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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뉴스

이 재오의 정체 1

조선이 여론조작이라는 날치기 숫법으로 승리를 강탈한 이가 일행을 뛰워주고 승리하고 도둑질 당한 박근혜 전 대표의 패배를 기정사실화 하려는 안간힘으로 "끙끙"대며 박근혜전 대표글에 이어 이재오라는 자의 홍보기사를 올렸으나 이가의 중요한 전과인 남민전 간찹단사건으로 감방에 10년을 있었다는 사실을 고의로 쏙~ 빼고 포화 미장해주려는 앙큼한 발상으로 독자들을 속이고 국민의 눈을 피해나가려 발악하는 모습 참 더럽습니다,이에 이재오에 대한 진실을 옮기며 오프에서의 글만 보고 진실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하여 많인 사람들에게 조선의 추악한 행태와 검은마귀 이재오 놈의 반역행위를 널리 알려주시기 바랍니다*(옮긴이..)

이재오는

빨/갱/이 활동을 하다가 5번씩이나 투옥되어 실제로 10년 이상 옥살이를 했다. 이는 그가 얼마나 집요한 빨/갱/이라는 것을 잘 웅변해 준다.그는 김영삼에 이해 신한국당에 들어와 이제까지 우익당의 간부로 활동하면서 그의 정체를 위장해왔다.이번에 그에 대한 색깔 공격이 없었다면 그는 당당히 한나라당 대표로 선출됐을 것이다. 대표 선출을 위한 여론 조사에서 이재오는 1위를, 강재섭은 3위였다.

자신들이 벌였던 적화통일 단체들을 그럴듯한 민주화 등 애국적 명분으로 위장합니다. 그들이 옥살이를 한 것은 과거의 군사정부가 억울하게 뒤집어 쒸운 것이라고 로도합니다. 이재오의 전력과 발언을 정리해 놓고 나면 참으로 무섭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번에 우리가 그에게 한나라당을 넘겨주었더라면 어떻게 될 뻔 했을까.!

이재오의 과거

1) "남민전" /빨/갱/이 활동으로 투옥
1979년 11월 남민전( 남조선민족해방전선)이 적발됐읍니다.이재오는 이에 관련돼 복역했읍니다. 남민전은 집요하고도 악랄한 빨/갱/이들의 조직이었습니다. 1960년대 인혁당, 통혁당 사건 관련자들이 출감 한 후노동자.농민.청년학생 등 각계 각층 규합, 북한과의 연계속에 결성한 지하공산혁명 조직입니다.

이 사건은 1970년대를 대표하는 간첩사건으로 관련자만도 100여 명이 넘었읍니다. 남민전은 안용운(38) 등이 월북, 김일성에게 사업보고서를 제출하는 등 북한으로부터 구체적 지침을 받아왔고,남한 내에서 북한이 요구하는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할 경우 게양할 붉은 별이 그려진 대형 "전선기戰線旗까지 만들었읍니다

심지어 이들은 공작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혜성대 彗聖隊라는조직을 만들어 재벌집 강도 등을 계획했읍니다. 김정익씨는 자신의 책 "수인囚人번호 3179"에서 "남민전 조직원들은 교도관 연락책가지 동원, 교도소 내외에 비밀지령을 주고 받으며 조직을 강화시킬 정도로 치밀했다"고 적고 있읍니다.
계급적인 적들을 증오하라,철저히 증오하라 남조선에서 민중혁명이 일어나면 최우선적으로 해야 될 일은 이 사회의 민족반동 세력을 철저하게 죽여 없애야 한다. 그 숫자는 2백만 정도는 될 것이다. 그래야만 혁명을 완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재판결과 사건의 총 관련자 가운데 1심과 2심에서 39명이 석방됐으며 남민전 사건 연루자들은 지난 1989년까지 모두 만기 특사로 출옥했읍니다. 특히 작가 홍세화洪世和는 1979년 당시 남민전 사건으로 프랑스에 망명, 공소시효가 만료된 이후인 1999년 한국에 돌아와 현재 한겨레 신문 편집국 부국장으로 재직하고 있읍니다.

빨/갱/이들의 집합소라 할 수 있는 민족문제 연구소의 현 소장인 임헌영도 남민전 사건에 연루됐으며 이재오와는 동지 사이였읍니다. 민족 문제연구소는 한일 과거사 청산을 통해 역사를 바로 세운다는 명목 하에 지난 1991년 설립ㄷ히었고, "친일인명사전편찬" 사업을 벌여 왔읍니다.

2) 1986년 "민통련"의 민족 통일 위원장
1984년 6월 29일 "민중민중누동협의회"(민민렵)가 출범했읍니다. 민청련 등이 중심이 돼 건설한 단체였읍니다. 노동자.농민 등 기층 대중운동의 역햘 강화에 중점을 두고, 조직도 개인 회원보다는 회원 단체를 중심으로 구성했읍니다. 이 조직이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자 1984년 10 월 16일 문익환, 장기표 등을 중심으로 해 "민주통일 국민회의"(국민회의)가 따로 조직됐읍니다. 국민회의는 명망 있는 재야 원로들이 주축이 됐읍니다. 이 두 개를 통합한 것이 "민통련"입니다. 1985년 3월29일 서울 장충동 분도회관에서 이 두개 단페가 통합대회를 갖고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을 출범시키면서 문익환을 의장으로 선출했읍니다. 총 23개 단체가 가입한 매머드급 민주화( 좌익) 단체였읍니다.

