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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님, 韓國에 오소서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님, 韓國에 오소서

이법철(大佛總, 상임지도법사) :

미소라 히바리(일본어: 美空 ひばり みそら ひばり, 1937년 5월 29일 ~ 1989년 6월 24일)는 일본의 쇼와 천황 시대를 대표하는 가수이자 여배우이다. 그녀는 일본국 가나가와 현 요코하마 시 이소고 구에서 태어났다. 세이카 학원(精華?園) 고등부를 졸업했으며, 본명은 가토 가즈에(일본어: 加藤 和枝 かとう かずえ)다. 그녀는 사후에 일본 여성 최초로 국민영예상을 수상했다. 나는 미소라 히바리님을 생전에 만나 불 인연은 없었지만, 그녀가 한국계 일본인이라는 전해오는 말을 전해듣고, 한일양국(韓日兩國)의 친선을 돈독히 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 글을 감히 적어본다.

1989년 초, 서울올림픽의 감격이 잦아들 무렵 일본에서는 한 시대를 마무리 짓는 한 사건이 발생한다. 1월 7일, ‘쇼와덴노(昭和天皇)’가 사망한 것이다. 쇼와천황(1901~1989)의 이름은 히로히토(裕仁)다. 일본국이 깊은 애도로 신불(神佛)에 기도하는 때, 6월 24일에는 문화적으로 쇼와 시대를 끝내는 것같은 일이 발생했다. 일본국 국민 가수이자 연기자인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가 52세의 아직 젊은 나이에 사망한 것이다.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는 패전의 공황에 일본국민이 빠져 울부짖고 있을 때, 1949년 데뷔하여 노래로써 일본국민들에게 위안과 기쁨을 주고, 슬픔을 나누며 일본국민들의 힘든 시절을 견디게 한 국민적인 연인이요, 딸이었다.

일본국 패전의 조종(弔鐘)을 울리는 상징같은 미군의 B29 폭격기가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두 발을 투하하고, 그 원폭으로 일본국은 유사이래 참혹한 지옥도(地獄圖)같은 고통속에 떼주검을 당해야 했다. 그 후 천황은 목이 메인 음색으로 항복선언을 하고, 그 음성이 전파(電波)를 타고 전국에 울려 퍼질 때, 부지기수(不知其數)의 일본인들은 울음을 터뜨렸다. 천황이 항복선언을 하는 것은 국민이 천황을 잘못 모신 것이라 자책하면서 수많은 일본인들은 황성(皇城)을 향해 울며 요배(遙拜)하고 할복(割腹)으로 사죄하며 죽어갔다. 전국 도처에서 일본인들은 천황에 대한 진사(眞謝) 정신으로 할복 등으로 자결했고, 패전의식으로 정신이 공황에 빠져 있을 때, 하늘에서 위로의 천사로 보내준 것같은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였다.

쇼와 천황의 죽음에 이어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 사망소식에 일본 언론은 애도를 표하면서 ‘이제 쇼와(昭和) )시대가 끝났다’는 제목의 기사를 발표했다. 그 신문 보도를 본 국민들은 패전에서 천사같은 노래로 위로해준 국민들도 다시 육신으로 볼 수 없고, 육성의 노래를 들을 수 없는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에 대해 통석해하며 왕생극락을 기원했다.

대한민국 국민들, 즉 우리에게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가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고 기억해야 하는 것은 그녀의 아버지가 일본으로 건너 간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는 아버지가 그리워하는 아버지의 고국인 한국과 고향에 대해서 아버지의 손을 잡고 찾아 선조의 뿌리를 찾고자 하는 갸륵한 각오가 깊었다. 가난하여 먹고 살기 위해서 일본국에 까지 와서 노동으로 생업을 삼은 아버지는 죽는 순간까지 고향을 그리워했다.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는 아버지의 위패를 모시고, 대신 아버지가 그리워하는 한국을 찾아가는 것이 꿈이었고, 아버지가 금의환향(錦衣還鄕)하듯, 아버지의 나라에서 딸이 “돌아와요 부산항”을 열창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는 아버지의 나라를 찾는 꿈은 생전에 이루어 질 수가 없었다. 왜? 속좁은 일부 한국인들이 일제(日帝) 때, 한일합방(韓日合邦)에서 주는 고통의 과거사만을 생각하여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까지 혐오(嫌惡)의 대상으로 간주, 한국 방문을 봉쇄한 것이다. 속좁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일본국은 오래전부터 한국 남녀 가수들에게 문화교류의 대문을 활짝 열어주고 있다. 그 증거가 일본 열도를 한국의 노래인 “돌아와요, 부산항” 등이 유행하는 것이다. 일본국은 한국노래를 일본국에서 마음껏 부르도록 배려와 협조를 해주고 환호 하는 데, 한국은 달랐다. 끝내 히바리(美空ひばり)는 아버지의 나라에서 “돌아와요 부산항”의 노래를 부르지 못하는 것은 물론, 아버지의 고향과 선조의 산소를 찾지 못하고, 52세의 짧은 나이로 생을 마칠 수 밖에 없었다.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는 노래로써는 일본국 제일의 가수로 등극을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한(恨)과 슬픔과 고독속에 산 가수라 할 수 있다.

