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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우대사(普雨大師)와 문정황후(文定王后)

-권부와 친하는 것은 호랑이와 친하는 것과 같아-

 

조선조 중종(中宗) 때, 문정황후(文定王后)가 있었다. 그녀는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그녀의 아들 명종(明宗)이 1545년 12세에 왕위에 오르자 문정대비는 8년간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면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그녀는 불교를 흥왕케 하려는 발원을 하고 팔도의 감사들에게 고승을 추천하라는 교지를 내렸다. 그때 함경도 감사 정만종이 보우대사(普雨大師) (1509∼1565)를 추천하는 장계를 올렸다.

문정왕후 (文定王后 ; 1501~1565)의 본관은 파평, 성은 윤씨(尹氏)이다. 조선시대 중종의 제2계비(繼妃)이다. 영돈녕부사 윤지임의 딸로 1501년에 태어났다. 1517년 왕비에 책봉되
었다. 그녀는 동생인 윤원형에게 정권을 쥐게 하고 인종의 외척 윤임 일파를 제거하기 위해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을 죽이고 윤원로를 귀양보내기도 했다.


▲태능에서 안식하고 있는 문정왕후@ 중앙불교)

문정왕후는 키가 크고, 자색이 출중한 미인으로 전해온다. 천자총명(天資聰明)하여 유불선(儒佛仙) 삼교의 책을 통달하다시피 했는 바 특히 불경을 손에 놓지 않다가 중종의 제2 계비로 입궁했다. 그녀는 남편인 중종(中宗) 재위 때는 불교흥왕의 원력을 가슴에만 담고 표현을 하지 않고 은인자중했다. 마침내 1545년 아들 명종이 임금이 되자 모후(母后)로서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면서 불교흥왕을 위해 팔을 걷어 부쳤다.

문정대비는 정만종의 추천을 받은 보우대사를 궐안에 불러들여 수많은 질문으로 시험했다. 문정대비는 보우대사가 학문이 깊고, 깨달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여 불교중흥의 간판으로 내세웠다.

문정황후는 여걸로서 유명했다. 중국에서 최초의 여황제로 즉위한 측천무후(則天武后)와 비견될 지경이었다. 문정대비는 보우대사를 내세워 불교흥왕을 추진하는 한편 정치적 반대파들을 제거하기 위한 정치공작을 쉬지 않았다. 그녀가 배후에서 조종하여 일어난 큰 사건은 ‘을사사화(乙巳士禍), 정미사화(丁未士禍) 등이다. 자신의 어린 아들인 명종이 임금노릇을 제대로 하기 위한 걸림돌을 치우는 역할을 어머니로서 한 것이다.

문정대비는 아들인 명종이 말을 듣지 않으면, 야심한 밤에 대비전에 불러 종아리를 걷게 하여 회초리로 사정없이 매를 치며 독설을 퍼부었다고 한다. 효자인 명종은 매를 맞을 때마다 어머니에게 용서를 빌고 효도를 잘하겠다고 서약을 했다는 것이다. 문정대비가 회초리를 치는 소식이 대궐의 담을 넘어 세간에 회자되었다. 세간에서는 문정대비를 두고 악녀라고 소리죽여 규탄하며 비난하는 자들도 있었다.

당시 조선조 정책은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이 개국 조종(祖宗)의 전통이었다. 그러나 효심 지극한 명종으로서는 어머니가 독실히 믿는 불교흥왕을 위해서 무조건 협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야(朝野)는 문정대비의 불교관을 정면으로 반대한다는 것은 파직이나, 죽기 아니면, 감옥행이요, 원지유배(遠地流配)이기 때문에 숨을 죽일 수 밖에 없었다.

보우대사의 호는 허응(虛應) 또는 나암(懶庵)이다. 보우는 법명이다. 가계 등은 미상이다. 15세에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금강산일대의 장안사 (長安寺)·표훈사(表訓寺) 등지에서 수행하고 학문을 닦았다. 6년 동안의 정진(精進) 끝에 마음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법력(法力)을 얻었다. 대장경을 모두 섭렵하는 한편 ‘주역’도 공부하였다. 그는 평소 유생들에게 핍박을 받는 불교에 대해 개탄을 금치 못했다. 보우대사는 문정대비에게 불교중흥책의 하나로 유생이 과거롤 보듯 승과(僧科)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청했다. 문정대비는 불교중흥의 첫걸음으로 보우대사를 1548년,(명종 3년) 12월 지금의 서울 강남 봉은사(奉恩寺)주지로 취임케 하고, 수진대사를 봉선사 주지로 취임케 했다.

