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활동을 위해 환속한 운암 김성숙. 2008년 4월25일 서대문 독립관 무궁화홀에서는 국가보훈처가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한 운암 김성숙에 대한 기념식과 학술강연회가 있었다. 이날 운암김성숙선생 기념사업회회장 자격으로 축사에 나선 이해찬 전국무총리는 과거 민청학련 사건으로 투옥당했던 시절을 회고하며 74년 서대문 형무소에 온 이래 34년만에 다시 돌아왔다고 말하고 자신이 살아온 민주화운동과 정치활동은 독립운동과 맥을 같이 해 기념사업회장을 맡았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 전 총리는 올해가 광복 60주년, 정부수립 60주년 임을 강조하면서 단정(단독정부)이 아닌 남북이 하나 되는 정부를 만들었으면 6.25도 없고 분단도 없었을 것 이라고 말해 남한 단독의 정부수립을 통한 대한민국 건국을 비판했다. 그리고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운암 김성숙에 대해 좌우합작으로 나라를 하나로 만들려한 김성숙 선생은 분단피해와 냉전피해를 같이 보았다고 평하면서 운암 선생은 용공음해로 이승만, 박정희 시절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고 강조했다.동시에 최근 선거결과로 대변되는 시중의 우경화 추세를 겨냥한 듯 아직도 혁신계 인사를 용공음해하는 시각이 사라지지 않았다며 강한 불만을 토로했
일본의 패망이 가까워 오자 조선총독부는 일본 항복 후에 초래될 한반도에서의 혼란상태와 그로 인한 한반도 거주 일본인들의 피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조선인 정치 지도자에게 치안권을 이양할 것을 계획했다. 조선총독부는 1945년 8월 11일 경기도지사 이쿠다를 통하여 동아일보 사장이자 민족주의 지도자인 송진우를 접촉하여 치안권을 인수할 의사가 있는지를 타진했다. 여운형 역시 고하 송진우를 찾아와 협력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송진우는 해외에서 오랫동안 독립운동을 전개해 온 임시정부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데다가 패퇴하는 일본으로부터 치안권을 인수받는다는 것은 민족적 대의에 반한다는 생각에서 총독부의 제의를 거절했다. 조선총독부는 1945년 8월 14일 송진우와 가까운 김준연에게도 부탁했으나, 김준연은 송진우의 참여 없이는 응하지 않겠다고 해서 이것 역시 무산되었다. 이에 반해 조선중앙일보 사장이었던 여운형은 총독부의 제의를 수락하고, 일본의 항복선언이 방송되기 불과 4시간 전인 15일 오전 8시경에 총독부 정무총감 엔도의 관저에서 엔도로부터 치안권을 인수받았다.여운형을 비롯한 좌익세력은 여운형이 총독부로부터 인수한 권한을 임의로 ‘행정권’으로 해석하면서, 그것을 건국준비
일본의 패망이 가까워 오자 조선총독부는 일본 항복 후에 초래될 한반도에서의 혼란상태와 그로 인한 한반도 거주 일본인들의 피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조선인 정치 지도자에게 치안권을 이양할 것을 계획했다. 조선총독부는 1945년 8월 11일 경기도지사 이쿠다를 통하여 동아일보 사장이자 민족주의 지도자인 송진우를 접촉하여 치안권을 인수할 의사가 있는지를 타진했다. 여운형 역시 고하 송진우를 찾아와 협력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송진우는 해외에서 오랫동안 독립운동을 전개해 온 임시정부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데다가 패퇴하는 일본으로부터 치안권을 인수받는다는 것은 민족적 대의에 반한다는 생각에서 총독부의 제의를 거절했다. 조선총독부는 1945년 8월 14일 송진우와 가까운 김준연에게도 부탁했으나, 김준연은 송진우의 참여 없이는 응하지 않겠다고 해서 이것 역시 무산되었다. 이에 반해 조선중앙일보 사장이었던 여운형은 총독부의 제의를 수락하고, 일본의 항복선언이 방송되기 불과 4시간 전인 15일 오전 8시경에 총독부 정무총감 엔도의 관저에서 엔도로부터 치안권을 인수받았다. 여운형을 비롯한 좌익세력은 여운형이 총독부로부터 인수한 권한을 임의로 ‘행정권’으로 해석하면서, 그것을 건국준
공산혁명가인 운암 김성숙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던 국가보훈처는 ‘ 1917년 봄, 부친과 함께 남러시아의 싸말리아로 들어가, 볼세비키 사상을 받아들이고 사회주의자가 되어 혁명군에 가담하여 활동’ 한 유동하를 10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유동하는 안증근 의사에게 이토 히로부미의 하얼빈역 도착일시를 전보로 타전해 살인을 방조한 죄목으로 징역 1년 6개월을 복역한 바 있지만, ‘안중근의사 의거’ 재판과정에서 모든 관련사실을 부인하였으며, 현재 남은 기록으로는 그의 배경과 행적이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고 있어 사실을 밝히는데 한계가 있는 인물이다. 보훈처가 공개한 그의 기록을 보더라도 ‘1918년 가을, 유동하는 시베리아에 주둔한 일본군에 의해 11명의 애국청년들과 함께 체포되어 싸말리야 강가로 끌려가서 교두에서 총살을 당했다.’는 김용괄(총살을 앞두고 교두에서 뛰어내려 구사일생으로 탈출)이라는 청년의 증언만 있을 뿐, 그의 죽음의 경위에 대하여 정확히 알려진 바 없다. 이명박 정부에 의하여 지난 3월 10일 보훈처장에 임명된 김양은 취임사에서 “국가보훈처는 나라를 위해 희생·헌신하신 분들에 대한 정당한 보상과 예우를 통해 국민의 애국심을 함양하여 국가발전의
