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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뉴스

李明博과 한국은 어디로 갈 것인가?

지난 12월19일 한국은 한 고비를 넘었다. 그러나 天國이 도래한 것은 아니다.

李明博과 한국은 어디로 갈 것인가?
지난 12월19일 한국은 한 고비를 넘었다. 그러나 天國이 도래한 것은 아니다.
趙甲濟

朴正熙가 만든 무대의 한 주인공

오는 2월말 李明博 당선자(67세)는 올해 建國 60주년을 맞는 대한민국의 열 명째 대통령이 된다. 그는 첫 번째 商人 출신 대통령이고 네 번째 바닷가 출신 대통령이다. 金泳三 전 대통령의 고향은 巨濟島, 金大中의 고향은 하의도, 盧武鉉의 고향은 바닷가인 김해, 李明博 당선자의 고향은 유명한 제철소가 있는 항구 浦港이다. 1945년에 일본으로부터 해방되자마자 남북으로 分斷된 이후 南韓은 3면의 바다와 휴전선에 의해 사실상 섬이 되었다. 한국인들은 먹고살기 위해서 바다로, 해외로 나아가야 했다. 수출이 살 길이었다. 市場을 찾아 월남, 중동을 거쳐 미국 유럽 아프리카 南美, 냉전 종식 이후엔 유라시아 대륙으로 진출했다. 한국은 미국, 유럽, 일본 등 해양국가와 손을 잡았고 해양국가들이 발전시킨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국가 이념으로 받아들였다. 한국은 지난 60년간 전면적인 해양화의 길을 걸어왔다.
한국에서 잘 사는 곳은 臨海공업 시설이 몰린 바닷가와 섬이다. 큰 조선소가 있는 巨濟島와 중화학 工團이 들어선 蔚山은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를 넘었다. 바닷가 사람들은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강인하고 진취적이다. 한국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발전시키는 데 礎石을 놓았던 李承晩, 朴正熙는 내륙지방 출신이었지만 청년기에 유학을 하고 해외경험을 했던 해양적 인물이었다. 반면 金日成 金正日은 바다를 멀리하고 해외여행을 거의 하지 않는 내륙型이다.
한국의 역대 대통령 10명중 세 명은 군인 출신 대통령이다. 가마쿠라 막부 이후 明治維新까지 약700년간 武士통치가 이어졌던 일본과는 반대로 한국에서 군인 출신들이 정권을 잡은 것은 12세기 고려 武臣亂 이후 1961년의 5·16 군사혁명이 처음이었다. 군인 출신 대통령과 상인 출신 대통령이 10명중 네 사람이나 된다는 것은 군인과 기업인이 주도해온 한국의 근대화를 상징한다.
朴正熙 장군이 주도한 한국의 경제발전은 군인이 商人들을 정치적으로 밀어줌으로써 가능했다. 李明博 대통령 당선자는 朴正熙가 만든 開發年代라는 무대에 등장하여 성공한 주인공 중 한 사람이다. 1941년 일본 오오사카에서 태어난 그는 네 살 때 포항으로 돌아와 가난하게 살았다. 고등학교는 야간부를 다녔고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학비를 벌어 고려대학에 들어갔다. 대학재학중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이끌다가 옥살이도 했다. 開發연대의 미덕은 생산과 건설이었고 이런 새로운 시대를 상징한 회사가 石工 출신 기업인 鄭周永의 現代建設이었다. 李明博은 1965년에 이 회사에 들어가자마자 鄭周永의 눈에 들어 35세에 사장이 되었다. 1970년대에 이미 李明博은 봉급생활자의 한 偶像이었다. 李明博은 지난 30년간 한국 사회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이름 중 하나였다.

