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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뉴스

도산 안창호의 社會主義者的 활동前歷 .

10만원권 화폐 초상화에 도산 안창호도 부적절하다

도산 안창호의 社會主義者的 활동前歷

10만원권 화폐 초상화에 도산 안창호도 부적절하다

이준식 성균관대 연구원

[편집자 주: 요즘 한국의 10만원권 지폐에 들어간 초상을 두고 논란이 분분하다. 노무현 좌파정권이 김구를 10만원권 지폐의 초상인물로 서둘러 선정한 것에 대한 비난이 보수진영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다. 노무현 좌파정권은 김구를 영웅시하기 위하여 조급하게 10만원권에 초상인물로 확정했다는 의혹이 곳곳에서 제기된다. 김구를 10만원권 화폐로 결정한 선정위원들의 명단을 공개하라는 목소리도 있고, 적절한 여론수렴이 없이 김구를 10만원권 초상인물로 선정했다는 비난도 일고 있다. 오늘날 실리주의자의 눈으로 평가한다면, 백범 김구는 사실상 10만원권에 대표될 인물로서는 애매한 이념적 성향을 지닌 비현실적 민족지도자였다.

좌우세력의 중간적 입장으로 남북한을 통일해야 한다는 핑계로 남한의 좌파세력은 이승만을 경시하고 김구를 중시하는 인물평을 강화시켜나갔으나, 국민들은 대한민국을 건국한 이승만에 대한 평가가 폭발적으로 좋아지고 있다. 집권 좌파세력의 퇴출로, 김구와 김대중에 대한 호평은 약화되고, 이승만과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날로 좋아진다. 그 결과 졸속으로 서둘러 선정된 김구 대신이 이승만이나 박정희를 10만원권 화폐에 초상인물로 다시 선정하라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승만 수준의 훌륭한 건국 대통령을 오직 독재자로 혹평하여 학대하는 나라는 자학적 좌파 지식인들이 역사를 오판하는 한국 뿐일 것이다.

건국 대통령인 이승만이 10만원권 초상화에 들어가야 한다는 주장이 강하게 대두되는 가운데,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가 좋아하는 인물이라는 도산 안창호도 10만원권 초상화의 대상인물로 주목을 받는다. 그런데 이승만을 제외하면 김구와 안창호는 모두 확고한 우파인물이 아니라는 주장이 우파진영에서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김구는 좌우를 왔다갔다 한 몽상적 비현실주의자로 비판을 받고 있으며, 추앙받는 도산 안창호도 좌파적 이념에 친화적인 주장들을 가끔 폈다고 비판받고 있다. 여기에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의 좌파적 성향의 행적을 기록한 이준식 성균관대 연구원의 논문이 그를 판단하는 데에 참고가 될 것 같아 게재한다. 조영환 편집인: http://allinkorea.net]



안창호와 사회주의(이준식 성균관대 연구원/김효선 이승만연구자 제공)

제32회 도산사상연구발표회 2007년 5월 15일 오후 2시/ 도산안창호기념관 점진홀

1. 머리말

오늘의 발표는 아주 작은 두 개의 단서에서 출발했다. 그 하나는 《주간조선》 1719호(2002년 9월 5일)에 실린 「[발굴 특종] 77년 만에 밝혀지는 ‘모함 투서’의 진상」이라는 제목의 기사이다. 이 기사에 따르면 “도산 안창호가 미국에서 마지막 독립운동을 하던 1925년 당시 소련 공산당과 연계가 있다고 모함한 한 투서로, 미 정부 당국의 감시 대상 속에서 심문과 가택 수색까지 당한 사실이 77년 만에 처음 밝혀졌다” 는 것이다. 그런데 정확하게 말하면 이 기사는 특종이 아니다. 안창호가 ‘공산주의’ 관련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는 사실 자체는 이미 오래 전부터 알려져 있었다.

이 사실이 처음으로 등장한 자료는《신한민보》 1925년 6월 25일자의 「안창호씨도 쏘비에트주의자라고」라는 제목의 기사이다. 안창호가 “미국에서 볼셰비키주의를 선전하므로 미국 법률에 범하였다”는 이유로 추방될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이었다. 한편 김산(본명은 장지락)이라는, 당시로서는 무명에 가까운 조선인, 혁명가의 삶을 그린 책으로 유명한『아리랑』에도 “1924영(1925년-발표자) 샌프란시스코에서 공산주의 서적을 자택에 소지하고 있다는 이유로 검거 되었지만,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다음날 석방되었다”는 구절이 나온다.2) 따라서 1920년대 중반부터 안창호가 ‘공산주의자’라는 소문 때문에 곤경에 처해 있었다는 이야기는 민족운동 전선에 널리 퍼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해방 이후에 안창호의 측근 인물도 한 좌담회에서 이 사실을 언급한 바 있다.3)

