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 대한민국을 조국으로 믿고 수호 번영시키려는 선명한 보수당은 존재하는가? 에 대해서 부지기수(不知其數)의 애국 국민들은 문민정부 들어서면서부터 나날히 회의적이라는 증언을 한다.왜 선명한 보수당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회의적인가? 이유와 근거는 YS로 시작한다는 문민 대통령들이 대한민국 건국정신을 부정하는 것은 물론 건국 대통령인 이승만은 증오하고 北의 김일성은 세습독재체제가 붕괴 될까봐 국민을 기만하면서 까지 국민혈세로 대북퍼주기의 보급관 노릇을 하고 외국 순방 때는 대한민국 국익을 위해서가 아닌 北을 위한 변호를 하고 다니기 때문이다.기막힌 근거는 해방 후 김일성이 배후에서 조종하여 일어난 여러 반란사건은 물론, 김일성의 남침전쟁까지 “조국통일전쟁”으로 미화하고, 김일성을 환영한다는 취지의 ‘국가보안법’폐지를 위해 직간접으로 진력해온 골수 좌파 인사들을 대통령이 직접 중용해왔다는 것이 근거이다. YS는 대통령이 되어 소박하고 민중적인 이미지를 홍보하려고 자신은 청와대에서 설렁탕을 주식(主食)으로 한다고 선전했다. (항설(巷說)은 민중이 먹는 설렁탕 차원이 아닌 특질(特質)이요 고급 설렁탕이라고 하지만) 그 설렁탕을 장복(長腹)하면서 총명한 판단이 흐
슈타지(Stasi)는 옛 동독의 국가안전부, 즉 정보부를 말한다. 슈타지는 동독 내의 반체제 인사 감시, 탄압, 국경경비, 해외정보 수집, 국내 반탐(反探)공작, 등을 담당했다. 슈타지 총책은 1957년부터 1989년까지 재직한 에리히 밀케였다. 슈타지는 동독을 점령한 소련군의 정보부 KGB의 지령을 받으면서 서독을 망치고 서독에 주둔한 미군을 내쫓기 위한 무수한 비밀공작을 벌여 성공 직전에 이르렀다. 그러나 슈타지는 비밀공작의 성공직전 어이없게 물거품이 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이유는 무엇인가?슈타지는 당시 유명했던 영국 M15 정보부나 미국 CIA, 소련의 KGB 정보부를 능가하는 공작능력이 있었다는 당시 전문가들의 논평이 증언한다. 슈타지의 요원들은 독일 히틀러 총통 시절 악명을 떨쳤던 비밀경찰 게슈타포(GESTAPO)의 정예 요원들이 집결하여 만든 정보기관이기 때문에 무서운 능력이 있었다는 것이다.슈타지는 상부인 소련의 KGB로부터 받은 밀명(密命)을 받고 다음의 4가지 비밀공작을 서독을 향해 했다고 전한다. 첫째, 슈타지는 서독총리의 최측근과 비서실에 서독인으로 포섭된 슈타지의 간첩을 심어 서독총리의 일거수(一擧手)일투족(一投足)은 물
항설(巷說)에 비등하는 여론은 자살한 성완종의 죽음을 안타까워 하면서도 “부패한 기업인, 실패한 로비”라는 재앙이 여야(與野) 어디까지 미칠 것인지 화제가 분분하고, 일각에서는 성완종을 두고 스파이 세계에서 최고의 공작인 시체를 통해 공작하는 간첩인 “사간(死間)과 같다.”는 화제도 분분하다. 사간(死間)의 의미는 무엇인가? 시체를 통해 도모하는 공작을 해서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철저히 신뢰하게 만드는 공작이다. 예컨대 6,25 김일성의 남침전쟁 때, 美 맥아더장군이 인천 상륙작전을 하기 전 죽은 미군의 시체에 미군 장교의 옷을 입히고, 연락장교의 신분증, 가죽 가방안에는 2∼3급 정도의 진짜 보안문서인 작전서류를 넣고, 1급 보안의 가짜 작전 서류를 넣어 인민군이 볼 수 있는 바다에 띄웠다. 가짜 1급 보안서류는 맥아더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이 아니고, 군산지역으로 미군 상륙작전을 한다는 비밀문서였다. 인민군의 첩보부는 바다에 떠밀려온 미군 연락장교의 시체를 수거하여 서류가 든 가방을 획득한 후 골똘히 분석한 결과 결론을 내렸다. 인민군은 긴급히 총화력을 군산지역에 배치하고 미군의 도래를 기다렸다. 따라서 맥아더는 손쉽게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것이 첩
