 바란다고 거듭 얘기했다. 교육청의 조사내용 및 지역주민들과 학생들의 진술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1) 품위손상

첫째, 교사 박희영은 83년 5월 C고등학교 근무시 그의 담임반 학생 40명 전원을 청소용 걸레봉으로 집단구타하고 물의를 야기하여 학교장으로부터 앞으로 같은 일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하라는 주의를 받았던 사실이 있다.

둘째, 앞의 문제로 84년 K중학교로 전근된 후 박희영 교사는 미혼 남녀교사 10여 명으로 계를 조직해 회장을 하면서 회식을 가질 때마다 음주, 고성방가를 하여 지역주민들의 비난을 받아왔다. 교육자로서 심히 품위를 실추시키는 이런 일에 학교장은 계속적으로 주의를 촉구했으나 개전의 정이 전혀 없었다.

셋째, 84년 5월 학교장은 직원연수를 통해 ‘교원은 공직자로서 투철한 국가관을 확립해야 한다’고 하였음에도 박희영 교사는 가정방문시 학생들에게 ‘요즘 자주 일어나고 있는 데모는 젊은 사람들의 판단이 옳고 그래서 그 사람들이 앞장서서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다. TV화면에선 경찰이나 군인들의 피해만 보여주어서 그렇지 사실은 대학생들의 피해가 더 많다‘는 등 데모를 오히려 찬양하여 어린 학생들에게 시국관의 갈등을 갖게 만들었다.

넷째, 사춘기 학생들의 이성교제는 학교의 특별한 감독과 지도를 요함에도 불구하고 교사 박희영은 학생들의 이성교제를 알선하고 ‘공부는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 ‘데이트 코스는 서울까지 완행열차 코스가 제일 좋다’ ‘한밤중이라도 친구 생각나면 여자고 남자고 할 것 없이 가서 만나고 한바탕 놀고 와라’ 등의 말을 수업 중에 학생들에게 하여 교원으로서 올바른 학생지도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교원으로서의 권위를 상실했다.

(2) 학습지도 부실

첫째, 교육법 제75조1항에 ‘교사는 교장의 명을 받아 학생을 교육한다’고 명시 되어 있는바 학교장이 직원연수 등을 통해 ‘교사는 교육과정에 의한 교과지도를 충실히 하여 줄 것을 수차에 걸쳐 촉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박희영 교사는 84년 3월 부임 이래 학습시간에 학습목표와는 다른 ‘5분 이야기’ 시간을 운영해왔다. 그 내용은 ‘이성교제, 가족비판, 가난한 어른’ 등의 주제로 학생들의 인격형성이나 성장발달을 저해할 우려가 있는 얘기를 자주 하였다.

둘째, 박희영 교사는 2학년 4반 학생 15명에게 ‘서울로 간 허수아비’등 약13종의 책을 주고 읽기를 권한 후 독후감 쓰기를 지도했는데 그 책들은 거의 판금도서들이었다. 이 책들은 국어교육 목적 및 문학작품지도 영역에서 말하는 학생들의 가치관 및 인격형성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무비판적 수용으로 악영향을 끼칠 우려가 더 많은 도서로 분석, 평가되었다. 따라서 박희영 교사는 독서지도를 통해 학생들에게 올바른 가치관 및 바람직한 인간상을 불어넣지 못하고 현실을 부정적이고 왜곡된 시각으로 비판하도록 지도한 저의가 있었음을 배제 할 수 없다.

셋째,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학교장 훈화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라’는 등의 말을 하였고, 교육과정에도 없는 운동권 노래들을 자주 가르쳤는가 하면 ‘죽여 버려’ ‘혁명’ ‘투쟁’ 등 과격한 언사가 입에 배여 학생들에게 혐오감을 주고 교사로서 품위를 떨어뜨렸다. 그 외에도 여러 곳의 집단시위나 성명 등을 통해 학교안팎으로 물의를 일으키고 그에 대한 윗사람이나 상부교육기관의 경고에도 아랑곳없이 행동한 여러 내용들이 진정되어 있었다.