다른 하나의 단서는 김산이 제공한 것이다. 그에 따르면 안창호는 “이제까지 받은 영향 중 두 번째로 커다란 영향”4)을 준 인물이었다. 그런 안창호에 대해 김산은 “손문과 중국 민족주의자들이 중국의 복잡다단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맑스주의로 전향함과 동시에 안창호는 공산주의 이론과 전술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안창호는 결코 공산주의자가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직 미숙한 한국 공산당을 반대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평가했다.5) 안창호가 ‘공산주의자’가 아니면서도 ‘공산주의’에 대해 관심을 갖고 ‘공산당’에 반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 주목된다. 주지하듯이 김산은 민족주의에서 무정부주의로, 그리고 다시 무정부주의에서 사회주의로 민족 운동의 노선을 바꾸어 나가면서 일제와 투쟁한 인물이다. 민족 운동의 다양한 이데올로기를 두루 섭렵한 뒤 최종적으로는 사회주의자가 된 김산이 안창호를 ‘反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평가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별로 큰 의미가 없을 것도 같은 이 두 단서에서 출발해 안창호의 또 다른 측면 곧 사회주의 또는 사회주의 운동과의 관련성을 살펴보자는 것이 오늘 발표의 목적이다.

2. 안창호를 둘러싼 몇 가지 오해

안창호에 대한 연구는 결코 적지 않다. 아니 개별 인물로는 가장 많이 연구된 것이 안창호인지도 모르겠다.6) 그런데 많은 연구를 통해 안창호의 어떤 한 측면만이 부각되어 오히려 안창호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생각된다. 오늘의 발표 주제와 관련해 몇 가지 오해를 먼저 정리해보자 한다.

첫 번째 오해는 이른바 자본주의 근대화론과 관련된 것이다. 다른 오해와 마찬가지로 첫 번째 오해의 연원은 일제 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20년대 중반부터 이미 사회주의 세력에서 안창호에 대해 비판하는 글이 발표된 바 있었는데 그 결정판은 인정식이 쓴「안창호론」7)인 것으로 보인다. 인정식은 안창호를 “신흥 자본 계급”, “토착 자본 계급”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인물로 규정했다. 따라서 안창호가 벌이는 민족 운동도 부르주아지의 ‘자본주의 경제 건설’의 일환인 것으로 폄하된다. 이러한 평가를 더욱 구체화한 것은 서중성이다. 서중석은 안창호를 한말 일제하에 형성된 자본주의 근대화론의 대표적인 인물로 규정한다.

안창호가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침략으로 보지 않고, 그 자본주의의 이식을 개화=문명의 길로 보는 연장선상에서 한말 · 일제 침략하에서도 일제와 타협하면서 그와 같은 근대화론을 결지하려는 입장”에 서 있었다는 것이다.8) 그러한 근대화론의 흐름이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러나 과연 안창호가 그러한 흐름의 대표적 인물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실제로 서중석의 논의는 안창호보다 이광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광수를 안창호의 ‘無二의 腹心’(인정식의 표현)이니 뭐니 하며 대변인격으로 보면서 이광수를 통해 안창호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인데 과연 이광수의 생각을 안창호의 사상으로 간주해도 무방한 것인지 의문이다.

첫 번째 오해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는 두 번째 오해는 안창호가 반공주의자였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데 일조를 한 것이 주요한이 쓴 전기이다.9) 이 전기는 원래 1963년 도산기념사업회의 위촉을 받아 쓴 것이다. 그런데 1963년이란 해는 박정희 정권 아래 반공주의가 다시 힘을 쓰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따라서 주요한이 쓴 전기에는 ‘공산주의’와 안창호는 무관하다는 기조가 깔려 있다. 임시정부 초창기에 이동휘 세력과 손을 잡은 사실에 대해 “이동휘가 이미 공산당의 마수에 걸려 그 노선을 따로 할 수밖에 없었다는 정보를 늦게야 받았고, 받은 뒤에도 용단성 있게 갈라서지 못하였다는 것도 도산의 중대한 오판이라고 할 것이다”10)라고 적고 있다든지 “도산이 그 당시 국제공산주의의 기본 전략을 충분히 검토했다는 증거는 없다”11)라고 적고 있는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 그리하여 주요한은 “민주주의적 방식으로 민족 운동의 대동단결을 도모하려는 도산의 이상은 봉건 유산과 공산주의의 협격으로 결국 목적을 달성치 못하였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러한 결론은 ‘공산주의’에 대해 별로 아는 바 없었으며 ‘공산주의’ 세력과 대립하다가 결국 민족 운동의 통일을 이루지 못한 채 좌절하고 말았다는 안창호의 이미지를 생산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후술하듯이 주요한은 안창호의 세력12)의 핵심 인물로 사회주의에 대해 연구하고 있었으며 안창호가 국제 혁명 운동과의 연대를 적극 모색하고 있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안창호가 ‘공산주의’로부터 공격을 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은 주요한 자신이 박정희 정권에서 경제과학심의회 위원, 대한해운공사 대표이사 등을 지낸 바 있다는 사실과 연결시켜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세 번째 오해는 문치파 또는 준비론자라는 세간의 평가와 관련된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이미 일제 당국이 임시정부 안의 민족 운동 세력을 구분하면서 안창호 세력을 문치파로 규정한 바 있다. 일제 문서에 따르면 “미국 및 하와이 지방에 거주한 불령 조선인과 결탁하여 과격한 행동을 피하여…독립을 열망한다고 부르짖어 그 소리를 크게 함으로 열강 특히 미국의 동정에 하소연하여 그의 후원을 얻어 천천히 독립의 목적을 달성 하려고 주장하는 자”가 문치파 곧 안창호 세력이라는 것이었다.13) 이러한 규정은 당대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통용되어 안창호 하면 교육, 인격 개조, 실력 양성 등을 통해 장기적인 전망 아래 민족의 독립을 이루는 길을 택한 인물로 각인되어 있다.

