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안사가 시해소식을 들은 것은 시해현장에서 총소리가 멎은 지 40분 후, 오후 8시20분이었다. 김계원이 시신을 싣고 국군서울지구병원에 도착한 시각은 7:55분, 병원을 가려면 보안사 정문을 통과해야 했다. 당직총사령 이상연 대령이 군의관에 전화를 걸었지만 중앙정보부 요원이 밀착감시를 하기 때문에 군의관의 대답이 엉거주춤했다.“코드원(대통령)이냐, 위독하시냐” 했더니 군의관은 “예”라고만 대답했다. 이런 보고를 받은 전두환은 청와대 경호실에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경호실장은 물론 차장과도 통화를 하지 못했다. 그 다음의 보고가 전두환에게 들어왔다. “노재현 장관이 보안사령관을 찾고 있습니다. 정승화 총장이 각군 수뇌부를 B-2방카로 소집하고 있습니다.” 오후 9:00시, 전두환이 B-2 방카에 도착했다. 이 때 김계원과 최규하는 청와대에 있었고, 정승화 총장이 혼자서 독자적으로 상황을 처리하고 있었다. 벙커에는 노재현, 김재규 그리고 군 수뇌들이 있었다. 전두환이 노재현에게 “대통령에 무슨 일이 있습니까?”하고 묻자 노재현은 “대통령이 서거했다. 자세한 건 모른다”고 일러주었다. 전두환이 대통령 서거 사실을 처음으로 확인한 시점이 바로 밤 9:00시 경이었다
정몽준 의원이 1월29일 한나라당 최고위원으로 선출됐다. 12월3일 『이명박 지지』를 선언하며 입당한 지 한 달 여 만의 일이다. 鄭의원이 左派정권 종식을 위해 어떤 기여를 했는지 의문이다. 「이명박 세몰이」에 조금은 기여했다고 쳐도, 2002년 보수층 배신(背信)의 과오(過誤)를 씻기엔 역부족이다. 그는 당시 좌파 후보인 노무현 씨와 손잡고 여론조사에 의한 단일화라는 세계 정치사상 유례가 없는 해프닝을 벌인 끝에 盧씨를 후보로 만들어주었다. 투표 하루 전 결별을 선언했으나 이 선언이 오히려 盧후보 지지층을 결속시켜 두 번째의 좌파 대통령이 등장하도록 도왔다. 鄭의원은 盧정권이라는 사신(邪神)을 불러 낸 주역임에도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4조원을 넘는 재산(2007년 10월 현재 4조229억)중 한 푼이라도 「체제유지비」로 썼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정몽준씨의 아저씨벌 되는 70대, 80대 노인들까지 거리로 나서 애국투쟁을 할 때 정몽준씨는 보이지 않았다. 애국투쟁에 냉담했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좌파세상이 되었을 때 잃을 것이 가장 많은 기업인인 그가 좌파세상을 만들어놓고 좌파와의 싸움을 피했다 . 鄭의원은 2006년 11월10일, 국회에서
지난해 12월19일의 대통령 선거는 左右간의 평화적 정권교체라는 의미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정권교체의 전통은 단계적으로 진화되었다.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선 평화적 정권교체가 이뤄졌다. 전두환 대통령이 노태우 민정당 대표를 후계자로 지명하여 盧 후보가 당선 된 것이다. 1992년 大選에선 군인출신 대통령 시절을 마감하고 30년만에 처음으로 민간출신 대통령을 뽑았다. 1998년 선거는 정권이 여당에서 야당으로 넘어간 최초의 경험이었다. 지난해 대통령 선거는 정권이 여당에서 야당으로 넘어간 두번째 경험이자 우파가 평화적으로 정권을 다시 차지한 최초의 경험이었다. 이런 맥락속에서 1987년의 최초 정권교체를 되돌아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한다. 5공화국의 史官이기도 했던 金聲翊 비서관의 기록중 관련부분을 소개한다. 金 당시 비서관은 대통령의 言行을 기록하는 일을 맡아 공사석에 많이 배석했다. 아래 기록에 따르면 全斗煥 대통령은 1987년 당시 평화적 정권교체와 함께 서울올림픽을 성공시켜야 한다는 일념에 몰두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또 한국 대통령은 남북대결 상황을 관리할 수 있을 정도의 군사적 지식을 가져야 하며 그런 점에서 노태우 대표를 후계자로 결정
한나라당 국회의원 중 親北 또는 對北포용노선을 주장해 온 이들이 오는 4월 총선에서 공천 및 당선될 수 있을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아래는 한나라당 내에서 그간 논란이 돼 온 대표적 의원들의 발언 및 성향을 분석한 자료 중 첫 번째이다. 1. 배일도(裵一道) 한나라당에는 소위 「간첩·빨치산」추모행사에 이름을 올리는 이까지 나왔다. 한나라당 배일도(裵一道) 의원은 2007년 10월13일 광화문 열린공원에서 열린 소위「제18회 민족민주열사·희생자 범국민추모제」에 추모위원(追慕委員)으로 참여했다. 左派연합체인 한국진보연대 등이 주최한 이날 행사는 500여명의 소위 「열사(烈士)」를 추모대상으로 분향소·전시물에 게시했다. 그런데 이들 소위 열사 중 상당수는 건국 이후 간첩·빨치산 활동으로 실형을 받은 인물들이었다. 추모대상에는 남파(南派)간첩 출신 「금재성·김도한·김남식·신창길·왕영안·윤용기·진태윤·최백근·최남규·최인정」, 빨치산 출신 「권양섭·김광길·김병인·김용성·김현순·류낙진·박판수·손윤규·안상운·윤기남·장광명·정대철·정순덕·주명순」 등 다수의 共産혁명기도자들이 포함됐다. 행사장 전시물은 남파간첩 출신과 빨치산 출신들을 가리켜 『동지』와 『열사』로 호칭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