淸溪川 복원공사 성공

그는 1992년에 여당인 民自黨의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해 별도의 黨을 만들어 대통령 후보로 나섰던 鄭周永과는 다른 길을 가게 되었다. 李明博 의원은 1996년 총선 때 서울 종로에서 출마하여 李鍾贊(전 국정원장), 盧武鉉(현 대통령)에게 이기고 당선되었다. 선거비용 누락 신고 등의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던중 의원직을 사퇴하였다. 그는 미국에서 수년간 滯留하다가 귀국하여 사이버 금융사업을 시작하였으나 실패했다.
지난 대통령 선거 때 가장 큰 쟁점이 되었던 이른바 BBK 주가조작 관련 사건은 이때의 일이다. 그는 2002년엔 야당인 한나라당의 공천으로 서울시장 선거에 나서 당선되자마자 많은 사람들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淸溪川 복원공사에 착수했다. 工事 자체보다도 수십 만 명의 청계천 주변 商人들을 설득하는 것이 더 어려웠다. 覆蓋된 청계천 주변에서 수십년간 生業을 이어온 이들을 移住시키는 일을 李明博은 무리 없이 해냈다. 2005년 가을엔 드디어 서울 도심부에 6km의 물줄기가 복원되었고 이곳은 문화공간 겸 관광명소로 변했다. 盧武鉉 대통령이 예절 없는 언행으로 국민들을 짜증 나게 만들던 시기에 청계천은 하나의 위안이 되었다.
청계천 공사가 한창이던 때 만난 李明博 시장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朴正熙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왜 높은지 압니까? 그분의 功績에 대해서는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보면 다 압니다. 그분이 만든 고속도로나 거대한 중화학 工團이 바로 그분의 성적표입니다.”
주말마다 수십만 명이 모여 일종의 공원으로 변한 淸溪川이 아마도 李明博씨의 최고 선거 운동원이었을 것이다. 그의 다른 선거운동원은 盧武鉉 대통령이었다. 그의 失政과 오만이 많은 국민들을 화 나게 만들어 야당 지지로 돌아서게 했다. 입만 열면 개혁, 진보, 통일을 외치는 좌파세력이 國政을 운영할 능력과 양식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모범으로 보여준 이가 盧 대통령이었다.
李明博 서울시장은 또 버스 전용차선을 만들고 버스와 지하철을 연계하는 아주 편리한 종합 대중교통 시스템을 단기간에 완성했다. 서울시의 빚도 많이 줄였다. 현대건설에서 體得한 생산적인 리더십을 행정 부문에 적용하여 성공했다. 그는 盧武鉉 대통령이 추진하던 首都이전에 반대했다. 반대자들이 수도이전은 헌법위반이라고 헌법재판소에 提訴하여 이기도록 하는 일에서도 뒷받침을 많이 했다. 무능하고 오만한 좌파정권에 신물이 나 있던 국민들에게 李明博 시장은 일을 잘 하는 사람이란 인상을 확실히 심었다.

