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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구라(忠臣藏)와 ‘12,12 忠義將兵들’

-萬古(만고)의 배신자는 누구인가?-


東西古今(동서고금) 인류가 교훈으로 추구하고 실천하려 하고, 선양하는 것은 忠義思想(충의사상)이다. 그 충의사상은 일반인은 물론, 국가와 국군의 통수권자인 국가원수를 보위하는 군인들에게 있어서는 생명과 같다. 군인으로서 국가원수를 위한 충의를 위해 목숨을 草芥(초개)같이 버리는 군인의 이야기는 靑史(청사)에 신화적으로 길이 남는다. 그러나 군인이 국가원수를 시해한 반역자들에게 줄을 서 附逆(부역)하여 출세를 도모한다면, 만세를 두고 세인들의 지탄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일본 동경 국립극장에서 일본의 충의사상을 대표하는 연극 주신구라(忠臣藏)을 관람할 수 있었다. 주신구라의 劇(극)은 억울하게 죽은 주군의 복수를 한 47인 사무라이의 이야기다. 뇌물을 밝히는 간신 ‘키라코우즈케 노스케’의 간계에 의해 아코우번주(赤穗藩主)인 ‘아사노 타쿠미 노카미’가 억울하게 죽음을 당했다. 아코우번 가신들인 47인의 사무라이들은 비통과 절망속에서 은인자중 때를 기다리다가 마침내 겐로쿠(元祿)15년(1702), 눈이 내리는 날, 복수의 칼을 뽑았다.

그들이 주군의 복수를 위한 칼을 뽑아들고 함성과 함께 원수의 집으로 난입해 들어가는 장면에는, 순간 국립극장은 戰鼓(전고)의 북소리가 우레소리 처럼 귓청이 떨어져라 울려 퍼졌다. 억울하게 죽은 주군의 復讐血戰(복수혈전)의 칼부딪는 소리와 전고소리로 관객들은 모두 흥분되었다. 여기저기서 흥분한 관객들의 박수가 터졌다. 주군의 복수를 위해 목숨 바쳐 충의를 실천하는 사무라이들을 성원하는 박수였다.

마침내 충의의 사무라이들이 원수의 목을 베었을 때, 국립극장은 흥분은 절정에 달했다. 관객들의 일부는 울면서 기립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일본인들은 TV의 극화, 소설, 시, 연극 등은 매년 ‘주신구라’를 일본 국민들이 본받아야 할 충의사상으로 일깨워주고, 나같은 외국인들에게도 충의사상을 일깨워 주고 있었다.

우리 역사에 주군을 향해 충의를 바치다가 殉死(순사)한 충의지사는 많다. 그 가운데 현대사에 ‘주신구라’를 능가하는 비창하고 장엄한 이야기가 있다. 소위 ‘12, 12 충의장병들’의 애기다. 고(故) 朴正熙 대통령은 ‘주신구라’의 억울하게 죽은 아코우번주와는 비교할 수 없이 휼륭한 대한민국 국군통수권자요, 국가원수이다.

박대통령은 아코우번주 보다 더 억울하게 최후를 맞이했다. 절대적으로 신임했던 同鄕人(동향인)이요, 육사동기요, 나이는 작지만 信友(신우)요, 부하의 인연이 깊은 김재규 당시 정보부장의 흉계에 의해 피살 된 것이다. 김재규는 박대통령을 시해하기 전 용의주도하게 평소 관리해오던 장차 계엄사령관이 될 정승화 육참총장을 지근거리의 방에 불러놓고 시해극을 벌였다. 그러나 ‘12,12 충의장병들’은 목숨 걸고 시해극을 벌인 자와 동조자들을 체포하여 법정에 세웠다. 전세계에 한국 군인의 충의를 증명해보인 쾌거가 아닐 수 없다.

