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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뉴스

4월 총선과 좌파 척결을 위하여

남로당의 실패와 김대중 노무현의 좌파 전략

남로당의 실패와 김대중 노무현의 좌파 전략

나는 개인적으로 김대중과 노무현을 좌익, 즉 누구보다도 분명한 적화통일론자로 평가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나의 이 평가에 대해 의심을 품거나 불만을 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나는 사람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해방 후 번창했던 남로당의 60년 전(前) 역사를 도입해 설명하고자 한다. 김대중과 노무현이 어떤 사람인가를 아는데 도움이 될 것이며, 우리가 왜 이번 총선에서 좌파들을 국회로부터 추방해야 하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1) 남침 실패의 두 가지 교훈

북한 김일성이 땅을 치고 후회한 일이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가 6.25 때 서울을 점령하고 3일을 머문 일이다. 서울 점령 후 무려 3일. 만약 그 기간에 인민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곧바로 부산으로 진격하였더라면, 미군과 유엔군은 군대를 파견할 시간을 벌지 못하였을 것이고, 남한은 말 그대로 적화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일성은 서울에서 3일을 기다렸다. 남침만 한다면, 30만 남로당원들이 폭동을 일으킬 것이라는 박헌영의 말만 믿은 것이다. 김일성은 이 폭동이야말로 인민군의 남한 침략이라는 전쟁 범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일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3일 동안 제주 4.3 사건 같은 폭동을 기다렸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오판(誤判)이었고 실패였다.

또 하나는 ‘왜 남로당이 합법적인 의회 진출을 꾀하지 않고, 제주 4.3 폭동과 여순반란 사건을 일으켰던가.’ 라는 반성이었다. 만약 남로당이 48년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한 5.10 선거에 참여하였더라면, 최소한 제주에서만도 2석은 차지하였을 것이고, 전국을 통틀어 남로당 의석수는 제1당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만약 그랬더라면, 남한은 전쟁 없이도 적화되었을 것이라는 것이 사가(史家)들의 판단이다.

당시 정치 상황을 살펴보자. 남로당은 46년 10월 대구폭동 사건을 즈음하여 폭동을 지휘하던 주요 간부들이 잠적하자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결성한 정당이다. 46년 11월 23일 공산당, 인민당, 신민당이 연합하여 남로당을 결성하여 이를 박헌영이 주도(主導)하였고, 북은 김일성을 중심으로 북로당이 탄생하였다.

그 후 박헌영은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월북하였고, 그는 평양으로 가지 않고 해주에서 남한 좌익들의 파업과 폭동을 지휘하였다. 특히 6.25 전쟁 전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벌인, 박헌영이 남파한 유격대의 활약은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그런 박헌영이 김일성에게 자신의 존재를 각인(刻印)시켜주기 위해, 그리고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5.10선거를 방해하기 위해 일으킨 것이 제주 4.3사건이었다. 제주 4.3 사건의 주모자 김달삼은 박헌영의 사위이자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 출신이었다.

2) 전교조와 남로당

여기에서 잠시, 당시의 상황 속에서 오늘날 학생을 세뇌시키고 남한 적화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전교조라는 존재와 관련된 문제를 지적해 보자. 해방 이후 남로당에는 적화사업으로 수많은 붉은 교사들이 학교에서 학생들을 포섭하여 세뇌시켜 폭동의 중심에 있었다.

그 예로써, 제주 4.3에 이어 여순반란사건에도 ‘붉은 교사’들이 양성한 학생들이 국군과 싸웠다. 당시 기록을 보면 김지회, 지창수를 비롯한 반란군에 가담한 남로당 무장 세력은 모두 1,000여명, 여기에 학생을 비롯한 동조자가 무려 1,200명이었다. 특히 소름끼치는 장면 하나가 있다.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여수 시내로 진입한 국군을 골목길로 부르는 여학생들.
“국군 아저씨, 잠깐 이리 와 보세요.”

다가간 국군에게 치마폭 속에 숨긴 권총을 꺼내든 여학생들. 총이 발사되고, 사망한 동료를 본 국군들. 이어 여수가 탈환이 되고, 국군은 이들을 모두 처형하였다. 그 청순한 여학생에게 총을 들려준 이들이 바로 ‘붉은 교사’들이었다.

그 후 지리산으로 백암산으로 선생님을 따라 입산(入山)하여 빨치산이 되어 비참하게 죽어간 학생들. 이들을 누가 세뇌시켰다고 보아야 하는가. 그들은 너와 내 자식을 가르치는 교사들이었고, 지금도 그런 교사들이 학교에서 우리 학생들 곁에 있다고 보면 된다. 그들이 바로 지금의 전교조라는 것은 이젠 널리 알려진 상식(常識)이다.