運이 강한 사람

朴正熙는 士農工商의 전근대적 신분질서를 商工農士로 바꿔야 한다고 굳게 믿었던 사람이다. 즉 무역을 하고 기업을 경영하는 商人 계층이 11세기 이후 권력을 독점해왔던 지식인 계층(士)을 누르고 한국 사회에서 지도적 위치에 올라야 국가가 발전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1993년 이후 15년간 민주투사로 불린 세 대통령이 國政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한국사회는 좌경화되었다. 조선조적인 위선적 명분론을 이어받은 것이 친북좌익 세력이었다. 이들은 金正日 정권의 對南工作기지화되었다. 국가조종실을 차지하여 남한 사회의 주도권을 잡은 親北좌파 세력이 한국의 主敵인 金正日 정권과 손을 잡고 보수층을 몰아세웠던 기간에 金正日은 남한 정권의 경제적 지원과 庇護를 받아가면서 핵실험을 했고 韓美동맹은 약화되고 韓日관계는 악화되었다. 商人 출신 李明博 대통령의 등장과 한국의 보수화는 이 좌경화 흐름에 대한 반동이었다. 한국 사회의 친북좌경화는 이제 제동이 걸리게 되었다.
李明博 한나라당 후보는 자신의 운명에 대한 확신이 매우 센 사람이다. 지난 여름 한나라당 안에서 대통령 후보 자리를 놓고 朴正熙의 딸 朴槿惠씨와 치열한 競選을 벌이고 있던 때 만난 그는 나에게 자신의 이름 풀이를 했다. 어머니의 胎夢(태몽)이, 환한 해가 몸속으로 들어오는 것이라 아버지가 이름을 明博(널리 비친다)이라 지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름에 해와 달이 있어서 그런지 비가 내리던 행사도 내가 참석하면 개이는 경우가 많다”고 자랑했다. 그는 국회의원들과 함께 白頭山에 오른 적이 있었다. 한 同行者의 증언에 따르면 출발 전에 頂上에 구름이 끼어 있다는 말을 듣고 李明博 당시 시장은 “내가 가면 틀림 없이 개일 터이니 갑시다”라고 말했다. 일행이 백두산 꼭대기에 올랐을 때 과연 구름이 걷히더라고 한다. 그는 독실한 新敎徒이다. 서울 江南 지역의 소망교회 長老로서 일요일마다 駐車場 정리를 오랫동안 했다.
그가 대통령에 당선된 과정은 그야말로 행운의 연속이었다.
1. 2006년 10월9일 金正日의 핵실험이 그를 도왔다. 그때까지 李 전 시장은 朴槿惠 전 한나라당 대표를 여론조사에서 쫓아가고 있는 입장이었다. 朴 전 대표는 칼을 맞아가면서 그해 5월의 지방선거를 한나라당의 大勝으로 이끌었다. 金正日의 핵실험 이후 李明博 지지율이 朴 전 대표를 앞서기 시작했다. 위기가 조성되니 여성보다는 남성 쪽으로 여론이 기운 면도 있고, 상대적으로 安保型으로 알려져 있었던 朴槿惠씨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단호한 태도를 보여주지 못한 것이 원인이었다.
2. 2007년 초 黨內 지지율에서 3등을 달리던 孫鶴圭 전 경기도 지사가 한나라당을 탈당한 것도 결과적으로 李 후보의 競選 승리를 도왔다. 孫 전 지사는 한나라당내에서 李明博씨와 中道 표를 共有하고 있었다. 만약 孫鶴圭씨가 한나라당 競選에 참여하여 3파전이 되었다면 李 후보는 中道 표를 상당 수 빼앗겨 朴 전 대표에게 졌을 가능성이 높다.
3. 競選이 막바지로 치닫던 2007년 7월 하순 아프가니스탄에서 수십 명의 한국인들이 탈레반에 납치되어 두 명이 피살되는 사건이 터졌다. 李 후보에 대한 朴 캠프의 의혹 폭로 공세가 한창일 때였다. 人質사태는 열흘 정도 한나라당 競選에 대한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버렸고 李明博씨는 치명타를 면했다.
4. 작년 8월8일, 盧武鉉 대통령과 金正日 사이에 제2차 평양회담이 있을 예정이란 발표가 있었다. 이 뉴스 또한 사흘 정도 李明博 후보에 대한 폭로 공세를 둔하게 만들었다. 이 회담 발표는 朴槿惠 전 대표의 기회였다. 제2차 평양회담의 위험성을 지적하여 자신의 보수성을 부각시킬 수 있었는데 朴 전 대표는 그 5년 전에 만났던 金正日을 의식했음인지 애매한 태도를 보여 反轉의 기회를 놓쳤다.
5. 8월19일 한나라당 競選 당일 비가 왔더라면 李明博 후보의 주된 지지층인 청장년층의 투표율이 朴 전 대표 지지층인 老年層보다 낮아져 勝敗가 바뀌었을 가능성이 있다. 날씨가 나빠지면 청장년층은 투표를 하러 가지 않는 경향이 있다.
6. 북한정권이 水害를 이유로 평양회담 날짜를 30여일이나 늦춘 것도 노무현-김정일 회담으로 대통령 선거에 영향을 끼칠 타이밍을 놓치는 결과를 만들었다.
7. 신장개업한 여당인 대통합민주신당의 대통령 후보 競選이 시작되는 것과 타이밍을 맞추어 터진 신정아 스캔들(노무현 정부의 장관급 인사가 관련된 권력형 부패사건)은 국민들의 관심을 사로잡아 경선의 興行을 망쳤다.
8. 투표를 40여일 앞두고 李會昌 전 한나라당 총재가 무소속으로 출마한 것도 李明博 후보를 도왔다. 보수 후보가 두 사람이 됨으로써 테러 위험이 사라졌고, 여당 후보인 鄭東泳 지지율이 여론조사에서 3위로 밀리면서 汎與圈 후보들이 단일화를 해도 이길 수 없다는 절망감을 확산시켰다.
9. BBK 관련 의혹과 관련하여 그는 투표 사흘 전 큰 위기를 만났다. 2001년에 한 대학에서 강연을 하면서 자신이 BBK를 설립하여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다고 자랑하는 장면을 담은 비디오가 與黨에 의해 폭로되었다. 그때까지 李明博 후보는 자신은 BBK란 회사의 경영과는 無關하고 주가조작의 피해자라고 주장해왔었다. 여론이 악화되자 李明博 후보는 야당에 제안한 특검법을 수용했다. 특검 수사는 현재 진행중이다. 이 폭로도 결과적으로는 李 후보를 도왔다. 李會昌 후보를 지지하던 이들이 표가 분산되면 여당 후보가 당선될지 모른다고 불안해져서 李明博씨에게 표를 몰아주었다.