前述(전술)한 바와 같이 박대통령은 김재규와의 인연이 깊었다. 김재규의 군요직은 물론이요, 권력 2인자 자리인 정보부장직까지 乘勝長驅(승승장구)한 것은 모두 박대통령의 절대적 신임때문이었다. 그러나 김재규는 충의를 외면했다. 오히려 술자리를 마련해놓고 술잔을 권하다가 권총으로 박대통령의 흉부에 1발을 발사하고, 다시 부하 박선호의 총으로 교체하여 이번에는 박대통령의 후두부에 총구를 들이대고 확인사살을 했다.

김재규의 시해행동은 天人共怒(천인공노)할 반역, 배신의 극치였다. 김재규같이 반역하고 배신한다면 이 세상에 뉘라서 부하로서 신임할 수 있으며, 뉘라서 고향 마을의 信友(신우)를 믿을 수 있을 것인가?

‘10, 26 박대통령 시해사건’을 일으키기 전 김재규는 유사시 자신에게 충성하는 軍脈(군맥)을 만들었다. 정승화는 김재규가 3군단장에서 이임할 때 후임 3군단장으로 추천해주었고, 역시 김재규의 강력한 추천에 의해 육군총장이 된 사람이다. 특전사라는 최정예 부대를 이끌고 있던 정병주는 김재규가 5사단 36연대장을 할 때 대대장으로 시작해서 그 후 줄곧 김재규의 심복으로 알려졌던 사람이다.

수도권을 장악하고 있는 3사령관인 이건영은 김재규가 정보부장일 때 차장으로 데리고 있다가 다시 3군사령관으로 내보낸 심복이다. 당시 수경사령관은 정승화의 심복이었다. 이처럼 당시 김재규는 縱橫(종횡)으로 사실상의 군권을 장악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들은 김재규의 돈으로 고급요정에서 술판을 벌이며 자주 만나 시국을 의논하고 의기를 투합했던 사이였다. 어찌 그뿐이랴. 박대통령의 비서실장 김계원에게 조차 김재규는 대통령의 시해를 사전에 통지할 수 있는 관계였고, 시해직후 경호실의 병력출동을 막은 이재전 경호차장도 의혹의 대상이었다.

1979.10.27. 김재규 심문조서 및 10.28. 김재규 자필진술서(수사기록66-71쪽)에는 김재규가 쓴 범행동기를 이렇게 진술했다.

“본인은 76.12.4.부터 정보부장으로 근무해 왔다. 정국이 시끄럽고, 야당의 활동이 날로 적극화돼 가고 있었다. 이에 대한 본인의 수습방안이 실패를 반복하여 무능함이 노출됐다. 본인 및 형제 등의 이권개입과 비위가 노출되어 대통령으로부터 경고친서를 받아 놓고 있었다. 군 후배이자 연하의 차지철이 너무 오만방자하여 수차에 걸쳐 수모를 당했고, 대통령은 이런 차지철만 편애했다. 이런 사유로 79.4월 경부터 대통령과 차지철을 살해하고 군부의 지지를 받아 직접 집권하려고 결심했다. 그 후 기회를 엿보기 시작했다. 곧 있을 대통령의 중요 인사 단행에 본인이 포함될 것이라는 정보에 불안을 느꼈다. 10.19. 부산지역 소요사태를 관찰했다. 정부에 대한 불신이 매우 컸다. 이런 소요가 서울 대구 등 5대 도시로 확산되면 경제가 침체되고 현정권이 끝장을 맞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럴 때에 거사를 하면 국민적 지지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보아 본인은 10.26. 만찬기회가 결행의 적기라고 생각하게 됐다.”

‘12,12 사건’은 박대통령에게 충성을 바치는 충의장병들과, 박대통령을 시해하고 난 후 비상계엄속에 혁명위원회를 통해 정권을 잡으려는 김재규 군맥인 김재규軍과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충돌이었다.

충의장병들의 중심에는 전두환 당시 합수본부장이 있었다. 전두환 합수본부장이 없었다면, 박대통령의 시해사건은 어쩌면 김재규측 정승화 계엄사령관 농간에 의해 흐지부지 될 수 있었다. 당시 김재규軍은 박대통령의 死因(사인)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오직,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중심으로 보신과 입신출세를 위해 줄을 섰다. 충의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할 군인들이 국가원수의 시해를 강건너 불보듯이, 오불관언(吾不關焉)했던 것이다.