노무현 정권은 일제하에서 항일운동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대한민국 정체성에 반하는 공산혁명운동가를 대대적으로 발굴 포상해왔다. 2005년 3.1절을 기해 여운형을 비롯한 54명, 같은 해 광복절에는 공산혁명운동가인 김산, 조선공산당 책임비서였던 김철수를 포함한 47명의 사회주의계열 항일운동가를 독립유공자로 포상한 것이 그 대표적 사례이다. 이런 노무현의 반국가적 행위는 노무현의 취임과 더불어 비로서 구체화된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계획은 김대중 정권 시절인 2001년부터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한 민족문제연구소에 의해 은밀하고 치밀하게 준비되어왔던 것이다. 민족문제연구소는 한국근현대사의 쟁점과 과제를 연구 해명하고, 한일과거사 청산을 통해 굴절된 역사를 바로 세우고 친일인명사전 편찬 등 일제 파시즘 잔재 청산에 앞장서겠다며 1991년 2월 말경 반민족문제연구소로 출범하여 1995년 6월 현재의 민족문제연구소로 개칭한 단체로 오늘날 대한민국 역사 왜곡을 주도적으로 담당하고 있는 조직이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친일인사선정을 위한 ‘사전의 인물 수록범위와 서술방식’에 관한 토론 내용에서도 ‘독립운동은 일제로부터 국권을 회복해야겠다는 구체적 목적을 가지
노무현 정권은 일제하에서 항일운동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대한민국 정체성에 반하는 공산혁명운동가를 대대적으로 발굴 포상해왔다. 2005년 3.1절을 기해 여운형을 비롯한 54명, 같은 해 광복절에는 공산혁명운동가인 김산, 조선공산당 책임비서였던 김철수를 포함한 47명의 사회주의계열 항일운동가를 독립유공자로 포상한 것이 그 대표적 사례이다. 이런 노무현의 반국가적 행위는 노무현의 취임과 더불어 비로서 구체화된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계획은 김대중 정권 시절인 2001년부터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한 민족문제연구소에 의해 은밀하고 치밀하게 준비되어왔던 것이다. 민족문제연구소는 한국근현대사의 쟁점과 과제를 연구 해명하고, 한일과거사 청산을 통해 굴절된 역사를 바로 세우고 친일인명사전 편찬 등 일제 파시즘 잔재 청산에 앞장서겠다며 1991년 2월 말경 반민족문제연구소로 출범하여 1995년 6월 현재의 민족문제연구소로 개칭한 단체로 오늘날 대한민국 역사 왜곡을 주도적으로 담당하고 있는 친북좌파의 전위조직이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친일인사선정을 위한 ‘사전의 인물 수록범위와 서술방식’에 관한 토론 내용에서도 ‘독립운동은 일제로부터 국권을 회복해야겠다는 구체
2008년 4월24일 한국은행은 자유시민연대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위원장 앞으로 제출한 ‘고액권 화폐 초상인물 오류시정에 관한 건의’에 대한 답신을 통해 화폐초상인물에 대한 변경을 검토할 수 없다는 종전의 입장에 변화가 없음을 알려왔다. 또한 건국1세대 이종구씨와 시흥시민 김흥수씨가 보낸 건의서 역시 유사한 내용의 답변을 보내왔다. 한국은행은 10만원권 화폐도안 초상인물로 선정한 백범 김구에 대한 업적 설명을 통해 “ (전략)백범은 … 귀국 후 ① 외세 간섭없는 통일조국 건설을 위해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주도하고 ②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하여 남·북 협상에 임하는 등 ③ 통일 정부 수립에 전력했다고 소개했다. 한국은행이 밝힌 위 부분은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반대했다는 것 보다 김구의 잘못된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소련이나 공산주의자들의 손을 들어 주었다는 것에 보다 큰 문제점이 있다. 김구는 중국에서 독립 운동하던 시절부터 공산주의자들을 불신했고 그들과 합작하는 것을 완강히 반대했었다. 김구의 이런 과거 경력에 비추어 볼 때 김구가 남북협상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취하는 것이 당연하다. 또한 하루에도 수천명 씩 38선을 넘어 남으로 내려오는 북한출신들의 말을 들
국가보훈처는 지난 3월 31일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승려에서 임시정부 국무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광복 후에는 조국 통일을 위해 혁신 정당을 조직하여 정치인으로 활동하신 김성숙(1898.3.10 ~ 1969.4.12) 선생의 탄신 110주년을 맞이하여 선생의 공훈을 기리고자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고 밝혔다. 국가보훈처는 김성숙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한 이유로 “1. 일제강점기 조국 광복을 위해 승려에서 임정 국무위원 등으로 활동 2. 광복 후 민족주의 실현을 위해 현실 정치인으로 온갖 고초를 겪음”이라 밝히며, 나라를 위해 헌신한 고인의 뜻을 기리기 위해 포스터 1만 5천부를 제작 배포하고 중앙일간지 및 정기간행물 등에 특집기사를 게재 김성숙을 홍보하고 있다. 그런데 지난 4월 25일 보훈처가 후원하고 대한민국 선열유족회가 주관한 ‘4월의 독립운동가 김성숙 선생 공훈선양 학술강연’을 통해 밝힌 김성숙의 행적을 보면서 국가보훈처가 운암 김성숙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한 이유에 대해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국가보훈처에 깊은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학술 강연을 통해 본 김성숙은 3.1 운동 당시 비밀리에 독립문서를 만들어 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