여담(餘談)을 더해 본다. 전교조는 태극기에 대해 경례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묵념은 하는데, 그 묵념의 구호가 바로 이렇다.
“통일을 위해 순국하신 선배 교사 선생님들께 묵념을 올립시다.”
그 선배들이란, 김달삼 이하 ‘붉은 교사’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김달삼은 1948년 남한 내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5.10 선거를 방해하기 위해 박헌영의 지령을 받아 3월초 제주 조천면 신촌리에서 19명이 간부들과 폭동을 모의하였다. 그리고 김달삼은 제주 경비를 위해 파견된 9연대 안에 침투해 있던 프락치들과 남로당 유격대원들을 동원, 4월 3일 새벽 두 시에 제주 도내 12개 경찰지서를 습격하는 것으로 그 비극을 시작하였다.

이때 김달삼에 의해 학살(虐殺)당한 사람 중에는 14살(문숙자), 12살(문정자) 소녀들도 있었다. 학살 대상은 우익인사들과 그 가족, 경찰과 대청단원들의 가족들이었다. 살해 도구는 모두 죽창이었다. 어린 소녀들의 순결한 목숨도 그들은 처형해야할 적으로 판단하였던 것이다.

그 후 김달삼은 9연대장 김익렬과 평화 협상을 맺고, 북한 정부 수립을 위한 8.25 선거일에 맞춰 판문점을 넘어 북으로 갔다. 이때 김달삼이 가지고 간 것이 제주도민들이 투표한 투표용지였다. 당시 제주도 8만 유권자 중에서 무려 5만이나 되는 숫자였다.

이후 제주도는 이덕구에게 맡겨지고, 이 자가 1949년 6월 7일 사살될 때까지 1,700명에 이르는 우익 계열의 제주도민들을 학살하였다. 그리고 ‘육지 사람들이 우리 형제를 죽인다.’고 선동하여, 그 결과 선량한 제주도민들이 지역적 온정(溫情)에 합세하였고, 수많은 군경을 습격하여 죽였다. 그리하여 무려 1만 이상이 죽었다.

이 과정에서 제주도로 파견될 14연대가 마침내 제주도 파견을 거부하면서 여순반란 사건을 일으켰다. 이들이 토벌되면서 대한민국은 형제 동포들이 적과 적으로 나뉘어 6.25가 끝날 때까지 죽이고 죽이는 지옥도(地獄道)를 연출하게 되었다.

그러나 제주의 비극이 6.25 침략을 좌절시킨 계기가 된 것이다. 그러한 살극(殺劇)을 경험한 대한민국 국민들은 남로당과 빨치산들의 정체를 알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남로당을 탈당하였다. 따라서 6.25가 일어났어도 국민들은 폭동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렇게 6.25는 끝났고, 북의 의도는 좌절되었다.

3) 좌익들의 제도권 진출 음모

남침 전쟁의 실패 이유를 뼈저리게 깨달은 것이 김대중 이후의 좌익들의 행보(行步)이다. 김대중은 집권 초기에 자생(自生) 빨갱이로 이름이 높은 민노당을 합법화시켰다. 그리고 날치기를 하면서까지 전교조도 합법화시켜 주었다. 제주 4.3 사건의 실패를 거울삼은 것이다. 그 결과 좌익들은 모두 정치 제도권으로 들어오게 되었고, 이어 국가보안법 폐지 및 미군철수와 연방제 통일운동이 이들에 의해 결합되고 진행되었다. 더구나 이 모든 것들은 법과 권력의 보호를 받으며 펼쳐졌다.

정치권력뿐만이 아니었다. 교육 문화 행정부까지도 좌익들의 무대가 되었다. 반미 정서를 유발시키기 위해 그들은 영화도 만들고 문학작품도 주도하게 되었다. 교육은 전교조가 장악하여 빨치산을 추모하였다. 통일부는 김정일 정권의 선군정치를 돕기 위해 인민군을 먹여 살릴 온갖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심지어 400만석 보내기 법제화 운동도 펼쳐지고 있었다.

좌익 세상을 위한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그러나 노무현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6.25 당시 빨치산이었거나 동조하였던 당사자들에 대한 명예도 신원도 회복시켜 주었다. 빨치산에 의해 학살당한 전북 무장 선산마을 사건이 그 대표적인 예이고, 영암 금정에 세워진 추모비도, 제주 4.3사건 기념공원도 바로 다름없는 빨갱이들의 역사 회복 그것이었다.

김대중에 이어 노무현은 더욱 정교한 공작을 펼쳤다. 그는 민주의 이름으로 가장(假裝)한 모든 사건에 명예를 부여하였다. 남민전과 같은 대한민국 내 폭동음모 사건도 민주화 유공자로 인정하고, 정부 부처 각 요로(要路)에 이들 386 주사파 좌익들을 배치하였다. 이들이 지금 대한민국 행정부를 점령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나는 ‘왜 김대중이 민노당과 전교조 같은 무리들을 합법화 시켰는가.’에 대한 답을 남로당의 실패에서 찾았다. 만약 제주 폭동을 일으키지 않고 5.10선거에 참여했더라면? 그리고 결정적인 시기에 정치권력과 남로당 유격대, 그리고 국군과 경찰에 침투한 프락치들을 동원했더라면?

