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12월 19일 대망(待望)의 정권교체를 이룩한 후 한 달을 넘어서고 있다. 지난 10년간의 국정농단 좌파정권을 종식시킨 후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연일 내놓는 국정방향은 그동안 쌓였던 국민들의 좌절감과 적체(積滯)감을 해소시켜주는 동시에 새로운 희망과 기대를 안겨주기에 충분했다.구체적으로, 인수위가 정부조직개편안을 확정 발표하면서, 신 정부의 국정 구상이 드러났다. 실용주의 원칙에 입각, 불필요한 조직을 정리하고 최소한의 작은 정부로 실적 위주의 행정을 기하겠다는 것이다. 말썽많았던 부처의 통폐합은 이러한 의중이 담긴 불가피한 조치라고 본다. 향후 국회 통과 과정에서 통일부의 존치 여부가 최대 관심사가 될 전망이다. 영어교육의 조기 보편화 시도는 때늦은 감이 있지만, 적절하고도 과감한 조치라고 여겨진다. 세계화 시대인 오늘날, 국제사회에 나가보면 한국인들이 영어 문제 때문에 불이익과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신선한 충격을 준 것은 이명박 당선자의 법치(法治) 강조다. 법을 지키지 않는 민노총과의 만남을 법 준수 이후로 연기했기 때문이다. 법치는 모든 국정(國政)의 기초다. 법치 없이 어떠한 개혁도 진전도 기대할 수 없다. 법을
1987년12월16일 실시된 제13대 대통령선거는 이 나라 政治史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사건이었다. 이 선거는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1987년 체제’의 첫 단추였다. 그 동안 ‘權威主義’ 시대의 긴 터널을 지나 온 대한민국의 憲政은 이 해 憲法改正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함으로써 ‘民主化’를 開花시키는 轉換點에 서 있었다. 그 첫 번째 ‘직선제’ 대통령선거인 제13대 大選은 4派戰이었다. 여당인 盧泰愚 후보에 맞서서 3명의 야당 후보들이 出師表를 던졌다. 金大中 후보ㆍ 金泳三 후보ㆍ 金鍾泌 후보가 그들이었다. 이 大選의 ‘키 워드’도 ‘정권교체’였다. 국민 대다수의 요구는 金大中 후보와 金泳三 후보가 후보를 단일화하여 ‘정권교체’를 이룩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두 후보는 이 같은 여론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完走를 고수했다. 투표 결과는 盧泰愚 후보의 승리였다. 후보별 득표 결과가 흥미로운 것이었다. 盧泰愚 후보는 828만표를 얻었다. 세 야당 후보들의 득표 결과는 金泳三 후보가 633만표, 金大中 후보가 611만표, 金鍾泌 후보가 180만표였다. 金泳三ㆍ金大中 두 후보의 득표 합계는 1,245만표로 이것은 만약 두 후보가 후보를 단일화했었다면
군에서 범죄에 관한한, 수사관과 피의자와의 관계는 더 이상 계급의 상하관계가 아니다. 오직 법을 집행하는 수사관과 법을 어긴 피의자와의 관계만 성립한다. 김재규의 행위대통령 시해를 통해 혐명위원회를 설치하고, 본인 스스로 정권을 장악하려는 정부전복-내란 범이요, 은인을 살해한 패륜적 살인범이다. 정승화의 행위비록 시해에는 동참하지 않아 살인죄를 저지르지는 않았지만, 차 내에서 피 묻은 김재규와 나란히 옆에 타고 오면서 김재규로부터 박대통령이 살해됐다는 말을 듣고도 범인이 누구냐고 추궁하지 않았고, 벙커에 와서는 김재규가 차내에서 내린 명령 2개를 그 누구와도 의논하거나 보고하지 않고 의심스럽게도 혼자서 수행했고, 경호실 차장과 수경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경호병력의 살해현장 출동을 차단시킨 후, 김재규에게 결과를 보고했으며, 자신이 김재규와 동행한 사실을 숨기고 계엄사령관에 취임한 후, 그 직위를 악용하여 김재규를 비호하고 수사를 방해했으며 연행과정에서도 물리력을 동원하여 수사를 거절했다. 합수부는 당시 계엄공고 제5호에 의해 “10.26내란사건”에 대한 수사책임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10.26내란사건”에 관한한 모든 피의자를 조사할 권한이 있었다. 정승화의
장태완의 난동: 무조건 사살하라, 민간인 피해는 생각말라이어서 장태완은 자기의 지휘선상에 있지도 않은 26사단장(배정도)와 수도기계화사단장(손길남)에 전화하여 전 병력을 서울운동장과 장충공원에 출동하라는 월권적 명령을 내렸다. 한편 육본작전참모 하소곤 소장은 1공수여단이 이미 출동한 것으로 오해하고 장태완에게 한강 1,2교를 차단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장태완은 이미 1공수여단의 출동정보가 오보인줄 알면서도 “이 때다”싶어 한강교에 퇴근중인 시민 차량을 강제로 세워 이들 시민차량을 빼앗아 바리케이트를 치게 했다. 수도권 일대의 헌병초소에 검문에 불응하는 자는 무조건 사살하라는 기막힌 지시를 내렸다. 이어서 수경사 전 참모를 상황실로 소집하여, 모든 전차를 동원하여 30경비단을 때려잡고 거기에서 반란을 모의하고 있는 유학성, 황영시, 장세동 등을 무조건 사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22:30분경 육군본부 상황실에 있던 육군 지휘부가 몽땅 수경사로 이동했다. 수경사는 자체방어능력이 있는데다 목소리가 큰 장태완과 함께 행동하는 것이 유리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을 것이다. 윤성민 참모차장, 천주원 인사참모부장, 하소곤 작전참모부장, 황의철 정보참모부장, 최항석 교육참모부