보우대사는 문정대비를 마음대로 만나고 움직이는 큰 권력자로 부상했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의 실세에게는 줄서는 서는 사람이 많은 법이다. 유생들도 고속출세를 위해 보우대사의 문턱이 닮아져라 찾아 인사하며 아부인사를 시작했다. 이때, 변협(邊協)이라는 이름의 선비가 보우대사에게 출세길을 열어달라고 매달렸다. 보우대사는 과거 시험에 전념할 것을 충고할 뿐이었다. 그 때 변협은 문정대비에게 자신을 추천해주지 않는 것에 대한 앙심을 품었다.

문정대비는 봉은사를 선종본산(禪宗本山)으로 봉선사를 교종본산(敎宗本山)으로 삼았다. 보우대사는 선종판사, 수진대사는 교종판사가 되었다. 명종 7년, 선교(禪敎)양종의 승려를 선발하는 승과를 실시했다. 훗날 임진난의 구국성사들인 서산대사는 1回 합격, (명종, 7年, 1552), 사명대사는 4回 합격(명종 16년, 1561)했다. 서산, 사명대사는 보우선사가 시험관으로 있을 때 승과에 장원급제를 한 것이니 지중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불교를 능멸히 여겨 사찰에서 가무음주(歌舞飮酒)를 즐기고 횡포를 다반사(茶飯事)로 벌이든 광유(狂儒) 황언징(黃彦澄) 등이 명종(명종) 4년 9월에 능침사(陵寢寺)인 정인사(正因寺)와 회암사(檜巖寺))에 가서 소란을 일으키고 기물(器物)을 부수고, 파손하고, 사보(寺寶)를 훔치는 훼불사건이 발생했다. 보우대사는 그 폐해를 문정황후(文定王后)에게 보고했다. 문정황후는 대노했다. 봉은사(奉恩寺)와 봉선사(奉先寺)에 유생들의 출입을 금했다. 황언징은 식년 과거(科擧)시험을 1회에 걸쳐 보지 못하도록 명하고, 투옥해버렸다.

유생들이 거세게 반발했다. 1549년 9월 20일, 성균관 생원인 안사준(安士俊) 등은 보우를 요승(妖僧)으로 몰았다. 보우의 목을 베고, 투옥된 황언징을 석방해달라는 상소를 조정에 올렸다. 상소문을 본 문정대비는 불같이 격노했다. 탄압되었든 선교양종(禪敎兩宗)을 부활시켜 불교중흥을 할 수 있는 인재를 과거를 통해 선출하는 시점에 찬물을 끼엊는 것같은 유생들을 엄히 처벌할 것을 아들에게 명령했다. 격노한 문정대비는 전국의 큰 사찰의 입구에 하마비(下馬碑)를 세우게 했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사찰에 말을 타고 진압할 수 없도록 엄중히 조치했다. 효심지극한 명종은 추상같이 하마비를 세워 실시할 것을 명령했다. 지금도 사찰에 가면 하마비가 있다. 독자 여러분은 문정대비의 불심을 생각하며 하마비를 봐야 할 것이다.

유생들은 미친듯이 상소를 써 조정에 올렸다. 6개월 사이에 상소문이 무려 423건이나 되었고, 75(啓)나 되었다. 유생들은 보우대사를 요승, 역적으로 몰아 목을 벨 것을 주청했다. 상소문은 읽는 문정대비는 상소문을 올리는 자들은 불교중흥을 막는 마군이들이라고 저주를 퍼붓고, 상소문은 찢어 불태워버렸다. 효심이 지극한 명종은 불같이 화를 내는 어머니의 마음을 평안하게 해주고싶었다. 상소문이 오면 명종이 찢어 불태워 버리는 지경이 되었다. 유생들은 문정대비가 있는 한 보우대사를 해칠 수 없다는 것을 손으로 땅을 치며 개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녀가 하루속히 죽기를 고대했다.