2. 노래를 통한 의식화 교육

‘선생님 우리 선생님!
이제 그만 야단치세요, 네?
매일 보는 얼굴이지만 할 말이 많은 걸요.
떠든다고 지우개처럼 이제 그만 탁탁치세요. 아야야야~.
우리들은 말괄량이지만 마음만은 밝잖아요?‘
(‘우리들의 노래’ 가사 변형)

학생들의 애교 어린 귀여운 모습이 연상되는 노래다. 그러나 교사의 지도 방법에 따라 이 노래에 대한 이해와 반응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다. 내용보다 교사의 지도 방법이 문제 있다. 교사가 이 노래를 학생들에게 가르치기 전에

“우리 학교에서 어느 선생님이 가장 공부를 잘 가르쳐요?”

“공부는 잘 가르치지만 그 선생님은 학생들의 머리를 탁탁 때리는 나쁜 버릇이 있지요?”

“머리를 맞으면 기분이 어때요”

“인격적으로 존경할 수 없지요?.....”

이런 유도 질문들을 한다.

그 다음 이 노래를 부르게 하면 실력 있고 존경받던 교사가 하루아침에 ‘인권유린’ ‘인격모독’ 교사로 전락되었다. 심하면 학생들에게 배척을 당하고 학교를 떠나는 예도 있었다. 가사가 변형된 ‘못생긴 얼굴’도 같은 노래였다. ‘너네는 큰집에서 네 명이 살지? 우리는 작은집에서 일곱 명이 산다. 그것도 모자라서 집을 또 사니? 니네 집 많아서 좋겠다. 하얀 눈 내리는 겨울이 오면 우리 집은 하얗지.‘

교사가 이 노래를 가르치기 전에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학생들에게 하여 학생들을 분류하여 놓는다. “남의 집 세 사는 학생 손들어요.” “초가집에 사는 학생 손들어요.” “집이 둘 있는 학생?” “2층 양옥집에 사는 학생?” “별장을 가지고 있는 학생 손들어요.” 각각 손을 들게 하고 학생들 서로가 서로의 처지를 확인하게 한 다음 이 노래를 부르면 무의식중에 빈부의 격차를 생가하게 되고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를 부모로 둔 학생 서로 간에 반발심. 투쟁심까지 불러일으키게 됨은 당연지사였다. 이 노래 덕에 지금까지 다정한 친구사이가 적이 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요즘 들어 각종 비리로 떠들썩하지만 어쨌거나 우리 농촌이 잘살게 된 토대가 된 것은 ‘새마을 운동’ 탓이 큼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다른 교사들이 아무리 지도해도 역시 가사를 변형시킨 ‘고향의 봄’을 부르면 ‘나무아미타불’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고향의 봄’을 학생들과 부를 때

“금년 마늘. 양파 농사는 어때요?”
“씨도 못 건졌지요?”
“배추 값은 어때요?”
“밭에서 썩어가고 있지요?”
“고향의 봄을 다같이 불러 봐요, 큰소리로.....” 이런 식이었다.
‘내가 사는 동네는 새마을동네
일본쌀과 미국 쌀 수입 등살에
마늘 양파 배추 값 똥금된 동네
그 속에 사는 농민 서럽습니다.‘

이러한 노래를 계속 반복해 부르는 가운데 순박한 학생들은 서서히 의식화 되어 갔다. 모든 일에 비판과 증오의 눈초리를 보내고 옳은 일도 거짓된 일로 부정 하였다. 박희영 교사가 당한 민원에 대한 조사조차 거부하고 불응한 것은 무척 불성실한 행위였다.

3. 벌때처럼 들고 일어난 재야단체

나는 밤이 늦어서야 교육위원회로 돌아왔다. K중학교 학부형대표와 지역주민대표들이 진정한 내용에 대해 국가공무원법 규정에 의거 징계의결 요구를 한 후 박희영 교사에게도 이를 통고했다.

그러자 이에 대해, 재야단체 일부와 관련교사들이 벌 떼 같이 들고 일어났다. ‘민주교육 탄압에 선진적으로 앞서가는 00교육위원회- XX교사회 신문’ ‘민주화선언 교사들에 대한 부당한 탄압 철회를 촉구함-천주교00교구’ 이에 힘입어 박희영 교사는 84년8월16일의 징계위원회에도 출석을 거부하고 소위 ‘양심선언’이란 것을 하였다. 박희영 선생은 XX교회 목사 이동영등을 찾아가 9명의 목사. 신부가 모인 자리에서 양심선언을 했던 것이다.

