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5 송
此諸法勝義 亦卽是眞如
차제법승의 역즉시진여
常如其性故 卽唯識實性
상여기성고 즉유식실성
이것이 모든 법의 승의(勝義세간의 이치보다 수승한 깊고 오묘한 의리(義理))이고
또한 진여(眞如)이다.
그것의 본성은 항상 여여(如如) 하기 때문에 유식(唯識)이 곧 실성(實性)이다.
乃至
“이것이 모든 법의 승의(勝義 세간의 이치보다 수승한 깊고 오묘한 의리(義理)를 승의라 한다)이다.”
중 ‘이것이’가 제24송의 “후유원이전(後由遠離前) 소집아법성(所執我法性),
최후는 앞에서 설한 아(我)와 법(法)에 집착하는 성질을 멀리 여의었기 때문에,”를 받는 말이니,
말을 붙이면,
최후는 앞에서 설한 아(我)와 법(法)에 집착하는 성질을 멀리 여의었기 때문에
이것이 제법승의(此諸法勝義)이고 또 역시 이것이 곧 진여이다가 된다.
앞의 구절에서 ‘아(我)와 법(法)에 집착하는 성질을 멀리 여의었기 때문에’라는 말씀은
오별경 수행을 통해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을 성취하여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을 이미 여의었다는 말씀이니
전생에서부터 가지고온 ‘나’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행하던 성질이 180도로 변하여
완전히 위타(爲他)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말씀이다.
제법승의(諸法勝義)란 제법 중에서 가장 수승한 뜻이라는 말씀이다.
‘아상과 법상의 성질을 멀리 여의었기 때문에’
모든 법 중 가장 수승한 의(義)를 증득했다는 뜻으로 제8식 안에 선(善)이든 악(惡)이든
과거 경험에 의한 종자가 모두 멸진되어 더 이상 멸할 것이 없는
최상의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진여문(眞如門)에 든 것을 의미한다.
본문에서도 제법승의(諸法勝義)가 곧 진여(眞如)라고 했다.
진여란 참되어서 부정(不淨)함이 전혀 없어 여여(如如)하다, 변함이 없다는 뜻이다.
이는 곧 원성실성(圓成實性)이 곧 제법승의(諸法勝義)이고 진여(眞如)라고 했다.
한 가지 잘 알아야 할 것은
의타기성에 원성실성이 있고,
원성실성이 있음으로 의타기성이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즉 생멸에 불생불멸이 있는 것이지, 생멸을 멸한 곳에 불생불멸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이다. 생멸법 중에서 변계소집성 생멸을 멸해야 하는 것이지 생멸을 다 소멸하는 것은 아니다.
순수한 의타기성은 남아 있는 것이니 위타(爲他)를 위한 생멸작용은 있는 것이다.
상여기성고(常如其性故) 즉유식실성(卽唯識實性)
“그것의 본성은 항상 여여(如如) 하기 때문에 유식(唯識)이 곧 실성(實性)이다.” 중에 그
본성은 차제법승의(此諸法勝義) 역즉시진여(亦卽是眞如)
(모든 법의 승의(勝義)와 진여(眞如))를 받는 대명사이니, 그것의 본성은 승의(勝義)와
진여의 체성이다.
상여(常如)란 항상 여여(如如)하여 변함이 없다는 뜻이니
승의와 진여의 체성은 항상 여여 하여 변함이 없는 까닭에 유식이 곧 실성(實性)이다.
유식이 곧 실다운 본성이다,
불생불멸하는 체성이다,
참된 성질이라는 말씀으로 금강경 제5송에서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즉견여래(卽見如來)의 여래와 같다.
그리고 이 유식실성(唯識實性)을 원만하게 이룬 실성이라 하여 원성실성(圓成實性)이라고도 한다.
승의(勝義) 중 최상의 승의를 제법승의 혹은 승의 중의 승의라 하여 승의승의(勝義勝義)라고도
하는데 우리들 수준에서 승의의 예를 들어 낮은 단계의 실성(實性)을 설명해 보고자 한다.
변계소집(遍計所執)의 근본은
‘나와 내 것’이 인식되기 시작할 때 동시에
‘너와 내 것’의 분별과 동시에 ‘나’라는 존재의식과 ‘내 것’이라는 물욕(物慾)이 성립되어
능소(能所)와 주객(主客)이 이루어져 변계소집이 시작되는데 이 때 이미 제7 말나식이 발동하여 제8식에 저장된 업(業), 과거경험에 의한 심상과 표상이 전개되기 시작해서
너와 나를 분별하고
남보다 낫고자하는 경쟁심이 작동하게 된다.
의타기성(依他起性)의 근본은
‘나’를 내 스스로 의식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깨치게 하고,
‘나’를 의식하기 위해서는 ‘너’가 필요함을 인식시키고,
‘나’가 무엇을 하려고 하더라도 ‘너’를 의지하여야함을 인식시켜서
‘나라는 존재’를 유지 내지 보호하기 위해 ‘너를 차별’하는 일이 있을 수 없음을 인식시킴으로서
너와 내가 평등하게 하나가 될 수 있을 정도로 제7 말나식에서 작용하는
아상(我相)과 법상(法相)에 대한 집착을 소멸하게 되면
‘나’를 포함한 이 우주 법계의 일체만상이 음으로 양으로 거미줄처럼 서로 얽혀
연기하지 않음이 없음을 이해하게 된다.
이 순간이 일체법과 ‘나’가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고,
너와 나의 상대적인 개념이나 대립적인 개념이 무너지고
‘너로부터 득’을 보려는 마음이나,
‘나의 존재’를 알아달라는 마음에서
어떻게 하면 ‘너를 편안’하게 해 줄 수 있을까 로 변하게 된다.
그리고 일체만상이 있는 그대로에서
나에게 필요한 것은 털끝만큼도 빠짐없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구할 것도 없고 의지할 것도 없는 이치를 터득하게 되니
일체가 항상 평온함을 체험하게 된다. 이것이 곧 적정(寂靜)이고 열반이요 극락이다.
이와 같이 의타기성(依他起性)의 원리를 인식하고
이를 방해하는 변계소집(遍計所執)
즉 금강경에서 설하는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의 상(相)을 여의는
과정이 의타기성을 체험으로 실현하는 수행이 될 것이다.
변계소집성이 완전히 소멸되고 의타기성만이 운전될 때
제법승의(諸法勝義), 진여법성, 원성실성이 성취되는 때이다.
이 때 의타기성은 너와 내가 분별되지 않는 의타기성이다.
즉 너와 내가 분별되지 않는 관계에서 고통 받는 중생을 구제하고
그들의 병에 따라 처방하여 병을 낫게 하는 것이
참다운 의미에서의 자비행(慈悲行)이고 보살행이다.
즉유식실성(卽唯識實性)을 상여기성고(常如其性故)라고 하여
항상 여여 하게 있는 그 성품이 곧 유식실성이라 했으니,
유식실성은 원성실성, 진여법성, 제법승의이다.
만법이 오직 식(識)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고 했을 때의
식은 생멸법의 식이였으나 유식실성이라 할 때의 식은 불생불멸의 식이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하는 최상의 식이다.
제22송 여무상등성(如無常等性) 비불견차피(非不見此彼)에서 설명된 바와 같이
생멸하는 식에서 불생불멸하는 식이 보이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