강해진 보수세력

2007년 12월19일 대통령 선거는 李明博과 한나라당의 승리라기보다는 보수층의 승리라고 규정하는 것이 맞다. 李明博 후보는 약49%의 득표로써 여당 후보 鄭東泳 씨를 531만 표의 大差로 이겼으나 그가 받은 득표율과 표수는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었던 盧武鉉 정도였다. 李明博 후보는 과반수 득표에도 실패했다. 여유를 느낀 한국 보수층이 李明博, 李會昌(득표율 15.1%) 두 후보한테 표를 갈라주었기 때문이다. 두 李씨 표를 합하면 약64%이다. 극좌파인 民勞黨 權永吉 후보는 3%를 받았다. 보수층을 主語로 삼아야 지난 선거의 의미가 제대로 보인다는 이야기이다. 보수층이 만든 大勢를 李明博과 한나라당이 잘 이용한 것이다. 정치인은 大勢를 만들 수 없고 이용만 할 뿐이란 말이 있다. 李明博 후보는 商人기질을 잘 발휘하여 아주 實利的인 선거 전략으로써 2005년부터 두드러지기 시작했던 한국의 보수화 흐름을 타고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反국가적 좌파정권을 투표로써 조용하게 끝장낸 이 선거를 ‘나의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다. “나도 한 몫 했다”는 뜻이다. 보수층은 체제가 걸린 이번 선거의 구경꾼이 아니었다.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승리에 한 몫씩을 했다. 그리하여 보수혁명의 참여자가 되었다. 그들은 서울시청 광장에서 열린 保安法 폐지 반대 시위에 참석하여 물대포를 맞았다. 국민행동본부라는 우파 단체는 국민들의 후원금으로 지난 5년간 약300회의 反좌파 의견 광고를 신문에 냈다. 보수층은 이 광고를 오려서 아들과 사위에게 돌리고 후원회비를 보내주고 친북정책의 사령탑인 통일부에 전화를 걸어 따졌다. 직장과 학교와 고향의 후배들에게, 대한민국이 어떻게 만들어진 나라인지, 미국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朴正熙가 집권한 1961년의 삶이 어떠했는지, 1950~60년대에 취직이란 단어가 어떤 의미를 지녔던가를 울분을 토하듯이 말해주었다.
나이 70에 인터넷을 배워 20대 청년들과 댓글 싸움도 했다. 맥아더 동상을 부수려는 손자뻘 되는 철부지들에게 계란을 던진 것도 그들이었다. 거리로 나와서 행동하는 ‘아스팔트 우파’가 등장하여 대중 동원력에서도 좌파를 앞섰다.
12.19 大選은 세 번째의 해방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많았다. 1945년 8.15 광복은 미군의 덕분이었다. 1950년 9월28일의 서울 수복은 유엔군의 덕분이었다. 2007년 12월29일 선거에서 친북좌파 정권을 끝장낸 힘은 한국의 민주주의에서 나왔다. 진정한 의미의 자주적 국민혁명이었다. 후진국에선 총칼로만 할 수 있는 일을 한국인은 조용하게 평화적으로 해냈다. 민주주의의 힘으로 민주주의를 지켜냈다. 12.19는 무엇보다도 한국 민주주의의 승리였다.

