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산악영웅 박영석을 기리다 한승조(대불총 상임고문) 한국의 대표적인 산악인 박영석이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봉을 내려오다가 눈사태인지 돌사태인지를 맞아 그의 동료 산악인 동행자인 신동민과 강기석 대원과 함께 행방불명으로 영원한 不歸(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박영석 산악원정대 대장은 히말라야 8,000m급 14좌를 6개월 안에 등정하여 세계 최단기간의 기록을 세운 사람이다. 뿐만 아니라 7대륙 최고봉인 남북극을 등정하는데도 성공하여 세계에서 첫 산악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던 산악인임을 부인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안나푸르나에 다시 새로운 등산 루트를 개발하겠다고 나섰다가 비극적인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던 것이다. 나는 산악인도 아니며 바위타기 등 위험한 등반을 해본 경험이 없는 완전 아마추어이다. 다만 산을 좋아하고 특히 高山(고산)을 숭배하는 성향을 가짐으로 인하여 세계의 高山을 등정하고자 나서는 산악인들에 대해서는 畏敬(외경)과 羨望(선망)의 마음을 가져 왔다. 그러니 한국의 등반영웅 박영석씨의 죽음을 소 닭 보듯이 지나칠 수가 없어서 여기에 글을 써서 남기려는 것이다. 박영석 대장은 기왕에 그만한 偉業(위업)을 이룩했으면 그만 만족하여 더 할 필요도 없었을 터인데 왜 다시 고생스러운 冒險(모험)을 하다가 48세라는 젊은 나이에 저승으로 떠나 버린 것일까? 여러 가지 생각이 나의 머릿속을 바쁘게 드나든다만 박영석씨와 나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이다. 다만 그가 한국이 낳은 偉人(위인)이며 英雄(영웅)의 한 사람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다보니 그냥 스쳐 지나갈 수가 없는 것이다. 박영석은 누구인가? 박영석은 한국의 유명한 산악인 중의 한 사람으로 히말라야의 안나푸르나 봉우리를 등정하고 하산하다가 그의 대원들과 함께 불행하게도 事故死(사고사)로 그의 생을 마감했다. 박영석은 험준하기로 이름이 난 히말라야의 14좌를 세계최단기간인 6개월 안에 登頂하였을 뿐만 아니라 남극과 북극의 극정을 정복함으로써 先人未踏의 기록을 남겼다는 점에서 한국이 낳은 세계최고의 산악인이라는 영예를 차지했던 인물이다. 그렇더라도 박영석의 죽음에 대하여 그의 과도의 명예욕과 등정의 無謀(무모)함에 대하여 그를 아끼는 사람들의 비판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산악인들이 남다른 성취욕을 갖는 것은 무조건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보다 큰 성취감에 대한 갈증도 度를 넘으면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야망과 정열도 中庸(중용)의 선을 넘지 말아야 했다는 아쉬움을 말하는 사람도 있음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이와 비슷한 소견을 조선일보의 최보식 기자의 칼럼에도 볼 수가 있었다. 박영석은 등산밖에 모르기에 거기에 미쳐버린 사람이 아니냐? 박영석은 보다 많은 취미, 보다 넓은 인생의 시각과 지혜를 가졌어야 했는데 너무 일찍 외골수로 山岳(산악) 스포츠에 빠져든 것이 그의 불행이었다는 비판도 없는 것이 아니다. 최보식의 칼럼에서 “… 박영석은 … 소위 산악 그랜드슬램도 달성했다. 산악인으로서 이 보다 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그런 뒤에도 베링해협 도보횡단, 태양전기차로 남북횡단을 시도했다. 에베레스트 남서벽 등반에서는 그가 아낀 후배 산악인들이 숨졌으나 멈추지 않았다. 마흔 중반을 넘기면서 체력이 떨어졌음을 스스로 느끼면서도 매달렸다. 그의 기록이 아니라 그의 존재를 진정 아꼈던 선배들은 ‘영석아, 이제 그만 됐다’며 눈물을 뿌렸다.” 그는 멈출 수 없는 이유에 대해 말했다. “그만 하라는 말은 마치 내 삶을, 내 인생을 멈추라는 얘기로 들려요. 