과연 그런가. 안창호에게 그런 면모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단순히 문치파로 규정할 경우 국내외의 정세가 바뀜에 따라 다양한 민족 운동의 노선을 모색했던 안창호의 실체는 왜곡 될 수밖에 없다.14) 실제로 1930년대 중반에 이미 원세훈이 “安氏는 조선을 떠나서 중국과 露領 연해주를 잠시잠시 거쳐서 미국에 건너가서 기미 이전까지의 장구한 세월을 보냈으니 중국에서 교육만능주의나 또는 문화운동을 반복하였다는 것은 사실과 상반되는 것이며 기미 이후에 상해에서 지낸 바를 거론하더라도 교육만능주의를 반복할 여지와 무대가 無하였으며 다만 개인간 좌담에서 문화운동을 말한 때가 유하였을 것 뿐일 것이다”15)라고 밝힌 바 있다.

마지막은 친미 외교주의자라는 평가이다. 최근 들어 상해 임시정부 참여세력의 이념과 전술 차이를 해명하는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런 가운데 안창호 세력이 친미 외교 노선을 견지하면서 한인사회당의 친소 외교 노선, 독립 전쟁 방침과 대립했다는 점이 지적된 바 있다. 나아가 이러한 전술상 불일치 때문에 이동휘 내각은 끊임없는 분쟁에 휩싸였고, 마침내 이동휘 세력의 임정 탈퇴로 귀결되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보기를 들어 윤대원은 “안창호는 임정이 레닌정부와 관계를 강화하는 데 매우 부정적이었다. 그는 임정이 소련과 악수할 경우 그들로부터 일부분의 동정을 얻을 수 있지만 세계열강의 동정을 모두 잃게 되어 오히려 큰 손해라고 판단했다.…소련에 대한 그의 부정적 인식은 소련과 적대적 관계를 가진 미국을 비롯한 제국주의 열강의 도움을 받아 독립하기를 바라던 친미 외교론에서 기인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16) 실제로 안창호가 남긴 1920년 일기에는 사회주의 및 대소 외교에 부정적인 견해를 가졌음을 보여주는 대목이 여러 군데 등장한다.

그러나 그 일기에는 안창호가 사회주의 운동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대소 외교에 능동적으로 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대목도 많다. 더욱이 후술하듯이 당시 안창호 세력이 주도하던《독립신문》에는 소련과의 제휴를 적극적으로 모색하겠다는 의지가 담긴 글이 여러 차례 실린 바 있다.

이상에서 언급한 몇 가지 오해가 만약 정말 오해라면 1925년에 일어난 사건은 그야말로 우발적 사건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치부할 수 있다. 그러나 발표자가 볼 때 1925년의 사건은 우발적 사건이 아니었다. ‘공산주의’로 몰릴 만한 상당한 근거가 있는 사건이었다. 이하에서는 이 근거를 밝힘으로써 안창호라는 인물의 전체상을 이해하는 데 미력하나마 도움이 되고자 한다.

3. 임시 정부 초기 안창호 세력의 사회주의관17)

초기 임시정부에는 4개 이상의 정치 세력이 참여했다. 이동휘를 지도자로 하는 한인사회당 세력(나중에 상해파 고려공산당으로 개편), 미국을 기반으로 하는 이승만 세력, 흥사단을 기반으로 한 안창호 세력, 그리고 신규식을 영도자로 하는 신한청년당 세력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1919년 말 러시아혁명에 참여한 바 있던 뽀다뽀쁘가 상해에 온 것이 하나의 계기가 되어 임시정부의 각 세력이 러시아혁명 더 나아가서는 소비에트러시아와의 연대에 깊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뽀따뽀쁘가 만난 것은 한인사회당 세력(이동휘 등), 안창호 세력(안창호 등), 신한청년당 세력(여운형 등)이었다.18) 이는 이미 세 세력이 대소 외교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안창호 세력의 경우 1920년 1월 14일부터 소련과의 교섭 문제를 논의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19) 그런데 이 날은 남이 있는 안창호 일기가 시작되는 첫 날이기도 하다. 곧 안창호 세력이 대소 교섭에 나선 것도 그 이전부터라고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1919년 12월 초만 해도 안창호 세력은 대소 외교 내지는 국제 혁명 운동과의 연대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12월 7일 안창호가 “우리의 외교상 진행할 일은 英美法等 제강국에만 한할 것이 아니라 독일, 西班牙, 伊太利, 어느 나라든지 국제연맹에 참가될 제각국에 선전하여 국제연맹국 각위원이 반수 이상만 동정하도록 하면 그만이오”20)라는 입장을 밝힌 바 있기 때문이다. 외교의 중요성을 거론하면서 그 대상으로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전승국뿐만 아니라 독일, 이탈리아 등 패전국까지 거론되었지만 소비에트러시아는 빠져 있다. 외견상 국제연맹 중심의 외교를 구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같은 기사에 따르면 안창호는 ‘무력주의’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을 피력하고 있었다. 따라서 12월 초 이후 어느 시점부터 대소 외교와 독립전쟁 준비론으로 입장을 전환한 것으로 보인다.