그러나 충의장병들은 국가원수의 사인규명을 위한 旗幟(기치)를 드높이 들었다. 그들은 북한군의 개입 시간을 주지않고 분초를 다투어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사건에 관련자들을 수사에 나섰고, 김재규軍을 제압했다.

충의장병들의 중심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있다. 충의장병들이 국가원수 시해범과 동조자들을 수사하여 법정에 세우기 위해 제압하고 나니 박정희 대통령을 존경하는 대부분 軍心(군심)은 전두환 당시 합수부장으로 모와졌다. 산사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은 나에게 자신은 대통령이 되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한 적이 없다고 토로했다. 오직 “대한민국을 지키는 군인의 길”을 원했을 뿐이라고 했다. 그의 이력은 진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는 대구 공고(현)를 졸업하기도 전에 대구시내에 ‘6,25 의 인민군이 낙동강 전선에서 쏘아대는 폭발물이 폭발하는 것을 목격하고,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전선으로 떠나려 머리에 태극기를 매고 집을 떠났었다.

이를 눈물로 만류하는 어머님과의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전두환 전 대통령은 고교를 졸업하고, 진해의 육사로 달려갔다. 그는 또 월남 파병에 자원했다. 그는 오직 대한민국을 목숨바쳐 지키는 군인의 길로 만족했을 뿐, 추호도 대통령의 꿈은 없었다. 그러나 운명의 신은 김재규가 ‘10, 26’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하여 권력을 잡으려 했기 때문에 합수부장으로서 소임을 다하다 보니 뜻밖에 軍心이 그를 등 떠밀어 대통령이 된 것이다.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전 대통령은 군부의 장기집권 유혹을 단호히 뿌리쳤다. 단임 국가원수로 만족했다. 그는 훗날 문민시대에 교활한 정치인들에게 불이익을 받을 것을 예상했지만, 爲國丹心(위국단심), 그의 주도로 ‘6,29 선언’을 통해 마침내 문민시대를 여는 초석이 되었다.

혹자는 나의 ‘12,12 충의장병론’에 폭언을 퍼부을 수 있다. 충의장병들이 5,18 광주사태에 책임이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광주사태의 기원(起源)은 군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국가원수의 시해사건에는 吾不關焉이요,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당한 것이 천재일우의 권력잡을 好機(호기)로 환장한 호남 정치인들의 선전선동 탓이다. 광주시민이 간디의 무저항 데모를 했다면 진압군이 출동할 필요가 있었을까? 정권에 환장한 정치인들의 선전선동으로 광주사태는 촉발되어 무고하고 선량한 시민들과 군인들이 충돌하게 된 것이다.

광주사태에 그날의 용감무쌍한 국군이 방어하지 못했다면 상상하기 여러운 대한민국 위기의 아슬아슬한 사건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무장 시민군들은 광주교도소를 장악하려고 5월 21일을 전후하여 6차례나 교도소를 방어하는 국군들에게 무차별 발포를 하면서 진격했다. 당시 광주교도소에는 간첩 및 좌익수 170여명을 포함하여 2,700여명의 복역수가 수용되어 있었다. 시민군은 왜 결사적으로 교도소를 장악하려 했을까? 왜 간첩과 좌익수를 해방하려 했을까? 만약 그들이 탈옥하여 손에손에 총기를 들었다면 광주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을 것 아닌가? 어쨌거나 충의장병들이 광주사태의 기원은 아니다.

대한민국에는 ‘주신구라’를 능가하는 ‘12,12 충의장병’들의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거듭 강조한다. 우리도 好時節(호시절)이 오면 국립극장에서 정권 야욕을 위해 국가원수요, 동향의 친구요, 후원자인 대통령를 확인사살로 무참히 죽인 반역자와 그 패거리들을 응징하기 위해 충의장병들이 등장하는 장엄한 연극이 공연되는 때가 오리라고 기대한다. 어찌 연극 뿐일까? 시, 소설, 드라마, 영화에서도 충의장병들의 이야기는 진실로 부활하기를 꿈꾸어본다.