그녀는 거기서 교육위원회의 징계의결 요구는 부당한 처사로서 ‘민주교사’에 대한 탄압이라고 하였다. 나는 그 소식을 듣고 이동영 목사를 면담했다. 장재민 신부등 9명이 자리를 같이 했다. 박교사의 양심선언이 끝나 후였다. 나는 그들에게 교육위원회가 박교사에게 징계의결을 요구한 것에 대하여 자세한 설명을 시작하였다. “박희영 교사에게 징계의결을 요구한 것은 사실입니다. K중학교 학부형과 지역주민대표 등의 진정에 따라 교육위원회와 K중학교 교장의 사전조사 내용을 근거로 그들을 만나 진술을 들으면서 사실을 확인 후 징계의결 요구를 했습니다.

또 직접 진정내용을 확인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확인조사에 앞서 박교사를 먼저 만나 면담을 하고 진술을 요청했습니다. 같은 교원으로서 솔직한 마음은 아니기를 바라고 바랐습니다. 박교사는 본인의 정당한 조사에 대해 ‘탄압,강요’란 말을 서슴없이 하며 ‘일고의 가치조차 없다’고 거부했습니다.”

나의 설명은 계속 되었다.

“박교사 말대로 내가 무슨 조사를 했어야 내가 그녀에게 위협하고 탄압을 했다고 할 수도 있지 아니한가요? 박교사는 자기 자신이 정당하다고 한다면 징계위원회에 출석하여 진정내용에 대한 사실 여부를 진술하고 밝혀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징계위원회는 오늘 11시에 있습니다. 저는 박교사의 참석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께서도 박교사를 진정으로 위한다면 이 일에 협조를 부탁합니다. 이것은 제 솔직한 심정입니다.”

그들은 말없이 듣고 있었다.

징계위원회는 예정대로 개최되었다. 그러나 박교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얼마 뒤로 연기해 놓았다. 그때 박교사의 부친이 교육위원회를 방문하였기에 면담 후 협조를 간곡히 요청했지만 그다음의 징계위원회에도 역시 박교사는 출석을 한지 않았다.

‘박희영 교사의 징계의결 요구를 즉각 철회하라. 민주교사. 민주교육 운동에 대한 탄압을 즉각 중단하라. 담당자 김세현을 즉각 파면하라.’ ‘K중학교 박희영 교사에 대한 당국의 탄압과 민주화선언 교사에 대한 일체의 탄압을 즉각 중지할 것을 촉구한다. 우리는 교육자의 양심에 따라 행한 교사들의 교육민주화 선언을 전폭 지지하면서 민주교육에 헌신하는 교사들의 제반 활동에 아낌없는 성원을 보낸다.’

수없이 많은 유인물들이 온 거리에 돌고 돌았다. 그러던 중, 이동영 목사, 장재민 신부등 6명이 예고없이 나를 찾아왔다. 그들은 무조건 박교사의 징계철회를 요구하였다.

나는 그 자리에서 “교사는 직근감독자의 명령. 지시에 따르고 지역사회의 특성에 적응해야 하며 직근감독자와의 대화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박교사로 하여금 대화에 응하도록 협조하여 주도록 다시 부탁 말씀드리겠습니다.”

교육감께서도 ‘박교사가 그의 잘못을 뉘우치고 관심을 보인다면 징계의결 요구를 철회할 용의가 있습니다.’라고 까지 말씀하셨다. 이동영 목사등은 협조하겠다고 약속하고 돌아갔다. 징계위원회를 3차까지 연기하고 박교사의 출석,진술을 요구했다. 박교사의 진술을 끝까지 기대했다. 박교사가 징계위원회에 참석, 사실을 밝히고 잘못을 뉘우치면 정상을 참작하여 관용할 뜻을 직접 박교사와 그의 가족에게 알렸다. 박교사 부친에게도 수차 박교사의 태도 여하에 따라 관용할 뜻을 밝혔고, 박교사에게도 그런 뜻을 계속 전했다.