보우대사는 "지금 내가 없으면 후세에 불법(佛法)이 영원히 끊어질 것이다,."라는 사명감과 신념을 가지고 불법을 보호하고 종단을 소생시키는 일에 목숨을 걸었다. 문정대비는 보우대사를 병조판서에 제수하려 들었다. 재색의 탐욕에 물든 속인보다 무소유의 비구승인 보우대사가 청정히 국사를 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보우대사는 사양으로 없던 걸로 됐지만, 전국의 유생들을 경악, 분노케 했다.

보우대사는 불교중흥을 위해서는 우선 도승제(度僧制)부터 추진했다. 명종 6年 11月월에 경국대전(經國大典), 도승법(度僧法)에 의거하여 선종(禪宗)에서 406명을 선발하여 예조(禮曹)에 보고했다. 우여곡절 끝에 명종 7年 8월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예조는 462名의 승려에게 처음으로 도첩(度牒)을 주었다. 승려면허증을 조정에서 발급한 것이다. 명종 8년 1월에는 선교양종에서 2천6백며명의 승려가 시험을 거쳐 예조로부터 2천5백8십명이 도첩을 받았다. 유생들은 더욱 상소를 올렸다.

한편 승려의 도첩제가 실시되고, 승과제가 시행되면서 사찰도 정비되었다. 명종 7年 1月에는 주지가 있는 절이 전국적으로 99사찰에서 395사찰로 늘어나게 되었다. 전국의 사부대중들은 문정대비와 보우대사의 노고에 환호하여 감사했다.

보우대사에게 봄날은 길지 않았다. 혹한의 바람이 들이 닥쳤다. 1565년 4월 7일, 문정대비 65세 때였다. 양주 회암사(檜巖寺)에서 주지 보우대사가 문정대비 참석하에 무차대회(無遮大會)를 여는데, 대회도중 문정대비가 쓰러져 의식을 잃었다. 긴급히 왕궁으로 옮겨 어의에게 진찰케 했지만, 문정대비는 소생하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보우대사를 미워하는 유생들은 어의에게 사인에 대해 압력을 넣었다. 사인은 문정대비의 사인은 연일 불교의 재(齎)를 지내기 위해 보우대사가 영양가 없는 소찬(素餐)만 먹게 하여 영양부족으로 죽게 했다는 것이다. 집단으로 문죄하는 상소를 올렸다. 여기에 18세 때 금강산 절에서 1년간 중노릇을 한 율곡 이이(李 珥)ehj ‘논요승보우소 (論妖僧普雨疏)’를 올려 그를 귀양 보낼것을 주장했다. 따라서 명종은 보우를 제주도로 귀양보낼 것을 허락하였다.

보우대사는 후견인인 문정대비가 죽자 졸지에 문정대비를 죽게 한 죄인이 되었다. 그는 1565년 6월 12일에서 7월 28일 사이에 포박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운명인가, 제주목사는 앞서 언급한 앙심을 품은 변협(邊協)이었다. 변협은 석일(昔日)의 앙심으로 옥속에서 항쇄(項鎖), 족쇄(足鎖)를 한 보우대사를 장사들을 시켜 매일 몰매를 가하도록 하고, 급기야 장살(仗殺)시켜버렸다. 보우대사의 죽음이 서울에 알려진 것은 1565년 10월 15일이었다. 보우대사는 억불정책 속에서 불교를 중흥시카려다 순교자가 되었다.

사명대사는 훗날, 울면서 보우대사의 문집인 허응당집 발문(虛應堂集 跋文)을 이렇게 적었다. "생각컨대 우리 대사께서는 동방의 한쪽 좁은 땅에 태어나 백세동안 전해지지 못했던 도(道))의 실마리를 열어 오늘날 배우는 자들이 이에 힘입어 그 돌아갈 바를 얻게 하시고 이 도(道() 하여금 마침내 사라지고 끊어지지 않게 하신분이다. 이 분이 아니었더라면 영악풍류(靈岳風流)와 소림곡자(小林曲子)가 거의 사라지고 들리지 않을뻔 하였다.-중략- 아! 이 글은 비록 전하나 만일 그 뜻을 알 수 있는 이가 아니면 누가 大師(대사)의 고귀한 뜻을 알겠는가?"

