若時於所緣 智都無所得 약시어소연 지도무소득 爾時住唯識 離二取相故 이시주유식 이이취상고 만약 소연경(所緣境)을 대할 때 조금도 소득심이 없는 지혜를 얻었다면, 이 때 유식성에 머물게 된다. 이것은 이취(二取)의 상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소연(所緣)은 능소(能所)의 소(所)이니 어떤 상대를 대할 때 조금도 득을 보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지혜로운 마음으로 대하는 것은 능취와 소취, 능과 소의 상을 여의었기 때문이니, 이 때 유식성에 머무는 것이 된다. 능소의 상을 여의었다는 의미는 제7 말나식의 아상(我相), 아소(我所), 아애(我愛), 아만(我慢)을 여의었다는 뜻이고, 이는 곧 탐진치 삼독을 여의었다는 말이니 자기를 위한 소득심이 모두 사라졌다는 의미이다. 금강경 제5송에서 범소유상(凡所有相) 개시허망(皆是虛妄)하니 아상(我相)과 법상(法相)을 모두 여의고,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일체 소득심을 여의면 즉견여래(卽見如來) 곧 원성실성을 보리라. 이 송에서도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을 여의고 아공(我空) 법공(法空)을 성취할 것을 말씀하신다. 도무소득(都無所得)은 반야심경에서 “색도 없고 수상행식도 없으며”에서 시작하여 “고집멸도도 없고 지혜도 없으며 얻을 것도
제 25 송 此諸法勝義 亦卽是眞如 차제법승의 역즉시진여 常如其性故 卽唯識實性 상여기성고 즉유식실성 이것이 모든 법의 승의(勝義세간의 이치보다 수승한 깊고 오묘한 의리(義理))이고 또한 진여(眞如)이다. 그것의 본성은 항상 여여(如如) 하기 때문에 유식(唯識)이 곧 실성(實性)이다. 乃至 “이것이 모든 법의 승의(勝義 세간의 이치보다 수승한 깊고 오묘한 의리(義理)를 승의라 한다)이다.” 중 ‘이것이’가 제24송의 “후유원이전(後由遠離前) 소집아법성(所執我法性), 최후는 앞에서 설한 아(我)와 법(法)에 집착하는 성질을 멀리 여의었기 때문에,”를 받는 말이니, 말을 붙이면, 최후는 앞에서 설한 아(我)와 법(法)에 집착하는 성질을 멀리 여의었기 때문에 이것이 제법승의(此諸法勝義)이고 또 역시 이것이 곧 진여이다가 된다. 앞의 구절에서 ‘아(我)와 법(法)에 집착하는 성질을 멀리 여의었기 때문에’라는 말씀은 오별경 수행을 통해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을 성취하여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을 이미 여의었다는 말씀이니 전생에서부터 가지고온 ‘나’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행하던 성질이 180도로 변하여 완전히 위타(爲他)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말씀이다. 제법승의(諸法勝義)란
初卽相無性 次無自然性 초즉상무성 차무자연성 後由遠離前 所執我法性 후유원리전 소집아법성 처음은 곧 상(相)이 무성(無性)이요, 다음은 자연성(自然性)이 무성(無性)이다. 그리고 최후는 앞에서 설한 아(我)와 법(法)에 대한 집착하는 성질을 멀리 여의었기 때문이다. 초즉상무성(初卽相無性) 처음, 상(相)이 무성(無性)이라고 한 것은 상(相)은 변계소집(遍計所執)하여 일어나는 모습인데, 이렇게 일어나는 모습이 무성(無性)이란 말이다. 이는 금강경 제5송에서 제상비상즉견여래(諸相非相卽見如來)에서 제상(諸相)이 변계소집된 상(相)이고 비상(非相)이 무성(無性)이다. 그리고 32송에서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고 한 말씀이 변계소집의 상(相)이다. 그리고 반야심경에서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이라고 한 말씀도 상무성(相無性)과 같은 뜻이다. 현대사회의 문제는 모두 변계소집성이 만연되어 왔기 때문에 누적된 문제이다. 이 변계소집은 개인의 이기주의에서 비롯된 것이고, 국제적, 국내적 사회문제의 근본 원인이 되어왔을 뿐만 아니라, 가정의 불화와 개인의 육체적 정신적 병의 원인이 되기도 하기 때문에 심각하게 바라보고 이해해야할 성품이다. 위에서 이미 설
卽依此三性 立彼三無性 즉의차삼성 입피삼무성 故佛密意說 一切法無性 고불밀의설 일체법무성 곧 이 3성(性)에 의해 저 3무성(三無性)이 정립된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밀의(密意)로 일체법이 무성(無性)이라 설(說)하셨다. 즉의차삼성(卽依此三性)의 즉(卽)은 ‘곧’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라는 뜻이고, 의차삼성(依此三性)은 이 ‘삼성에 의해서’ 인데 삼성은 앞에서 설명한 바 있는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의타기성(依他起性), 원성실성(圓成實性)이다. 즉의차삼성(卽依此三性) 입피삼무성(立彼三無性)은 곧 이 삼성에 의해서 저 삼무성(三無性)이 정립(定立)된다고 했다. 변계소십성은 제7식이 8식에 의지하여 일으키는 심상(心相)이 자기 혹은 자기 것이라고 집착하여 여러 가지 득실(得失)을 따지는 계산이기에 그 심상(心相)에는 자성(自性)이 없고, 또 오감관에 비춰진 사물을 제7식이 8식에 저장된 과거 경험에 의지해 만든 심상(心相)에 집착하여 희비고뇌(喜悲苦惱)의 감정을 일으키거나 손익(損益)을 따지는 계산이기에, 이 심상도 실재하지 않은 허상(虛相)에 집착하는 것이므로 변계소집성에는 불변하는 고정된 성품이 없다. 그러므로 변계소집성은 무성(無性)이라 한다고 했다. 이