그러나 박교사는 계속 징계위원회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무조건 징계철회를 주장하였다. 끝내 징계위원회 출석. 진술은 거부되고 말았다. 박희영 교사는 XX교회에서 또다시 양심선언을 한다고 곳곳에 유인물과 안내장이 살포되었다. 나는 다시 이동영 목사를 찾아가 징계위원회를 열려는 경위를 자세히 설명하였다.

이목사는 한 시간 이상 그내용을 진지하게 들었다. 그리고 그 뜻을 이해하는 것 같았다. 이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학부형, 학생들이 박교사의 민주화선언 관련보다도 교사로서 비도덕적이며 비윤리적인 행위에 분노 그에 대한 징계의결을 요구했다면 박희영 교사의 양심선언을 무기연기한다.“ 실제로 박교사의 양심선언은 무기연기 되고 말았다.

4. 밤낮없이 울려대는 협박과 위협의 전화

박희영 교사는 84년8월22일~8월29일까지 병가원을 제출하고 서울에 있었다. 그녀는 그때를 이용하여 서울 명동성당 사도회관에서 ‘징계의결 요구서에 대한 반박문’과 ‘교육민주화를 염원한다’는 양심선언을 또 하였다. 그러나 그 내용은 대부분 사실을 왜곡한 것이었으며 박교사의 일방적인 주장이었다. 박희영 교사는 학교에 병가원을 제출하고 서울로 올라가 계획적으로 양심선언을 하였다. 중병에 걸린 환자로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조용히 정양해야 할 사람이 그런 자리를 만들어서 목청을 돋우는 것은 죽음을 재촉하는 행위였다.

박교사의 병명을 모를리 없는 주위 사람들이 그의 반박문과 양심선언서를 듣고 박수를 보내야 했는가? 나도 딸을 가진 사람으로 참으로 가엾고 측은한 일이었다. 교육위원회와 내가 박교사의 병명을 진작 알지 못했던 것이 못내 안타깝고 비감했다.

아무리 입장의 차이가 나는 하늘과 땅이라도 대화로 풀지 못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나라와 나라 사이, 정당과 정당 사이의 도무지 풀리지 않을 것 같은 어려운 문제도 일단 서로 얼굴을 맞대고 자리에 앉아 씨름을 하다보면 의외로 쉽사리 해결방안이 나오곤 하는 것을 우리는 수없이 보아오지 않았던가!

하물며 이 조그만 땅, 조그만 지역에서 일어난 이 일이 안 풀릴 이유가 어디에 있어, 서로가 원수마냥 갈등의 골만 패어가야 하는지........ 인생의 선배로서 몹시도 아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박교사의 건강상태를 알고난 후 나는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하루 빨리 내가 한 발 성큼 물러나더라도 이 일을 좋게 마무리 짓고 싶은 마음 간절했다. 그러나 그것은 내 마음일 뿐 박교사는 끝내 극한으로 내달릴 작정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언급할 만한 가치도 없는 사소한 내용으로 본인을 징계위원회에 회부한 것은 그러한 것들이 실제로 사회에 물의를 일으켜서라기보다는 본인이 평소 가지고 있던 교육관이나 그것에 입각한 교과운영 및 학생지도가 교육행정의 민주성을 상당히 결여하고 있는 교육위원회나 학교당국이 자기들의 구미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교사의 자율권을 확보하려고 노력하는 교사들에 대해 가하는 탄압이라고 밖에 해석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는 앞으로 교사들의 교권과 자율성을 앞장서서 보호해줄 의무가 있는 교육위원회를 비롯한 교육행정 당국이 징계를 남용하여 자율적이고 창조적으로 교육의 민주화를 실천하고자 하는 많은 교사들에게 신성한 교권을 침해하는 불행한 사례가 더 이상 계속되지 않기를 바란다.‘

(징계의결요구서에 대한 반박문 중)

‘84년 8월 18일, 교육위원회로부터 교사로선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해임을 요구하는 징계의결 요구서를 받고 저는 개인적으로 심각한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으며 지금까지 스스로 동료교사나 학생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려고 노력해왔던 행동에 내려진 부정적 평가에 대해 양심을 갖고 입장을 밝히려 한다.