1920년 1월 초 안창호는 신년축하회에서 “금후의 세계의 대세는 사회주의적으로 경향”할 것이라는 전제 아래 소비에트러시아와 일본제국주의의 적대적 관계에 주목해야 하며 앞으로 이를 바탕으로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는 취지의 연설을 했다. 연설의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或曰 英美法伊 諸國은 일본이나 다름업시 남의 땅을 빼앗고 인민을 노예하는 도적놈들이니 그네와 외교를 한다사 아모 효과가 업스리라 하나 나는 확답하고. 우리는 제국시대의 외교를 탈하야 평등의 외교를 하는 것이오. 이것으로 우리는 列國의 동정을 끌 수 잇다 하오…

俄國(러시아-발표자)으로 논하면 일본은 그에게 不共戴天之讎일 것이오. 日俄戰爭의 원한은 고사하고 그네가 만흔 피로써 신국가를 건설하려 할 때에 제일로 방해한 자가 일본이 아닌가요 과격파라는 일흠으르 누가 지엇스며 연합군을 뉘가 끌어들엿스며 학살을 뉘가 행하엿나요. 현금 俄國의 최대한 仇敵은 일본일 것이니 우리는 俄國을 우리 편에 너흘 수 잇소. 미국에 대하야는 더 말할 것이 업소. 그의 상하 량원 그의 各階級의 인민이 이미 우리 편됨을 증명하지 아니하엿나요. 아세아문제 태평양문제는 미국 금후의 정치와 경제와 따라서 군사의 중심문제가 될 것이오. 그가 大陸軍을 건설하는 假想敵이 누군지를 생각하면 알 것이오.21)

곧 안창호는 1919년 말에 밝혔듯이 미국 등 열강과의 외교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새롭게 소비에트러시아와의 외교에 주목하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1920넌 1월 15일 안창호 세력은 안공근을 소비에트러시아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22) 당시 안창호 세력이 장악하고 있던 《독립신문》에는 장문의 뽀따뽀쁘 회견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23)

안창호 세력을 비롯해 임시정부의 각 정치 세력이 대소 교섭에 나서는 가운데 상해의 민족 운동 진영 안에서 사회주의적 경향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이동휘 세력은 더 말할 것도 없지만 사회주의로 기울어지는 분위기는 안창호 세력에서도 나타났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1920년대 초 《독립신문》의 논조이다. 당시《독립신문》은 안창호의 측근인 이광수(사장)와 주요한(편집장)이 주도하고 있었다.24) 따라서 안창호 세력의 기관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고 보아도 큰 무리는 아닐 것이다.25)

이광수와 주요한의 주도 아래 1920년에 들어서면서《독립신문》에는 사회주의, 소비에트러시아, 국제 혁명 운동에 관한 기사의 수가 급증했다. 그 정점은 1920년 5월 29일자 신문을 통해 “독립 운동의 기관으로 출현한 본지는 또한 세계 사조의 소개자로 자임한다 함은 본지 창간사에 천명한 바라, 사회주의는…이에 찬성하거나 반대하거나, 진정한 태도로 연구치 아니치 못할 문제니, 이는 다음에 오는 사회는 필연적으로 사회주의적 사회임일 연고라 또 우리 독립 운동에 종사하는 자는 독립 운동을 진행하는 一要件으로서나, 독립 후의 건국 사업을 준비하는 의미에서나 이의 연구를 소흘히 하지 못할지라”고 밝힌 것이다. 1920년 기사 가운데 눈에 띠는 것만 정리해도 다음과 같다.

