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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뉴스

10.26 전두환의 등장

최규하 내각은 그누구도 대통령서거 이유를 묻지 않았다.

보안사가 시해소식을 들은 것은 시해현장에서 총소리가 멎은 지 40분 후, 오후 8시20분이었다. 김계원이 시신을 싣고 국군서울지구병원에 도착한 시각은 7:55분, 병원을 가려면 보안사 정문을 통과해야 했다. 당직총사령 이상연 대령이 군의관에 전화를 걸었지만 중앙정보부 요원이 밀착감시를 하기 때문에 군의관의 대답이 엉거주춤했다.“코드원(대통령)이냐, 위독하시냐” 했더니 군의관은 “예”라고만 대답했다.

이런 보고를 받은 전두환은 청와대 경호실에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경호실장은 물론 차장과도 통화를 하지 못했다. 그 다음의 보고가 전두환에게 들어왔다. “노재현 장관이 보안사령관을 찾고 있습니다. 정승화 총장이 각군 수뇌부를 B-2방카로 소집하고 있습니다.”

오후 9:00시, 전두환이 B-2 방카에 도착했다. 이 때 김계원과 최규하는 청와대에 있었고, 정승화 총장이 혼자서 독자적으로 상황을 처리하고 있었다. 벙커에는 노재현, 김재규 그리고 군 수뇌들이 있었다. 전두환이 노재현에게 “대통령에 무슨 일이 있습니까?”하고 묻자 노재현은 “대통령이 서거했다. 자세한 건 모른다”고 일러주었다. 전두환이 대통령 서거 사실을 처음으로 확인한 시점이 바로 밤 9:00시 경이었다. 이때부터 전두환은 발 빠르게 육군본부 보안대 사무실에 임시 지휘본부를 차리고 사태 파악에 나섰다. 반면 국무총리인 최규하와 육군참모총장인 정승화는 김재규가 실세인 줄로 착각하면서 범인을 숨기고 있었고, 신현확 부총리를 포함한 모든 장관들은 범인이 누구냐고 다그치지 않으면서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11:40, 김계원으로부터 범인이 김재규라는 것을 전해들은 노재현은 전두환을 불러 “정승화의 지침을 받아 김재규를 체포하라”고 지시했다.

이보다 먼저 노재현으로부터 김재규 체포지시를 받은 정승화는 헌병감 김진기 준장을 불렀다. 김재규가 시해범이라는 사실은 알려주지 않고 무조건 김재규를 연행하여 보안사 안가에 정중히 모시라고만 했다. 1980.3.7. 정승화내란방조사건 제2차 공판에서 김진기는 이렇게 진술했다,

"11:40-50분경, 총장으로부터 체포지시를 받았다. 이유는 모르고 그냥 "잡아오라"고 했다. 무슨 일이 있구나 생각은 했지만 각하에게 이상이 있는 줄은 몰랐다. 체포해서 보안사령관에게 인계하라고 했다. 헌병 10명에 무장을 지시했다. ‘정중히 대하라’는 정승화의 지시는 난폭하게 대하지 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노재현으로부터 김재규를 체포하라는 지시를 받은 전두환은 육본 총장실로 가서 정승화를 만났다. 정승화는 체포지침을 내리지도 않았고, 사태의 경위를 알려주지도 않았으며, 조사하라는 지침도 내리지 않았다. 단지 이렇게 말했다. “국방장관실에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있다. 헌병이 체포하면 인계받아 보안사 안가에 정중히 모셔라.”국방장관으로부터 받은 지시내용과 정승화 총장으로부터 받은 지시내용이 전혀 달랐다. 전두환은 노재현 국방장관으로부터 두 가지 말을 들었다. “각하가 서거했다” “김재규를 체포하라” 그리고 정승화로부터는 “국방장관실에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있다. 헌병이 체포하면 인계받아 보안사 안가에 정중히 모셔라.” 사태를 어느 정도 눈치 챈 전두환은 육군본부 보안대장실 오일랑 대령에게 명령을 내렸다. “국방장관실에 김재규가 있다. 육군총장이 찾는다는 구실로 유인하여 보안사 안가로 연행하라.”

안가에 유인된 김재규는 제1성을 이렇게 냈다. “이제 세상이 바뀌었다. 나에게 협력하라.”