- 중략 -

교육자적 양심에 입각하여 다음의 사항을 천명하는 바이다.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 보장. 교권확립. 징계철회. 보충수업. 자율학습 폐지. 교육 자치제 조속시행 등은 순수한 교육자적 양심에 의한 최소한의 요구이므로 어떤 다른 명목으로도 이 내용을 왜곡하거나 부정 할 수 없으며, 또한 본인에게 내려진 어떤 징계라도 철회되지 않으면 그런 것이 시정될 때까지 부단히 싸워나갈 것을 밝히는 바이다.‘

(교육의 민주화를 바라는 나의 양심선언 중)

서울에서 박교사가 이런 양심선언 등을 하고 있는 동안 K중학교 부근과 거리 곳곳에는 각종 유인물이 뿌려졌다. 유인물을 주워 본 각급학교의 교사, 학생, 학부형들은 교육위원회에 전화를 해왔다. 그들은 사실이 어떤지에 대해 매우 궁금해했다. 사실대로 얘기하였다.

박교사가 정당한 행위를 했고, 잘못이 없다면 마땅히 징계위원회에 출석을 해서 사실을 밝히는 것이 옳은 일로 그들은 이해를 했다. 박교사는 득보다 손실이 더 컸다. 스스로 잘못을 알린 것이 되고 말았다. 관련교사들은 학부형, 지역주민, 그 밖의 사람들이 의외로 쉽게 동조를 않자 내게 협박을 하기 시작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협박과 위협을 대동한 전화가 울려댔다. 학부형, 교사, 학생을 자칭한 신원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이 한밤중에도 전화를 걸어 다짜고짜로 욕부터 해대기 일수였다.

"민주교사를 탄압하는 이유를 밝혀라.“

“박교사의 징계의결 요구를 철회하지 않으면 보복하겠다. XX새끼 죽여 버리겠다.”

가족들은 전화 공포증으로 사색이 된지 오래였다. 애비로서 자식들 앞에 면목이 없었다.

그들은 숙직을 하고 있는 밤에도 전화를 하였다. 함께 숙직하던 동료가 내게 온 협박전화를 잘못 받고 난 후 밤새도록 잠을 못 자며 분개한 일도 있었다. 이것이 ‘교육민주화’를 한다는 사람들이 할 도리인가부터 묻고 싶다. 협박전화를 받고나면 혈압이 오르고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전화기 코드를 빼놓고 잠을 청해야 했다. 온갖 협박을 참고 감수했다. 다만 하늘은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고 진실이 언젠가 밝혀질 것을 나는 조용히 기도했다. 대중선동과 협박은 일반대중을 일시적으로 기만할는지 모르지만 오래 지속은 못한다. ‘선과 악’은 하느님만이 심판할 것임을 나는 확신하고 자위했다.


5. 학부형과 학생들이 등 돌린 교사

박교사의 유인물은 계속 살포되었다. 교회. 학교. 장터........교사와 학교 고용인들의 책상 속에도 직접 유인물을 배포하였다. 그 사실을 알고 학부형과 교사들은 더욱 박교사를 비난하고 용서하지 못하였다. 학생들도 박교사를 불신하고 수업을 거부했다. 박교사의 ‘징계의결 요구에 대한 반박셩명서’와 ‘양심선언서’는 자신들이 실제로 보고 느꼈던 사실과 많이 다른 것을 보고 분개를 한 것이다.

교직원 일동과 학생들은 학교장에게 박희영 교사의 인사조치를 연명으로 건의하였다. 교사들은 박희영 교사의 수업을 거부했다. 박교사의 인사조치를 강력히 요구했다. 교육현장에서 교사가 가장 신뢰하고 또한 두려워해야할 대상은 학생들이다. 학부형이 아닌 지역주민들의 여론도 참고를 해야 하지만 학생들의 진실은 스쳐 지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국민의 신망을 얻지 못하는 지도자가 국민의 등 돌림에 역사 앞에 심판을 받듯 제자가 원하지 않는 교사는 설 땅이 없는 것이다.