天才(주요한-발표자) 역술,「俄羅斯革命記」, 1920년 1월 10일-2월 26일 연재
경제,「幕이 열닌 階級戰爭」, 1920년 1월 17-22일 연재
송아지,「婦人解放問題에 關하여」, 1920년 3월 11일-4월 15일 연재
玄寶(=柳榮)초역,「社會主義」, 1920년 3월 13일-1920년 4월 10일 연재
「三月十五日의 俄國革命記念日」, 1920년 3월 18일
「留日學生俱樂部의 第一會講演」, 1920년 3월 18일
「世界大戰이 오리라」, 1920년 3월 23일
「獨立戰爭의 時機」, 1920년 4월 1일
「留日學生俱樂部의 第一會講演」, 1920년 4월 8일
「勞動共和國 多方面 觀察」, 1920년 4월 10일
「最近의 德奧共産黨」, 1920년 4월 20일
「中國과 社會主義」, 1920년 4월 22일-24일 연재
「韓, 中, 俄 三國이 聯合하여 日本을 驅逐하리라」, 1920년 4월 27일
「일본기자의 본 노농공화국 復活한 俄國民 勞動者 意氣軒昻」, 1920년 4월 27일-6월 22일 연재
「五月一日略史」, 1920년 5월 1일
「국제사회당」, 1920년 5월 1일-8일 연재
孫斗煥,「社會主義者의 韓日戰爭觀」, 1920년 5월 22일
孫斗煥,「社會主義硏究」, 1920년 5월 29일-6월 17일 연재

이밖에도 소비에트러시아의 상황 특히 시베리아와 연해주에서의 일본군과의 충돌이 어떻게 진전되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다룬 짧은 기사가 무수하게 게재되었으며 중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의 사회주의 운동의 진전을 소개하는 기사도 여러 편 등장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세 명의 논객 곧 주요한, 이광수, 손두환이다. 주요한은 천재란 필명으로「아라사혁명기」를 역술했다.「아라사혁명기」는《독립신문》에서 볼셰비즘과 러시아혁명을 본격적으로 소개한 최초의 글이자 이후《독립신문》에 전개되는 논조의 한 전형을 보여주는 글이다. 주요한은 “세계의 정신적 지배자는 아라사”이며 “아라사주의의 승리를 확신”한다고 단언했다. 물론 다른 사람이 이미 쓴 글을 다시 정리한 것이기 때문에 글의 논조가 모두 주요한의 생각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상당 부분은 주요한의 생각이 녹아들어 있다고 보인다. 그런데 이 글에는 볼셰비즘과 러시아혁명에 대해 비판하는 서술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따라서 주요한이 사회주의, 볼셰비즘, 러시아혁명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는 주요한이 쓴 다른 연재 기사「부인해방문제에 관하여」에서도 확인된다. 그는 근대 혁명을 사상 혁명(르네상스와 종교 개혁), 정치 혁명(프랑스대혁명), 경제 혁명(러시아혁명)으로 구분하고, 이 세 혁명을 모두 거쳐야만 진정한 해방에 이른다고 보았다. 정치 혁명을 거친 구미 각국에서도 여성들의 불평등하다는 점을 들어 정치 혁명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주요한은 독립이란 일제의 지배만이 아니라 “모든 압제하는 자와 모든 속박하던 것에서 탈출”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새로운 사회로 설정한 것은 사상의 자유, 정치의 자유 그리고 경제의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 곧 사회주의 사회였다.

그렇다면 이러한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은 주요한뿐이었을까? 이광수의 기명 기사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광수와 관련해 흥미로운 것은 1920년 3월 상해에서 열린 러시아혁명기념일 행사에 참석하고 留日學友俱樂部에서 볼셰비즘에 대해 강연했다는 사실이다.26) 이 강연에서 이광수는 볼셰비즘을 “장차 세계 전부에 올 혁명”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근대 혁명을 사상 혁명, 정치 혁명, 경제 혁명으로 구분했다. “경제 혁명의 모형은 俄國”으로 규정되었고 러시아혁명의 영향이 영국과 미국에도 미치고 있다는 점도 지적되었다. 그리고 독립운동은 “신국가 신사회의 건설 운동”으로 파악되었다.

주요한의 주장과 이광수의 주장 사이에 큰 차이는 발견되지 않는다. 특히 3대 혁명론을 동일한 논리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따라서 주요한과 이광수의 주장은 안창호 세력 내부의 토론결과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실제로 이광수는 강연에서 “사상 문제의 연구는 독립 운동의 일부”라는 결론을 내린 바도 있었다. 안창호 세력이 사회주의를 놓고 연구와 토론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안창호의 일기에도 적혀 있다.《독립신문》의 사원이자 나중에 흥사단에 가입하는 유영이 바커라는 필자 이름만 확인되는 사회주의 관련 원전을 초역한 것도 이러한 연구 모임의 산물이다.