1949년 7월에 《갓파 부기우기(河童ブギウギ)》를 통해 가수로 데뷔하고, 1960년에 《애수 부두(哀愁波止場)》로 일본 레코드대상 가창상을 수상했다. 1962년에 당시 인기 영화 배우였던 고바야시 아키라와 결혼했지만, 2년 만인 1964년에 이혼하게 된다.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는 자녀의 출산을 하지 못했다. 이혼 한 후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는 속세의 남녀의 정을 잊고, 독신으로 오직 노래와 결혼해 보이는 인생을 살았다.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친어머니였던 가토 기미에(加藤喜美枝)가 사망하고, 곧이어 친동생과 친우마저 차례로 사망하는 비운을 맞게 된다.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는 혼자 술에 의존하는 정도가 높아졌고, 건강은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술에 취하면 이버지의 나라를 찾지 못한 것을 한탄했고, 자신을 못오게 막는 한국정부를 원망했다.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는 1987년 4월 22일에 후쿠오카 제생회 병원에 급하게 입원, “만성 간염 및 양측 대퇴골 골두 괴사”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재기 불가능”이라는 평을 받았다.

쇼와 천황이 죽으면서 연호가 헤이세이로 바뀐 1989년 1월 11일에는 그녀는 생애 최고의 인기곡 《가와노나가레노요니(川の流れのように, 흐르는 강물처럼)》을 발표했다. 그 곡은 일본국 NHK 방송국에서 조사한 “일본의 명곡”에서 1위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1989년 6월 13일에 결국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는 의식불명으로 인공호흡을 시작했고, 6월 24일에 간질성 폐렴으로 인한 호흡부전으로 인해 향년 52세로 사망했다. 1989년 7월 4일, 일본정부는 일본 여성 최초로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에게 국민영예상을 수여하고, 그녀의 공적을 회고하고 기렸다.

1989년 7월 22일에 거행된 장례식은 각 일본국 각 방송사에서 전국에 생중계를 했고, 팬들을 포함해서 4만 2천여명이 조문하고 애도의 분향과 꽃다발을 바쳤다.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의 명곡 “흐르는 강물처럼”의 노래 합창속에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는 요코하마 시 고난 구(港南?)에 안장되었다.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는 너무 일찍 갔지만, 그녀의 기념관에는 그녀의 명곡 “흐르는 강물처럼”노래가 영원히 울려 퍼질 것 같다.

그토록 한국을 찾고 싶었던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님에게 한국의 비구승 나, 법철(法徹)은 영혼이라도 한국에 오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초혼(招魂)의 글을 쓰고, 초혼의 기도를 드린다.

韓-日 정치인들의 정치사상 때문에 한일 국민들은 서로를 혐오(嫌惡)하거나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처럼 지내서는 안된다. 광대무변한 우주에서 본다면 항하사(恒河沙) 모래알속의 하나인 지구촌(地球村)이요, 그 속에 생사하는 인간들이요, 선배, 후배 붕우(朋友)가 있을 뿐이다. 윤회열차(輪廻列車)같은 지구에 함께 살면서 붕우정신(朋友精神)으로 서로 사랑하고 화합하고 협력하며 살아가도 인생 백년을 살지 못하는 데, 편향된 정치인들의 정치사상으로 인해 韓-日 국민들이 상호 혐오(嫌惡)해서는 절대 안되는 것이다.

특히 일본국인은 재일 한국인 교포들에 증오하는 마음으로 대하지 말고, 붕우정신을 갖고 자비와 사랑을 나누도록 권장하는 바이다.

結 論

한국의 탈렌트, 스포츠인 등은 물론 한국의 남녀 가수들은 일본국에 건너가 자유롭게 노래하여 환호와 갈채를 받아온 지가 반세기를 넘긴지 오래이다. 그런데 일부 한국인들은 아직도 일본 가수들이 한국에서 노래하면 안된다는 편협된 주장을 하는 것인가? 수치스러운 일이 아닌가?

이제라도 한국은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의 영혼방문을 의미하는 위패라도 한국에 다녀가게 할 수 있는 미덕을 보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녀의 후배가수인 “돌아와요 부산항”을 부른 島津亜矢, 森昌子 등 제위가 세종문회관 대강당에서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의 노래 “흐르는 강물처럼”의 노래를 대신 불러,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의 한국을 찾다 못찾고 죽은 여한을 풀어 주었으면 한다. 韓-日 국민들이여,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의 영혼 방문이 냉각 된 한일관계가 더욱 붕우정신으로 서로 용서하고 화해의 손을 잡고 협력하는 상징이 되도록 하면 어떨까.