뭔가 이루려면 꽉 찬 느낌이 있어야 만족하는데,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느낌이 들 때마다 허탈한 것 같아요.” “… 성취할 때마다 다음 도전의 강도는 높아진다. 이전보다 더 극적이어야 한다.” 이는 자기도 모르게 죽음과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짐을 뜻한다. 그렇게 해서 그는 무엇을 추구하는 것일까? … 그는 끝없는 등반을 통해 더 큰 욕망을 이루려고 했다는 점에서 어리석은 순수함이 있었다. “히말라야 정상으로 올라갈 수 있는 길은 몇 가닥일 뿐입니다. 신이 허락해 주는 시간에만 우리는 잠깐 올라갔다 내려오죠. 전율이 돋습니다. … 제가 TV에 잘 안 나가고 사람들 모이는 자리에서 강연이라고 떠드는 걸 싫어하는 것은 神에 대한 겸손입니다. 숱한 원정에서 후배들을 죽이고 신이 살려줘 여기까지 왔는데 그런 걸 팔아먹겠습니까.” 최보식 기자는 박영석과 형제와 같이 가까운 사이였기에 박영석을 아끼는 마음에서 위와 같은 비판을 했던 것 같다. (조선일보, 2011.10.26.일자. 칼럼 “박영석 대장을 이해하는 법”에서 인용) 동아일보의 보도(10.31일자 기사) 다음은 동아일보 이원홍 기자의 보도를 발췌 인용하겠다.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8850m)로 가는 길 언덕엔 산악인 박영석 대장이 새긴 비석이 서 있다. 그가 1993년 5월 16일 에베레스트 남서벽에 도전했다가 후배 두 명을 잃고 세운 비석이다. 그는 2007년 같은 장소에 도전했다가 오희준 이현조 대원 두 명을 더 잃었다. 공교롭게도 똑같은 5월 16일 사고를 당했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2009년 마침내 에베레스트 남서벽에 올라 4명의 사진을 꺼낸 뒤 “고맙다”며 울었다. 2005년 최초로 지구상의 3극점인 에베레스트・남극・북극과 히말라야 8000m급14좌, 7대륙 최고봉을 모두 오르는 ‘산악그랜드슬램’을 달성한 그였지만 대기록을 세운 뒤에도 마음의 빚이 있었다. 후배 4인의 목숨을 앗아간 에베레스트 서벽이었다. 다리근육이 파열된 채로 올랐다. 새 길을 뚫었다. <코리안 루트>란 이름을 붙였다. 히말라야 14좌에 모두 코리안 루트를 만들려 했다. 그의 남은 인생 최대 프로젝트였다. 극한의 지역에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개척해 한국인의 도전정신을 영원히 기록하는 것이 목표였다. 이원홍 기자의 글에서 부상과 오뚝이: 박영석은 1991년 에베레스트 남서벽에서 100m를 굴러 얼굴뼈가 보일 정도로 다쳤다. 마취도 하지 않은 채 꿰매고 돌아왔다. 1996년에는 700m를 추락했다. 갈비뼈 두 대가 부러졌다. 함께 간 세루파는 목숨을 잃었다. 부러진 뼈를 스스로 맞추고 돌아온 적도 있었다. 동료들의 희생과 방황: 그는 길에서 여러 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늘 후배들이 기꺼이 동참했다. 환청에도 시달렸다. “그러나 나는 쉴 수가 없다”고 말했다. “걔네들 몫까지 살아야 한다”고 했다. 산으로 간 이유: 대답은 “산에 가면 마음이 편하다”였다. 한편으로는 한민족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산에 가서 가장 지독한 근성을 보이는 것은 언제나 한국산악대였다.”며 “대단한 민족, 악바리 민족”이라고 했다. 전 세계에 <코리안 루트>를 내려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경제문제와 가족생활: 등반 때문에 신혼예물을 팔기도 했다. 결혼 8년 만에 첫 월급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전세금을 빼서 나선 적도 많았다. (동아일보, 2011.10.31일자) 그는 그렇게 山이 되었다(소설가 박범신의 글) 소설가 박범신은 평소 박영석과 친근했던 사이였다. 그 역시 조선일보 10월 31일자 1면에 “그는 그렇게 山이 되었다”는 제하에 글을 기고했다. 그 표제만 보아서는 그 소설가는 박영석을, 죽어서 山神이나 된 듯이 다루려는 말투였다. 박영석이 죽어서 山이 되었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고자 함인가? 