세 번째로 주목되는 인물은 손두환이다. 손두환은 이광수, 주요한과 같이 일본에서의 2 · 8독립선언 이후 상해로 망명한 뒤 안창호의 권유로 임시정부 선전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1920년 5월과 6월에 일련의 사회주의 관련 논설을 발표했다. 특히「사회주의자의 한일전쟁관」에서 당시 세계정세를 ‘제국주의, 침략주의, 자본주의’가 안고 있는 모순의 발현으로 파악한 뒤 이러한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전쟁이 필연적이라고 주장한 점이 주목된다. 그러한 반제국주의 전쟁의 한 고리를 조선의 민족 운동과 일제 사이의 전쟁 곧 ‘한일전쟁’으로 설정하고 그 전쟁이 결국에는 조선은 물론이고 일본, 중국, 아시아, 그리고 궁극적으로 세계의 사회주의화에 기여할 것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안창호 세력 안에서 사회주의에 관한 주장이 활발하게 개진되는 가운데 안창호 자신도 사회주의에 대한 관심의 정도를 계속 높여간 것으로 보인다. 1920년 8월 안창호 일기에 기록된, 북경대학 학장 蔡元培와의 대화가 이를 잘 보여준다. 이 대화에서 채원배가 러시아에서 시작된 사회주의 운동이 동아시아 3국에도 확산되어야 한다는 희망 밝히자 안창호는 여기에 적극적으로 찬성하면서 “此를 여차히 되기를 天爲에 방임치 말고 君과 韓中俄의 유지 인사가 조직적으로 기관을 성립하고 운동”하자는 대안을 제시하기도 했다.27)

이러한 생각은 다음 해 초 한국 · 중국 · 러시아 3국의 반일연맹론으로 다시 등장하기도 했다.28) 국제 혁명 운동, 소비에트 러시아, 중국 혁명과 연대해 독립 전쟁을 준비하겠다는 안창호 세력의 구상,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사회주의(세력)에 대한 적극적 관심이 필요하다는 안창호 세력의 인식은 적어도 1922년까지도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 1922년 8월 한 신문 기사가 눈길을 끈다.29) 이 기사에 따르면 이 해 9월 이르쿠츠크에서 공산당 대회가 열릴 예정인데 그 참가 대상 가운데는 조선인 대표 “상해 가정부 노동국 총판 안창호”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안창호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 사이에 일정한 연결 고리가 계속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 당시 각 운동 세력에서는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안창호도 1922년 5월 무렵 한 강연을 통해 공산당의 의미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해방과 혁명이라는 동일한 목적을 위해 선의의 경쟁과 연대를 해야 한다는 점을 주장한 바 있었다.30)

그러나 당시 민족 운동을 둘러싼 정세는 안창호의 이러한 구상이 실현되는 것을 막았다. 임시정부를 개조하려는 구상도 좌절되었고 소비에트러시아와 일본제국주의 사이에는 외교적 타협이 이루어져 국제 혁명 운동에 기대하는 것도 한계를 보이고 있었다. 그리하여 1924년 말 안창호는 상해에서의 활동을 일단 마무리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4. 1920년대 중반 이후 안창호 세력의 사회주의관

1924년 11월 미국으로 떠났던 안창호는 2년이 지난 1926년 5월 16일 다시 상해로 돌아왔다. 7월 8일 안창호는 ‘우리의 혁명운동과 임시정부문제’라는 주제로 강연하였다. 그는 이 강연에서 ‘민족 혁명’의 성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혁명도 또한 종별이 없지 아니하오. 정치의 왕래 舊現狀을 없이 하고 새로운 他制度를 바꾸어 세우는 것을 정치혁명이라 할 것이니 군주국가에서 민주정치를 바꾸어 세우는 것같은 것이 곧 그것이오. 종교의 왕래 舊現狀을 없이 하고 새로운 他制度를 바꾸어 세우는 것을 종교혁명이라 할 것이니…이 밖에도 사유재산제도를 파양하고 공유제를 쓰려 하는 경제혁명도 있고…혁명의 종별이 매우 많고 단순하지 아니한 것이오.

그러면 오늘날 우리의 혁명이란 무엇인고? 나는 말하기를 민족혁명이라 하오. 그러면 민족혁명이란 무엇인가? 비민족주의자를 민족주의자 되도록 하자는 것인가? 아니오. 우에 말한바 혁명은 곳 재래의 舊現狀을 업시하고 새로운 他現狀을 박고아 세우는 것인 즉 민족혁명이란 곳 우리 민족의 현상을 업시하고 새로운 타현상으로 박고아 놋는 것이오. 다시 말하면 우리 민족의 일본에 압박밧는 상태로 잇는 현재 현상을 업시하고 한인으로 자유스럽게 살수 잇는 타현상을 박고아 세우자는 것이오. 그럼으로 이것은 당연히 민족혁명이라 일흠할 것이오. 이것은 곳 우리 민족이 저의 민족감정과 이해타산과 사활문제 등을 합하야 이러나는 전민족의 운동이오. 결코 한 부분의 운동으로 되는 것이 아니오. 그런데 우리 혁명의 뜻이 우에 말한바와 갓은 즉 제일로 일본이 압박받는 상태를 업시 한다함에는 조금도 문제됨이 없는 것이나…31)