 川の流れのように (카와노나가레노요-니, 흐르는 강물처럼)

美空ひばり(미소라히바리)

                   

知らず知らず 步いて來た 細く長いこの道
(시라즈 시라즈 아루이테 키타 호소쿠 나가이 코노 미치)
모르게 모르게 걸어 온 가늘고 긴 이 길

振り返れば 遙か遠く 故鄕が見える
(후리카에레바 하루카 토-쿠 후루사토가 미에루)
뒤돌아보면 저 멀리 고향이 보여

でこぼこ道や 曲がりくねった道
(데코보코 미치야 마가리쿠넷타 미치)
울퉁불퉁한 길, 고불고불 구부러진 길

地圖さえない それもまた人生
(치즈사에나이 소레모 마타 진세-)
지도조차 없는 그것도 또한 인생

ああ川の流れのように ゆるやかに
(아- 카와노 나가레노요-니 유루야카니)
아! 강물의 흐름처럼 완만하게

いくつも 時代は過ぎて
(이쿠츠모 지다이와 스기테)
여러 시대는 흘러서

ああ川の流れのように とめどなく
(아- 카와노 나가레노요-니 토메도나쿠)
아! 강물의 흐름처럼 끝없이

空が黃昏に 染まるだけ
(소라가 타소가레니 소마루다케)
하늘이 황혼에 물들 뿐…

- 간주 -

生きることは 旅すること 終わりのない この道
(이키루 코토와 타비스루 코토 오와리노 나이 코노 미치)
살아가는 건 여행하는 것, 끝없는 이 길

愛する人 そばに連れて 夢探しながら
(아이스루 히토 소바니 츠레테 유메 사가시나가라)
사랑하는 사람을 옆에 데리고 꿈을 찾으며

雨に降られて ぬかるんだ道でも
(아메니 후라레테 누카룬다 미치데모)
비에 젖어서 질퍽이는 길이라도

いつかはまた 晴れる日が來るから
(이츠카와 마타 하레루 히가 쿠루카라)
언젠가는 또 다시 맑은 날이 올테니…

ああ川の流れのように おだやかに
(아- 카와노 나가레노요-니 오다야카니)
아! 강물의 흐름처럼 평온하게

この身をまかせていたい
(코노 미오 마카세테 이타이)
이 몸을 맡기고 싶어요

ああ川の流れのように 移りゆく
(아- 카와노 나가레노요-니 우츠리유쿠)
아! 강물의 흐럼처럼 변해 가는

季節 雪どけを待ちながら
(키세츠 유키도케오 마치나가라)
계절 눈이 녹는 날을 기다리며…

ああ川の流れのように おだやかに
(아- 카와노 나가레노요-니 오다야카니)
아! 강물의 흐름처럼 평온하게

この身をまかせていたい
(코노 미오 마카세테 이타이)
이 몸을 맡기고 싶어요

ああ川の流れのように いつまでも
(아- 카와노 나가레노요-니 이츠마데모)
아! 강물의 흐름처럼 언제나

靑いせせらぎを 聞きながら
(아오이 세세라기오 키키나가라)
푸른 시냇물 소리를 들으며… 

 






혁신학교? 혁신은 개뿔! 애들 학력만 퇴행중! 교무실 커피자판기, 교사 항공권 구입에 물 쓰듯...특혜 불구 학력은 뒷걸음 일반학교에 비해 연간 1억4,000~1억5,000만원을 특별히 지원받는 서울형 혁신학교가 예산을 엉뚱한 곳에 쓰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특별예산(학교운영비)으로 교사실의 각종 책장이나 가구를 구입했고, 수백만원을 들여 학습자료 저장용 USB와 외장하드를 사서 나눠 갖은 사실도 밝혀졌다. 교무실 커피자판기를 구입하는데 특별예산을 쓴 혁신학교도 있었다. 이밖에도 여직원 휴게실 가스보일러 교체, 부장교사 워크숍 항공권 구입, 교직원 전체 체육복 구입 등 본래 목적과는 거리가 먼 곳에 특별예산을 물 쓰듯 전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학생들에 대한 선심성 예산 집행 정황도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학생 티셔츠 구입, 진공청소기 구입 등에 특별예산을 수백만원씩 사용했다. 학생들의 생일축하용 떡케익 구입비용으로 매달 70~90만원을 사용한 곳도 있었다. 반면 서울형 혁신학교의 학력은 일반학교에 비해 오히려 뒷걸음질 친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내용은 서울시교육청이 새누리당 강은희 의원에게 제출한 2012년 혁신학교 정산서 통합지출부를 통해 밝혀졌다. 서울형 혁신학교는 곽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