그 큰 제하에 다음과 같은 글이 이어진다. 간밤에 꿈을 꾸었다. 잠에서 깨었을 때 박영석이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너털웃음을 웃고 있는 이미지가 내 눈앞에 남아 있었다. 작년 이맘 때던가 남극탐험을 얼마 앞두고 재동 한 음식점에서 만났을 때 술잔을 기울이던 모습 그대로였다. 나는 이제 세계적인 산악인으로 성공했으니 안락한 생활을 할 때도 되지 않느냐고, 왜 또 그런 험한 길을 굳이 가려하느냐 이렇게 반박하기 이를 데 없는 질문을 했다. “이렇게 살아 있잖아요!” 박영석은 거두절미 자신의 가슴을 주먹 쥔 손으로 탁 두들기며 응답을 하더라는 것이다. “그와 신동민・강대석 대원을 위한 위령제를 지냈다는 뉴스가 들리지만 나는 믿지 않는다. … 산악소설 ‘졸라체’에서 나는 이렇게 쓴 바 있다. ‘죽고자 가는 게 아니다. 살아 돌아올 수 있는 길이기 때문에 가는 것이다.’ … 올해로 꽉 찬 마흔여덟살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언제나 새로운, 더 위험한 길을 향해 담대하게 떠났다” “이미 그의 발밑에 깔린 히말라야 14좌에다 새로운 <코리안 루트>를 내겠다는 꿈은 그의 꿈이었을 뿐아니라 우리 모두의 꿈이었다. ‘내가 시작하면 누군가 계속 가지 않겠나. 숨 쉴 수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나는 계속 갈 것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는 말하자면 누군가의 지도가 되기 위해 이미 偉大한 頂上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그 새로운 길을 간 것이다… 그러니 그들이 우리 곁으로 돌아오지 않겠는가.” “박 대장은 평소 ‘바보처럼 살았군요’를 자주 불렀다. 도전밖에 모르던 ‘아름다운 바보’는 그렇게 ‘풍요의 女神인’ 안나푸르나의 품에 영원히 안겼다.” (조선일보. 10.31일자 A2면, “사고 닷새 전, 산속 마지막 생일잔치. 박 대장은 속삭였다. 황홀해” 에서) 맺음말 신문보도의 인용은 이만 줄여야겠다. 박영석과 관련된 위의 신문기사를 읽으면서 박영석이란 사람은 登山에 아주 미쳐버린 사람임을 알 수가 있었다. 여기에 박영석의 偉大함이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박영석은 인간 능력의 한계에 도전하기 위하여 자신을 버린 사람이다. 그리고 모든 다른 가치를 포기하고 희생의 제물로 자신을 바친 사람이다. 천재나 영웅은 결코 평범한 사람들 일 수가 없다. 다만 보통 사람의 눈에는 보통이 아닌 미친 사람들처럼 보였을 뿐이다. 미친 사람들 하면 보통 이하의 인간도 있고 보통 이상의 인간들도 있다. 보통 이하의 인간은 인격파탄자들이며 인간 사회에서 제외되며 격리되어야 할 사람들이다. 그러나 보통 이상의 인물들은 천재나 영웅들이며 자신을 희생하여 인류사회에 큰 이익과 혜택을 가져다주는 사람들이다. 말하자면 고등인간의 수준을 넘어서서 神位로 접근한 사람들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박영석은 한국의 대표적 산악인이다. 산악등반은 요즘처럼 스포츠 활동으로 본다면 그는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스포츠 영웅으로 존대받아야 한다. 박영석은 개인적으로 오랫동안 몸고생 마음고생을 남들보다도 훨씬 많이 했다. 이 세상에 대단한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는 되지만 그 공로를 자랑하여 세상의 대접과 명예 또는 혜택을 알차게 우려먹으려고 드는 사람들과 비교해 볼 때, 우리는 박영석의 순박한 인간성을 더욱 사랑하게 되는 것 같다. 박영석은 자신의 성취를 코에 걸고 뻐겨보려는 마음 없이 오로지 자기보다 먼저 간 후배들을 미안해하며 빚에 쫓기듯이 살다가 생을 마쳤으니 우리는 그의 일생에 더 아쉬움을 느끼는 것이다. 우리는 그를 대한민국 國威를 크게 선양한 위인으로서 응분의 경의와 대접을 해야겠다. 그러면서 그 인간성의 사랑스러움을 마음속에 간직하면서 山神으로 격상해도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가져 보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