작금 한국정치계와 일부 언론은 대한민국 망치기의 폭동의 불을 지피기 위해 선전선동의 불을 마구 지피고 부채질을 하고 있다. 폭동의 발화점은 한국 수도의 간판인 광화문 광장이다. 광장에는 세월호 사건의 직간접 관련자들, 통진당 해체에 원한이 있는 자들, 또 정경유착(政經癒着)만이 사업가로서의 고속 성장할 수 있다는 판단으로 타에 추종을 불허할 만큼 용의주도하게 뇌물공여를 했다는 고(故) 성완종의 자살과 그가 남긴 뇌물 수수자들의 명단을 이용하여 정부와 여당을 망치기 의한 일부 정치인들과 부화뇌동하는 남녀들에 의해 광우난동(狂牛亂動)을 능가하는 대폭동의 전조(前兆)를 보이고 있다.광화문 광장의 대폭동에 음양(陰陽)으로 기여하는 자는 경악스럽게도 광화문 광장에 불법천막을 제공해오는 등 지원해오는 서울 시장 박모(朴某)의 원모심려(遠謀心慮)한 계책이 있다는 항설(巷說)이 난무한다. 박원순은 “정부에 불만세력은 다 내게로 오라!”듯이 광화문 광장에 공을 들이고 있다. 어찌보면 광화문 광장의 시위대를 분석하면 소통령이라는 서울시장과 대통령인 박근혜와의 숨가쁜 대회전(大會戰)대결이 있다고 전망할 수 있다. 또, 경악의 적신호(赤信號)인 경광등(警光燈)이 켜진 것은 노무현
대한민국 건국 70년이 지나는 작금의 한국정치, 국민들이 희망하는 정치 가운데 與野 정치인이 입으로는 민주화를 외쳐대면서 속내는 부정뇌물에 탐착하는 추악한 정치에서 언제나 환골탈퇴(換骨脫退)하는 정치를 해보일 수 있을까? 與野를 망라하여 뇌물자금을 은밀히 전해오는 데 절정고수(絶頂高手)같은 성완종의 망령이 지휘하는 듯한 뇌물수사을 맹촉하는 명단은, 與野의 정치를 니전투구(泥田鬪狗)식이요, “똥묻은 개 재묻은 개 질타하듯” 상호 비난전으로 녕일(寧日)이 없게 하고 있다. 웃을 수 없는 얘기다. 과거 프랑스에서 단두대(斷頭臺)를 발명하여 형벌에 사용하게 한 자가 인생이 역전되어 어느 날 자신이 단두대에서 죽어야 했듯이, 한국의 정보부를 창설한 인사가 역시 인생이 역전하여 정보부에 끌려가 고통스러운 고문과 심문을 받았듯이, 작금에 부정부패 척결을 국민에게 선언하고, 총지휘하는 이완구 총리가 성완종이 자살하면서 남긴 기획의도적인 뇌물 수수자의 명단으로 진위(眞僞) 여부를 가리기 위해 제일먼저 수사 검찰에 소환된다는 항설이 충천하고 있다.따라서 이완구 총리는 기자들에게 자신이 성완종의 돈을 받았으면 “목숨을 내놓겠다.” 선언했다. 결백의 배수진치고는 무섭다. 목숨을
작금의 한국 TV 등 언론에서는, 지난 2015년 4월 9일 북한산 형제봉 300m 떨어진 나무에 자신의 푸른색 넥타이로 목을 매 자살한 경남기업 전 회장 성완종씨의 자살시체에서 나온 유서의 뇌물을 준 인사들의 명단 때문에 연일 특별방송을 하듯 해대고 있다. 일부 한국인들은 성완종의 죽음을 안타까워 하면서도 한국의 정경유착(政經癒着)이 빚은 국민혈세를 나눠 먹는 도적판을 벌이다가 사고가 난 것이라 분개하여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또 국회에서 특별법을 제정하여 수사를 하지 않고는 도저히 올바른 수사를 할 수 없다는 비관적 견해가 난무한다.