1986년 3월 30일 5만여 명이 모인 광주에서의 투쟁을 시발로, 5월 3일에는 인천에서 5.3 인천사태를 일으켰고, 그 결과 민통련 간부 대부분이 수배되고 문익환이 구속됐으며 사무실이 폐쇄됐읍니다. 주요 간부들이 구속 또는 수배된 상태에서 민통련은 1987년 5월 27일 통일민주 당과 민추협을 위시한 제도권 정치세력과 카톨릭.개신교.언론.여성.노동자. 농민 등 모든 민주화운동세력을 총 망라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국본)을 결성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읍니다. 이후 6월 항쟁을 통해 6.29 선언을 이글어낸 바 있읍니다.

3) 1989년 "전민련" 조국통일위원장
전민련은 민통련의 후신이며 당시 재야세력의 구심점이었읍니다. 1989년 1월에 출범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은 창립 성명서에서 "자주.민주.통일을 민중의 힘으로 달성한다는 민통련의 이념을 계승한다.전민련은 국가보안법 철폐, 주한미군철수 문제 등을 사회적 이슈로 가시화 하는데 구심점 역할을 하면서, 민통련의 명맥을 이은 전국적인 재야 민주화운동 단체라는 것을 내세웠읍니다.

이부영이 상임의장 장기표가 사무처장, 김근태가 정책기획실장을 맡아 "재야 트로이카가 됐읍니다., 하지만 1990~1991년 이부영과 장기표가 신당 추진을 위해 전민련을 떠났고 김근태도 1995년 정계에 입문했읍니다. 전민련이 어수선해지자 1992년 대선을 앞두고 1991년 12월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약칭 전국연합)이 결성되면서 해체되었읍니다.

현재 "뉴 라이트전국연합"과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은 명칭이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 좌익의 가문을 계승한다는의미이기도 하고, 김정일에 대한 충성약속이기도 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좌익조직들은 가만히 살펴보면 늘 처음에는 철저하게 위장돼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읍니다.
전국연합"의 결성 목적은 민중생존권 수호, 전 사회적 민주개혁,민족자주권 쟁취, 한반도의 자주적 통일, 주한미군철수, 국보법철폐에 있읍니다. 본부는 서울 용산구 남영동에 있읍니다.



4) 1991년 "민중당" 사무총장
민중당 (남한조선노동당중부지역당) 사건"은 1992년 10월 안기부(국정원 전신)가 발표한 남로당 사건 이후 최대 간첩단 사건이었읍니다. 62명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고 300여 명이 수배됐읍니다. 이재오 역시 이 사건으로 복역했읍니다. 수차레에 걸쳐 10년 반을 복역한 이재오는 지독한 빨/갱/이로 밖에 볼 수 없읍니다.

구속자 중에는 중부지역당 총책 황인오씨를 비롯해 민중당 출신 손병선씨, 전 민중당 공동대표 김낙중씨, 전 민중당 정책위의장 장기표씨, 등 재야의 거물들이 총망라됐습니다. 당시 안기부는 인천 등 전국24개 주요 도시의 46개 기업과 단체 등 조직원 300여 명을 확보해 북한 노동당과 남한 대중을 연결하는 역할을했다고 밝혔읍니다. 사건의 주역 중 황시와 김낙중.손병선 씨 등은 무기징역이 선고됐으나 이들 모두 1998년 8.15 특사로 풀려났읍니다.

6.3 동지회 트리오
6.3 동지회는 1964년 6월 3일 서울 주요대학생들과 시민들 1만여 명이 박정희의 한일협정 시도에 반대하는 데모를주도했던 사람들이 구성한 단체입니다.

文件發送 : 國民精神中興運動中央會


혁신학교? 혁신은 개뿔! 애들 학력만 퇴행중! 교무실 커피자판기, 교사 항공권 구입에 물 쓰듯...특혜 불구 학력은 뒷걸음 일반학교에 비해 연간 1억4,000~1억5,000만원을 특별히 지원받는 서울형 혁신학교가 예산을 엉뚱한 곳에 쓰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특별예산(학교운영비)으로 교사실의 각종 책장이나 가구를 구입했고, 수백만원을 들여 학습자료 저장용 USB와 외장하드를 사서 나눠 갖은 사실도 밝혀졌다. 교무실 커피자판기를 구입하는데 특별예산을 쓴 혁신학교도 있었다. 이밖에도 여직원 휴게실 가스보일러 교체, 부장교사 워크숍 항공권 구입, 교직원 전체 체육복 구입 등 본래 목적과는 거리가 먼 곳에 특별예산을 물 쓰듯 전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학생들에 대한 선심성 예산 집행 정황도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학생 티셔츠 구입, 진공청소기 구입 등에 특별예산을 수백만원씩 사용했다. 학생들의 생일축하용 떡케익 구입비용으로 매달 70~90만원을 사용한 곳도 있었다. 반면 서울형 혁신학교의 학력은 일반학교에 비해 오히려 뒷걸음질 친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내용은 서울시교육청이 새누리당 강은희 의원에게 제출한 2012년 혁신학교 정산서 통합지출부를 통해 밝혀졌다. 서울형 혁신학교는 곽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