문정대비가 죽자 명종은 유생들 편에 서서 명종 21년 4월, 선교양종과 승과를 페지해버렸다. 죽은 어머니에게 효도를 할 생각이 없었든 것이다. 불교는 다시 암울한 시기에 빠져버렸다. 보우대사의 죽음을 보면서 서산, 사명대사는 권부에 가까이 하는 것은 호랑이와 가까이 하는 것이라는 것을 확연히 깨달았다. 훗날,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서산, 사명대사는 의승병을 일으키어 공을 세웠지만, 관작을 내리며 붙잡는 선조와 조정대신들을 뿌리치고 산으로 돌아갔다. 승려는 권부에서 호가호위(狐假虎威)나, 앞잡이가 돼서는 안되고, 언제나 무소유속에 산에 살아야 천수를 누린다는 교훈을 얻은 것이다. 보우대사는 죽음을 예감하면서 피할 수 없는 운명에 허탈하게 웃으며 이렇게 임종게(臨終偈)를 남겼다.


허깨비로 허깨비 고을에 들어와

오십여년 희롱하는 미치광이가 되었네.

인간의 영화롭고 욕된 일 농삼아 다하고

허수아비 승(僧) 벗고 푸른 하늘 오르네.


왜 유생들이 보우대사의 주살(誅殺)을 고집하여 상소를 올렸을까? 첫째, 억불숭유(抑佛崇儒)가 반대로 억유숭불(抑儒崇佛)로 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유생들이 더크게 격노한 것은 과부가 된 문정대비의 금남궁궐(禁男宮闕)을 수시로 출입하여 정사를 좌지우지 하는 것에 대한 분노가 컸다고 볼 수 있다.

결론은 어떤가? 보우대사는 청정히 일편단심으로 불교중흥을 꾀했지만, 문정왕후가 죽는순간 유생들과 명종의 묵인하에 장하(仗下)의 이슬이 되어 버렸다. 권력자는 호랑이와 같다고 했다. 호랑이와 친하면 언제 호랑이에게 죽을지 모르는 것처럼, 권력자는 마음이 바뀌면 죽이는 것이다. 명태조는 신하 죽이기를 좋아하여 신하들이 황제앞에 나갈 때는 미리 가족과 하직인사를 했다는 말이 전해온다. 출가수행자는 오직 부처님을 의지하여 수행과 전법을 하고, 중생을 위해 헌신봉사 할 것이지 권력이 있는 임금이나 대비와 친하여 고귀함을 얻으면 천수를 누리지 못한다는 것을 보우대사의 비극에서 각성해야 할 것이다. ◇

이 법 철(bubchul@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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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학교? 혁신은 개뿔! 애들 학력만 퇴행중! 교무실 커피자판기, 교사 항공권 구입에 물 쓰듯...특혜 불구 학력은 뒷걸음 일반학교에 비해 연간 1억4,000~1억5,000만원을 특별히 지원받는 서울형 혁신학교가 예산을 엉뚱한 곳에 쓰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특별예산(학교운영비)으로 교사실의 각종 책장이나 가구를 구입했고, 수백만원을 들여 학습자료 저장용 USB와 외장하드를 사서 나눠 갖은 사실도 밝혀졌다. 교무실 커피자판기를 구입하는데 특별예산을 쓴 혁신학교도 있었다. 이밖에도 여직원 휴게실 가스보일러 교체, 부장교사 워크숍 항공권 구입, 교직원 전체 체육복 구입 등 본래 목적과는 거리가 먼 곳에 특별예산을 물 쓰듯 전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학생들에 대한 선심성 예산 집행 정황도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학생 티셔츠 구입, 진공청소기 구입 등에 특별예산을 수백만원씩 사용했다. 학생들의 생일축하용 떡케익 구입비용으로 매달 70~90만원을 사용한 곳도 있었다. 반면 서울형 혁신학교의 학력은 일반학교에 비해 오히려 뒷걸음질 친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내용은 서울시교육청이 새누리당 강은희 의원에게 제출한 2012년 혁신학교 정산서 통합지출부를 통해 밝혀졌다. 서울형 혁신학교는 곽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