안창호는 민족 혁명을 수행할 조직체로서 대혁명당을 조직하기 위해 9월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32) 이후 중국 관내 지역에서는 북경(1926년 10월 28일), 상해(1927년 3월 21일), 광동(5월 8일), 무한(7월 초), 남경(9월 27일)에서 촉성회가 각각 결성되었다. 이들 5개 단체는 11월 9일부터 상해에 모여 한국독립당관내촉성회연합회를 결성했다.33) 또한 안창호는 1927년 1월과 4월에 만주의 길림으로 가서 유일당 결성을 촉구하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34)

그런데 이러한 활동의 과정에서 주목되는 사실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민족혁명을 위한 단결의 필요성에 대해 강조한 1926년 5월 16일 강연의 후반부에서 스스로 ‘무산자의 하나’로서 ‘공산주의’가 지향하는 바에 대해 원칙적으로 공감한다고 밝힌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사회주의 세력과의 연대를 구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길기는 하지만 안창호의 말을 직접 인용해보자.

우리가 일본을 물리치고 독립하여 세울 國體政制는 무엇으로 할꼬. 공산주의로 할까? 민주제를 쓸까? 복벽하여 군주국으로 할까?…그러나 나는 말하기를 지금은 그것을 문제삼아 쟁론할 시기가 아니오. 각기 주장하는 자가 각기 주장하는 바를 자기로 더욱 연구하고 또 그를 실행할 때에 잘 실행하게 되도록 준비할 것뿐이라하오.

왜 그러냐 하면 지금은 오직 거국일치로 전력을 적을 물리치는 데 모아 쓸 때요 장래 일을 미리 말하여 의견을 다투고 힘을 나눌 때가 아닌 까닭이오. 그러면 장래 일은 그 때에 되어 지난대로 막가기로 합시다. 그時 다수민중이 공산을 원하면 그리 합시다. 그時 다수민중이 민주를 원하거든 그리합시다. 무엇이나 민중다수가 원하거든 그리 합시다.…

혹 나에게 묻는 이가 있소. 그러면 나 안창호의 가진 주의는 무엇이냐고. 이에 대하여는 나도 내 주의가 무엇인지 말하기 難히오. 공산주의인지 민족주의라 할지. 내가 가진 주의는 나로도 무엇이라 이름지을 수가 없는 것이오. 나는 大生産機具를 국가공유로 하자 함에 동감하는 자오. 나도 무산자의 하나이므로 다수한 빈자를 위하여 부자와 자본의 권리를 타파하여야 될 것을 아오. 그러나 지금 오늘날은 부자니 빈자니 유산자니 무산자니를 막론하고 다같이 합동 단결하여 오직 한낱 일본을 적을 삼고 민족혁명을 하여야만 쓰겠다 생각하는 사람이오.35)

곧 경제 평등의 문제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나름대로 입장을 표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1926년 7월이면 이미 사회민주주의의 입장에서 나중에 ‘대공주의’라고 불리는 정치사상을 확립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36) 흔히 대공주의의 성립 시기를 1927년 무렵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명명의 시점이지 대공주의 사상이 성립된 시점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어쨌거나 안창호가 추진한 민족유일당 촉성 운동은 순조롭게 추진되지 못했다. 중국의 정세, 특히 1927년 4월 장개석의 쿠데타를 계기로 제1차 국공합작이 와해된 것이 중국 관내에서의 민족유일당 운동이 실패로 끝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37)

1929년 10월 상해의 유일당조직촉성회가 해체를 선언한 바로 다음 날 안창호는 한국독립당 결성에 착수하였다. 한국독립당은 1930년 1월 25일에 결성되었다. 한국독립당은 黨義에서 “국토와 주권을 완전히 광복하며,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을 기초로 하는 新民主國을 건설하고, 그리고 內는 국민 각개의 균등생활을 확보하고, 外는 민족과 국가와의 평등을 실현하며, 나아가서 세계 일가의 진로로 향한다”고 밝혔다. 또한 이를 달성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당강을 제시하였다.

1. 대중에 대하여 혁명의식을 환기하고, 민족적 혁명역량을 총집중할 것.
1. 엄밀한 조직하에 민족적 반항과 무력적 파괴를 적극적으로 진행할 것.
1. 세계 피압박민족의 혁명단체와 연락을 취할 것.
1. 보통선거제를 실시하고, 국민의 참정권을 평등하게 할 수 있는 기본권리를 보장할 것.
1. 토지와 대량생산기관을 공유하고, 국민의 참정권을 평등하게 할 것.
1. 생활상의 기본지식과 필요기능을 修得시키며 충분한 의무교육을 公費로서 실시하고 국민의 修學權을 평등하게 할 것.
1. 민족자결과 국제평등을 실현시킬 것.
1. 세계 일가의 조성에 노력할 것.38)

당의와 당강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독립당의 이념적 근간은 안창호의 대공주의였다. 상해 임시정부 초기부터 동지들과 연구하고 토의하는 가운데 사회주의에 대한 해법으로 안창호가 나름대로 찾아낸 대공주의가 정강의 형태로 구체적인 민족 운동 과정에 반영된 것이다. 실제로 한국독립당 창당 이후 안창호는 상해의 흥사단원동임시위원부(이하 원동흥사단)를 중심으로 자신의 구상을 실현하는 인력을 기르는 데 주력하고 있었다.