항간의 국민들은 성완종의 자살을 보면서 두 가지로 비판하고 있다. 첫째, 與野 정치인들은 입만 열면 민주화를 다투워 외쳐대면서 민주정치 70년이 가까워 왔는데도 속내는 여전히 부정한 뇌물공여에 대해서는 중개인을 두던 아니면 본인이 직접 돈을 받는 짓을 계속해 온다고 맹비판 하는 것이다.둘째, 대한민국 건국이후 소위 한국 경제인들은 대통령과 그 최측근인 실세에게 사바사바의 거액의 뇌물을 건내지 않고는 사업에서 성공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국세청, 검찰 등 수사기관의 수사에서 보호받고 은행의 대출 등 도움을 전폭적으로 지원 받으
박근혜 대통령의 인기가 여론조사에서 밑바닥을 치더니 이제 소폭 상승 되고 있다 는 소식이다. 여론조사의 인기도는 100% 믿을 바는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어쨌거나 빈 총도 안맞은 것이 낳다는 듯이 여론조사의 결과가 밑바닥을 친다는 뉴스는 국민을 동요 시키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여론조사에서 박대통령의 인기를 추락하게 한 원인을 제공한 인사가운데, 일본인이면서 주한 산케이(産經) 신문 지국장인 가토 다쓰야(加藤達也 49)가 맘먹고 쓴 기사가 크게 작용한다고 항설(巷說)은 전한다. 가토 다쓰야의 박대통령에 대한 의혹제기의 글은 주술적인 음모론으로 한국인의 정신세계를 뒤흔드는 주술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가토는 왜 그런 글을 써 의혹제기를 했을까? “아니면 말고”, “믿거나 말거나”의 가토의 박대통령에 대한 의혹제기는 가득이나 종군위안부에 대한 아베 수상의 사과에 관하여 한-일이 상호 혐오감과 백안시는 물론 비난을 퍼붓는 와중에 가토는 아베 수상에 충의를 보이듯 “박대통령과 정윤회가 사적(私的)인 밀회가 있었다.“에 대해서 근거없는 주장의 보도를 해버렸다. 세월호 참사로 죽은 이들의 유족들은 가토의 의혹제기에 냉철한 사실여부의 분석을 하고 판단을 해
나는 1980년대 초에 일본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일본국에서 가장 인상깊게 받은 장면은 두 곳이었다. 하나는 우리 역사의 백제(百濟)을 의미하는 백제역(百濟驛)을 목도하고 감격했고, 또 하나는 국립극장에서 추신구라(忠臣藏)의 연극(演劇)을 볼 수 있었다. 추신구라는 억울하게 죽은 주군(主君)의 복수에 나선 가신적(家臣的)인 47인의 사무라이들의 충의(忠義)를 담은 활약상의 이야기였다. 나는 추신구라의 47인이 충의를 위해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는 감동적인 장면을 보면서 몇 번이고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야 했다. 나는 지금 한국에도 일본의 추신구라적 충의를 보이는 사람들을 연상해 본다. 추신구라의 발단은 대략 이렇다. 1704년 에도시대에 아코성의 성주 ‘아사노 나가노리’는 막부의 참근교대제도(參勤交代制度)에 따라 자신의 성을 떠나 쇼군이 사는 에도의 궁(宮)에 기거하고 있었다. 아사노는 막부고관인 기라 요시나카의 지휘 아래서 일하고 있었다. 기라는 아사노를 고의적으로 음해했다. 어느날 기라는 고의적으로 아사노에게 모욕을 주어 격분하게 했고, 기라가 바라는 대로 아사노는 격분을 이기지 못하고 절대 궁내에서 칼을 뽑아서는 안되는 데 칼을 뽑아 기라에게 상처