그래서 김대중은 이를 깨닫고, 한총련으로부터 출발한 주사파들을 합법화시켜 살려내어 정치권으로 인도해 왔다. 그리고 이들이 성장하여 오늘날 결정적 시기(김일성 탄생 100주년 통일)를 노리며 암약하고 있는 것이다.

4) 2008 4월 총선과 좌파 척결

그러나 악명 높았던 남로당이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니다. 지금도 살아서 결정적 시기의 폭동을 준비하고 있다고 보면 정확할 것이다. 민노총은 남로당 소속으로 전국 노동자를 이끌던 전평(全平)으로 후예라고 밝히고 있으며, 온갖 노동자 농민단체를 껴안고 좌익으로 이끌어 가고 있다.

이들이 반드시 폐지시키고자 노리고 있는 ‘국가보안법’은 제주 4.3 사건으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 당시는 남로당이 합법적인 정당이므로 처벌할 수가 없었다. 미국도 오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미국은 어리석게도 좌익들의 활동을 묵인하고 있었고, 살인 파업과 같은 극렬 노동운동을 허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라 안팎에서 소요(騷擾)와 반란을 일으키는 자들을 처벌하게 하기 위해 만든 것이 1948년에 제정된 ‘국가보안법’이었다.

그래서 국가보안법은 6.25 전부터 좌익들이 철폐를 주장하던 것이었고, 미군철수 역시 소련군의 북한 퇴각 이후부터 줄기차게 주장하던 것이었다. 이 두 가지 주장이 모두 2008년 지금도 변함없이 진행되고 있는 이유가 바로 북의 지시를 받는 남로당의 후예들, 살아있는 주사파 좌익들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2007년 12월 정권을 바꾸었고, 2008년 4월 9일 총선을 치를 것이다. 목표는 하나다. 김대중 노무현이 기른 좌익들을 척결해야 한다. 이번 총선을 통해 우리는 민주를 가장(假裝)한 좌파를 걸려내야 한다.

좌익들은 치열하게 제도권 진입을 노리고 있다. 필자는 이번 정권에서 밀려난 전교조를 비롯한 좌파들이 정체를 숨기고 이명박 정부 안으로 기어들고 있음을 제보 받은 바 있다. 후일 이들로 인해 발생할 불행을 상상해 보라.

그리하여 우리는 나라를 하나의 색깔로 통합하고, 하나의 목소리, 하나의 시각과 목표를 두고 뭉쳐서 경제를 살려내야 한다. 아니, 더 나아가 세계 제1의 나라로 도약해야 한다. 그러므로 대동단결만이 꿈의 에너지가 될 것이다.

좌파들은 끊임없이 분열을 획책하고 있다. 노동자와 기업가를 나누어 분열시키고, 적을 감싸주어야 할 동포로 위장시킨다. 철없는 어린 학생들이 사상의 노리개로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 아이들이 멋진 꿈을 꾸고, 멋진 꿈을 지닌 아이들이 그 꿈을 이루는 위대한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출처: http://www.dailian.co.kr)

정재학(데일리안 편집위원]


혁신학교? 혁신은 개뿔! 애들 학력만 퇴행중! 교무실 커피자판기, 교사 항공권 구입에 물 쓰듯...특혜 불구 학력은 뒷걸음 일반학교에 비해 연간 1억4,000~1억5,000만원을 특별히 지원받는 서울형 혁신학교가 예산을 엉뚱한 곳에 쓰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특별예산(학교운영비)으로 교사실의 각종 책장이나 가구를 구입했고, 수백만원을 들여 학습자료 저장용 USB와 외장하드를 사서 나눠 갖은 사실도 밝혀졌다. 교무실 커피자판기를 구입하는데 특별예산을 쓴 혁신학교도 있었다. 이밖에도 여직원 휴게실 가스보일러 교체, 부장교사 워크숍 항공권 구입, 교직원 전체 체육복 구입 등 본래 목적과는 거리가 먼 곳에 특별예산을 물 쓰듯 전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학생들에 대한 선심성 예산 집행 정황도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학생 티셔츠 구입, 진공청소기 구입 등에 특별예산을 수백만원씩 사용했다. 학생들의 생일축하용 떡케익 구입비용으로 매달 70~90만원을 사용한 곳도 있었다. 반면 서울형 혁신학교의 학력은 일반학교에 비해 오히려 뒷걸음질 친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내용은 서울시교육청이 새누리당 강은희 의원에게 제출한 2012년 혁신학교 정산서 통합지출부를 통해 밝혀졌다. 서울형 혁신학교는 곽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