1930년 이후 안창호와 함께 활동한 바 있는 구익균은 안창호에 대해 사회민주주의자로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규정은 1920년대 중반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사회민주주의 활동을 벌이고 있는 구익균 자신의 입장이 반영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 이 시기 안창호의 행적과 관련된 자료를 보면 그러한 규정이 전연 틀린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931년 5월 흥사단원동임시위원부(이하 원동흥사단) 월례회에서 구익균은 ‘사회주의의 사적 발달’ 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그 이전에 이미 구익균은 사회주의에 공명하고 있음을 밝힌 뒤 안창호의 권유로 원동흥사단에 가입한 바 있다.39) 따라서 구익균의 강연은 안창호의 동의 아래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원동흥사단은 같은 달 ‘민족운동자로서 사회운동자와 연락할 것, 아니할 것’이라는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했다. 이 토론회에서 구익균 등 3명이 가편, 신언준 등 3명이 부편에 서서 토론을 전개했는데 안창호는 재판장으로 토론회를 주관했다. 토론회의 결과는 가편의 승리였다.40) 이러한 사실은 적어도 1930년대 초 원동흥사단 안에 사회주의와의 연대를 추구하는 흐름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안창호도 이를 인지한 상태에서 묵인 내지는 지원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실제로 안창호 자신이 사회주의와의 연대를 결코 부정적으로 보지 않았다는 사실은 다른 자료에서도 확인된다.

먼저 1931년 6월 9일자《조선일보》기사가 있다.41) 이 기사는 조선일보 기자이던 전무길이 기사 적성일자보다 한 달 전에 원동흥사단 정례 회의를 빌어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기자: 사유재산제도에 대하여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도산: 만일 내가 정치를 한다면 생산기관은 국유로 하겠습니다. 토지도 일반에게…경작케 하고 국세 를 제한 전 수익은 각인의 사유로 할 것입니다.
기자: …상속제는 물론 없을 테구요.
도산: 물론 생산기관을 사유같이 상속할 수는 없습니다. 많은 전통과 勞功을 존중해야 사용권을 계승시킬 것입니다. 계승자 없으면 국가가 달리 처분하지요. 그리고 모든 것을 민족을 단위로 하겠습니다.

다음으로는 1932년 4월 무렵 원동흥사단 대회에서 한 강연의 기록이 있다. 이 강연에서 안창호는 민족 운동자의 태도에 대해 언급하는 가운데 “조선에 있어서는 계급운동자도 민족해방을 요하게 된다. 우리도 계급운동(혁명)을 할 마음이 있다마는 그것을 달하는 데는 조선은 자본주의가 발달 못된 나라라 자본가를 타도하는 데도 일본 자본주의를 타도하여야 겠다. 우리는 계급혁명을 반대하지 말자. 우리도 그것을 하면서 반대할 이유는 조금도 없다. 만일 해되는 점이 있으면 반대하자. 우리는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태도를 가지지 말자”42)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말 그대로 이해한다면 일본자본주의 곧 일제를 타도한 뒤에는 계급혁명도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당면의 과제인 민족해방을 위해서는 사회주의를 적대세력으로 간주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연대해야 한다는 주장을 (도산 안창호는) 펴고 있는 것이다. [이준식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연구원/김효선 이승만연구자 자료제공


혁신학교? 혁신은 개뿔! 애들 학력만 퇴행중! 교무실 커피자판기, 교사 항공권 구입에 물 쓰듯...특혜 불구 학력은 뒷걸음 일반학교에 비해 연간 1억4,000~1억5,000만원을 특별히 지원받는 서울형 혁신학교가 예산을 엉뚱한 곳에 쓰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특별예산(학교운영비)으로 교사실의 각종 책장이나 가구를 구입했고, 수백만원을 들여 학습자료 저장용 USB와 외장하드를 사서 나눠 갖은 사실도 밝혀졌다. 교무실 커피자판기를 구입하는데 특별예산을 쓴 혁신학교도 있었다. 이밖에도 여직원 휴게실 가스보일러 교체, 부장교사 워크숍 항공권 구입, 교직원 전체 체육복 구입 등 본래 목적과는 거리가 먼 곳에 특별예산을 물 쓰듯 전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학생들에 대한 선심성 예산 집행 정황도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학생 티셔츠 구입, 진공청소기 구입 등에 특별예산을 수백만원씩 사용했다. 학생들의 생일축하용 떡케익 구입비용으로 매달 70~90만원을 사용한 곳도 있었다. 반면 서울형 혁신학교의 학력은 일반학교에 비해 오히려 뒷걸음질 친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내용은 서울시교육청이 새누리당 강은희 의원에게 제출한 2012년 혁신학교 정산서 통합지출부를 통해 밝혀졌다. 서울형 혁신학교는 곽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