일머리를 아는 사람

李明博이란 이름을 대면 많은 한국인들은 ‘일’이란 낱말을 떠올린다. 그는 일머리를 아는 사람, 일자리를 많이 만들 사람, 무엇보다도 한국의 공무원들에게 일을 많이 시킬 사람이다. 2006년 여름 점심식사 시간에 만난 李明博 전 서울시장은 앉자마자 「일」을 이야기했다.
『일자리가 모자라고 일할 것이 없으니 國論 분열이 일어나는 겁니다. 사람이 일에 빠지고 바빠지면 엉뚱한 생각을 할 틈이 없어요』
그는 『일을 통한 행복』이 인생의 기본이라면서 정치인은 그런 일감을 만들어주는 것이 의무라고 했다. 李 전 시장은 독일통일을 주도한 鐵血 재상 비스마르크가 젊은이들에게 했다는 말을 인용했다.
『일하라! 더 일하라! 죽을 때까지 일하라!』
그는 이런 말도 덧붙였다.
『이것도 비스마르크가 한 말인데, 운명에 도전하라, 그러면 운명이 피할 것이다』
비스마르크는 노동자들의 정치활동을 많이 규제했지만 노동자들을 위한 복지제도를 가장 많이 도입한 사람이기도 했다. 李 전 시장은 『죽을 때까지 일하라는 것은 일을 많이 하라는 뜻도 되지만 사람은 죽을 때까지 일감을 가져야 한다는 말인데, 우리 현실에선 매우 절실한 문제이다』고 말했다.
『젊은 층에 일자리를 만들어주고 노년층이 계속해서 일을 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하고 경제를 성장시켜야 합니다. 지금의 60, 70대는 과거의 청장년층에 지지 않을 정도로 건강합니다. 이들이 일을 놓으면 국가적 손해이고 인생이 불행해집니다. 임금 피크제를 실시하고 停年제도를 고치든지 하여 70세까지는 일을 할 수 있도록 하고 그 뒤에도 사회봉사 등 公益을 위한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는 당시 국가적 논쟁거리가 되었던 戰時작전권 문제에 대해서 방금 KBS 라디오와 인터뷰하고 오는 길이라면서 이런 말을 했다.
『정부가 미국측에 대해서 제발 2012년까지 이양 시기를 늦추어달라고 애걸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어떻게 이런 식의 협상을 하는지 기가 막힙니다. 이런 협상은 중소기업도 안합니다. 수출을 해본 국제 감각이 있는 중소기업 수준보다도 못한 짓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상태에서 최선은 戰作權 협상을 질질 끌어서 차기 정부로 넘기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韓美간에 합의가 되더라도 차기 정부에선 반드시 재협상을 해야 한다고 재삼 강조했다.
『그렇게 하면 우리가 상당한 代價를 지불해야겠지만 국가이익을 위해선 그렇게라도 해야 합니다』
李明博 당선 이후 韓美연합사를 해체하기로 한 2006년의 韓美합의를 재검토해야 한다는 말들이 나오고 있다.
李明博 전 시장은 대학생들에게 한 이야기들을 소개했다.
『6·25 때 우리가 北侵했다고 믿는 학생들이 있어 제가 이렇게 말했어요. 「내가 그때 포항에 살았는데 나는 남쪽으로 피란했다. 北侵했는데 北으로 가지 않고 어떻게 남쪽에서 남쪽으로 피란을 가는가 말이다」』
李明博 전 시장은 차기 정부가 해야 할 일중에서 특히 法治확립을 강조했다. 아무리 좌파가 사회 구석구석에 많이 박혀 있더라도 법대로 하면 질서를 잡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勞組 전임자에 대한 「무노동 무임금」 면제 특혜를 또 5년 연장한다고 하는데 말이 안됩니다. 나 같으면 대기업 노조에 대해선 무노동 무임금 면제특혜를 폐지하고 중소기업 노동자에 대해선 면제를 해줄 겁니다. 대기업 노동자들은 회사를 그만두어도 한동안 버틸 수 있지만 중소기업 노동자들은 그런 여유가 없어요. 인원이 열 명도 안 되는 自營업소에 고용된 노동자가 전체의 45%나 됩니다. 이들이 얼마나 먹고살기 힘든지 압니까?』