교육위원회 관계자들과 학교장 등이 이런 밑으로부터의 자발적인 요구에 의한 진실을 박교사에게 계속 주지시키며 새로운 각오로 교직에 충실할 것을 기대하였지만 ‘개전의 정’이 전혀 없었다. 그 과정에서 서로 마음고생이 심하였다. 한참 자라는 나이의 아직 ‘생각 미숙아’들에게 외곬수의 사상주입, 현실부정, 빈부간에 적대감 조성 등 한쪽방향의 의식화 교육이 진정 바람직한 것인가를 나는 의문이 아닐 수 없다. 그 나이야말로 아무런 편견 없이 여러 주장과 생각들을 공부하며 다양하고 폭넓은 시야로 가치와 생각들을 각각 흡수해 나가야 할 때가 아닌가?

급히 많이 먹는 음식이 체하듯 소화시킬 능력조차 아직 준비되어 있지 않은 아이들에게 의식화교육은 절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내 나이와 입장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설익은 사과를 따서 무엇에 쓸 것인가? 중학교 과정의 교육은 빨갛게 잘 익은 사과를 열매 맺게 하기 위한 ‘돌봄과 가꿈’의 단계가 적절한 것이다. 비료도 아무 때나 주는 것이 아니며 물도 너무 많이 주면 뿌리가 썩는다. 사랑과 정성을 지니고 순리대로 알맞게 나무를 돌봐나갈 때 마침내 그 나무에는 탐스런 사과가 주렁주렁 열리리라.

6. 학생들은 편견 없이 배울 권리가 있다

계속적인 설득과 간곡한 요청에도 박희영 교사는 전혀 뉘우치는 빛이 보이지 않자 교육위원회는 박교사의 징계해임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84년9월에는 해임처분 인사발령을 내렸다. 그러자 박희영 교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밤낮 양심선언을 하였는데 그럴수록 진실을 알고 있는 순박한 학부형과 학생, 동료교사들은 어이없어 했다. 나에 대한 모함과 악성루머도 유인물로 작성되어 거리 곳곳에 나돌고 있었다.

하루는 B중학2학년에 다니는 딸과 B초등학교 4학년에 다니는 아들아이가 학교에서 울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학교에 살포된 박희영 교사의 유인물을 보고 친구들이 쑥덕대자 충격을 받은 것이었다. 아이들은 학교에 다니기를 두려워했다. 다정했던 친구들이 등을 돌리고 수군거리는데 정말 학교가기가 지옥에 가는 것 같다고 눈물을 펑펑 흘렸다.

내가 억지소리를 듣고 모함을 받는 것은 다 참을 수 있어도 아이들까지 그렇다고 하니 억장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언젠가는 아이들도 내 마음을 이해하겠지.......죄스럽고 안타까운 마음을 속으로만 담아두자니 더욱 괴로웠다. 아이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이 아이들을 위해서도 시시비비는 분명히 밝혀야 한다는 생각을 굳혔다.

6.25전쟁으로 가난했지만 다복했던 가정을 졸지에 잃고 나머지 가족들을 다독이며 꿋꿋하게 살아온 한평생, 그들의 잔학성을 바로 내 피부로 경험했기에 나는 북한공산집단과 그에 동조하는 좌경세력들에 절대 타협할 수 없었다. 관련교사들과 입장이 달라 자칫 ‘탄압하는 주체’로 보일지 모르는 핸디캡에도 불구, 한평생 소신껏 꼿꼿이 교육의 길에 전념해 온 나의 생각에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고개 끄덕여 줌이 힘이 되었다.

박희영 교사에 대한 관련교사들의 유인물이 쏟아질 때마다 많은 교사와 학부형. 학생들이 내게 격려를 아끼지 아니했다. 편지를 보내고 전화를 하고 위로를 잊지 않았다.

