依他起自性 分別緣所生
의타기자성 분별연소생
圓成實於彼 常遠離前性
원성실어피 상원리전성
타(依他)에 의지함으로서 [과(果)가] 일어나는 자성(自性)이 있음으로
연(緣)을 분별해서 생(生)하는 바가 있게 되고,
그에 있는 원성실성(圓成實性) 주1)은 항상 앞의 성품을 멀리 여읨에 있다.
제20송에서는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 무자성(無自性)임을 설명하였는데
제21송에서는 의타기성(依他起性)과 원성실성(圓成實性)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의타기자성(依他起自性) 분별연소생(分別緣所生) 중
의타기자성(依他起自性)은 능변(能變)이고 분별연소생(分別緣所生)은 소변(所變)이다.
의타기자성(依他起自性)은
인(因)이 타에 의지함으로서 어떤 결과가 일어나는 자성(自性)이니 능변(能變)이다.
사람은 이렇게 단순한 자기 마음을 잘 알지 못한다.
자기 스스로도 타에 의지해 존재하는 자성(自性)임을 알지 못함으로 자기가 자기를 모르게 된다.
자기가 자기를 알고 싶으면 남을 접촉할 때 일어나는 자기의 성품을 잘 관찰하면 된다.
왜냐하면 자기의 성품이 남을 의지할 때 드러나는 자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항상 많은 사람들을 접촉하면서 살아간다.
우리는 저 사람을 의탁해서 어떤 덕을 보고 해를 보는가는 생각해봐도
자기 성품이 어떠하였는가를 관찰하는 것에는 거의 관심이 없다.
불교적인 대인관계에서는 그 접촉에서 들어난 자기의 성품을 돌이켜봐
남을 불편하게 하였거나 남에게 손해를 보인 자기의 성격이 드러났으면
반드시 개선(改善)하여 상대방을 편안하게 해주고 덕을 베풀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이외에도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수많은 일들이
모두 남에 의지함으로서 주관적인 의사를 결정하는 자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이는 능변식(能變識)이다.
분별연소생(分別緣所生)은
의타기자성(依他起自性) 즉 능변식(能變識)이 타(他)인 연(緣)을 어떻게 분별하느냐에 따라
무엇이 소생(所生)하는 바라고 했다.
자기의 마음속에 남에게 의지하는 자성(依他起自性)이 있기 때문에
자기의 연(緣)을 분별하는 대로 결과가 소생(所生)한다는 말씀이다.
이 때 의타기자성(依他起自性)이 인연(因緣)법의 인(因)으로서,
자기 내면의 자성이 남을 바르게 보고 바르게 의지하는 성품을 갖추었을 때,
바르게 연(緣)을 분별하여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바라고 하여 분별연소생(分別緣所生)이라 했다.
좋은 분별연소생을 갖기 위해서는 바른 의타기자성을 가져야 함을 말씀하셨다.
원성실어피(圓成實於彼) 상원이전성(常遠離前性)
어피(於彼)의 피(彼)는 의타기자성(依他起自性)이니,
의타기자성 안에 원성실성이 있으니
이는 항상 전성(前性)을 멀리 여읨에서 드러난다.
전성은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니 의타기자성에서 변계소집성을 여읜 마음이 원성실성이라는 뜻이다.
앞 20송에서 변계소집성은
제8 아뢰야식에 저장된 과거의 경험들을
제7 말나식이 의지해 아상(我相), 아애(我愛), 아견(我見), 아만(我慢)이 일어키는 아소(我所)에 대한
욕구가 탐욕 탐애 등을 추구하는 마음으로 변하여 심상(心相)을 일으키고 표상(表相)을 일으킨다.
그들에 대한 집착심과 계탁하는 마음이 심할 때 일어날 수 있는 정신적 질환,
대인 관계 등을 위에서 설명한 바 있다.
이러한 변계소집성을 멀리 여의기 위해서는 오별경심소(五別境心所)에 의지해 오별경 수행을 해야 한다.
오별경 수행 중에 일체 존재는 의타(依他)하여 서로 연계(緣繫)함으로서 삶을 이어갈 수 있음을 깨달을 때
변계소집성을 멀리 여의게 된다.
삶이란 의타기(依他起)하는 것이란 사실을 인식하는 마음속에 원성실성(圓成實性)이 있음을 체험하게 됨으로 변계소집성을 항상 여읠 수 있는 곳에 원성실성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즉 원성실성과 변계소집성은 같이 갈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변계소집성이 소멸된 곳에 원성실성이 드러날 수 있으며,
변계소집성이 활개 칠 때 원성실성이 감추어진다.
변계소집성이 활개 칠 때는 의타기성하는 자성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며,
의타기성하는 자성의 도리를 깨닫고 남을 존중하는 마음이 싹트고 그와 같이 행할 때,
변계소집성이 사라지고 원만실성이 드러나게 된다는 말씀이다.
참고자료 주)
삼성설
유식사상은 용수의 공사상을 바탕으로 형성되었다. 이런 공사상을 좀더 구체적으로 해명하여 인식과 존재와 깨달음의 문제를 탐구하는 것이 삼성설(三性說)이다. 삼성(三性)은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의타기성(依他起性), 원성실성(圓成實性)이다. 변계소집성은 집착과 미망의 세계이며, 의타기성은 서로 의지하는 연기의 세계이며, 원성실성은 깨달음의 세계이다.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은
분별성(分別性)이라고도 하며,
범부의 인식내용이 허망함을 뜻한다.
범부가 인식하는 것은 성인이 인식하는 것과 다른 것으로,
현상세계와 자아를 집착하여 이를 고정적 실체로 인식하고 있다.
즉 이러한 범부의 인식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허망한 것이다.
허망분별에 의해 거짓으로 분별된 인식이기 때문에 변계소집성인 것이다.
주2)
의타기성(依他起性)은
의타성(依他性)이라고도 한다.
의타기(依他起)란 다른 것에 의존해 생긴다는 뜻으로 타(他)란 연(緣)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의타기(依他起)란 연기(緣起)와 같은 것이다.
식(識)은 수많은 연(緣)이 모여서 성립한 것으로 독자적으로 생성되는 것이 아니며,
연(緣)이 흩어지면 식(識)도 사라지게 된다.
식은 끊임없이 변화해가는 것이다.
즉 의타기성은 여러 가지 조건이 서로 화합됨에 따라 존재하는 것을 말하며,
이것이 우리의 현실세계이며, 모든 존재의 보편적인 모습인 것이다.
주1)
원성실성(圓成實性)은
진실성(眞實性) 이라고도 하며,
의타기성의 식(識)으로부터 허망한 분별이 없어진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의타기성 이외에 특별한 다른 세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현상세계를 있는 그대로 아는 것으로 의타기성의 진실을 각성하는 것이다.
즉 의타기성의 세계를 의타기성의 세계라고 그대로 자각하는 것이다.
실체를 그대로 자각하는 것, 존재의 진상을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 원성실성이다.
즉 원성실성과 의타기성은 불일불이(不一不異)의 관계이다.
의타기성에서 변계소집성인 주체가 원성실성의 깨달음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원성실성의 경지에서도 의타기성의 상(相) 외에는 없기 때문에 서로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미망에 싸여있는 것은 변계소집성이며, 자기를 깨닫는 것은 원성실성이다.
출처: https://studybuddha.tistory.com/2083 [불교용어 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