안이한 對北觀

李明博 당선자는 북한정권에 대해서도 인권문제를 당당하게 거론하겠다고 공언했다. 金大中, 盧武鉉 정권은 김정일 정권에 일방적 경제지원을 해주고도 북한정권이 불법으로 억류하고 있는 납북자와 국군포로를 한 사람도 데려오지 못했다. 擧論조차 하지 않았다. 보수층이 기대하는 대로 李明博 정부가 북한인권 문제를 北核문제에 버금가는 정도로 제기할 수 있을지는 더 지켜봐야 할 것이다. 북한정권의 선전매체들은 지난 10월까지는 李明博 후보를 공격했으나 11월에 들어서는 李會昌 후보만 공격하고 李明博 공격을 중단한 상태이다. 경제적 지원을 부탁해야 할 새 남한 정부를 자극하지 않으려는 것 같다. 북한이 李會昌씨를 공격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李會昌씨는 自由新黨(가칭)이란 강경 보수정당을 만들어 오는 4월 국회의원 선거에서 제2당이 되겠다고 나섰다. 북한은 李會昌 당이 만들어지면 李明博의 한나라당과 보수선명 경쟁을 벌여 李明博 정부를 反北化 내지 강경 보수화시킬 것이라고 판단한 듯하다. 지금까지는 한나라당이 국회내 두 개의 좌파정당과 싸우면서 좌경화했는데 보수정당이 두 개 생기면 정계가 자연스럽게 우경화할 가능성이 높다.
李明博 당선자는 그러나 레이건이나 대처 같은 이념형 보수 정치가는 아니다. 李明博씨의 최근 발언들을 살펴보면 金正日 정권의 본질에 대해서 다소 非실용적(관념적) 이해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金正日 정권이 개방을 하지 못하는 것은 체제붕괴를 우려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정권과 군부를, 대화를 통해서 안심시켜주어야 하며 그런 노력은 자신의 구호가 된 "非核-개방-3000달러" 구상 정도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金大中-盧武鉉 대통령의 對北觀과 비슷한 점이 많다.
金大中 盧武鉉 정권도 같은 인식에서 지난 10년간 약100억 달러 규모의 對北 경제지원을 했다. 북한이 납북자와 국군포로를 보내주지 않아도, 핵실험을 하고 미사일을 개발해도, 서해 도발을 계속해도, 남과 맺은 약속을 거의 다 파기해도 한국측은 지원하고 대화했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김정일 정권은 1998년과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국제사회와 남한을 협박하고 뜯어먹어야 생존이 가능한 집단으로 남아 있다. 10년 실험의 결론은 自明하다. 미국의 전 유엔대사 볼튼의 말대로 김정일이 다이어트를 하도록 만들지 않으면, 애국행동단체의 성명대로 김정일을 굶기지 않으면 북한주민을 위한 개혁 개방은 일어날 수 없다.

