初卽相無性 次無自然性
초즉상무성 차무자연성
後由遠離前 所執我法性
후유원리전 소집아법성
처음은 곧 상(相)이 무성(無性)이요, 다음은 자연성(自然性)이 무성(無性)이다.
그리고 최후는 앞에서 설한 아(我)와 법(法)에 대한 집착하는 성질을 멀리 여의었기 때문이다.
초즉상무성(初卽相無性)
처음, 상(相)이 무성(無性)이라고 한 것은 상(相)은 변계소집(遍計所執)하여 일어나는 모습인데,
이렇게 일어나는 모습이 무성(無性)이란 말이다.
이는 금강경 제5송에서 제상비상즉견여래(諸相非相卽見如來)에서 제상(諸相)이
변계소집된 상(相)이고 비상(非相)이 무성(無性)이다.
그리고 32송에서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고 한 말씀이 변계소집의 상(相)이다. 그리고 반야심경에서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이라고 한 말씀도 상무성(相無性)과 같은 뜻이다.
현대사회의 문제는 모두 변계소집성이 만연되어 왔기 때문에 누적된 문제이다.
이 변계소집은 개인의 이기주의에서 비롯된 것이고,
국제적, 국내적 사회문제의 근본 원인이 되어왔을 뿐만 아니라,
가정의 불화와 개인의 육체적 정신적 병의 원인이 되기도 하기 때문에 심각하게 바라보고 이해해야할 성품이다.
위에서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여기에서 상무성(相無性)이란 변계소집하는 상은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니 얼마든지 고칠 수도 있고 없앨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변계소집성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을 수행목적으로 한다.
차무자연성(次無自然性)
다음은 자연성이 없다 이다.
자연(自然)은 음양의 조화와 성주괴공(成住壞空)의 원리에 의해 작용되는데,
<성주괴공 : 4겁(劫)을 가리킴. 성, 주, 괴, 공은 각각 우주가 생성되고, 존속되고, 무너지고, 공무(空無)로 되돌아가는 것. 각각 성겁, 주겁, 괴겁, 공겁 등이라 함.>
이 작용은 또 원인과 조건이 만날 때 이루어지는 모습이다.
이를 연기법이라 하기도 하고 의타기성(依他起性)이라 하기도 하는데,
주객이 있어 음양의 조화를 이루기도 하고 성주괴공의 작용이 이루어지지만
주체 홀로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객에 의지해야만 무엇인가 이룰 수 있는데
이 주(主)와 객(客)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니 자연도 이에 따라 변하므로 그 성품이 무자성이라고 하여
무자연성(無自然性)이라고 했다.
이는 의타기성이 무성(無性)이란 말과 같은 뜻이다.
이 말씀에서 고정불변하는 하나님, 홀로 일체를 창조하셨다는 창조설을 부정하는 것이고,
일체 생과 멸, 성주괴공(成住壞空)은 항상 인과 연이 화합함으로서 이루어지는데,
이러한 화합을 위해서는 인(因)도 변하고 연(緣)도 변해야 함으로 그 결과인 화합도 변해지는 것이니,
이 세상에 아무 것도 변계소집할 대상은 없다는 말씀이다.
유유원리전(後由遠離前) 소집아법성(所執我法性)
그리고 최후는 앞에서 설한 아(我)와 법(法)에 대해 집착하는 성질을 멀리 여의었기 때문에,
라고 하여 다음 게송으로 이어진다.
위에서 이 우주의 법칙이 의타기성임을 깨달았으면 의타기(依他起),
즉 무엇인가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자신이 그에 맞게 변해야하고,
그 조건들도 필요에 따라 변해야하며,
그 산물도 필요에 응하게 되기 위해서는 아상(我相)을 고집하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법상(法相)을 고집해도 그 결과를 바르게 유도할 수 없게 된다.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원성실성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아(我)와 법성(法性)에 집착하는 마음을 멀리 여의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예를 들면, 파도가 파도의 형상에 집착하고,
그 파도를 일으키는 조건들에 집착하여 그 파도를 유지하고 키워가기 위한 온갖 사량이 변계소집이다.
이 변계소집을 여의고 파도를 다시 바라보게 되면 파도는 조건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니
조건의 변화에 따라 파도도 변하는 것이지만
물을 여의고 파도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요,
파도가 이는 조건들이 사라져 파도가 잠잠해져도 바닷물은 여전히 있는 것이니,
생멸하는 파도에서 불생불멸하는 바닷물을 볼 수 있을 때 살아가기 위해 변계소집하던 습성을 여의고
생멸하는 조건들을 수용하고 공경하는 새로운 습(習)을 들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