故此與依他 非異非不異 고차여의타 비리비불리 如無常等性 非不見此彼 여무상등성 비부견차피 그러므로 이것이 의타와 더불어 있어 다르지도 않고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다. 마치 무상(無常)과 성(性)이 같아서 이것과 저것을 볼 수 없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고차여의타(故此與依他)의 고(故)는 위 제21송에서 원성실어피(圓成實於彼) 상원이전성(常遠離前性)인 고로 라는 의미이다. 어피(於彼)의 피(彼)는 의타기자성(依他起自性)이니, 의타기자성 안에 원성실성이 있으니 이는 항상 전성(前性)을 멀리 여읨에서 드러난다. 전성은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니 의타기자성에서 변계소집성을 여읜 마음이 원성실성이라는 뜻이다. 세상에 모든 존재는 의타기자성하는 진리를 깨닫고 나와 너를 분별하여 이익을 얻고자하던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을 멀리 여의었을 때 원성실성(圓成實性)이 드러난다고 했다. 이는 나를 여의고 너와 하나가 되었다는 뜻이 된다.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남을 만났을 때 일어나던 모든 아상(我相)을 소멸하고, 법(法)을 접할 때 자기 중심적으로 일으키던 모든 법상(法相)을 소멸하였으니 이 22송에서 말하는 원성실성(圓成實性)은 변계소집성이 없는 마음이니 진성(眞性)을 의미
依他起自性 分別緣所生 의타기자성 분별연소생 圓成實於彼 常遠離前性 원성실어피 상원리전성 타(依他)에 의지함으로서 [과(果)가] 일어나는 자성(自性)이 있음으로 연(緣)을 분별해서 생(生)하는 바가 있게 되고, 그에 있는 원성실성(圓成實性) 주1)은 항상 앞의 성품을 멀리 여읨에 있다. 제20송에서는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 무자성(無自性)임을 설명하였는데 제21송에서는 의타기성(依他起性)과 원성실성(圓成實性)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의타기자성(依他起自性) 분별연소생(分別緣所生) 중 의타기자성(依他起自性)은 능변(能變)이고 분별연소생(分別緣所生)은 소변(所變)이다. 의타기자성(依他起自性)은 인(因)이 타에 의지함으로서 어떤 결과가 일어나는 자성(自性)이니 능변(能變)이다. 사람은 이렇게 단순한 자기 마음을 잘 알지 못한다. 자기 스스로도 타에 의지해 존재하는 자성(自性)임을 알지 못함으로 자기가 자기를 모르게 된다. 자기가 자기를 알고 싶으면 남을 접촉할 때 일어나는 자기의 성품을 잘 관찰하면 된다. 왜냐하면 자기의 성품이 남을 의지할 때 드러나는 자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항상 많은 사람들을 접촉하면서 살아간다. 우리는 저 사람을
由彼彼遍計 遍計種種物 유피피편계 편계종종물 此遍計所執 自性無所有 차편계소집 자성무소유 여러 가지로 두루 계산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갖가지 사물을 두루 계산하는 마음이 일어난다. 이렇게 두루 계산하여 집착하는 대상의 자성(自性)은 없다. 유피피변계(由彼彼遍計) 변계종종물(遍計種種物) 앞 19송에서 유제업습기(由諸業習氣) 이취습기구(二取習氣俱), 모든 업(業)의 습기(반복되어 얻어진 기운)가 있기 때문에 능취(能取)와 소취(所取)의 습기가 함께 있다고 했다. 습기에 분별하는 마음을 가하면 능취(能取)는 변계(遍計)가 되고 소취(所取)는 물(物)이 된다. 유피피변계(由彼彼遍計)는 능변(能變)을 설명하는 것으로 전오식이 어떤 사물을 접촉할 때 제7 말나식이 제8 아뢰야식에 저장된 정보에 의지해서 스스로 자기 생각의 대상을 만들어 여러 가지로 그 이익을 두루 계탁(計度), 즉 계산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변계종종물(遍計種種物), 전오식이 보고 들은 여러 가지 사물에 대해 두루 계산하는 행위가 전개된다는 말씀이다. 이렇게 전개되는 행위에 집착하는 것이 소취(所取)이다. 예를 들면, 어떤 종교를 믿는 사람에게 여러 가지로 두루 계산하여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마음이 있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