12.12. 17:00! 세 가지 일이 동시에 벌어지고 있었다. 전두환 합수부장은 최규하 대통령 집무실에서 정승화 연행에 대한 재가를 청하다가 최규하가 노재현 국방장관을 부르기로 하면서 지연되어 기다리고 있었고, 정승화 연행조는 이미 약속해 놓은 대로 총장공관에서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으며, 30경비단에 전두환이 초청해 놓은 8명의 장군은 장태완으로부터 협박성 전화를 받으면서 대통령실에 간 합수부장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초청된 장성은 유학성(군수차관보), 차규헌(수도군단장), 황영시(1군단장), 노태우(9사단장), 박준병(20사단장), 박희도(1공수여단장), 최세창(3공수여단장), 장기오(5공수여단장)이었다. 이들은 전두환이 정승화 연행의 불가피성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기 위해 초청받은 사람들이었다. 전두환이 대통령실에서 나와 30경비단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윤성민 참모차장이 ‘진돗개 하나’를 발령하고,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30경비단을 무력 공격하겠다는 협박성 전화를 했다. 대통령실에서 재가를 받지 못하고 돌아온 합수부장으로부터 전후 사정을 전해들은 유학성, 차규헌, 황영시, 백운택, 박희도 등 5명의 장군들은 수경사령관은 협박을 가해오고, 참모차장이
2008年 總選과 政治 展望대선과정, 그리고 대선 이후 각 정치세력의 최대 화두는 총선이다. 총선이 끝나면 앞으로 3년 동안은 선거가 없기 때문에 18대 총선은 최소한 의회정치체계 내에서 향후 3년간의 정치구도를 확정짓는 선거가 될 것이다. 그것이 어떤 방향이건 간에 18대 총선 결과가 새로운 체제를 향한 정초선거가 될 지, 97년 체제의 재판이 될지는 아직 단언할 수 없다. 그러나 현재 각 정치세력의 동향과 국민정서를 고려할 때, 그동안 진보·개혁 세력이 꿈꾸던 대안체제와는 전혀 다른 체제의 시발을 알리는 선거가 될 가능성이 높다. 대선 이후 총선을 준비하는 각 정치세력의 동향을 점검해보고, 현 구도에서 진보세력의 대응방향을 살펴보자. 1. 보수진영 : 장기 안정화인가 새로운 분열인가? 이번 대선은 보수세력에 패배한 진보세력이라는 측면이 부각되었을 뿐, 보수진영 내부의 세력관계가 역전된 측면은 잘 다루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는 매우 중대한 변화다. 다시 말해 보수진영 내부에서도 그동안 주류로 자리 잡아 왔던 소위 정통보수세력이 중도보수세력에게 주도권을 넘겨주었다. 1-1. 한나라당 경선 과정에서 불거진 양 세력 간의 갈등은 어느 한쪽의 승리로는 봉합될 수
한나라당 당규 3조2항의 부정부패와 관련자는 공천 신청 자격을 불허한다는 조항을 둘러싸고 이명박, 박근혜 계열 사이에 갈등이 커지고 있다. 부정부패 관련자보다 더 문제인 것은 反국가적인 親北반역행위 관련자이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反국가단체나 이적단체에 소속했던 인물, 反헌법적이고 反국가적인 6.15 선언을 찬성했던 인물, 보안법 폐지를 요구했던 인물, NLL에 구멍을 내도록 한 인물, 韓美연합사 해체 찬성자, 북한인권을 외면한 인물들이다. 이들에 대해서 공천을 신청할 자격을 박탈하고 부정부패 관련자의 공천신청 자격을 불허했어야 앞뒤가 맞다. 보수는 자유민주의 헌법체제를 수호하겠다는 세력이다. 그런 집단이 부패만 규제하고 반역은 봐준다면 자기 모순이다.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각 정당내에서 反국가행위자의 공천신청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는 애국세력이 들고 일어나야 한다. 반역세력의 국회진출을 차단하지 못하면 12.19 보수혁명은 미완성이 된다. 공직자의 가장 큰 부패는 반역이다. 국민세금을 거두어 主敵에게 갖다바치는 것 이상의 악질적인 뇌물공여는 없다. =========================================== 부정부패자 공천 불허 당규
지난해 12월19일의 대통령 선거는 左右간의 평화적 정권교체라는 의미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정권교체의 전통은 단계적으로 진화되었다.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선 평화적 정권교체가 이뤄졌다. 전두환 대통령이 노태우 민정당 대표를 후계자로 지명하여 盧 후보가 당선 된 것이다. 1992년 大選에선 군인출신 대통령 시절을 마감하고 30년만에 처음으로 민간출신 대통령을 뽑았다. 1998년 선거는 정권이 여당에서 야당으로 넘어간 최초의 경험이었다. 지난해 대통령 선거는 정권이 여당에서 야당으로 넘어간 두번째 경험이자 우파가 평화적으로 정권을 다시 차지한 최초의 경험이었다. 이런 맥락속에서 1987년의 최초 정권교체를 되돌아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한다. 5공화국의 史官이기도 했던 金聲翊 비서관의 기록중 관련부분을 소개한다. 金 당시 비서관은 대통령의 言行을 기록하는 일을 맡아 공사석에 많이 배석했다. 아래 기록에 따르면 全斗煥 대통령은 1987년 당시 평화적 정권교체와 함께 서울올림픽을 성공시켜야 한다는 일념에 몰두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또 한국 대통령은 남북대결 상황을 관리할 수 있을 정도의 군사적 지식을 가져야 하며 그런 점에서 노태우 대표를 후계자로 결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