‘非核-개방-3000달러 구상’은 夢想

김정일 정권은 아직 한번도 死活의 선택을 강요받아 본 적이 없다. 개혁 개방을 하지 않으면 본인과 체제가 멸망한다는 위기감을 느껴본 적이 없다. 수십억 달러의 비자금을 해외에 숨겨놓고 매일 파리에서 아이스크림을 空輸(공수)해오고, 병당 2000달러 하는 꼬냑 타임레스를 무더기로 수입하여 지옥 속에서 천당생활을 하는 김정일과 그 측근들이 북한주민들처럼 위기감을 느끼려면 對北압박이 강화되어야 한다.
李明博 당선자와 미국의 부시 행정부는 김정일 정권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정상적인 국가의 정상적인 지도자의 관점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비정상적인 정권을 이해하려고 한다. 金正日 정권은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면 사라져야 하는 존재이다. 북핵 문제 같은 것을 일으키고 있으므로 세계가 북한정권에 관심을 주고 달래려 한다. 이런 문제가 없고 위협요인이 되지 않는 북한정권을 어느 나라가 도와주려 할 것인가? 金正日 정권은 문제해결이 아니라 문제지속이 생존 전략이다.
미국과 한국이 이런 金正日 정권을 보장해줄 순 없다. 金正日은 그런 요구를 하지도 않는다. 한국의 햇볕정책론자들이 일방적 對北지원을 만들어낸 논리에 李明博 당선자도 영향을 받고 있는 듯하다.
북한정권은 자유세계 지도자의 약점, 즉 자신의 임기 내에 문제를 해결하여 인기를 얻어 보겠다는 욕심을 역이용해왔다. 金正日 정권을 상대로 문제를 빨리 해결하겠다고 서둘면 반드시 그들의 페이스에 말려든다. 그런 점에서 李明博 당선자는 첫 걸음을 잘못 딛고 있다. "非核 개방 3000달러 구상"은 정책이 아니라 꿈이다. 북한의 실질적 1인당 국민소득은 300달러이다. 북한은 물론 경제 통계를 발표한 적이 없다. 한국측에서 아주 낡은 모델로 推計하고 있는데 1000달러 정도로 과대평가하고 있다. 북한주민들이 1인당 1000달러 소득을 누리는 나라로 나오면 지옥에서 천당으로 옮겨온 것 같은 충격에 빠질 것이다. 그런 북한체제의 소득을 10배로 올린다는 것은 정책이 아니라 夢想인 것이다.
李明博 당선자는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기만 하면 前 정권보다 더 많이 퍼주겠다는 생각을 여러 차례 드러냈다.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해도 따져야 할 것들이 있다. 6·25 전쟁중 납북자들의 운명을 알아야 한다. 戰後 납북자 500명을 돌려받아야 한다. 휴전협정을 어기고 그들이 不法억류한 국군포로 수만 명의 운명을 알아야 하고 생존자를 돌려받아야 한다. 유태인수용소 같은 강제수용소를 폐지해야 한다. 어떤 면에선 北核보다도 이런 인권문제가 더 시급하다. 金正日 정권은 한국인뿐 아니라 일본인 등 10여개국의 인간들을 납치했다. 일종의 인종 수집가이다. 李明博 정부가 일본 등 피해당사국과 연대하여 북한을 압박하는 데까지 갈 수 있다면 韓日관계도 좋아질 것이다.