수사관들은 김재규의 언행으로부터 김재규가 대통령 시해범이라는 확신을 얻었고, 이는 즉시 전두환에게 보고됐다. 전두환은 정승화에게 “대통령 시해범은 김재규입니다. 구속해야 합니다”라며 압박했다. 정승화는 더 이상 저항할 명분이 없었다. 시해 된지 6시간 후인 10.27. 01:30분에 비로소 김재규가 구속된 것이다. 대통령이 갑자기 서거했다고 하는데도 최규하를 포함한 수많은 국무위원들 중 그 누구도 “사고의 진상부터 파악해야 할 것 아니냐?”는 발언을 하지 않고 눈치만 살피다가 밤 11시30분부터 국방부 회의실에서 비상국무회를 열었다. 그 결과 10.27.04:00시를 기하여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정승화 육군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최규하 권한 대행은 특별담화문을 발표하여 대통령 서거 사실을 공표했다. 비상계엄이 선포되면서 계엄공고 제5호에 의해 계엄사 내에 합동수사본부가 설치됐다.

만일 정승화가 시해사건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국무회의는 정승화를 계엄사령관으로 결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비상 국무회의가 열리고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정승화 육군 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임명하는 동안, 시해사실을 알고 있는 최규하, 김계원, 노재현, 정승화는 대통령이 어떻게 해서 서거했는지, 그 이유에 대해 알려주지도 않았고, 그 자리에 있는 국무위원들 누구도 더 이상 따지려 하지 않았다. 국무회의가 끝날 때까지 유고의 내용은 밝혀지지 않았던 것이다.

대통령이 서거하였으면 국무회의는 단연 청와대에서 최규하 총리에 의해 열렸어야 했고,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김계원으로부터 전해 들어 알고 있는 최규하 국무총리는 경호실에 명령을 내려 대통령 시해의 현장부터 확보하라는 지시를 내렸어야 했다. 그러나 최규하는 김재규가 유도하는 대로 국무회의를 국방부에 가서 열었다. 이에 더해 최규하는 회의도중 빠져나가 궁금해 할 김재규에게 국무회의 결과를 알려주는 등 극도의 기회주의적 행동을 보였다.

정승화는“김재규를 체포하라”는 노재현 국방장관의 명령도 이행하지 않으면서 김재규를 감쌌다. 최규하 총리와 국무위원들 중에 진상을 밝히자고 물고 늘어지는 사람도 없었다. 모두 다 기회주의적 허수아비들이었다. 체포 직전까지의 사태는 정승화, 김계원, 김재규가 주도했다. 최규하 내각은 무기력했고, 국가는 무주공산이 되었다. 그래서 먼저 점령하는 세력이 임자로 보였다. 김재규가 이끄는 중앙정보부, 김계원이 이끄는 청와대, 정승화가 이끄는 60만 육군이 단합했던 당시의 상황은 누가 봐도 막강했다. 이런 힘이면 역모를 할 만한 세력이었다. 이 엄청난 세력이 그 힘을 발동하려 기지개를 펴는 순간, 2성 장군에 불과한 전두환이 재빠르게 선수를 쳐서 예봉을 꺾은 것이다. 전두환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김재규-정승화가 주도하는 쿠데타 세력이 국가를 지배했을 것이다. 2성 장군에 불과한 전두환의 사태파악 속도와 거침없는 행동이, 당시 최규하가 이끄는 국무위원들의 무기력함에 비하면 단연 돋보이지 않을 수 없다.

2008.1.27.

글 : 지만원


혁신학교? 혁신은 개뿔! 애들 학력만 퇴행중! 교무실 커피자판기, 교사 항공권 구입에 물 쓰듯...특혜 불구 학력은 뒷걸음 일반학교에 비해 연간 1억4,000~1억5,000만원을 특별히 지원받는 서울형 혁신학교가 예산을 엉뚱한 곳에 쓰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특별예산(학교운영비)으로 교사실의 각종 책장이나 가구를 구입했고, 수백만원을 들여 학습자료 저장용 USB와 외장하드를 사서 나눠 갖은 사실도 밝혀졌다. 교무실 커피자판기를 구입하는데 특별예산을 쓴 혁신학교도 있었다. 이밖에도 여직원 휴게실 가스보일러 교체, 부장교사 워크숍 항공권 구입, 교직원 전체 체육복 구입 등 본래 목적과는 거리가 먼 곳에 특별예산을 물 쓰듯 전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학생들에 대한 선심성 예산 집행 정황도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학생 티셔츠 구입, 진공청소기 구입 등에 특별예산을 수백만원씩 사용했다. 학생들의 생일축하용 떡케익 구입비용으로 매달 70~90만원을 사용한 곳도 있었다. 반면 서울형 혁신학교의 학력은 일반학교에 비해 오히려 뒷걸음질 친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내용은 서울시교육청이 새누리당 강은희 의원에게 제출한 2012년 혁신학교 정산서 통합지출부를 통해 밝혀졌다. 서울형 혁신학교는 곽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