‘12,12 충의장병’에게 씻을 수 없는 모욕과 고통을 준 정치인 YS이다. 그는 전두환을 계승하는 노태우 전 대통령의 幕下(막하)에 들어가 보비위를 하면서 대통령 후보로 간택 되었고, 노태우로부터 물경 선거비 비자금을 3000억원을 물려 받아 선거비로 활용, 마침내 대통령이 되었다. 국민들에게는 선거비를 “십원 한 장 받지 않았다”고 언명했었다.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온갖 진급의 총애를 받은 김재규, 노태우로부터 3000억을 받고 대통령 후보가 된 YS의 공통점은 천추에 침뱉을 배신이다.

김재규가 은인 박정희 대통령을 확인사살로 시해하듯이, YS는 대통령의 권력으로 공소시효가 이미 지났는데도 ‘5,18 특별법’을 만들어 은인 노태우는 물론, 전두환 전 대통령까지 죽이는 배신의 극치를 보여 주었다.

YS가 대통령이 되어 무엇을 했나? 북한 세습독재체제를 옹호하기 위해 클린턴 대통령의 북푹을 막고, 남로당적 좌익시대의 대문을 활짝 열어주고, 아들이 대통령의 고유권한의 인사권을 전횡하고, 부정뇌물 착복죄로 감방에 갈 죄를 짓는데도 두 눈을 지그시 감고, 한국사상 최초로 경제대란 IMF를 초래하여 온국민에게 고통을 주고, 大猝富(대졸부) 되어 청와대를 떠났을 뿐이다. 그는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될 자인데도 스스로를 각성치 못하고, 박정희 대통령을 향해 욕설을 퍼붓는 것으로 소일 하고 있다시피 한다고 한다. 그것이 그의 민주화인가?

누가 "12,12"의 장병들의 마음 고통과 슬픔, 분노와 눈물을 알 것인가? 그러나 충의는 영원한 것이다. 주신구라를 능가하는 ‘12,12’충의장병들의 정신을 계승하는 국군들이여, 어느 누구던 국군통수권자를 확인 사살로 시해하는 자가 또, 있다면 주저없이 출병하여 시해범을 법정에 세우는, 충의를 보여야 할 것이다. ◇


李 法 徹(bubchul@hotmail.com)








혁신학교? 혁신은 개뿔! 애들 학력만 퇴행중! 교무실 커피자판기, 교사 항공권 구입에 물 쓰듯...특혜 불구 학력은 뒷걸음 일반학교에 비해 연간 1억4,000~1억5,000만원을 특별히 지원받는 서울형 혁신학교가 예산을 엉뚱한 곳에 쓰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특별예산(학교운영비)으로 교사실의 각종 책장이나 가구를 구입했고, 수백만원을 들여 학습자료 저장용 USB와 외장하드를 사서 나눠 갖은 사실도 밝혀졌다. 교무실 커피자판기를 구입하는데 특별예산을 쓴 혁신학교도 있었다. 이밖에도 여직원 휴게실 가스보일러 교체, 부장교사 워크숍 항공권 구입, 교직원 전체 체육복 구입 등 본래 목적과는 거리가 먼 곳에 특별예산을 물 쓰듯 전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학생들에 대한 선심성 예산 집행 정황도 나왔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는 학생 티셔츠 구입, 진공청소기 구입 등에 특별예산을 수백만원씩 사용했다. 학생들의 생일축하용 떡케익 구입비용으로 매달 70~90만원을 사용한 곳도 있었다. 반면 서울형 혁신학교의 학력은 일반학교에 비해 오히려 뒷걸음질 친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내용은 서울시교육청이 새누리당 강은희 의원에게 제출한 2012년 혁신학교 정산서 통합지출부를 통해 밝혀졌다. 서울형 혁신학교는 곽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