韓美日 관계는 정상화될 것

李明博 정부는 韓美, 韓日 관계를 개선하는 노력을 할 것이다. 노무현 정권 들어서 韓美, 韓日관계가 나빠진 것은 불가피한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는 盧 정권의 좌경적 이데올로기가 아마추어식 외교를 하다가 보니까 그렇게 된 점이 있다. 실용주의를 표방하는 李明博 정부가 그런 식 외교를 할 것 같지는 않다. 韓美日 관계가 좋아지는 것이 한국의 反중국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1992년 韓中 修交 이후 두 나라의 무역관계는 비약적 발전을 지속해왔다. 한 경제학자는 “중국 경제가 잘 되는 한 한국의 위기는 없다”는 말까지 한다.
작년 한국의 對中수출액은 약800억 달러였다. 이는 전체 수출액의 약22%였다. 對美 수출액 441억 달러(전체의 12.3%), 對日 수출액 255억 달러(7.1%)를 합친 것보다 많다. 한국은 작년 중국으로부터 612억 달러어치를 수입했다. 이는 전체 수입액의 17.7%였다.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545억 달러(전체의 15.8%), 미국으로부터는 361억 달러어치(전체의 10.5%)를 수입했다. 韓中 무역액은 약1420억 달러로서 전체 무역액의 약20%이며, 韓美, 韓日무역액을 합친 것과 거의 같다.
무역수지를 보면 한국은 對中 무역에서 181억 달러, 對美무역에서 약80억 달러의 흑자를 기록했으나 對日 무역에서 약290억 달러의 적자를 기록하였다. 한국은 미국, 중국, 일본 중 어느 나라와도 敵對관계를 만들어선 안 되는 나라이다. 盧武鉉 정권은 對北 정책에서 미국 및 일본보다는 북한 및 중국과 더 긴밀하게 협조하는 모습을 보일 때가 있었다. 韓美, 韓日관계가 복원되면 北核 폐기를 위한 對北 압박은 전보다는 더 손발이 맞게 될 것이다. 한국의 보수화와 보수정권의 등장은 동북아의 역학관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이다.
오는 4월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좌파세력은 몰락 수준의 타격을 입을 것이다. 대통령과 국회의 권력이 보수파로 넘어가면 좌파가 장악한 사회 및 문화 권력도 交替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大選, 總選에 이은 제3의 좌우 대결이 벌어질 것이다. 좌파정권의 비호하에 많은 좌경적 인사들이 정부내의 각종 위원회와 언론, 학교, 노조, 그리고 NGO 조직에 들어가 있다. 이들이 풍성한 자금을 써가면서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正體性을 훼손해간 것이 지난 10년이었다.
대표적인 우파행동 조직인 국민행동본부는 올해의 목표를 ‘親北청산, 保守自淨, 法治확립’이라고 선언했다. 도전자 입장에서 챔피언 자리로 돌아온 보수층은 지도층과 公職사회의 고질적 문제인 부패를 청산하여 스스로 깨끗해져야 법과 질서를 확립하고 反헌법적 좌경세력을 규제할 수 있다. 이것이 한국의 어린 민주주의가 어른이 되어가는 길이기도 할 것이다. 한국 민주주의의 성장과 발전의 자연스런 결과가 자유통일이고 국가 선진화일 것이다. 지난 12월19일 한국은 한 고비를 넘었다. 그러나 天國이 도래한 것은 아니다.


혁신학교? 혁신은 개뿔! 애들 학력만 퇴행중! 교무실 커피자판기, 교사 항공권 구입에 물 쓰듯...특혜 불구 학력은 뒷걸음 일반학교에 비해 연간 1억4,000~1억5,000만원을 특별히 지원받는 서울형 혁신학교가 예산을 엉뚱한 곳에 쓰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특별예산(학교운영비)으로 교사실의 각종 책장이나 가구를 구입했고, 수백만원을 들여 학습자료 저장용 USB와 외장하드를 사서 나눠 갖은 사실도 밝혀졌다. 교무실 커피자판기를 구입하는데 특별예산을 쓴 혁신학교도 있었다. 이밖에도 여직원 휴게실 가스보일러 교체, 부장교사 워크숍 항공권 구입, 교직원 전체 체육복 구입 등 본래 목적과는 거리가 먼 곳에 특별예산을 물 쓰듯 전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학생들에 대한 선심성 예산 집행 정황도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학생 티셔츠 구입, 진공청소기 구입 등에 특별예산을 수백만원씩 사용했다. 학생들의 생일축하용 떡케익 구입비용으로 매달 70~90만원을 사용한 곳도 있었다. 반면 서울형 혁신학교의 학력은 일반학교에 비해 오히려 뒷걸음질 친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내용은 서울시교육청이 새누리당 강은희 의원에게 제출한 2012년 혁신학교 정산서 통합지출부를 통해 밝혀졌다. 서울형 혁신학교는 곽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