교육위원회가 만일 학부형과 학생들이 존경하고 따르는 교사를 이유 없이 탄압하고 거짓을 유포하고 계획적으로 징계의결 요구를 하였다면 지역주민. 학부형. 학생 등 수많은 사람들이 과연 그의 처벌을 요구하겠는가? 그들은 박교사의 파면을 요구하기에 앞서 나를 용서 못할 일이었다. 그들이 잘 알지도 못하는 교육위원회의 말을 믿고 등을 돌리는 어리석은 사람들인가? 또 박교사는 징계가 부당했다면 법에 의해 행정소송을 해야했을 것이다. 그러나 박교사는 교육위원회의 거듭된 설득과 관용을 스스로 포기, 징계위원회에서 진술할 권리를 갖지 못했다. 박교사를 위해 안타까운 일이었다.

교회와 성당들을 찾아다니고 목사와 신부를 만나서 무슨 일을 하겠다는 것인가? 꽹과리는 울렸지만 춤추는 자가 없었음에 그녀는 끝내 아쉬워했을 것이다.

관련교사들은 그들이 발행한 유인물에서 ‘박희영 선생님의 몸은 이미 그해 봄부터 이상이 생기기 시작했으나 박선생님은 이를 내색치 않으시고 교육의 민주화와 자신의 교단을 지키기 위해 초인적으로 버티셨습니다. 몸을 위해 쉬어야 한다는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교육민주화를 위해 동분서주하시다가 쓰러지셨습니다. (중략)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 속에서 박선생님의 병환은 자꾸 악화되어 서울의 큰 병원들을 옯겨다녔으나 효과를 보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오시어 치료를 하다가 주위 교사들과 학생들의 기도와 염려를 뒤로 한 채 떠나셨습니다‘ 라고 기록하고 있었다. 나는 스스로를 반성했다. 박희영 교사가 징계위원회를 부정하고 무조건 징계철회를 요구해도 어쨌든 박교사를 계속 설득하고 순화 지도를 했어야 했는데...... 안타깝다.

박교사가 학생과 학부형들의 바람대로 한 발 뒤로 물러서서 웃는 낯으로 다시 교단에 설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교육계 선배로서 너무 서둘러 빵틀에 빵을 구우려 한 그에게 나는 좀더 자상하게 여러 경험담을 들려주지 못했을까 싶어 무척 마음이 상한다.

밥을 지을 때도 뜸 들이는 시간이 필요한데, 설익은 밥을 아이들에게 퍼주는 것이 과연 바람직했을까? 중학교 아이들에게는 그 나이에 맞는 교육이 제격일 테다. 아이들은 강요하지 않아도 커가면서 저절로 배워가는 것 아니가. 교사가 편견을 심어줄 이유는 아무데도 없다. 그러나 이제와서 위암으로 저세상 사람이 된 박교사에게 무슨 말을 하겠는가? 박교사의 넋을 위로하고 명복을 비는 마음 간절하다.


혁신학교? 혁신은 개뿔! 애들 학력만 퇴행중! 교무실 커피자판기, 교사 항공권 구입에 물 쓰듯...특혜 불구 학력은 뒷걸음 일반학교에 비해 연간 1억4,000~1억5,000만원을 특별히 지원받는 서울형 혁신학교가 예산을 엉뚱한 곳에 쓰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특별예산(학교운영비)으로 교사실의 각종 책장이나 가구를 구입했고, 수백만원을 들여 학습자료 저장용 USB와 외장하드를 사서 나눠 갖은 사실도 밝혀졌다. 교무실 커피자판기를 구입하는데 특별예산을 쓴 혁신학교도 있었다. 이밖에도 여직원 휴게실 가스보일러 교체, 부장교사 워크숍 항공권 구입, 교직원 전체 체육복 구입 등 본래 목적과는 거리가 먼 곳에 특별예산을 물 쓰듯 전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학생들에 대한 선심성 예산 집행 정황도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학생 티셔츠 구입, 진공청소기 구입 등에 특별예산을 수백만원씩 사용했다. 학생들의 생일축하용 떡케익 구입비용으로 매달 70~90만원을 사용한 곳도 있었다. 반면 서울형 혁신학교의 학력은 일반학교에 비해 오히려 뒷걸음질 친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내용은 서울시교육청이 새누리당 강은희 의원에게 제출한 2012년 혁신학교 정산서 통합지출부를 통해 밝혀졌다. 서울형 혁신학교는 곽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